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초에 여호와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무장한 해박한 지식과 무수히 많은 경험과 탁월한 지혜를 모두 다 동원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가늠할 수 없는 인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여정을 시작하셨습니다. 셋째 날, 지구를 둘러싸고 있던 물 한가운데 창공을 창조하셨습니다. 물을 창공을 중심으로 위와 아래로 갈라놓으셨습니다. 창공 아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셨습니다. 바다라고 부르셨습니다.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육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풀과 씨 맺는 식물과 씨를 품고 있는 열매 맺는 과일나무들이 각기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셨습니다.
포도나무도 돋아나게 하셨습니다. 뿌리를 통해서 물을 빨아올리게 하셨습니다. 다음날 창조된 태양의 도움을 힘입게 하셨습니다. 끌어올린 물을 과즙으로 바꿔주셨습니다. 발효醱酵된 과즙은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변화의 실질적이고 궁극적인 원인이 화학적이고 물질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위대한 계획을 위하여 영원 전부터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여호와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꿔주실 때 완벽하게 증명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없이 넓게 펼쳐진 포도원을 본다거나 포도주 과즙 또는 발효된 포도주를 마실 때는 여호와께서 여전히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어야합니다. 오병이어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일도, 밤새도록 단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던 물고기들을 순종하는 그물 속으로 떼를 지어서 빨려 들어가게 하신 일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여호와께서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다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살아내고 있는 일상日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크고 작은 역사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는 동안 용모容貌가 변하셨습니다. 입고 있었던 옷은 희어져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광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죽은 자들도 살려주셨습니다. 하나같이 나중에 저와 여러분이 경험하게 될 일들입니다. 무엇보다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불과 유황이 꺼지지 않고 타는 영원한 지옥 불구덩이를 완벽하게 깨뜨리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에 대한 믿음 안에서 죽은 성도들을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다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롬8:21b)라는 증거에 따르면, 저와 여러분에게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함께 어쩔 수 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피조물들이 잃어버린 고유한 영광도 회복시켜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을 품은 자녀라는 본래적인 지위를 완벽하게 회복하게 되는 날, 피조 세계에 대한 완벽한 지배력은 물론 우주적인 질서까지도 완벽하게 회복시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살아내고 있는 배후에서 그날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아니 반드시, 무조건 돌려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살아내고 있는 삶의 배후에서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마땅히 받으셔야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활동 하던 당시 둘째는 세리, 죄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방인, 사회적으로 억압의 대상이었던 천민계층 등을 가리켰습니다. 바라거나 원해서 갖게 된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출생과 함께 어쩔 수 없이 마치 굴레처럼 씌워진 신분이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마음대로 필칠 수도 없었습니다. 아픔이었습니다. 상처였습니다. 인격적으로 얼마든지 왜곡歪曲될 수 있는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가 아버지가 죽으면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분깃을 미리 챙겨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두 눈 멀쩡히 뜬 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아버지를 죽은 자 취급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정죄 당하고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한 파렴치한 죄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침없이 저질렀습니다. 재산 상속에 대한 율법에 따르면 장자에게는 전 재산의 2/3를, 둘째에게 1/3을 나눠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정식으로 재산을 상속해 주기 전까지는 적당한 재산을 선물로 주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그는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진 헛헛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을 어디에도 당당하게 내놓을 수 없었습니다. 적당한 선물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원망과 불평이 불쑥불쑥 튀어 올라왔습니다. 다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피고석被告席에 앉혔습니다. 온갖 정죄를 다 쏟아놓았습니다.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마음으로 이미 여러 번 죽였던 아버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자신에게는 이미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아버지 곁에 하루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는 더 더욱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을 불쌍히 여기면서 극진히 먹이고 입히며 남다른 사랑을 베풀어주었던 아버지 곁을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놀랍게도, 느닷없이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부정당해버린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 어떤 변론辯論도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의 정죄와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의 죽음과 함께 돌아가게 될 몫을 나눠주었습니다. 보란 듯이,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나는 둘째를 설득하거나 붙들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바랐을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기꺼이 떠나게 해 주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은 물론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찬 기색氣色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둘째가 떠난 날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돌아올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둘째가 돌아오던 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동구 밖까지 한걸음에 달려 나갔습니다. 상거지 꼴을 한 채 서있는 둘째를 거침없이 끌어안았습니다. 입을 맞췄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입혔습니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발에는 신을 신겨주었습니다.
