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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주한씨 안양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골든배
왕비(王妃)는 임금의 부인을 이름이니 옛날 고려(高麗)때부터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는 사이 청주한씨(淸州韓氏)분 중에서 국혼(國婚:나라의 임금과 혼인함)을 이름 한 여러분을시대별( 時代別)로 엮었음.*이 기록(記錄)에는 임금의장인(丈人)인 국구(國舅:임금의장인)의 기록이 포함되어 있음을 상기함 위숙왕후(威肅王后) 위숙왕후는 고려 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의 어머니 이다.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新羅) 헌강왕(憲康王) 3年(서기877) 생으로 고려건국(高麗建國)이 신라 효공왕(孝恭王) 18年이니 왕건(王建)의 나이 32세인 서기 918년으로 보면 위숙왕후는 오한(吾韓)시조부군(始祖府君)과의 계촌(計村)이 가능하겠으나 전해 오는 유록(遺錄)이 없어 살필 길이 없다. 용신왕후(容信王后) ?~1035 5世용신왕후(容信王后)는 고려 정종(高麗定宗) 임금의 왕후(王后)로써 문하시중(門下侍中) 조(祚)의 따님이요,고려 목종묘 사당(高麗 穆宗廟:祠唐)에 배향(配享)되신 문하시중(門下侍中) 언공(彦恭)의 손녀(孫女)이다.다음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나오는 용신왕후(容信王后)의 유사(遺事)이다.정종 용혜대왕비,용신왕후 청주 한씨 유사(靖宗容惠大王妃 容信王后遺事)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용신왕후 한씨(容信王后 韓氏)는 단주인(湍州人)이니, 증 문하시중 조(贈 門下侍中 祚)의 딸이다.정종(靖宗)이 처음 평양군(平壤君)이 되어 맞이하여 비(妃)를 삼고 즉위(卽位)함에 미처 호(號)를 연흥궁주(延興宮主)라 하였다.정종(定宗) 원년(靖宗元年: 단기3368, 서기1035년)에 후(后)가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형(형)이라 사(賜)하고 혜비(惠妃)로 책봉(冊封)하였다.뒤에 정신왕후(定信王妃)로 봉(封)하였는데 정종(定宗) 2년 7月에 훙(薨)하매 8월에 현릉(玄陵))에 예장(禮葬)하였다. 문종(文宗) 2년(단기3381, 서기1048년) 3월에 용신왕후(容信王后)라 추시(追諡)하고 문종 (文宗)10년 10월에 정의(定懿)를 가(加)하였으며,인종(仁宗) 18년( 단기3473, 서기1140년) 4월에 명달(明達)을 가(加)하고 高宗 40년(단기3586, 서기1253년) 10월에 희목(禧穆)을 加하였다. 용의왕후(容懿王后) 5世 용의왕후(容懿王后)는 용신왕후(容信王后)의 동생으로고려 정종(高麗定宗)의 계비(繼妃)이다.언니인 용신왕후(容信王后)가 일찍 돌아가니 정종(定宗)은 고인(容信王后)을 그리워하여 동생(容懿王后)을 다시 왕후(王后)로 맞았다고 한다.다음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나오는 용의왕후(容懿王后)의 유사(遺事)이다.정종 용혜대왕비 용의왕후 청주 한씨 유사(靖宗 容惠大王妃 容懿王后 淸州韓氏 遺事 韓氏高麗史列傳)용의왕후(容懿王后) 한씨(韓氏)도 역시조(祚)의 딸로 정조(靖宗)4년(단기3371, 서기1038년) 4월에 여비(麗妃)로 책봉(冊封)하고 호(號)를 창성궁주(昌盛宮主)라 하였는데 뒤에 현덕궁주(玄德宮州)로 고치고 정종(靖宗) 6年 2月에 왕후(王后)로 책봉(冊封)하였다.애상군 방(哀상君 昉),낙랑후 경(樂浪侯 璥),개성후 개(開城侯 日+豈) 三兄弟를 낳았다. 순정왕후(順靜王后)공민왕비 순정왕후(恭愍王妃 順靜王后)의 선계는 알려 오는 바가 다만 이 애책문(哀冊文:임금이나 왕비(王妃)가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제문(祭文)이 있을뿐 이어서 후일 참고 되기를 기망한다. 공민왕비 순정왕후 애책문(번역문)(恭愍王妃 順靜王后 哀冊文 (譯文)) 유홍무(維洪武) 9年 丙辰(禑王 2年 檀紀3709, 西紀1368년) 가을 윤(閏) 9月 삭(朔:초하루) 임오(壬午) 21日에 순정왕후(順靜王后)의 재관(梓官)을 권찬(權찬:임시매장한자리)에서 빈소 (殯所)로 옮겼다가 그 뒤 5日 병오(丙午)에 서울의 서릉(西陵)에 장사를 모시니 이는 예(禮)이다.발인제를 이미 마치고 비단 장막이 장차 옮기려 하니 용이(용틀임한 상여)는 주저하고 작불(꿩털로 수레에 단것)은 머뭇 거린다.신선한 바람 스침이여. 명정은 흐늘흐늘하고 찬 안개 부슬거림이여. 붉은 깃발이 너울거린다.효자 사왕(嗣王)이 하늘에 울부짖어 길이 사모하고 가을이 됨에 더욱 슬퍼합니다.(효자는 가을에 서리와 이슬을 밟으면 문득 시절이 변했구나 하며 조상을 생각한다)하였다. 형용이 이미 감춰짐을 애통하고 자훈(慈訓)의 일찍 여윔을 생각하니 슬픔은 얼굴에 드러나고,정( 情)은 말씀에 나타납니다. 이에 종신(從臣)들에게 명령하여 효성 스러운 생강을 서술하게 하니 그 글월에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당(唐)나라의 성스러운 후손이 우리 대동(大東)을 개척하셔서 장할시고 5백년의 덕은 흐뭇하고 이(仁)은 두터웠습니다. 왕화의 비롯함은 중궁(中宮)으로부터 였습니다.넓은 저 면(沔)의 땅은 정기가 서려 모였습니다.아름다운 대족(大族)이 있으니 그 집안을 한씨(韓氏)라 이릅니다.적선하기 여러 대에, 경사 피어 남이 무궁하였습니다. 이에 훌륭한 따님을 낳으시니 도가 유융(有융:殷나라의 始祖母)과 같았습니다.꽃다운 행실은 어질고 삼가며 옥의 자질은 깊고 깊었습니다. 지존을 풍금(楓禁: 임금이 고쳐하는방)에서 짝하시와 깊이 초방(椒房:왕비가 거처하는 궁)에 드렸습니다. 발자국을 밟아 이무(履武: 周나라의 始祖母인 江嫄이 들에서 큰사람의 발자국을 밟고서 아이를 배어 후직(后稷)을 낳았다고 한다.)상서를 표시하자 천일(天日)의 자질이었습니다.란(蘭)의 몽조가 정문공(鄭文公)의 어머니 연길(燕吉)이 꿈에 난초를 얻고 귀한 아들을 낳았다.) 과연 미더웠건만 어쩌자고 슬픔이 얽혔던고,효모문(堯母門)이 적막하고 태사(太사)의 장막이 처량하였습니다. 아! 슬프다. 생각하건데 선경효(先敬孝) 왕께옵서 거룩하신 수의(垂衣)의 정치를 하였사온데 전성(前星:태자의 별)은 오래 어둡고 후궁에서는 빛을 감추서 근심이 얼굴에 맺히고 염려가 종사(宗祀)에 미치더니 하늘이 지은 합(合)이라 새 왕후를 맞아오시와 첫아들을 낳으시어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시게 되었습니다. 성대한 공과 빛나는 덕에도 생존하실 때의 봉양이 미치지 못했으므로 마지막 가시는 길에 조심하여 이름을 현시(顯諡)로 더해 올리고 예를 옛 법대로 따랐습니다.추숭(追崇)을 이미 극진히 할수록 사모하는 마음 더욱 깊건마는 왕후의 아름다운 옷이 이렇게 진설되어 있는데도 패옥 소리는 들리지 아니 합니다. 아! 슬프다. 신선의 행차는 구름이 옮기고 슬픈 만가(挽歌)는 새벽에 부릅니다.공손한 슬픔이 대궐에 나타나고 모여선 신하들은 감회(感懷)가 깊습니다. 구름의 침침함이여 하늘도 시름이요 길은 멀고 멀어 땅은 가이 없습니다.풍수(風樹)가 그치지 아니 함이여(나무가 고요히 있으려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려 하여도 부모가 죽어서 기다려 주지 아니한다)하였다. 무덤 속은 다시 밝지 못합니다.아! 슬프다. 만물이 시들어서 가을은 쌀쌀하고 난초의 꽃이 져서 찬 이슬 같습니다. 초목을 보아도 감상이요 천지가 다하도록 연모(戀慕)라,내 마음은 깃발처럼 흔들리며 내 눈물 비처럼 뿌려집니다.도성문(都城門)에 나가서 주저하고 산언덕을 바라보며 한숨 쉽니다.바람은 광야에 불어 슬픈 소리요 해는 안개 속에서 비참한 빛입니다.생각은 끝 간곳 없고 운한은 돌을 굴릴 만 합니다.아! 슬프다. 좋은 무덤자리를 마침 하늘이 마련하였으니 길한 땅에 영원히 편안하리다.산들은 옹위하여 둘러있고 물은 쏟아져 맑고 찹니다.이 자리에 편히 하셔서 영혼은 편하고 즐겁고 안녕하시와 우리 사왕(嗣王)을 돌보시와 만수무강 하며 종손과 자손 백대에 복으로 경사일 것입니다.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감히 이 글월로 맹세하옵니다. 아! 슬프도다. 