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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의 해방
31. 구원의 방법 2.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의 해방.hwp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7:21-8:2)
구원의 목표는 몸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목표를 천당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목표는 천당에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두 번째 방법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가. 모든 생명은 법을 가짐
1) 법은 성향, 자연적 능력임
모든 생명은 법칙이 있다. 사람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 생명의 일정한 법칙의 지배를 받고 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법칙이 깨지면 사람은 병이 들거나 죽게 된다. 나무도 나무의 생명의 법칙에 따라 나무대로 살아 있다. 이 법은 그 생명의 성향이기도 하고 자연적인 기능이며 능력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일정한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고 우주도 어떤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호흡을 하는 법을 배우거나 습득한 바가 없지만 우리의 생명 안에 있는 법에 따라 법칙적으로 호흡을 하고 있다. 그래서 호흡이 끊어지면, 그 법칙이 깨어지면 죽는다.
하나님께도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그 법에 따라 움직이신다. 사탄도 사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사람도 사람의 생명의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에 따른다.
사람의 생명의 법은 무엇인가? 사람에게는 육신의 법칙이 있지만 인격 속에 있는 법은 선악의 법이다. 모든 일을 그 법에 의해 판단하고 의식하며 행동한다. 많이 배운 사람이건 적게 배운 사람이건 관계없이 이 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 법을 제하면 아무 기준이 없게 되어 야만이 되고 만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선악을 아는 법을 가장 고상하고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스도 예수에게도 그 생명의 법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의 법은 다시 사는 법이다.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요 11:25)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는 법이니까 죽을 수 있다.
선악을 아는 법에는 이 법이 없으므로 죽을 수 없다. 본능적으로는 육신이 죽지 않으려고 하고 인격적으로는 누구에게도 죽지 않으려고 한다. 죽으면 끝이 날 것 같기 때문에 죽지 못한다. 남에게 고개를 숙이면 자기가 끝나므로 그렇게 못하는 것이다. 선악의 법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오라고 하시니까 가셨다. 그분에게는 다시 사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다시 사는 법이 있으면 죽기 쉽다. 한 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은 언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고개를 숙일 데서는 숙이고 허리를 굽힐 데서는 굽힐 수 있다.
인사에 고개만 숙이는 인사도 있고 등을 굽히는 인사도 있고 허리까지 굽히는 인사도 있다. 우리에게 다시 사는 생명이 있다면 머리만 숙이는 죽음도 가능하고 등을 굽히는 죽음도 가능하며 허리까지 굽히는 죽음도 가능하다. 죽었다가 사는 법이 있으니까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법이 없는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하기에 고집스럽고 굽힐 줄을 모르는 것이다.
모든 종교와 성인들이 죽으면 산다고 가르친다. 버리면 얻는다고 하고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 어디서도 마음을 채우라는 데는 없다. 그런데 왜 그렇게 못하는가? 그렇게 하면 자기가 죽으니까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다시 사는 법이 있다. 우리는 이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으면 죽고 다시 산 생명이 발동한다.
우주는 복잡한 것 같아도 그 법에 따라 조화를 이루는데 사람 안에 있는 법은 서로 대립하고 있다. 하나님의 법인 신성한 법과 사탄의 법인 거역의 법이 대립하고 사람의 법인 선악의 법으로 혼돈과 갈등과 흑암에 있다. 사람이 안정을 얻으려면 법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2) 일상의 생활은 법으로 말미암음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모든 것들은 어떤 법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이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선의 법이 작용하기 때문이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악의 법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떤 법이 그런 것을 일으켜 내는 것이다. 새 안에 나는 법이 있으므로 새에게는 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그 법이 나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법은 세상에서 말하는 법률이 아니라 자연법 즉, 생명 안에 있는 원리와 법칙이다. 법은 그 생명에서 나와서 일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이 복잡한 것 같아도 선악을 아는 법칙이 그런 일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가 많이 다녀도 교통법규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질서정연하게 흘러가는 것이다.
법이 우리의 일상을 만들어 내고 있으므로 법을 해결하지 않고 일상만 해결할 수는 없다.