둘째가 스스로 발로 차 버렸던 신분을 그대로 회복시켜주었습니다. 둘째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잃었다가 되찾았다고 외쳤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동네잔치를 벌였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드러냈습니다. 스스로 깨닫고 돌아온 둘째를 향한 다함이 없는 뜨거운 사랑을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한편, 첫째는 둘째 곧 자신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격과 조건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세리, 죄인, 이방인, 천민에게 베풀어지는 사죄와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가리킵니다. 넓게는 성민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같았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생명처럼 생각하고 따르는 율법에 충실한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는 전혀 달랐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입만 번지르르할 뿐 행동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행위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했습니다. 섬기기는커녕 섬김 받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을 낮추기는커녕 높였습니다. 천국 문을 닫았습니다.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회개한 성도를 자신들보다 훨씬 더 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성전으로 맹세하면 괜찮지만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키라고 가르쳤습니다. 십일조는 드리되 훨씬 더 중요한 정의, 긍휼, 믿음은 버렸습니다. 목구멍까지 차 올라와 있었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겉은 깨끗하고 화려하게 꾸미면서도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은 방치했습니다. 버려질 수밖에 없는 죄를 서슴지 않고 저질렀습니다. 무엇보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피고석被告席에 앉혔습니다. 정죄했습니다.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결국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예루살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나라까지 송두리째 빼앗겼습니다. 무려 이천년 동안이나 세상을 유리방황하는 저주와 심판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위선적 태도는 둘째가 돌아온 사건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둘째가 돌아왔을 때, 첫째는 밭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유업으로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위해서도, 누군가를 위해서도 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해서합니다. 밭에서 내려오다 잔치 소리를 들은 그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묻다επυνθανετο”는 미 완료형입니다. 쉬지 않고 반복해서 계속 물었다는 의미입니다. 일종의 조사, 심문을 가리킵니다. 아버지 집에 대한 무관심, 아버지와의 소원한 관계, 둘째에 대한 불만, 심지어 적개심까지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도무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니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예 자신의 몫을 챙겨서 나가버린 둘째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 큰 아픔과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둘째를 위해서 성대한 동네잔치를 벌였다는 말을 들은 그는 분노했습니다. “분노ὀργίζω”는 용서하지 않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어서 완전히 고착固着이 되어버린 분노와 노여움을 가리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을 때 마음에 품었던 바로 그 “분노רהָחָ, (하라)”입니다. 선지자가 지독하게도 싫어하던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죄로부터 돌이켜 구원받게 되자 참지 못하고 터뜨렸던 화 곧 못마땅한 감정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분노와 노여움입니다.
죄인들의 구원에 대해 스스로 의인인 체하는 성민 이스라엘의 분노와 노여움입니다. 첫째는 둘째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떠들썩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던 자리에 도무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둘째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랬듯, 이번에는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첫째를 설득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더 집을 나왔습니다. 여러 차례 따뜻하고, 친절하고, 부드럽게 반복해서 설득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이렇습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주도적Initiative이십니다. 지극히 열정적Enthusiastic이십니다.
그렇지만 그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제가 집에 남아서 한시도 속을 썩이지 않고 아버지를 섬긴 것이 몇 년째입니까? 아버지는 그런 저와 제 친구들을 위해서는 잔치 한 번 열어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에게 다 날리고 나타난 저 아들에게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시다니요!”(눅15:29-30)라고 외쳤습니다. “섬기다δουλεύω”는 “속박되다, 예속되다.” 등의 뜻입니다. 노예나 종이 주인의 엄한 명령을 실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살림βίος”은 “생명, 존재 상태, 생활, 생계 수단, 돈” 등을 가리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함에 있어서 아버지를 엄격한 주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쓰임과 필요와 기능이 다하게 되면 언제든지 폐기처분할 수 있는 많은 수단들 가운데 하나였던 종과 노예로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반드시 가져야할 주인의식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또 아버지의 모든 것이 이미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기쁨을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부와 명예와 권세와 기득권 등 물리적인 보상을 바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를 빛나게 만들어주었던 가장 좋은 옷, 손의 가락지, 발의 신, 살진 송아지, 성대한 잔치만 보였습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 역시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열방 가운데 거룩하여 구별하여 주신 백성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감사와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단순한 의무감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서 나오는 천문학적인 물질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무엇보다 첫째 역시 아버지를 피고석被告席에 앉혔습니다. 이제까지 쭉 잘못만 저질러왔다고 정죄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잘못하고 있다고 참소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첫째 역시 탕자였습니다. 아버지를 아주 떠나버렸던 둘째는 아들로서의 가치와 지위를 회복하고 누렸습니다.
