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서는 ‘별 거 아닌’ 교지
고문서 자료 조사차 방문하는 집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고, 더욱이 문서 소장자들이 자발적으로 내어놓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지일 것이다. 고문서의 보관이란 말과 같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가문의 몰락뿐만 아니라 잦은 화재와 병란이 그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옛것이면 무조건 버려야만 했던 근대화라는 풍파 또한 고문서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더욱이 세상이 바뀌고 문자마저 끊기면서 그것은 의미를 가지지 못한 그냥 종이쪼가리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도 되었다. 교지는 이런 와중에서도 그 강한 생명력을 가지며 오늘날에까지 전해져 온 것이니 대를 이어온 소장자들의 정성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교지란 말하자면 과거합격증, 관리임명장 등에 해당하는 것이니, 선조가 양반이었음을 증빙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아직도 조선시대의 양반과 그 높낮이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가늠하는 후손의 입장에서는 벼슬한 선조가 그저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울 수 밖에 없다. 안동의 골짜기마다에는 고가가 즐비하고, 이들 고가의 벽장 속에는 수 십여 장의 교지가 들어앉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 때 조정 인재의 반이 영남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안동의 문과 급제자와 생원?진사시 합격자는 이 영남에서도 그 어느 고을과 비교되지 않는다. 문과 급제자만도 3백여 명에 달하고, 생원?진사시 합격자의 수는 천여 명에 이른다는 사실은 그것을 웅변해 준다. 영남의 71개 고을 가운데 문과와 생진과 합하여 10명 이하의 합격자를 낸 경우만도 17개 고을이라는 사실을 굳이 들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안동의 한 두 가문의 경우만 하더라도 이웃 웬만한 큰 고을 전체 과거합격자 수와 맞먹는다. 이들이 벼슬길에 나아가 몇 개월, 심지어는 며칠만에 자리를 옮기기 일쑤였고, 이들의 영달은 곧 조상들의 증직으로 이어졌으니 한 사람의 과거합격자가 수십 장의 교지를 양산해 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안동에서 교지를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호쾌하게 자료를 내보여 주는 경우에도 별도의 보자기에 고이 싸둔 교지를 슬그머니 뒤로 빼돌리기 때문이다. 별 거 아니란다. 그러나 몇 번 채근을 하여도 싫어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도리어 안보겠다면 어쩔까하는 걱정하는 마음도 능히 읽을 수 있다. 자랑할 만한 일이지만 스스로 드러내 놓고 자랑할 수 없는 깊은 속뜻이 있기 때문이다.
양반에게도 높낮이가 있다. 안동에서는 예로부터 벼슬보다는 학문으로 그 높낮이를 가늠해 왔다. 누가 무슨 벼슬을 했느냐 보다는 누구의 제자이고, 성취한 학문이 무엇인가를 더 중요한 잣대로 삼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벼슬했다는 것이 뭐 그리 큰 자랑이냐는 의미이다. 그래서 처사(處士)라는 칭호를 즐겨 사용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것은 18세기 이후 오랫동안 벼슬길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안동양반들의 자기합리화이지만, 벼슬살이의 덧없음에 비해 학문의 무한한 생명력을 일찍부터 터득하고 있었음이었다.