나. 죄와 사망의 법에 묶인 곤고한 사람
로마서 7장은 죄와 사망에 매인 곤고한 사람이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1) 율법에 의해 죽임 당함
첫째로는 율법에 의해서 죽임 당하고 있는 사람이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가 있는 줄 몰랐는데 율법이 오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기 때문이다. 계명이 오니까 이런 것은 해야 하고 저런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생긴다. 그러니까 계명은 살아나는데 나는 그 계명에 매여서 죽고 만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 계명이 커지면 죄가 더 드러난다. 법이 많아지면 죄의 항목들이 더 많아진다. 교통법규가 복잡해지는 만큼 교통 범죄도 많아진다. 법이 없으면 죄가 무효이지만 법이 있으면 죄가 힘을 얻는다.
그래서 바울은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열심히 따르려고 하던 사람의 고백이다. 여기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롬 7:21 참조)는 말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고 하는 나에게 그것을 거역하는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자기 안에 다른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따르려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방해하는 마음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죄라고 표현하였다. 죄와 자기를 구별한 것이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본성이 있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것을 극복해 보려고 고행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육신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육신을 학대하고 정신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신을 학대한다. 그러나 한쪽으로 흡수통일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속에서 더욱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한쪽 가지를 자르면 다른 가지가 나오고 그 가지를 자르면 거기서 또 다른 가지가 나온다. 선과 악 두 가지가 있어서 한쪽은 좋고 한쪽은 나쁘다고 하지만 나쁜 쪽을 잘라내면 거기서 또 두 가지가 나온다.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는 그런 싸움을 해 왔고 그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느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이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원함은 있으나 행함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울은 이것이 죄라고 결론을 내렸다. 한 법을 깨달았던 것이다. 로마서 7장 9절에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고 하였다. 법과 따로 있을 때는 죄와 무관했는데 법과 같이 있으니까 무관할 수 없다. 법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법이 없으면 법이 행세를 안 하니까 죄가 죽어 있는데 법이 오니까 죄가 살아난다.
악은 언제 오는가? 선을 행하기 원할 때마다 늘 함께 온다. 악이 원래 자기에게 있어서 늘 악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거역도 늘 있는 것이 아니다. 순종하려고 할 때 거역도 함께 하고 선을 행하려고 할 때 악이 함께 한다. 차라리 순종하려고 하지 않으면 거역도 나오지 않고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악도 나오지 않는다.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생기면 갑자기 악이 함께 나온다. 그러니까 악은 항상 숨어 있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본성은 숨어 있다가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려고 하면 드러난다. 형제를 사랑하려고 하니까 갑자기 옛날에 미웠던 일이 생각난다. 헌금을 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을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헌금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으니까 아깝다는 생각이 난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 그래서 괴로운 것이다. 한 가지 마음만 나오면 좋겠는데 그것도 같이 따라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선과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악만 제거하면 좋겠지만 절대로 악만 제거할 방법은 없다. 악은 선에 붙어 있기 때문에 그것만 제거할 방법이 없다. 암은 생명에 붙어 있는 것이라서 잘라내기가 어렵다. 악도 암처럼 선에 같이 붙어 있다. 악을 없애려면 선도 같이 없애야 한다.
2)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되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법이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음
로마서 7장 22-23절에는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하였다.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거듭난 사람이다. 그런데 지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서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이 사람이 곤고한 사람이다. 법에 포위되어 있는 사람이다. 거미가 쳐 놓은 그물에 곤충들이 걸리듯이 사람은 법의 그물에 걸려 버렸다. 율법(하나님의 법)과 마음의 법(속사람의 법), 그리고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법이다. 그 법은 육신의 법이고 죄의 법으로 그 근원은 사탄에게 있다. 이 법의 올가미에 걸려서 이리 갈 수도 없고 저리 갈 수도 없다. 하나님의 법을 피해 가려니 육신이 붙잡는다. 육신의 법을 따르려니 마음의 법이 붙잡고, 마음의 법을 따르려니 육신의 법이 붙잡는다. 사방에서 서로 잡아당기니까 이리도 저리도 못 간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은 이런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축되려면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사방으로 묶여 있는 사람을 교회에 데려다 놓으면 어찌 되겠는가? 집회 중에 핸드폰이 울려서 “여기 중국에서 온 좋은 술이 있는데 친구들이 모여서 먹고 있으니 빨리 오라.” 할 것이고 또 핸드폰이 울려서 좋은 부동산이 있는데 지금 오지 않으면 놓친다고 할 것이다. 집회 중에 나갈 수는 없고 사방에서 오라고는 하니 말씀이 들리지 않고 건축이 될 수 없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어야 건축에 참여할 수 있다. 적어도 집회에 올 때는 핸드폰 전원을 끄고 와야 한다. 전원을 끄지 못하는 사람은 전화를 기다리느라고 말씀을 듣지 못한다. 이 사람이 곤고한 사람이다.
