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일편야사> 없이 해석 불가한 <조의제문>.
문집 가운데서 <조의제문>과 <술주시>를 지적하여 여러 추관들에게 두루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는 다 세조를 지목한 것이다.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가 김종직이 가르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고서는, 즉시 스스로 주석을 만들어서 글귀마다 풀이를 하여 왕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만든 다음 이어서 아뢰기를 “김종직이 우리 세조를 비방하고 헐뜯은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부도한 죄상은 마땅히 대역으로 논해야겠으며 그가 지은 글도 세상에 유전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오니 아울러 모두다 소각해버리소서.” 라고 하니 왕이 따랐다.(1)
점필재가 지은 <조의제문>을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성종실록』 사초(史草)에 올렸다가 연산군에게 발각되어 무오사화라는 피바람을 몰고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위의 글에서도 유자광(柳子光)이 스스로 주석을 만들어서 글귀마다 풀이를 하여 왕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만들었다. 라고 했는데 사실 <조의제문>은 매우 난해하여 보통 사람은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제왕의 건부를 손에 쥐고 왕위에 올랐으니
천하에 진실로 미씨보다 높은 사람은 없었다.(2)
이 글을 읽고 누가 감히 단종이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임금이라고 말하는 것인 줄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관후장자(한고조)를 함곡관으로 들여보냈으니
또한 족히 어질고 의로운 마음을 볼 수 있었네
양처럼 패려궂고 늑대처럼 탐욕스런 항우가
제멋대로 경자관군(송의)을 죽였는데도
어찌 잡아다가 도끼에 기름칠하지 아니하였던고?(3)
이 글을 읽고 계유정난을 일으켜 전왕의 고명을 잘 수행하고 있는 김종서 등을 죽인 수양대군을 잡아다가 도끼로 목을 치지 않은 것이 잘못이다. 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오히려 이상할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
천하의 모사꾼 유자광이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윤필상이 함께 의논하여 김종직의 문집 편집자를 국문하기를 청하니 강구손이 말하기를 “편집한 자가 만약 그 글 뜻을 알았다면 죄가 참으로 크지만 알지 못했다면 어찌할 것인가?”하니,
유자광은 말하기를 “어찌 우물쭈물하는가?”하고, 또 이르기를 “어찌 머뭇머뭇하는가?” 라고 하였다.
윤필상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보니 그 의미가 깊고 깊어서 김일손이 ‘충분을 부쳤다.’라고 주석을 달아 설명하지 않았다면 진실로 해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알고 찬집하여 간행했다면 그 죄가 크오니 청컨대 국문하소서.”하고, 또 강구손은 아뢰기를;
처음 찬집자의 국문을 청하자고 발의할 때에 신은 말하기를 “그 글 뜻이 진실로 해득하기 어려우니 편집한 자가 만약 그 뜻을 알았다면 진실로 죄가 있지만 알지 못했다면 어찌하랴.” 라고 하였는데 유자광의 말이 “어찌 우물쭈물하느냐?”, “어찌 머뭇머뭇하느냐?” 라고 다그치니 신이 진실로 미안하옵니다.
김종직의 문집은 신의 집에도 역시 있사온데 신은 일찍이 그 글을 보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듣자오니 조위가 편집하고 정석견이 간행했다고 하옵는데 이 두 사람은 다 신과는 서로 교분이 있는 처지라서, 지금 신의 말은 이러하고 유자광의 말은 저러하니, 유자광은 반드시 신이 조위 등을 비호하고자 하여 그런다고 의심할 것 이온즉 국문에 참예하기가 미안합니다. 청컨대 피혐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4)
윤필상(尹弼商)은 1450년(문종 즉위) 문과에 급제하고, 1457년(세조 3) 중시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오른 사람이다.
강구손(姜龜孫) 또한 1479년(성종 10)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오른 사람이다.
이런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마저도 <조의제문>을 읽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으니 <조의제문>이 얼마나 난해한 글인지 알 수 있다.