안동에서의 이 같은 생각은 오랜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퇴계는 그의 묘비에 그 많던 벼슬을 열거하는 대신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기를 원했고, 그 보다 일찍이 남치공(南致恭)이라는 분은 세조로부터 받은 벼슬을 묘지석에 적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더욱이 18세기 이후 노론과 척신 세도정권으로 이어지는 정치판도 속에서 재야세력으로 자처했던 남인 안동양반들의 벼슬이 변변치 못했을 뿐더러 설사 한자리 차지했다한들 그 무슨 영광이 있었겠는가? 차라리 당당하게 처사로 자처함만 못하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과거와 벼슬을 부형(父兄)의 염원으로 부득이 하였던 것으로 돌리기도 했고, 아예 일찍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표현과는 달리 안동의 양반들에게도 과거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고, 벼슬 또한 고소원(固所願)이나 불급(不及)일 따름이었다. 이게 바로 안동양반들의 딜레마였다. 이 같은 딜레마는 겉과 속의 긴장관계를 적절하게 조율하게 하였고, 결국은 체면과 체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 것이다. 양반으로서의 체면과 체통, 그 미묘한 긴장의 끈마저 놓아버린 오늘에 안동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
죽은 이도, 부인도, 상한(常漢)도 교지를 받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 관작(官爵), 시호(諡號), 자격(資格), 토지 및 노비 등을 하사하면서 그 증표로 내려주는 문서이다. 고려시대에는 왕명(王命), 조선 초기에는 왕지(王旨) 혹은 관교(官敎), 그리고 대한제국시에는 칙명(勅命)이라고 했다. 또한 문과와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 내린 합격증서를 교지라고도 했다.(여기에 대해서는 과지와 홍패백패에서 거론하기로 한다.)
이제 교지의 구체적인 형식과 내용을 보자. 교지는 왕명을 전하는 공식적인 문서이다. 따라서 일정한 식(式)이 있게 마련이다. 대체로 첫머리에 ‘교지’로 시작하여, 연월일로 마무리된다. 그 사이에 쓰이는 글이 구체적인 내용이 된다. 그 내용에 따라 고신(告身), 급제(及第), 추증(追贈), 증직(贈職), 사시(賜諡), 사패(賜牌)교지 등으로 분류된다.
교지의 형식은 간단한 것이지만, 그래도 애매한 부분이 있다. 우선 <사진 ㉮>를 보자. ㉮는 김성탁을 조봉대부 사복시 주부로 임명한다는 내용이니, 사령장이다. 이를 고신(告身)교지라고 한다. 조봉대부는 품계로 종4품에 해당한다. 사복시는 궁중의 수레와 말 등을 관장하는 부서로 병조소속이다. 주부는 종6품의 실무관원이다. 그러니 품계와 관직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행(行)’자를 붙였다. 그러나 품계는 낮으나 관직이 높으면 ‘수(守)’자를 붙였다. 이를 행수법이라 한다.
<사진 ㉯>는 좀 복잡하다. ㉯는 류성룡에게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린 교지이다. 물론 사후에 내린 것이니 ‘증(贈)’이라 하였다. 교지 다음 호송공신에 이르기까지는 서애가 임란과 그 이후 수차에 걸쳐 받았던 공신호이고, 태광보국숭록대부는 정1품의 품계이고, 의정부 영의정을 제외한 나머지는 당연직에 해당한다. 부원군은 정1품의 공신에게 주어지는 작호(爵號)로 대체로 관향이나 연고지명으로 이름하였다. 품계와 관직이 일치하니 행 혹은 수가 붙지 않았다.
이렇듯 교지는 관직에의 임명만이 아니라 나이 많은 사람에게 품계를 주는 수직(壽職)도 있고, 후손의 영달로 죽은 조상이 받는 증직교지도 있다.<사진 ㉰> 더욱이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 배우자에게도 주어진다.
같은 사령장이지만 교지가 아닌 교첩(敎牒)이라고 하는 것도 있다. 이것은 품계가 5품 이하의 관리를 임명할 때 발급하는 사령장이다. 4품 이상의 관리는 대간 즉 사헌부와 사간원의 서경을 거치지 않고 왕이 직접 임명하였으나, 5품 이하의 관리는 대간의 서경을 거친 후에 이조와 병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임명하였다. 그래서 사령장에는 이조 혹은 병조가 언제 왕명을 받들어 임명한다는 의미로 시작하여 해당관서의 판서 참판 이하 관원들이 수결하고 있다.
임진,병자호란 특히 18세기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궁핍한 국가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품계와 관직을 대대적으로 팔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공명첩 혹은 납속책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만여 장 혹은 2만여 장이 일시에 발급되기도 하였고, 또 어느 한 두 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니 말 그대로 남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중앙에서 품계와 관직명을 적어 각도 각 군현으로 내보내면 군현에서는 해당자를 물색하여 이름을 적어 넣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진 ㉳>에서 볼 수 있듯이 이름자의 먹 농담, 글자 크기, 필체 등을 통해 공명첩임을 구별해 내기란 어렵지 않다. 그 가격은 시기와 관직뿐만 아니라 구매자의 신분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다.