아버지 곁에 머물렀던 첫째는 아들로서의 가치와 지위를 누리기는커녕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진정한 행복은 환경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은 누구도 스스로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면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절대로 강제로 바꾸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능력을 철저히 제한하십니다. 당신께 자신을 온전히 내놓고 맡기는 사람만 바꿔주십니다. 또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노예나 수단처럼 옳은 일을 하는 첫째가 사는 세상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온갖 위험이 산재하지만 자유로운 둘째가 사는 세상을 바라십니다. 완벽하게 자동적인 첫째들이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이 될지 상상할 수 있다면, 둘째들이 사는 세상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바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얼마든지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또 기억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에게는 스스로 외에는 누구나 다 맡을 수 있는 구취口臭가 있습니다. 치명적인 결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치명적인 결점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절망했듯이, 저와 여러분의 치명적인 결점 때문에 누군가도 절망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둘째의 치명적인 결점을 지적했습니다.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도 바로 그 치명적인 결점이 오래전부터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 기억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의 시야는 하나님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보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만 빼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시기, 오만, 탐욕, 자만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들을 오래 참으십니다. 다함이 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들 안에도 계시고, 밖에도 계십니다. 세상 끝나는 날까지 떠나지 않고 언제나 함께 동행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보다 훨씬 더 친밀하고 가깝게 또 끊임없이 교제하십니다.
오래 참아주시는 간절한 사랑에 쉬지 않고 대항하고, 끊임없이 성령을 근심케 하는 첫째 같은 저와 여러분과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치명적인 약점을 가졌음에도 사랑해 주십니다. 절대로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정도만큼이라도 존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만 더 기억하십시오. 코감기에 걸린 사람은 아무리 달콤한 냄새라고 할지라도 맡을 수 없습니다. 귀먹은 사람은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라도 들을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첫째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한, 아무리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 수 없으십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신이 아니라 하루도 쉬지 않고 다함없는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시는 하나님을 피고석被告席에 앉히는 치명적인 결점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참한 참화慘禍를 부르는 죄는 자신이 저질러놓고, 책임은 모두 다 하나님에게 떠넘기는 파렴치함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회개하기 전에도, 회개한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버리지 못한 채 똑같이 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지극히 농후濃厚합니다. 첫째와 똑같은 너무나 불행하고 비참하며 안타까운 삶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지극히 농후합니다.
“이집트에 매장지가 없어서...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이집트에서...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우리를 (제발) 내버려 두라. 우리가 이집트(에서 이집트) 사람을 섬길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더냐? (종으로)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1-12)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성민 이스라엘의 마음에 완전히 고착화되어 있었던 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라고 그들과 다를 리 없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고 있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오히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히는 죄를 수도 없이 많이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풍성한 은혜를 값없이 누리고 있으면서도 마치 지옥 같은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한 번 더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불가능이 전혀 없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해결해 줄 수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저와 여러분이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는 파렴치한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기 전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서기 전까지는 강제로 바꿔놓으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서는 순간,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십니다. 마치 오랫동안 학수고대하면서 그때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신속하게 움직이십니다. 받아 누리게 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축복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십니다. 아니 예전에는 풍성하게 누렸었지만 현재는 감히 기대할 수 없는 축복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십니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스스로 포기했던 아니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축복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십니다.
백합화처럼 꽃피도록 해주십니다. 뿌리를 내리도록 해주십니다. 가지들이 새롭게 퍼지도록 해주십니다. 아름다워지도록 해주십니다. 향기를 발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농사를 지은 대로 곡식을 얻도록 해주십니다. 유명세를 떨치도록 해주십니다. 잃어버렸던 모든 축복을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누리도록 해주십니다.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충분히 누리고 있으면서도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원망과 불평과 짜증을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정죄 받아야 마땅한 파렴치한 죄를 습관처럼 저지르는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피고석被告席에 앉혀 놓은 것은 아닌지 솔직하게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혹 그렇다고 한다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며 돌아설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신을 하나님께 송두리째 맡길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복된 삶은 물론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찬 지옥 같은 삶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벅찬 감사와 감격과 감동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