신의왕후(神懿王后) 1337~1391 11세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의 원비(元妃)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는 이태조(李太祖)보다 2년 연하 로서 충숙왕(忠肅王) 5년(단기3670, 서기1337) 9월에 고려(高麗)의 동북지방(東北地方) 영흥(永興) 땅에서 탄생하였다.아버지는 고려 말 밀직부사 증 영문하부사(密直副使贈領門下府事)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 경(韓 卿)이다.신의왕후(王后)는 이태조(李太祖)가 개국(開國:朝鮮開國)하기 한 해 전인 고려 공양왕(恭讓王) 3년(단기 3724, 서기 1391) 9월 23일 에 수(壽)55歲로 승하(昇遐)하였다. 처음에는 해풍군 치속촌에 장사 지냈다가 그후 이태조(李太祖)가 개국(開國)하자(1392년 7월17일) 절비(節妃)로 추봉(追封)하였다가 다시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되었다.신위(神位:神主:位牌)는종묘(宗廟)의정전( 正殿) 제 1실에 봉안(奉安)되어 있고 능소(陵所)는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京畿度 改風郡 相度綿 楓川里)(현 북한 행정구역명:판문군 상도리)에 있는 제릉(齊陵)으로 갑좌 경향(甲坐庚向:동쪽에서 서쪽 방향) 봉릉(封陵) 황후(王后) 홀로 안장(安葬)되어 있다.뒤에 능직관(陵直官)으로 권무관(權務官)2인과 수릉군(守陵軍) 50호를 두고 능의 동쪽마을에 제궁(齊宮)을 창건 하여 초경사(肖慶寺)라 칭하고 교종(敎宗)에 속하게 했다. 1398년(태조7년) 정종이 즉위하자 11월에 절비 한씨를 신의왕후라 추존하고 1408년(태종8년)에는 승인순성신의왕태후(承仁順聖新懿王太后) 라고 시호를 높였으나 1683년(숙종9년)에 제왕후의 시책(諡冊:책봉된시호) 중에 신의왕태후와원경왕태후(元敬旺太后:태종의비) 만이 태(太)자가있어 미편(未便)함이 논의되어 승인순성신의왕후,창덕소열(彰德昭烈)원경왕후로 각각 개책 되었다가 한말(韓末)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왕(王)을 황제로 칭제 (稱帝)하고 건양 원년(建陽 元年:서기1897)으로 고치면서 신의고황후(神懿高王后)로 추존(追尊)되었고 뒤에 승인순성(承仁純聖)의 존호(尊號)가 추상(追上)되었다. 신의황후(神懿王后)가 6남2녀를 탄육(誕育:낳아기름)하니 長男은 진안대군(鎭安大君)방우(芳雨)이고 차남은 정종대왕(定宗大王:2대왕)이요 3남은 익안대군(益安大君)방의(芳毅)요 4남은 회안대군(懷安大君)방간(芳幹)이요 5남은 태종대왕(太宗大王:3대왕)이며 6남은 덕안대군(德安大君)방연(芳衍)이다. 장녀(長女) 경신공주(慶愼公主)는 찬성사 이정(贊成事 李佇), 2녀 경선공주(慶善公主)는 청원군(靑原君)심종(沈淙)에게 하가(下嫁:시집감)했다. 신의왕후(神懿王后)옥책문(玉冊文) 임금,왕비에게 존호(尊號)를 올릴 때 옥책(玉冊)새긴 송덕문(頌德文) 신의왕후(神懿王后) 죽책문 竹冊文 예(禮)는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더 큼이 없고 효성은 낳아준 근본을 보답하는 것보다 중요할 수 없습니다.드디어 책문 찬술하는 전(典)을 쫓아서 시호 정하는 절차를 거행합니다.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성모(聖母) 한씨께옵서 기품은 화(和)하게 타고 나셨고 도는 곤순(坤順)에 부합하셨습니다. 인륜의 근본을 바로하여 길이 길한 운에 맞으셨고 왕화(王化)의 터전을 도와 이룩하셔서 능히 그 후손을 번창하게 하셨습니다.다만 계사(繼嗣)를 정하지 못한 것으로 하여 그 명위(名位)의 차질이 있었던 것입니다.엎드려 생각하옵건데 신은 외람되게 용재(庸材)로써 이와같이 큰 명을 이었는데 능히 적통을 뺏으려는 난을 평정시킨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사오리까.실로 하늘에 계신 영(靈)에 힘입어서 이에 이르렀을 뿐입니다.이에 길한 일진(日辰)을 택하여 특히 조촐한 제수를 드리오매 마땅히 큰 칭호를 올려서 아름다운 공을 들추어야 하옵기에 모관 모(某官 某)를 보내서 삼가 책을 받들어 시호를 올려 신의(神懿)라 하오니 밝게 비추시어 정성을 굽어 살피시옵고 우리 자손들을 열어 주소서. 긴 세대 복되게 하소서. 신의왕후(神懿王后) 신도비문(神道碑文) 이 비문은 길창부원군 권근(吉昌府院君 權近)이짓고 영중추부사 (領中樞府事)서명균(徐命均)이 쓴것으로 전문(全文:전체)을 다 상재(上梓) 하지 못하고 주요(主要)한 전후(前後) 부분문(部分文:一部) 만을 실었음. 승인순성신의왕후제릉신도비명병서(承仁順聖神懿王后齊陵神道碑銘幷序)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남에는 반드시 어진 비필(妃匹)이 덕(德)을 같이하고 경사(慶事)를 기리는데 힘 입어서 그 계통을 영구히 한다.하(夏)나라에는 도산(塗山)이 있어 계(啓:舜)가 능히 계승하였고.주(周)나라에는 태사(太사:文王의妃)가 있어 무왕(武王)이 크게 계승하여 우(禹)임금과 문왕(文王)의 하늘을 짝하는 제사(祭祀)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계속되었으니 아릅답고 성하도다!.우리 신의왕후(神懿王后)께서 천자(天資가 현숙(賢淑)하고 아름다우며 곤덕(坤德)이 유순(柔順)하고 정숙(貞淑)하여 일찍이 용연(溶淵)에 빈(賓)이 되어 왕업(王業)을 도와서 이루게 하였고 후하게 성철(聖哲)을 낳아서 대통(大統)을 끝없이 전하였으니 신이(神異)한 공(功)과 아름다운 의범(儀範)이 옛사람에 비교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아깝게도 대훈(大勳)이 이루어지게 되자 선유(仙遊:죽음)가 심히 급하여 태상(太上)께서 개국(開國)하신 뒤에 호의(壺儀)를 높일 수가 없고, 이성(二聖)이 대통(大統)을 이으매 영양(榮養: 부모를 영화롭게 봉양함)을 이룰 수 없어서 산릉(山陵)이 빛을 가리고 상로(霜露)가 슬픔을 더하니 아아! 슬프다. 처음 시호(諡號)는 절비(節妃)요 능호(陵號)는 제(齊)인데 뒤에 시호를 더하여 신의왕후(神懿王后)라 하고 인소전(仁昭殿)을 두어 진용(眞容)을 모시었으니 추숭(追崇)하는 예전(禮典)이 이미 갖추어 거행되었다.우리 주상전하께서 자의(慈儀)가 영원히 닫히어 효도(孝道)의 생각을 펼 수 없는 것을 슬프게 생각하시어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큰 비(碑)에 명(命)을 세기게 하고 신(臣) 권근(權近)으로 하여금 비문을 지어 만세(萬世)에 보이게 하시었으니 신(臣) 권근(權近)이 명(命)을 받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데 후(后)의 성은 한씨(韓氏)이니 안변(安變)의 세가(世家)이다. 황고(皇考:부친)의 휘(諱)는 경(卿)이니 충성공근적덕육경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령문하부사 안천부원군(忠誠恭槿積德毓慶補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嶺門下府事 安川府院君)을 주었고,황조(皇祖)의 휘(諱)는 규인(珪仁)인데...신(臣) 권근(權近)이 학식(學識)이 천박(淺薄) 하고 필력(筆力)이 비졸(鄙拙)하여 비록 지극히 형용(形容)하나 천지(天地)를 그리는 것 같으니 어찌 능히 만분의 일이나마 비슷하게 할 수 있겠는가? 감히 주(周)나라 대아(大雅)의 대명장(大明章: 武王과 그 조상이 나라를 세운 사적을 노래한 것)과 사제장 (思齊章:文王과後妃들의 덕을 찬미한노래)의 뜻을 상고 하여 삼가 명사(銘辭)를 지어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올린다. 그 사(詞)에 이르기를 상제(上帝)가 밝고 성하시어 덕(德)이 있는 이를 계도(啓導)하여 돕나니 사사로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함이 지극 하기 때문이다. 그 계도(啓導)는 무엇인고 하니 유순하고 아름다운 이를 낳아와서 덕(德)을 높은 임금의 배필(配匹)이 된 것일세. 실가지락(室家之樂) 마땅하여 임신(妊娠)하고 생육(生育)하니 그 정령(精靈)이 밝고 밝아 천인(天人)이 기대하던 착하고 어진 이를 낳았네, 거룩한 아버지를 붙들어 도우시고 위대하게 백성들의 임금이 되었네. 