가령 숙종,현종 년간에 쌀 8석 혹은 40석이던 동지(同知)와 첨지(僉知)라는 직첩이 영조 년간에는 200석 이상이 되었고, 상한은 사족에 비해 1.5배 더 비싼 편이었다. 더욱이 사족인 경우에는 실직에도 나아갈 수 있었지만, 상한들에게는 군역만을 면제해 줄 뿐이었다. 그러나 품계와 직첩을 구입한 상한들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손들의 군역 면제, 심지어는 양반으로까지 행세하고자 하였다. 물론 양반고을 안동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
중국황제의 연호로 우리의 세월을 셈하다.
모든 문서가 다 그러하듯이 교지도 발급 혹은 작성된 연월일로 마무리된다. ‘만력’이니 ‘천개’이니 하는 것은 중국 명나라 혹은 청나라 황제의 연호이고, 33년?7년은 그 즉위 33년 ?7년이라는 말이다. 조선 선조 38년(1605), 인조 5년(1627)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거의 대부분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다. 말하자면 우리 임금의 등극과는 무관하게 중국 황제의 운명에 따라 우리의 세월이 바뀌곤 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사대니 뭐니 하며 흥분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의 서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반면에 외세의 침략에 갈팡질팡하던 고종이 광무(光武)니 건양(建陽)이니 하는 연호를 세웠다고 해서 더 주체적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차피 남의 연호를 쓰는데 명이면 어떻고 청이면 어떠랴마는 굳이 망해버린 명의 연호를 고집하기도 하였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ㅇㅇ년’이니 ‘숭정처사(崇禎處士)’라는 것이 그것이다. 숭정이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1628-1644)의 연호이다. 당시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청의 연호를 사용했지만, 상당수의 선비들은 숭정이라는 연호를 계속 사용하기도 했다.
이것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반면에 청에 대한 불복종을 의미한다. 청에 대한 불복종은 장한 일이나, 망해버린 명에 대한 의리는 또 무엇인가? 명나라가 죽어가던 우리를 살려주었으니 그 은혜, 백골난망이라는 것이다. 임진왜란에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내준 것을 말한다. 오늘날 미국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와 똑같다. 그렇다. 명이고 미국이고 우리가 어려웠을 때 도움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만을 위한 것이었던가? 조선이 망한다면 명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명은 조선을 완충지대로 삼아 일본을 견제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그런데도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런 냉혹한 국제관계를 간파하지 못하고 그저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었다. 문제는 오늘에도 똑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으니 어찌 조선의 지식인만을 탓할 수 있으랴! 약소국의 서러움으로만 치부하기엔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엄청나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
‘가문의 영광’, 그러나
교지는 형식이나 글자 수에 있어서도 아주 단순한 문서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별 거 아닌’ 교지에서도 엄청난 역사를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가문의 영광’만이 아니라 조선의 과거제도와 관작, 나아가서는 약소국의 비애까지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생활사이고, 이래야 역사가 우리 삶과 함께 할 수 있게 된다. 역사가 교과서 속에만 있고, 나와 우리와 무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공허한 관념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교지를 ‘가문의 영광’으로 애지중지하는 소장가문의 생각과는 달리 연구자들에게는 그것이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교지가 아니라 없어져 버린 자료들에 대한 아쉬움이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자료들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함일 것이다. 이제 가문의 영광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소중함도 생각할 때다.
교지를 보존해 오던 심정으로 다른 자료들도 보존하고 또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되어야 한다. 옛 것만이 아니다. 오늘의 것이 곧 훗날 옛 것이 됨은 자명한 이치이다.
여러 곳에서 자료관이 세워지고 있다. 안동의 자료관은 건물이 아니라 내용이 그 어느 지역보다도 더 풍성해 질 것으로 기대된다.<안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