룽이런 (荣毅仁)
밀가루 대왕과 면사 대왕
룽(荣)씨 가족은 20세기 초 우시(无锡)에서 부흥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 상공업 가족이다. 룽씨 가족의 상업 기초를 다지는 것은 룽이런(荣毅仁)의 아버지 룽중경 (荣宗敬)과 룽더성(荣德生) 두 형제다. 그는 오래전 아버지를 따라 사설 금융 점포업을 경영하고 후에 밀가루 장사를 통해 얻은 이윤으로 친구와 협력해 우시에서 바오싱(保兴) 제분소를 건립했다. 1903년 독자경영 후 이름을 마오신(茂新) 제분소로 바꿨다. 20여년의 노력을 거쳐 형제 둘은 중국의 가장 큰 민족 자본가 행렬에 진입했다. 그들은 상공업계의 밀가루 대왕과 면사 대왕으로 불렸다.
신 중국이 설립된 후 룽더성은 내륙에 남아 전국 정협위원, 화둥(华东) 군정위원회 위원, 쑤난(苏南) 행정 관서 부주임 등 직무를 역임했다. 반세기 상공업 생애에서 전세계에 상공업 가족 네트워크를 육성했다.
■ 국제 신탁 제국 창립
룽이런은 1916년 출생했으며 1937년 상하이 성웨이한(圣约翰) 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했다. 일본이 중국 침략시 홍콩에 피난간 다음해 2월 룽중징은 불행히도 병사했다. 젊고 경험이 부족한 룽이런은 부친의 방대한 기업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신 중국 설립 룽씨 가족의 기타 멤버는 상하이 기타 자본가들과 같이 잇따라 내륙을 떠났다. 그러나 룽이런은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1956년 그는 심사숙고 끝에 자신의 상업 제국을 무상으로 국가에 바쳐 신 중국 공업의 진흥을 위해 탁월한 공헌을 했다. 1957년 후 룽이런은 상하이시 부시장, 방직 공업부 부장관직 담당했다.
문화혁명시 룽이런은 역경에 처했다. 11기 3중전회 후 그는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는 덩샤오핑(邓小平)의 지지 하에 1979년 10월 중국국제신탁투자회사를 설립했다. 회사가 설립된 후 1년만에 룽이런은 40개 국가와 지역의 4천여명 손님을 접대했다. 또한 국내에서 업무를 교섭하러 온 사람수가 3천여명에 달했다.
■ 이정 모델(仪征模式)
CITIC는 은행, 무역회사, 법률, 회계 사무소 등 각종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대출금, 수출입 무역 국제 입찰 대리 등 업무를 개설해 국제 경제 합작방면에 보귀한 경험을 축적했다.
우선 해외 채권을 발행했다. 지난 세기 80년대 초 장쑤(江苏) 이정화섬(仪征化纤) 공정이 투자 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로인해 화학섬유 제품을 급히 필요로 하는 중국은 거대한 손실을 입었다. 후에 중신사는 신중한 연구를 거쳐 해외에 채권을 발행하는 방법을 제기했다. 1981년 2월 중신사는 성공적으로 일본에서 1백억위안의 채권을 발행했다. 하지만 사상이 비교적 보수한 사람들은 채권 이율이 일반적인 정부 대출금과 수출입 대출금과 높은것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론과 반대로 이정화섬 공장은 월등한 효익으로 중신의 선택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번 모금 창업을 '이정 모델'이라고 불렀다.
■ 자본가와 정치가
80년대 후반 CITIC는 홍콩 수매전을 개시했다. 1987년 1월 16일 CITIC는 궈타이(国泰) 항공의 12.5% 주권을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 강룽(港龙)항공의 38.3% 주권을 매입해 홍콩 텔레콤 회사의 20% 주권을 얻었다. 홍콩 언론계는 CITIC가 홍콩을 수매한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실제적으로 당시 홍콩에서 투자한 내륙 자본 시스템 기업이 이미 1천개를 초과했다. 그 투자 총액이 2백50억달러를 초과했다. 그 중 2/3 이상은 CITIC를 선두로 한 화룬(华润)그룹, 광다(光大) 실업, 중국은행, 투자유치국, 중국여행사 등이 점유했다.
1993년 제8회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룽이런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부위원장으로 선발됐다. 이 76세의 혁명적 자본가는 또 다시 정치가 역할을 맡았다. 그는 다시 자신이 손수 창건한 상업 왕국을 그의 비서 웨이밍이(魏鸣一)와 왕쥔(王军)에게 넘겼다.
룽이런은 평생동안 자본가와 정치가의 역을 동시에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