몸소 제정(帝庭)에 조회하시여 우리 방토(方土) 보전하였네,서얼(庶孼)의 화란(禍亂)이 싹틀 때에 기미를 밝게 살펴 시원스레 소탕하니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편안하게 되었네 공9功)을 세우고 사양하여 적장왕자(嫡長王子) 높이시니 이륜(彛倫)이 발라지고 기세(基勢)가 더욱 장(壯) 하여졌네, 형제(兄第)의 집안 싸움 만났으나 차마죽이지는 못하고 그 신명보전(身命保全)케 하시어 우애(友愛)함이 더욱 더 돈독(敦篤) 하였네 덕(德)은 높고 공(功)은 크니 황제(皇帝)의 권고(眷顧)를 받는 것이 마땅하여 명(命)을 주심이 중첩 하였네, 밝고 밝은 제고(帝誥: 증국의 황제의 고명(高命)와 빛나고 빛나는 금보(金寶:금으로 만든 인장)를 우리 임금이 받으시어 만세(萬世)에 길이길이 보존 하리라, 왕업(王業)의 자취는 조종(助宗)이 쌓은 것이나 우리의 성신(聖神)은 후덕(后德)으로 말미암았네, 신(臣)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올리는 말씀이 구차한 것이 아니니 만세(萬世)에 밝게 전하여 천지(天地)와 같이 영구 하리라. 비문(碑文)은 권근(權近)이 지난해에 지은 것인데, 화장사(華莊寺) 의 묵은 비(碑)를 갈아서 새기었다.' 所在 : 경기도 개성군 상도면 풍천리(京畿度 開城郡 上道面 楓川里) 年時 :조선 태종원년 신사 朝鮮太宗元年辛巳(단기:3734.서기:1401)수후 영조20년 竪後英祖20년 甲子(단기:4077 서기:1744)개수改竪 소혜왕후(昭惠王后)1437~1504 14세 동영상 소혜왕후는 추존왕(追尊王) 덕종대왕비(德宗大王妃)로 세조(世祖)때 좌의정(左議政)한 서원부원군(西院府院君) 확(確)의 따님이요 공안공(恭安公) 치인(致仁)의 누님이다. 덕종(德宗)은 세조대왕(世祖大王) 이 대군(大君)으로 있을 때 도원군(桃原君)의 신분(身分)으로 소혜왕후와 결혼 하고 수양대군(首陽大君)이 王으로 즉위 하고 도원군이 세자(世子)로 책봉(冊封)되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 (冊封)되었고 후에 아들 성종(成宗)이 王에 올라 아버지를 덕종(德宗)으로 추존(追尊)하고 어머니를 인수대비(仁粹對妃)로 추봉(追封) 하였다. 다음은 소혜왕후 유사를 게재(揭載) 하여 후일 참고에 자(資) 한다. 덕종대왕비 소혜왕후 유사 (德宗大王妃 昭惠王后 遺事) 추존왕 덕종(追尊王 德宗)에게는소혜왕후(昭惠王后)만이 있다.흔히 인수대비(仁粹對妃)로 더 잘 알려진 소혜왕후(昭惠王后)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좌의정 서원부원군 한 확(左議政 西院府院君 確)의 딸로 덕종(德宗)보다 1년 앞선 세종(世宗) 19년 정사(丁巳:단기 3770, 서기 1437년 세종 19년) 9월 8일에 탄생(誕生)하였다.도원군 장(桃原君 暲)의 배필(配匹)로 가례(家禮)를 치루고 들어 왔다가 세조(世祖) 1년 을해(乙亥:端宗 3년, 단기 3788, 서기 1455년 세조1년)에 시아버지 세조(世祖)가 즉위(卽位)하고 부군 도원군(桃原君)이 世子로 책봉(冊封)되어 세자빈(世子嬪) 수빈(粹嬪)으로 책봉(冊封)하니 이때 나이가 19歲였다.그러나 2년 뒤인 세조(世祖) 3년 9월 2일에 세자(世子)인 덕종(德宗)이 급환으로 돌아가니 21歲로서 청상(靑孀)이 되었다. 그 뒤 소생의 아들 성종(成宗)이 즉위(卽位)한 뒤인 성종(成宗) 2년 신묘(辛卯:단기 3804, 서기 1471)에 夫君을 덕종(德宗)으로 추존(追尊)하면서 인수대비(仁粹對妃)로 진봉(進奉)되고 연산군(燕山君) 10년甲子(단기 3837, 서기 1504) 4월 27일에 68歲로 승하하여 시호(諡號)가 소혜(昭惠)로 올려졌다.그 사이에 휘숙명의(徽肅明懿)의 존호(尊號)를 더하여 받기도 하였다.많은 일화를 남긴 바 있는 소혜왕후는 불교(佛敎)를 독실히 믿고 불경(佛經)에 조예가 깊어(梵, 漢, 國)범.한.국 삼자체(三字體)로 쓴 불서(佛書)를 남겼고 특히 부녀자(婦女子)의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위해 편찬한 내훈(內訓)을 남겼다.또한 아들 교육을 엄격하게 하여 세조가 우스게로 폭비(暴妃)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후에 손자되는 연산군이 생모 윤씨가 모함에 폐위,사사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관련자들을 박해 하려 하자,병상에 있으면서 이를 꾸짖었다 한다. 이때 연산군이 머리로 받아 얼마후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 하니 춘추68세였으며 때는 1504년 4월24일, 연산군 10년의 일이다. 소혜왕후는 덕종이 승하한 후 47년을 더 살아 세조대는 물론 예종,성종,연산군대까지 살다가 승하 했다.소생은 2男 1女를 탄육(誕育) 장남은 月山大君 정(女+亭)이고,次男은 성종대왕(成宗大王)이며 1녀는 명숙공주(明淑公主)로 당양군 홍상(唐陽君 洪常)에게 하가(下家)하였다.신위(神位)는 영녕전 서협 제8실(永寧殿 西夾 第八室)에 덕종(德宗)과 함께 봉안(奉安)되어 있고 능소는 경릉(傾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京幾道 高陽市 德陽區 溶頭洞 西五陵)에 덕종(德宗)과 같은 국내(國內)이강(異崗)에 안장되어 있다. 이는 소혜왕후가 처음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의 당부이다. 世祖元年乙亥(단기:3788 서기:1455)7월 乙亥日(譯文) 하교하노라.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니 마땅히 좋은 배필이 있어 한가지로 종묘 사직의 중함을 받들어야 할 것이니와 이르건데 너, 한씨(韓氏)는 원훈(元勳)의 무성하게 드러난 망족(望族)의 예의있는 명가에서 자라나 일찍 몽(蒙嗣:재상가의 후사를 세조대왕이 잠저에 있을 때 그 맏아들 덕종의 신분의 이름)의배필 들어와유순하고도 온혜하였으므로 지금 춘궁(春宮:왕세자)을 세움에 접하여 이로써 너의 위호(位號)를 바꾸고자 명하여 왕세자빈(王世子嬪)을 삼노니 이 은총의 명을 빛나게 받아 더욱 힘써 도모하고 공경할 지어다. 인수왕비 봉숭책문(仁粹王妃 封崇冊文) 成宗2年辛卯正月辛卯(단기: 3804, 서기:1471) 正月 辛卯日(譯文) 공손히 우러러 생각컨데 국육(鞠育)하여 주신 은혜를 보답코자 하여도 가이 없어 다만 휘의지호(徽懿之號)를 높여 드리고자 하는 바 예에 있어서는 마땅히 먼저 옛 장전(章典)에 의거해야겠기에 이를 다하여 이에 성대한 식전을 드날리고자 하옵니다. 공손히 생각컨데 자인(慈仁)하고 정일(靜一)하시며 숙신(淑愼)하고 유가(柔嘉)하심으로 소고(昭考:밝으신 아버지 하시고 덕종대왕의 이름)의 원량(元良:세자때의 칭호)을 도와 능히 부도(婦道)를 견지하시고 묘궁(작고 보잘 것 없는 몸이라는 임금의 부조에 대한 자칭)의 우매함을 가르치사 국모의 의범을 융성하게 하시었으니 특별히 아름다운 칭호가 아니고서야 무엇으로 간절한 추숭(追崇)의 정성을 표할 수 있으오리까.신 혈(성종대왕의 어휘)은 크나큰 소원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보책(寶冊)을 받들어 존호(尊號)를 올려 가로되 인수왕비(仁粹王妃)라 하옵니다.업드려 오로지 바라옵나니 이 책보를 빛나게 받으시어 순수한 복희(福禧)를 맞으시고 성산(聖算:임금의 나이)이 크게 연이어지사 더욱 만세의 경사를 안으시고 장추(長秋:내후의 궁전)의 즐거움과 기쁨으로 길이 한 나라의 환희를 누리소서. 인수왕비 가상존호옥책문(仁粹王妃 加上尊號玉冊文) 成宗6年乙未(단기:3808 서기:1475)2月丙午日(譯文) *주: 인수왕비에게 더욱 존호를 드리는글 능히 휘음(徽音:왕후의 아름다운 덕망)을 이으사 곤축(坤軸:땅의 굴대란뜻으로 임금에 대한 왕후의 자리)에 적의(翟儀:왕후의위의)를 드러내시었으므로 이에 성대한 아름다움을 청하여 초위(椒위:궁정의 내정담안)에 크나큰 위호를 올리옵니다.공손히 생각컨데 도리로서는 우빈(虞嬪:夏나라 우 임금의 도산씨塗山氏)을 이으셨고 덕은 文母(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妊)에 협화 하시어 선성(先聖:성종의 부왕 덕종의 이름)의 배필이 되시니 내치(內治)를 닦으시고 경계하여 드림에 어긋남이 없으셨으며 소자(小子)를 보육 하사 오늘의 훌륭함이 있게 하시었으니 그 구로(구勞:어버이가 자식을 낳아 기르는 온갖 노고)는 가이 없습니다. 