누구나 글을 지을 때는 당연히 읽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짓겠지만,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윤필상이나 강구손은 세조를 비난하는 내용이라는 사실 파악마저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편야사>를 읽지 않았기 때문에 항우와 의제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 이야기를 수양대군과 단종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 이야기로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조의제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편야사>를 읽어서 의제와 항우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단종과 수양대군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연결한 다음 <조의제문>을 읽어야만 비로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 또한 점필재가 <조의제문>을 짓기 전에 연촌이 지은 <일편야사>가 이미 세상에 나와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로 되는 것이다.
<조의제문>은 <일편야사>를 읽어서 이야기의 배경을 이해한 사람이라야 항우와 의제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수양대군과 단종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연결시켜서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자광은 과연 어떻게 <조의제문>을 해석하여 숨을 뜻을 알아 낼 수 있었을까?
혹시 유자광도 <일편야사>를 읽은 것은 아닐까?
유자광은 <일편야사>를 읽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유자광같은 간신배가 <일편야사>를 읽었다면 무오사화의 피바람은 훨씬 넓은 범위로까지 확대되어 연촌을 비롯한 도학파 사림 전체로 번졌을 것이다.
유자광은 도학파 사림이 아니기 때문에 <일편야사> 읽을 기회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의제문> 속에 숨어 있는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된 것은 그 사람의 타고난 천재성으로 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유자광의 이력을 보면 간신배이기에 앞서 머리가 비상한 대단한 천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유자광은 부윤 유규(柳規)의 서자(庶子)로 태어나서 건춘문(建春門)을 지키는 갑사(甲士), 즉 문지기로 일했다.
이시애(李施愛)기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반란군 토벌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여 세조에게 발탁되어서 토벌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서얼(庶孼)이지만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을 허락받았다.
예종 때는 남이(南怡) 등을 무고하여 익대공신이 되고, 성종 때도 수많은 사람들을 무고하여 다치게 했는데, 연산군 때에 이르면 폭군을 등에 업고 간신으로서 능력을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유자광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될 때 붙잡혀서 참수형을 당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유자광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다시 반정공신이 되었는데, 반정에 나선 사람들이 아무 준비도 없이 군사를 동원할 때 유자광은 기름먹인 종이를 잘라서 비표(秘標)를 만들어 반정군에게 공급하여 원활하게 반정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자광의 머리는 가히 천재라고 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좋은 머리를 이간질과 충신 제거에 사용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 각주 -------------------
(1) 摘其中弔義帝文與述酒詩遍示諸推官曰此皆指世祖而馹孫之惡皆由宗直誨而成之也卽自爲註釋逐句而解之令王易知仍啓曰宗直詆毁我世祖至此其不道之罪宜論以大逆其所爲文不宜流傳竝皆燒毁王從之. <燕山君日記四年(1498)七月二十九日>
(2) 握乾符而面陽兮天下固無尊於羋氏. <守軒集中弔義帝文 : 金宗直>
(3) 遣長者以入關兮亦有足覩其仁義羊狠狼貪擅夷冠軍兮胡不收以膏齊斧. <守軒集中弔義帝文 : 金宗直>
(4) 弼商等共議請鞫編集宗直文集者姜龜孫曰編集者若知其文意則罪固大矣無奈不知乎柳子光曰豈可依違又曰豈可囁嚅弼商等啓臣等觀宗直弔義帝文其義深僻非馹孫以寓忠憤之語誠難曉然苟知其義而纂集刊行則其罪大矣請鞫之龜孫啓初議請鞫纂集者臣曰其文義誠難曉編集者若知其義則固有罪矣無奈不知乎子光云豈可依違豈可囁嚅臣實未安宗直文集臣家亦有之臣嘗觀覽而未解其意臣聞曺偉編集鄭錫堅刊行此二人皆臣相交者今臣言如此而子光之言如彼子光必疑臣欲庇偉等而然也參鞫未安請避. <燕山君日記四年(1498)七月十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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