이를 우러러 되돌아 보고 생각 하매 그 하늘로부터 받으신 빛을 현양(顯揚)해 드리고자 함 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대히 갖춘 예식은 이미 관부와 대궐 안길에 이루어져 융성하온즉 어버이를 높이는 것은 자식의 크나큰 영광이요 효도는 마땅히 그 情文(내용과 형식)을 대하야 하는지라 이로써 아름다움을 돌리는 말씀을 펼쳐 추숭해 올리는 의전을 거행 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온건데 보책(寶冊)을 크게 받으사 순한 복을 무저(茂著)히 대하시고 장락(長樂:왕후의궁전)을 즐기고 기뻐 하시면서 한 나라의 봉양을 누리시고 멀고도 아득한 장수의 아름다움으로 장차 만년의 환희를 섬겨 받으시옵소서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1461 15世 장순 왕후는 예종대왕비(睿宗大王妃)이다. 세조 예종,성종조(世祖,睿宗,成宗)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상당부원군 휘 명회(上黨府院君 諱 明會)의 따님이니. 다음의 유사(遺事)를 실어 자세히 설명한다. 예종대왕비 장순왕후 유사 (睿宗大王妃 章順王后 遺事 ) 예종(睿宗)은 장순, 안순(章順,安旬) 두 왕후(王后)에 후궁(後宮)은 없고 2남 1녀의 子女를 두었다. 장순왕후 청주 한씨(章順王后 韓氏)는 상당부원군 한명회(上黨府院君 韓明會)의 셋째딸로 世宗 27年(단기 3778, 서기 1445) 1월 16일에 탄생(誕生)하였다.어머니 민씨는 고려의 문하시중 민지(閔漬)의5대손인 가정대부(嘉靖大夫)한성부윤(漢城府尹)대생(大生)의딸이다. 당대의 문벌가문에서 태어난 장순왕후는 아름답고 정숙하여 世祖 6年(단기 3793, 서기 1460)에 16歲로 4년 年上인 世子 예종(睿宗)과 가례(家禮)를 올려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冊封)되고 다음해 12月에 인성대군(仁成大君)을 낳았다. 그 책문(冊文)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아! 그대 한씨는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온유하고 아름답고 정숙하여 종묘의 제사를 도울 만하므로 이제 효령대군 보(補)와 우의정으로 잉령치사(仍令致仕)한 이인손(李仁孫)등을 보내 그대에게 책보(冊寶)를 주어서 왕세자빈으로 삼는다. 그대는 지아비를 경계 하고 서로 도와서 궁중의 법도를 어기지 말고 더욱 왕업을 융성 하게 하라." 그러나 세자빈에 책봉된지 1년7개월 만인 1461년 世祖 7年11월30일 원손(仁成大君)을 낳고 산후병으로 그해 12月5日에 안기(安耆)의 집에서 눈을 감으니 열일곱의 어린 나이로.요서(夭逝했다.王后의 소생은 1男 1女인데 男 인성대군(仁成大君) 기(冀)는 세조 10年에 5歲의 나이로 요졸(夭卒)했다.女 현숙공주(顯肅公主)는 王后가 요서(夭逝)하던 해에 출산(出産)하였는데 무사히 생장(生長)하여 풍천위 임광재(豊川尉 任光載)에게 하가(河嫁)했다. 1462년 2월17일 세조는 왕세자빈에게 장순(章順)의 시호(諡號)를 내렸다.온순하고 너그러우며 아름답다고 章,어질며 자애롭다고 順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1462년 25일 파주(파주)의 보시동(보시동:현 봉일천리)언덕에 장사지냇으며 1470년(성종1년)능호를 공릉이라 했고,王后는 成宗 3年(단기 3805, 서기 1472)에 세자빈(世子嬪)의 지위(地位)에서 王后로 추존(追尊)되었고, 신위(神位)는 종묘(宗廟)의 영녕전 서협 제9실(永寧殿 西夾 第九室)에 예종(睿宗)과 함께 배향(配享)되어 있다.능(陵)은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봉일천리(京畿道 坡州郡 條里綿 奉日川里)에 있는 공릉(恭陵)으로 당초 왕후를이 아닌 세자빈묘로 조영되어 봉분의 난간석과 병풍석이 생략 되었고, 석양,석호 각 두마리만 능을 보호 하고 있다. 봉분앞에 상석과 장명등이 있으며 양쪽 끝에 석마와 문인석이 있으며. 王后 홀로 안장(安葬)되어 있다. 장순왕후 시책문 (章順王后 諡冊文)(번역문) 안순왕후 (安順王后) 1445~1498 15 世 안순왕후는 예종대왕비(睿宗大王妃)이다. 예종대왕의 초비(初妃:章順王后)가 요서(夭逝:일찍죽음)하여 계비(繼妃)가 된 안순왕후는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청천부원군(淸川府院君)백륜(白倫)의 따님으로 장순왕후와는10촌(十寸)사이다. 다음은 안순왕후 유사이다. 예종대왕비 안순왕후 유사(睿宗大王妃 安順王后 遺事) 예종의 계비(繼妃) 안순왕후 청주 한씨(安順王后 淸州 韓氏)는 우의정 청천부원군(淸川府院君)한백륜(韓白倫)의 딸로 예종(睿宗)의 원비 장순왕후(元妃 章順王后) 와 같은 해인 世宗 27年(단기 3778, 서기 1445) 3月 12日에 탄생(誕生)하였다.王后는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冊封)되어 가례(家禮)를 올린 것이 아니라 동궁(東宮)에 간택되어 들어가 소훈(昭訓)의 내명부 직품을 받고 世子를 섬기다가 世祖 14年(단기 3801, 서기 1468)에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하자 王妃로 冊峰 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예종 1年(단기 3802, 서기 1469) 11月 28日에 예종이 급환(急患)으로 二十九世에 승하하니 王后는 二十五世로 청상(靑孀)이 되었다. 조카인 성종이 卽位하여 인혜대왕비(仁惠大王妃)로 존호를 받고 뒤에 다시 소휘제숙(昭徽齊淑)의 휘호를 가상 받았다.연산군(燕山君) 4年(단기 3831, 서기 1498) 12月 23日에 54歲로 승하하였다.이에 安順의 시호(諡號)가 올려지고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京幾道 高陽市 德陽區 溶頭洞 西五陵) 에 있는 창릉(昌陵)에 예종과 함께 안장(安葬)되었다. 신위(神位)는 종묘(宗廟)의 영녕전 서협 제9실 (永寧典 西夾 第九室)에 배향(配享)되어 있다.소생은 1男으로 예종의 次男인 제안대군(齊安大君) 현(현)이다. 안순왕후 봉왕비 책문 번역문(安順王后封王妃冊文) 왕후로 책봉할 때의글 땅이 아래에서 하늘을 받들어 이로써 천지의 공을 이루고 후비가 안에서 지위를 바르게 함으로 풍화(風化)의 근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그 도리가 한 가지도다. 이르건데 그대 韓氏는 명문가의 숙원(淑媛)으로 태어나 집안의 덕을 곱게 가꾸어 내가 춘궁(春宮: 예종이 세자로 있을 때 이름)에 있을 때 묘선(妙選: 세자빈으로 간택 된것)을 받아와서 빈(嬪)이 되었도다. 들어와서는 나를 경계하고 서로 이룩하며 오직 덕이 있는 행의로써 우리의 三韓을 돕고 양궁(兩宮)(부왕인 세조대왕과 비 정희왕후 윤씨)를 기꺼이 받들더니 원량(元良 세자)을 탄생하여 이로써 우리 방가(邦家)의 경사를 두텁게 하였다.내가 보위를 이음에 이르서는 비록 이미 왕비로 봉하였으나 책보를 내리는 예를 겨를이 없었으니 이는 국모의 위의(威儀)로써 일국에 군림하게 함이 마땅한 바가 아닌지라 이번에 아무아무를 보내서 보책(寶冊)과 보옥(寶玉)을 수여하고 이로서 그 이름과 지위를 높이도다.어희(於戱)라 오로지 능히 공경하고 가히 그로써 종묘(宗廟)의 중함을 받들 것이며 오로지 덕을 쌓아 그로써 가희 본손과 支孫이 융성하게 번창케하여 휘음(徽音: 후비의 아름답고 훌륭한 덕망)을 이을 일을 생각하여 더욱 음교(陰敎: 임금의 교화에 대한 왕비의 교화)에 힘써서 나一人(하늘아래 유일한 사람, 즉임금)과 더불어 무강(武疆)한 복록을 함께 누릴 지어다. 안순왕후 왕대비상존호책문(번역문)(安順王后 王大妃上尊號冊文) 공손히 생각컨데 후사(後嗣)가 되고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사랑과 공경의 마음을 다해야 하거니와 거기에 덕이 있고 명망(明望)이 있으니 어찌 존숭하는 의전을 거행하여 이에 의범(懿範)을 드날리고 공경히 빛나는 칭예(稱譽)를 올려 드리지 아니할것이오리까. 공손히 생각컨데 성품은 온유하시고 자비로움과 검소하심으로 몸소 행하사 內政을 닦으시었으니 국모의 도와 의범은 이미 융성해 졌습니다.이로써 선왕(先王:예종대왕)을 도우사 공이 실로 대지와짝하시면서 위로는 장악궁(長樂宮:태후의 궁전을 말하니 곧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을 받들어 모시고 아래로는 묘궁(성종대왕의 자칭)을 거두고 보살펴 주셨사온즉 오로지 아름다움을 돌리는 말씀을 펼쳐 이로써 보답코자 하는 간절한 정성을 표하고자 합니다. 이에 신 혈(성종대왕 어휘)은 큰 소원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책보(冊寶)을 받들어 존호를 올려 가로되 인혜왕대비(仁惠大王妃)라 하옵니다.엎드려 바라옵건데 온누리의 여망(輿望)에 굽어 좇으시사 크나큰 의전을 받으시고 더욱 만복이 이르는 것을 한 나라의 봉양을 누리소서. 공혜왕후 (恭惠王后) 1465~1474 15世 공혜왕후 는 성종대왕비(成宗大王妃)이다, 세조 예종, 성종조(世祖,睿宗,成宗朝)의 영상(領相)을 지낸 충성공(韓明會) 명회(明會)의 따님으로 예종대왕(睿宗大王)의 초비(初妃:章順王后)의 동생이다. 다음은 유사(遺事)로 소개 하여 자세히 설명으로 삼는다. 성종대왕비 공혜왕후 유사(成宗大王妃 恭惠王后 遺事) 성종(成宗)은 두 왕후 십이후궁 일폐비(王后 十二後宮 一廢妃)를 거느리고 16男 12女를 두었다. 성종(成宗)의 원비(元妃)는 공혜왕후 청주 한씨(恭惠王后 淸州 韓氏)로써 영의정(領議政) 상당부원군 한명회(上黨府院君 韓明會)의 넷째딸이다. 王后는 世祖 2年(단기 3789, 서기 1456) 10월 11일에 出生하였다. 세조 13년(단기:3800.서기:1467)1월12일에 12歲로 한살 아래인 자산군 혈(者+乙 봉호잘,山君)과 가례(家禮)를 올렸는데 2年 뒤인 예종(睿宗) 1年(단기:3802.서기:1469) 11月 30日에 자산군이 즉위(卽位)하자 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왕비에 오른지 5년, 成宗 5年(단기:3807, 서기:1474) 4月 15日 에 소생없이 세상을 떠나니 향년 19歲였으며 숭릉에 안장 되었다.장순왕후와 마찬가지로 스므해를 살지 못하고 어린나이에 요절해 자매가 한울타리에 묻힌것이다. 공순영릉 입구에서 오른쪽 길로 계속 들어가다 보면 영릉이 보이고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순릉의 홍살문 건너 멀리 정자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공혜왕후는 어려서 들어왔는데도 예의가 바르고 덕이 많아 궁내 어른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전한다. 지석에 씌여 있는비르르보면"왕후는 나면서부터 남달리 총명 했으며 조금 커서는 온화하고 의순(懿醇)하며 숙경(肅敬)했다. 1467년 세조가 성종을 자릉산군으로 봉하고 배필을 가릴 때에 맞는사랑이 없었는데 왕후가 덕있는 용모를 지녔음을 알고 불러서 혼인을 정 했다 1467년 정월12일에 예를 갖추어 친영(親迎)할때 영응대군(永膺大君)이염(李琰)에게 혼사를 주관하게 하여 예를 이루었다.오아후를 들여와 뵈이니 언동이 예에 맞으므로 세조와 대왕대비가 매우 사랑 했다.그때 왕후는 나이가 어렸으나 노성한 사람처럼 엄전 했으며 늘 가까이 모시되 경근(敬謹)하기가 갈수록 지극하니 이 때문에 권우(眷遇)가 날로 더해 갔다."왕비로 책봉되어서는 정희왕후 윤씨,소혜왕후 한씨, 안순왕후 한씨,에게 항상 진기하고 맛있는 것을 구해 극진한 효도를 다했다.후궁들에게도 너그럽고 대범하게 대접 했다.장차 후궁을 뽑을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의복을 장만 해 두었다가 들어기를 기다려 내리고, 그뒤로부터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없이 의복과 노리개를 끊임없이 내려주었다 전한다. 이렇게 지극한 오아비를 왕도 고맙게 생각하고 중히 여겼던 것이다. 오아후가 열여덟살 나던해 병이 들어 친정으로 거쳐를 옯겨을 때, 성종은 하루 걸러 거동하여 병색을 살피고 약을 들 게 하였는데,병이 차도를 보여 궁으로 돌아 왔으나 재발 다음해 구현전으로 거쳐을 옯겼다.성종과(정희왕후,소혜왕후,안순왕후)는 날마다 겅동하여 공혜왕후의 쾌유를 종묘사직에 빌었다. 그러나 공혜왕후는 1474년 4월15일"죽고사는데에는 천명이 있으니 영영 세왕후를 여의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승하하니, 성종이 공혜(恭惠)의 시호(諡號)가 올려지니, 恭이란 공경하고 유순하게 웃사람을 섬겼다는 의미이고,惠는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해서 붙여진것이다. 연산군 4年(서기:1498.단기:1498)에 휘의신숙(徽懿愼肅)의 휘호가 추상되었다. 신위(新位)는 종묘(宗廟)의 정전 제5실(正典 第五室)에 배향(配享)되어 있으며 능소는 파주군 조리면 봉일천리(坡州郡 조里面 奉日川里)에 있는 순릉(順陵)이며 王后 홀로 안장(安葬)되어 있다. 공혜왕후 애책문(恭惠王后 哀冊文)(왕비의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글) 유세차 성화 십년 갑오 (維歲次 成化 10年 甲午:成宗 5年 단기 3807, 서기 1474年) 4月 乙卯朔 15日 己巳에 대행왕대비께서 구현전(求賢殿)에서 훙(薨)하시어 다음 6月 初7日 庚申에 순릉(順陵)에 옮겨 모시니 이는 예에 맞는 것이옵니다. 신위(蜃衛:왕후의 賓宮과 그 衛儀)가 밤새 베풀어졌다가 새벽에 예로(왕후를 태우는 수레) 출발하기에 이르니 명정(銘旌)은 슬픈 바람에 아릿답고 단아하게 흔들리고 보삽(임금의 재궁을 싣는 대여. 운삽은 발인 때 상여의 앞뒤를 세우는 제구이며, 보는 천자를 상징하는 도끼 등을 수놓은 무늬를 뜻 함)은 흰 달빛을 구비구비 비끼며 드높이 급요한 쌍궐(雙闕: 대전과 곤전의 두궁궐을뜻함)을 등지고 그윽히 유울(幽鬱)한 중천(重泉:구천 즉 저승)으로 향하였습니다. 주상전하께서는 어진 보좌(補佐)에서 일찍 세상을 떠난것을 비통해 하시고 유명(幽明)을 다르게 영구히 가로 막힌 것을 애도하시어 이에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책(冊)을 지어 드러나게 하시니 그 말씀은 다음과 같사옵니다. 천지가 어울려 조화를 이루매 만물이 모두 형통하고 음양이 번갈아 운행하매 세공(歲功)을 이루었듯이 왕후의 덕이 어진 데에서 왕화(王化)가 비롯되었나니 夏나라는 도산(塗山:禹임금의 왕비인 塗山氏)에서 열렸고 주(周)나라는 渭사(위수의 물가를 가르키는 말로 文王의 비인 태사(太사)가 이곳 신국(莘國:사람임)에서 일어난 것이 그러한 것이었도다. 하늘이 성조(聖朝)를 도우시사 세세에 숙덕(淑德)이 있으니 저 넓은 淸原(지금의 淸州)에는 韓氏가 오직 큰 가문인데 대를 이어 미덕을 이루어 이에 석원(碩媛:훌륭하고 큰 여인)이 나시었도다. 잠저(潛邸:동궁을 거치지 않은 임금의 등극 전 사저)에 들어와 빈이 되어 오직 덕으로 행하여 내조가 많아 대명(大命)이 돌아감이 있었고 중궁(中宮)에 올라서는 능히 호의(壺儀)를 정제하였도다.비각(碑閣)내에 세워진 공혜왕후(恭惠王后)의 비 전면에는 조선국(朝鮮國) 공혜왕후 순릉(恭惠王后 順陵)이라 전자(篆字)로 각자(刻字)되었다.天子께서 아름다운 일이라 이르시며 총광(寵光)을 내리니 고명(誥命)이 이에 빛나고 곤룡포에 문채가 빛났도다.아랫사람에게는 어짊이 미치고 의복을 빨아 입어 검박함을 밝혔으며 밤낮으로 재계하고 밝게 하여 공경히 종묘(宗廟)를 섬김에 사사롭게 편안함을 나타내려 하지 않았고 그 예절을 쫓아 더욱 경건히 하였도다.덕이 두터워 땅을 실을 만하고 도는 빛나서 하늘을 이을 만하여 王化를 二南(시경詩經:의 편명인 주남周南과 소남召南)보다 더 융성하게 하고 모의(母儀)를 온 나라에 나타내어 장수를 누리고 다복(多福)할 줄 알았는데 이에 영위( 榮衛)(血氣를 말함)가 잠깐 어그러져 필경에는 대점(大漸:병이 위독해지는 것)이 다가와 홀연히 황지(皇祇: 神을말함)는 자리를 잃고 이어 월어(月御:月神을 말함)가 빛을 감추었도다. 오호라, 슬프도다. 아픔은 三宮(대전, 중궁, 또는 內朝,外朝 治朝)에 사무치고 슬픔은 구중(九重:깊고 깊은 궁궐속)까지 얽혔으니 六宮(왕비에게 딸린 여섯 궁전)의 울음소리는 우뢰를 이루고 군신들의 눈물은 비가 되었도다. 아름다운 의범(儀範)을 어디로 갔는지 영모(어린아이 같이 사모함) 하나 따르지 못하니 슬프하노라.아아, 슬프도다. 어헌(魚軒: 왕비가 타는 수레)은 이제 멍에 메지 못하게 되고 象.服(귀한 부인의 예복)은 헛되이 설하여 있도다.장렴(화장에쓰이는 경대 등속)에는 향기가 사라져 가려 하고 형패(珩佩:허리에 차는 방울)에는 이미 소리가 끊겼는데 인산(因山)의 날짜가 정하여 졌으니 비창하도다.유역(室內)이 엄연히 그대로 있으니 대행(大行)한것 같지 않건만 수만(수挽:장송의 만가와 관악기)이 합아여 울리니 목이 메이도다. 자욱한 눈시울이 냇가 수목을 가림으로 슬픔이 더하고 비운(悲雲)이 들을 덮으니 형색(形色)이 참담(慘憺)하도다. 아아, 슬프도다.가성(佳城:산소)는 길지에 점쳐서 잡고 조역(兆域:묘역)은 신명을 따라 점쳤으니, 아아,대수(大隧: 땅을 파서 무덤으로 통하도록 만든 길)가 한 번 닫히면 깊은 밤에 새벽은 오지 않을 것이다. 아아, 슬프도다.천지가 있음으로부터 시작과 끝이 있지않은 사람이 누구 이겠는가.어진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장수하지 못하고 성인도 죽지 않는 이가 없도다.오직 구천(현천俔天: 주문왕비 태사를 기린 말로 천제의 누이에 비길 만한 여자)에 비길 만한 지극한 덕과, 해와 짝할 만한 아름다운 빛이 길이 백세토록 사라지지 않고 사책(史冊)에 씌여 꽃다운 이름이 유전(流傳)될 것이로다.슬프고 또 슬프도다. 공혜왕후 시책문(번역문)(恭惠王后 諡冊文) *註:왕이나 왕비의 시호를 올릴 때 생전의 공적을 칭송하기위하여 지은글 중정(中正)을 지켜밟아 나가고 승순(承順)의 덕을 본받아 안에서 도운 공이 이미 융성하였으니 시호를 정하여 이름을 바꾸는 예를 마땅히 행하여 후세에 드러내야 할 것이므로 이에 옛날의 전장(典章)을 계고(稽考:지나간일로 상고함)하여 이로써 아름다운 칭호를 더하는 바이로다. 아 아. 그대 大行王妃 韓氏는 한결같이 단아(端雅)하고 성실하고 아름다우며 그윽한 넉넉함과 곧고 고요함을 갖춘 명문 탄육(誕毓)의 빼어난 규수로써 일찍 언월(偃月: 이마에 나타나는 임금의 배필이 될 골상)의 자태를 이루어 과인의 잠저(潛邸: 동궁을 거치지 않은 임금의 등극 전 사저)에 들어와 빈(賓)이 되어 이미 구천(현천:俔天주문왕비 태사를 기린 말로 천제의 누이에 비길 만한 여자)의 덕을 드러내더니 과인의 대통을 잇기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중궁의 위에 올라 王化를 이남( 二南: 詩慶의 주남과 소남의 두 편명, 주남은 周나라 文王의 后妃가 修身齊家 한 일을 노래한 것이고, 소남은 南國의 제후(諸候)가 후비의 덕화(德化를 입은 것을 읊은 것임)에 기틀 잡게 하고 국모의 의표(儀表)를 한나라에 바르게 하였도다. 조심하고 부지런할 것을 염두에두고 경계하고 깨우쳐 성취하는 것을 도왔으며, 이제 발건데 소생을 얻은 상서로움이 거기에 더하여 이로써 자손을 번연(蕃衍)케 하는 경사가 협화되기를 기대하였건만 저 맑은 하늘이 돕지 아니하니 크나큰 운수를 도피하기 가 어려운지라 내 좋은 반려를 영구히 잃기에 이르렀으니 이제 누가 닭의 울음(왕비가 임금이 政事에 부지런히 內助 하는 것을 말함) 毛詩에 의하면 齊나라 애공(哀公)이 황음(荒淫)하자 현비(賢妃)가 새벽 닭이 울고 동녘이 밝았으니 정청(政廳)에 나아가 라고 권고(勸告)한 데에서 나온것임)처럼 나를 깨워 경계하여 준단 말인가.매양 좋은 보좌를 생각함에 어찌 내 거울을 잃은 슬픔을 이기리요.이에 갖춘의례를 받들어 아름다운 모범을 크게 드날리고자 영의정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책문을 받들고 공혜(恭惠)라 시호를 드리게 하니 영령(英靈)이 어둡지 아니 하거든 이 보명(寶命)을 가히 받들어 어여쁘고 또한 가지런하게 이 큰 칭호를 환혁(煥赫)히 드날리어 이로 하여금 번창하고 치성(熾盛)케 함으로서 밝은 상서를 붙들어 오래오래 이을지어다. 인열왕후(仁烈王侯) 1594~1635 20世 동영상 인열왕후는 인조대왕비(仁祖大王妃)이다.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된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준겸(浚兼)의 따님이요,또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된 효윤(孝胤)의 손녀이니 다음의 유사(遺事)를 통해서 자세히 소개 한다. 인조대왕비 인열왕후유사 (仁祖大王妃 仁烈王侯 遺事) 仁祖는 두 王后와 후궁(後宮)을 거느리고 6남 1녀를 두었다.인열왕후(仁烈王侯 )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호조판서(戶曹判書)로서 선조(宣祖)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 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사람으로 광해군(光海君) 5년(단기: 3946, 서기: 1613)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전리방귀(田里放歸) 되었다가 유배(流配)된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宣祖 27年 (단기: 3927, 서기: 1594) 7月 1日에 出生하였다.光海君 2年(단기: 3934 서기: 1610) 17歲의 나이로 능양군(綾陽君)이던 仁祖와 가례(嘉禮)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으로 봉(封)해지고 光海君 15年(단기:3956 서기:1623)에 능양군(綾陽君)이 反正을 일으켜 王으로 즉위(卽位)하자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그러나 정묘호란(丁卯胡亂) 등으로 내외의 어려움을 겪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 1年 前인 仁祖 13年(단기 3968, 서기 1635) 12月 9日에 향년 42歲로 승하하였다.뒤에 仁烈의 시호가 올려지고 또 정유(正裕)의 휘호가 더해 졌으며 孝宗 2年(단기 3984, 서기 1651)에 명덕정순(明德貞順)의 휘호가 추상되었다.신위(神位)는 종묘(宗廟)의 정전 제8실(正殿 第八室)에 배향(配享)되어 있고 능(陵)은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 (坡州郡 炭縣面 葛峴里)에 있는 장릉(長凌)에 仁祖와 합장(合葬)되어 있다. 소생은 四남을 두니 長男은 소현세자(昭顯世子)이고 次男은 孝宗大王이며, 三男은 인평대군 묘(麟坪大君)이고, 四남은 용성대군 곤(龍城大君 滾)이다.다섯번째 로 아들을 出産하였으나 2日만에 요절(夭折)하였다. 인열왕후 애책문(번역문)(仁烈王侯 哀冊文)(譯文) 유세차 숭정팔년 을해년(維歲次 嵩禎8年 乙亥年)(仁祖 13秊 단기 3968, 서기 1635) 12月 初9日에 大行王妃께서 창경궁(昌慶宮)의 산관(産館: 궁중의 아이를 분만하기;위해 마련한 산실청(産室廳)에서 승하하시매 아무 전각에 殯所를 모셨다가 이듬 해로 넘겨 아무달 아무날에 장릉(長陵:경기도 파주 교하에 있는 인조대왕과 그 비의능)으로 천좌(遷座)하여 모시니 이는 예이옵니다. 궁정에 차린 조연(祖筵: 발인제의 차림을 말함)이 거두어지니 빈전(嬪殿)의 장막은 텅 비워지고 三宮에서 뇌성과 같은 곡성이 진동하며 백령(百靈)이 용을 쫓는 구름과 같이 따르고 눈물을 자아내는 바람이 쏘아대매 만가(挽歌)의 흐느낌이 애달프옵니다.새벽 이슬의 울음에 명정(銘旌)이 젖는데 궁거(宮車:임금의 상여)는 더위 잡을 길이 없고 저승길을 따라 갈 길이 없사옵니다. 주상전하께옵서는 갑옷을 들어 보시고는 그 공덕을 생각하시고, 옛 궁검(弓劍)을 보시고는 정회(情懷)에 얽히시면서(갑옥과 궁검은 오아권을 상징하는 임금의 일용 의장품의 뜻이 있음) 닭이 울음소리로 새벽을 일깨우는 것 같이 규간(規諫)하시던 내조의 추감(追感)에 사로 잡히사 적불(꿩의 깃무늬로 장식한 왕비의 상여)를 어루만지시며 상통(償通)을 더하시더니 아름다운 장전(章典)을 상고하여 훌륭하신 성망을 드날려 드리라 하시니 받들어 지어 올리는 말씀은 다음과 같사옵니다. 저 울창한 西原(청주의 옛이름으로 왕비의 성인 淸州韓氏의 본관이다)에 사록(沙麓:앞의 시책문 참조)이 오랜 상서를 저장하여 성녀(聖女)를 독생(篤生)하니 동방의 국모가 되시었습니다.안온하신 문체로 예철(睿哲)의 배필이 되시어 공순하고 자혜로우심으로 도와서 이루시며 아름다움을 승습하여 빛이 거듭 나게 하시니 해와 짝을 이루어 밝으셨습니다.선조대왕의 말년에는 애석하게도 연좌(連座)되어 탄식을 일으키시더니 "왕후의 아버지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이 宣祖 22年(단기:3922 서기:1610)에 당시 금천현감으로 재직중에 앞서 역모자 정여립(鄭汝立)의 사위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한 일로 연루되어 투옥된 일을 말함, 그 뒤 왕후는 光海君 2年에 (단기:3943 서기:1610)에 잠저 시절의 인조대왕 능양군과 결혼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이 되고 光海君 5年에는 또, 아버지 한준겸이 대신으로서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수난을 당함" 이후로는 다시 신손(神孫: 선조의 어린 적자 영창대군을 말함)을 도우라는 명을 받고 "한준겸이 선조대왕이 영창대군에 대한 뒷 일을 부탁 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하나가 된것을말함>또한, 석원(碩媛: 크게 훌륭한 여자)을 구하시는 은사(恩思)를 입던 터에 오직 우리 왕후께서 예를 갖추어 탄강하시었던 고로 이에 간택을 받으시니 훌륭히 세선(世選: 대를 이어 한집안에서 국혼을 이루는 선택에 드는 것을 이룸)을 이루시었습니다.잠저(潛邸)로 빈(賓)이 되어 들어 오시니 이야말로 좋은 짝을 이루셨는데 옥과 같은 체도(體度)에 연충(淵沖)히 사려 깊으시고 맑고 신중하신 몸가짐에 꽃다운 계책을 지니었습니다.화목하고 조용히 익히신 內則으로 윗분들을 공경하고 삼가며 어버이의 장악(長樂)을 기쁨으로 받드니 칭예가 두드러져 햇빛처럼 밝았습니다.나라가 不運을 맞나 매운 화란이 궁궐 안 왕족에게 미치니 윤리와 기강이 희미하게 꺼지고 천지는 어둠에 싸였으며 종묘와 사직은 나부끼는 깃발처럼 위태롭고 검은 머리의 백성들은 도탄에 허덕였습니다.천제(天帝)가 마음을 고쳐 도모하여 큰 덕망을 지닌 이가 간택을 맡으니 그 영걸스런 계모(計謀)를 안에서 도와 주 무왕의 열 사람의 현신의 하나가 되매 육룡(六龍: 임금의 수레를 끄는 여섯 마리의 용마로서 어가를 뜻함)에 때를 맟춰 오르심이고 황상(黃裳: 정실부또는 왕비의 정위)에 오르사 크게 길함을 비롯 하시게 되었습니다. 전성(前星: 앞에 반짝이는 작은 별로서 세자를 말함)은 환연히 빛나고 인지(麟趾:번성하게 태어난 왕자군들을 칭함)가 떠올라 노래를 부르니 왕가와 나라가 서로 편안하고 크고 작은것이 함께 화합을 이루었습니다.중궁의 높은 지위에서 존영(尊榮)을 누리심이 十三年에 이르도록 관휴(關雎: 시경에 나오는 물수리로서 주 문왕의 비 태사(주 문왕의 비)와 같이 정숙하고 금슬이 좋은 부인을 상징함)의 화락이 넘치니 이는 전고에 짝할 바가 없는 일이었는데 어쩌다 하루 저녁에 재앙의 기운이 문득 이르러 영대(靈臺: 천문대)가 요얼한 기운을 고하고 태사(太史:고대에 天時와星歷을 맏은 관원)가 재앙을 기록하기에 이르렀을까.갑관:甲觀 동궁)의 서당에 나가시면 여러 아들에게 경사를 빌어 베푸셨건만 순간에 햇볓같은 복록이 재앙에 걸리시매 하룻 사이에 명(命)이 없어지심을 애통해 하옵니다.궁중의 금달는 다시 회복이 안되는데 신선의 수레는 급거히 오르시옵니다.어찌 人事가 불량한 것이오니까, 아니면 하늘의 역수(歷數)를 고치기가 어려운 것이옵니까.오호라 애통하옵니다. 아침의 풀잎에서는 이슬이 마르더니 주차(舟車)는 움직여 밤의 골짜기로 들어 가옵니다.용순(龍순:임금의상여)에 멍에가 메어지니 영구히 적막한 수원(壽原: 묘지의 언덕)에 이르시옵니다.물은 슬픔을 머금은 채 골짜기에서 나오고 산은 처참함을 띠고 봉우리를 연 이었습니다.솔바람은 보배로우신 비파를 울리는 것만 같고 참등(參燈) 궁중의 있는 많은 외등들)이 없어 어두우니 은등잔의 불빛도 없사옵니다. 평생의 기거하심과 다르니 전날의 목소리와 용모도 아니계시옵니다.오호라 애통하옵니다.상단(桑壇: 궁중의 뽕나무 심은 곳)에는 초목이 시들어 죽었고 견관(繭館:궁중의 왕비가 몸소 누에를 치던 곳)에는 먼지가 쌓였습니다.입으시던 玉衣는 헛되이 설해져 있고 쓰시던 금옥(金屋)의 집 문은 누가 열 게 되오리까.겨우 섣달의 납설(臘雪)이 희끗 희끗하게 덮일 때 돌아 가시었는데 어느덧 초봄의 매우(梅雨) 자욱히 내리옵니다.차라리 월전(月殿:지상의 왕비의 궁전을 말함)에서 조금씩 관망하심으로 족하실 것을 어찌 요지(瑤池:곤륜산에 있는 여신선 서왕모 노니는 상상 속의 연못)에 바짝 가서 노닐고자 하시옵니까.흰구름을 바라봄이여 이미 아득히 멀어지시었고 동관(글을 잘하는 문신)의 글줄에 머무는 것은 남은 슬픔 이옵니다. 오호라 애통하옵니다.주구(株丘: 무덤의 언덕)는 능히 훌륭하고 백성(栢城:묘역)은 두루 아름답습니다.현구(玄龜:신비한 거북으로 점침을 상징)가 맞추어 복지(卜地:묘자리)를 하였으니 금낭(錦囊: 좋은 시를 넣은 비단 주머니란 뜻으로 당대의 시인 묵객을 말함)도 그 기량이 달려 기릴 수가 없겠사옵니다.하늘이 아껴 두고 땅이 감춘 것을 발견했으니 봉황이 분분히 춤추며 날고 용이 서린 형국입니다.이 천혜의 땅에 장렴(粧렴:화장품 상자와 뜻으로 왕후의 체백을 말함)을 갈무리하심에 형패(珩패:패옥의 소리로서 왕비의 생전의 거동소리)가 언덕산에 가리워졌습니다.안개서린 산색의 봉우리들이 열지어 시중 하듯 늘어 있나니 부오(富온:부유한 할미인 토지 신)에게 의탁하여 금안(金安)을 누리소서.오호라 애통 하옵니다.차오르고 비는 것과 사라짐과 삶은 천도(天道)의 큰 경영이온지라 흐르는 냇물은 그침이 없고 가는 날짜는 멎지 아니하옵니다.아아, 인생이 모두 이 안속에 있음이여. 누구의 수명이 저 뫼언덕과 같이 장구하오리까.오로지 덕음(德音)은 어두워지지 않음이여 이 란장(蘭藏:란초와 같은 숭고함을 갈무리한 것의 뜻으로 묘소를 지칭함)과 한가지로 더욱 꽃 다우소서.감히 애달픔을 기술하면서 먼 후일 내다봄이여, 만년을 그렇게 드리워 다함이 없으시오소서. 오호라, 애통하옵니다. 사헌부대헌 신 김상헌 찬(司憲府大司憲 臣 金尙憲 撰) 인열왕후 시책문(번역문)(仁烈王侯 諡冊文) *주:왕이나 왕비의 시호를 올릴 때 생전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하여 지은글) 국왕이 말하노라. 한 사람은 좋은 보좌를 잃으니 바야흐로 죽음을 슬퍼하는 정이 절실하여 옛날의 여러 전장(典章)을 상고하고 이로써 그 덕을 빛내는 의전을 거행하고자 실제 여론에 두루 좇는 바이니 어찌 (다른본에는'이 어찌'의 기시를 감히 용납 하랴 의 뜻인 감용(敢容)으로 썻음) 사사로운 정에서 나온 말씀이리오. 오로지 생각컨데 大行(임금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시호를 올리기 전에 쓰는 접두어)한 왕비는 바탕이 원래 仁明하고, 성품은 오직 사려 깊고 고요하였던 바 사록(沙麓 상고시대에 중국 진(晋)나라에 있던 산으로 이 산이 무너진지 六百年 뒤에 제곡(帝곡)의 비가 태어남)의 운수가 응감하여 덕을 쌓은 가문에서 탄강(誕降)하였도다.위수(渭水: 주나라 문왕이 태사를 비로 맞이한 곳)에서 상서를 정하니 찬녀(纘女: 조상의 업을 이어 받은 여자의 뜻으로 문왕비를 일컫는말)의 천명을 찬양하는 노래가 퍼지고 일찍이도산씨( 塗山氏:하나라 禹임금의 비)의 내조로써 도우니 오래도록 상야(商野:상은 중국 고대의 상나라를 말하고 야는 당시 왕성밖에 있던 공경대부의 채지(采地)를 말함, 즉 궁실의 왕자군(王子君) 처지에 있던 인조의 잠저 시절을 일컬음)에서의 노고를 함께 하였도다.혼미하고 난폭한 군주가 이륜(彛倫)을 깨트리고 막는 때에 종사를 위해 의리를 일으켜 집안을 변하여 나라를 만들기에 이르러서는 한 차례 큰 병장기의 싸움에서 함께 돕는 공훈을 세웠고, 그 계책을 밀찬(密贊)한 재주는 실로 주 무왕의 열 사람 현신보다 어려운 일을 해내고 곤극(坤極:중전의 지위)에 위호를 바루어서 풍속과 교화가 그 기틀을 잡게 되었도다. 대비를 섬김에는 그 안색을 살펴서 받드니 정성과 예법에 차이가 없고 무릇 그 내치(內治)의 도리는 하나 같이 옛사람의 가르침으로써 스승을 삼았으며 절약과 검소한 생활을 몸소 실천하는 것은 잠저(潛邸:동궁을 고치지 않은 임금의 못속에 잠긴 용같이 있던 시절)에 있던 날과 같았도다.겸손과 중연(仲淵)히 침착한 마음으로 스스로 거느리니 어찌 척완(戚완:왕비의친정)과의 사사로움인들 있었으리요.때가 더욱 어려운 간난을 만나서는 얇은 얼음을 밟는 두려움을 지니면서 나를 보필하되 늘 못 미치는 것 같이 하였고 항상 복주지규(覆舟之規: 배가 뒤집히는 것 같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규간하는 것)로써 일깨우는 바가 절실하였도다.그리하여 이미 호정(壺政:대궐 안을 다스리는 것)이 화목하게 이루어짐이나타나니 능히 나랏사람들의 느껴 우러름을 받고 하늘의 보우가 크고도 두터워 자식을 많이 두는 것은 종사(메뚜기인데 시경에 나오는 자손이 그 처럼 번성하는 것을 뜻함)에 비교되고 인화(人化)는 순수하고도 심원하여 공성(公姓:왕족을 말함)은 마땅히 인지(麟趾:시경에 나오는 말로 공자(孔子)에게 신의와 후덕이 넘쳐 공족이 성함을 이름)를 노래하기에 이르렀다.무강한 장수을 일컬음에 있어 어찌 불숙(不淑)한 슬픔이 있을 것을 뜻하였으리요.자관(산뽕나무의 물감인 자황의 관이란 임금의 재궁(梓宮)을 말함)의 재앙을 만나니 문득 육의(六衣: 왕비의 여러 예복)를 말아 넣는 것에 놀라고 초도(椒塗: 왕비의 침전 길)에 시위(侍衛)가 느슨해지니 드디어 여러 선후(先后)들의 진유(眞游:영혼의 유영과 같은 여행)를 좇음이로다. 용모와 음성이 길이 엇갈려 떠났음을 슬퍼하나니 그 덕과 의범을 회상하되 미칠 길이 없으며 궁궐의 밤이 적막하니 누가 잠간(箴諫:바늘로 찌르는 깨우침과 같은 규간)으로써 내게 다시 들려 줄 것인가.동관(붉은 붓대를 받은 문신 또는 그 글)이 휘황하니 장차 고운 영예가 영구히 드러날지어다.영진(靈辰:장례날짜)은 머물지 아니하니 이미 영원으로 나아갈 기약이 박두 하였도다.서민은 어찌 의지할지을 몰라 모두 한결같이 친상을 당한 듯 애통하는도다.오로지 이에 춘추(春秋)에 장례지내던 고사에 따라 마땅히 이름을 바꾸는 바가 있어야겠거늘 하물며 지금 이같이 유한(幽閑)하고 정정(貞靜)한 의범으로 스스로 능히 은혜로운 절목을 받아 합당함에 있어서랴.(다른 본에는 스스로 합당 하다 대신에 가히...부족함이 없다.)고 하였다 갗춘 예식을 올리자니 이 침통함을 어찌 다 할 수 있으리오.지금 신 의정부 영의정 윤방(尹昉)을 보내 옥책(玉冊)을 받들고 시호를 증(贈)하게 하여 가로되 인렬(仁烈)이라 하노니 바라건데 맑은 영혼은 이 현호(顯號)를 받아 들여 신후(神后: 천신의 후비)와 짝을 이루면서 복택을 만년토록 유전(流傳)시켜 내려주고 (이곳의 복택을 어떤 본에는 경렬(景烈)이라 했다.)후손에게 경유(慶裕)를 드리워 주어 본손과 지손이 백세토록 번창하게 할 지어다. 슬프고 애통하도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신 조 익 찬 (臣 趙 趙 翼 撰) 명 성조려비(明 成祖麗妃) 명나라(明나라:中國) 성조(成祖)의 배위(配位)인 려비(麗妃)는 영의정(領議政)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에 증작(贈爵)된 영정(永 )의 따님이다. 세조(世祖) 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양절공 확(襄節公:確)의 누님으로 명 성조(明나라 成祖임금)의 비(妃:皇妃)이고, 명 선종(明나라 宣宗 임금)의 비(妃)인 공신부인(恭愼夫人)의 언니 이기도 하다.양절공 확(襄節公: 確)이 명 성조(明 成祖 宣宗임금)로부터 봉의대부 광록시소경에(奉儀大夫 光錄寺小卿)에 제수(除授) 된 일도 려비(麗妃)를 위한 예우(禮遇)였다고 전한다.다음은 여비(麗妃)의 제문(祭文)이다. 명 성조려비제문(번역문)(明 成祖麗妃 譯文) 황비(皇妃)는 삼가 내관 왕현을 보내어 어머니 김씨의 신령에 제사 지내며 말씀드립니다.우리 어머님이 기르시던 수고를 생각 하오면 덕이 후하시고 은혜가 깊사와 갚을 길 없사옵니다. 여식이 연약한 체질로 궁중의 빈(賓) 으로 뽑히어 황상(皇上)의 은총을 받아 부르시어 길이 강녕하심을 누리실까 기약 하였더니 어찌 뜻하였사오리까.하루 아침에 영영 가시다니 생사의 사이에 추념 하오면 어찌 애통함을 이기오리까. 이에 특별히 내관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오니 영혼이 계시거든 하감 하시고 흠향 하옵소서 하다. 명 선종황제 공신부인(明 宣宗皇帝 恭愼夫人) 명나라(明:中國) 선종황제의 공신부인은 명나라 성조(成祖)려비(麗妃)의 동생이며, 양절공 확(襄節公: 確)의 여동생이다. 다음은 공신부인이 별세 하니 헌종 황제가 내린 제문이다. 명 헌종황제사제문(번역문)(明 憲宗皇帝賜祭文(譯文)) 제문(祭文)에 왈(曰)(황제는 사설감 태감 왕거(司說監 太監 王据)를 보내 공신부인 한씨에게 사제(賜祭)한다.그대는 온유경신(溫柔敬愼)하여 아름답고 착함이 칭찬하기에 족하며 궁중에 일을 맡아 오랫동안 공로가 드러났고수복(壽福)이 강녕(康寧)하여 마땅히 큰 복을 누릴 것인데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부음(訃音)을 듣고 슬퍼하고 탄식한다.이에 특별히 공신부인을 추증하고 관원을 보내어 유제(諭祭)하며 인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장사 하게하였다.아아! 살아서는 어질고 착하였으며 죽어서는 영화로운 이름을 받았다.인생이 이와 같으면 유감이 없을 것이니 그대는 흠향할 지어다. 명 선종황제 공신부인 묘표(번역문)(明 宣宗皇帝 恭愼夫人墓表(譯文) 夫人의 성은 韓이요,휘(諱)는 계란(桂蘭)인데 대대로 조선국 재상(宰相)의 집안이다.考의 휘는 영정(永 )이요, 어머님은 김씨인데, 영락(永樂:명나라 成祖의 연호)庚寅年(太宗 10年 단기 3743, 서기 1410) 4月 9日에 부인이 났다.선덕(宣德:명나라 宣宗의 연호) 丁未年(世宗9年 단기 3760, 서기 1427)에 國王 성휘(姓諱)가 내정(內庭)에 뽑아 이제까지 57年이 되었는데 四朝에 거쳐 섬겨서 시종(始終) 공경하고 삼가기를 하루와 같이 하였다. 갑자기 병이 들자 황제가 좌우 사람을 보내어 보게 하고 내의(內醫)에게 명하여 치료하게 하였으나 효력이 없이 죽으니 때는 成化(명나라 憲宗의 연호) 癸卯年(成宗 14年 단기 3816, 서기 1483) 5月 18日이다. 황제가 듣고 슬퍼하며 애석해 하기를 여러번 하여 태감 왕거 (太監 王据)를 보내어 유제(諭祭)하고 白金 백만과 채단 사표리(綵段: 四表裏) 를 하사하고 시호(諡號)를 공신(恭愼)으로 하여 지나간 행실을 밝게 드러내고,또 내관감 태감 손진(內官監 太監 孫振)에게 명하여 장역(葬域:葬地)을 경영하게 하고, 司設監 太監 王据, 내관감 태감 우적, 곡청(牛迪,谷淸)에게 상사(喪事)를 총리(總理)하게 하였으니 皇太后, 中宮, 安喜宮, 東宮이 모두 부의(賻儀)가 있었다. 장사는 이해 6月21日에 하였는데 墓는 도성(都城) 서쪽 香山 언덕에 있다.왕거(王据)등이 조정의 사람과 은혜가 끝까지 이처럼 거듭함으로써 글이 없을 수 없다고 하여 묘위의 돌에기록하여 영덕을 영구히 전하게 하여 이에 행장(行將)을 갖추어 安(墓文을 지은사람 萬安)에게 글을 쓰기를 부탁하기에 그동안 행장을 상고해 보니 夫人은 성품이 유순(柔順)하고 착하여 말을 망령되게 하지 아니하고 행동에 떳떳한 법이 잇으며 내의(內儀)에 하나하나 능히 알고 기억하니 모든 집사(執事)가 함께 모사(여자 스승)로 높이 받들었다.무릇 음례(陰禮:婦人의 禮儀 또는 婚姻의 禮)의 행사에는 반드시 나아가서 질의를 받으면 거의 틀림이 없었고 결루(結縷:실로 맺는 일)의 工에 반드시 지시를 구하였으니 여기에 정밀함이 지극 하였다..혹시 여러 조정의 내령(內令)을 잊음이 있어서 와서 밝히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고하기를"이같음은 선묘(宣廟)의 令이고 이같음은 영묘(英廟)의 영이다." 라고 하니 이런 까닭에 빈어(嬪御:賓妾) 이하가 다 일컫기를 노로(老老)라고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다고한다.여러 조정에서 하사한 것은 다 기록 할 수 없고 금상 헌종今上(憲宗)에 이르러 하사한 것은 전에 것에 비하여 더욱 후하였는데.부인이 이따금 받으면 더욱 겸손하고 삼가하며 두려워하여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살아서는 황가(皇家:皇室)의 녹(祿)을 누리고, 죽어서는 거듭 은혜의 내림을 입음이 마땅하다.유제문(諭祭文)에 있기를 (온화하고 유순하며 공경하며 삼가서 아름답고 착함이 칭찬 하기에 족하다.)고 하였고 고봉사(誥峰詞)에는 (공경하고 부지런하며 삼가고 세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아니 하였다)는 글귀의 표창이 있었으니 어찌 지나친 칭찬이겠는가?부인은 어질도다! 옛을 상고하건데 先王의 덕과 교화의 성함이 안으로는 규문(閨門)으로부터 사해(四海), 만국(萬國)에 이르니 비록 부인. 여자라도 우리 조종(祖宗)의 교화의 융성함을 입지 아니함이 업어서 지난일과 더불어 나란히 하니 비유컨데, 봄 바람의 화한 기운과 같아서 가는 곳마다 빛이 난다.부인은 해동(海東:朝鮮)에서부터 오래 금중(禁中:宮中)에 있으면서 어려서부터 장성 할 때까지 배우고 익힘이 많아으므로 아름다운 행실과 능함이 있어서 같은 무리에게서 존중을 받고 조정에 알려져서 살아서와 죽어서 넓은 은혜와 큰 덕을 받음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묘표에 기록함이 이에 미치니 우리 조정의 교화가 널리 미친 것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이로써 표한다. *註:성휘(姓諱) 국왕의 이름을 기록해야 하나 어휘인고로 기록치 않고 표시함. 이부상서 만안 찬(吏部尙書 萬安 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