법으로부터,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된 이 사람은 누군가? 로마서 8장 1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고 죽으면 법에서 해방된다. 죽은 사람은 어떤 법으로도 재판을 할 수 없다. 죽은 자에게 적용할 법은 없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으면 법으로부터 해방된다.
살아 있으면서 법으로부터 해방되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로의 손에서 어떻게 해방되겠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유월절을 지내고 홍해를 건너서 나온 것 같다. 그러나 거기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죽음이다. 그들은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서 나왔던 것이다.
옛날에 궁에 들어갔던 여자가 거기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죽는 것뿐이었다. 죽은 자는 궁 안에 살 수 없으니까 뒷문으로 내보냈던 것이다. 우리는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자들로 거기서 이름도 빛내고 인정도 받으면서 살아 있으려고 하면 나올 수 없다. 그런데 거기서 쓸모가 없게 되면 아무도 보지 못하게 뒷문으로 내보낸다.
사탄에게 쓸모 있는 사람은 사탄이 내주지 않는다. 애굽에 열 번이나 재앙을 내렸을 때에야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 준 것은 그만큼 자기에게 쓸모가 있었다는 것이다. 흥정을 열 번이나 한 후에 마지막에 죽음의 재앙이 오자 할 수 없이 그들을 내놓았다. 사탄에게 쓸모 있는 그 사람은 하나님도 구출할 수 없다. 사탄에게 쓸모가 없어야 거기서 나오기 쉽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 그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리는 그와 함께 죽은 나를 나로 알아야 한다. 함께 죽고 함께 살았으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 안에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심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로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없다. 열심과 정성을 다하고 기도를 해도 주님이 우리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다.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산 것만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물이 아닌 것은 물속에 있을 수 없다. 돌멩이가 물속에 있어도 돌이 물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지 돌은 물이 아니다. 물만 물속에 있을 수 있다. 함께 죽고 함께 산 그 생명만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그 생명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정죄하시는지 안 하시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전에는 날마다 그분을 내 안에 모시려고 노력했고 그분에게 효도를 다 하려고 노력했어도 항상 그분이 정죄할까 봐 불안했다. ‘하나님이 뭐라 하시지는 않을까, 벌을 내리지는 않을까, 지옥에 보내지는 않을까, 천당에 가더라도 말석에 두지 않을까?’ 하며 불안했다. 열심히 모시려고 했지만 그분은 늘 우리 마음에서 외출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 이 생명을 알고 보니 그분은 나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분이다. 나가라고 한다고 나가는 분도 아니고 들어오라고 한다고 들어오는 분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2)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함
우리는 죄의 법을 섬기는 육신을 죽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분의 죽음을 주시고 죄의 법을 섬기는 육신을 죽은 자로 알게 하셨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은 일이 없지만 그분의 죽으심으로 거기서 죽은 나를 발견한 것이다. 지금까지 ‘나’라고 알던 그것이 거기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감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의 죽음 안에 포함시키셨다는 것이다.
3) 생명의 영의 법의 승리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킴으로 생명의 영의 법이 승리하게 되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은 그분이 우리를 데리고 죽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발견된 나’만 나인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를 해방시킬 방법이 없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연약함으로, 우리 속에 거역하는 본성이 있어서 따를 수 없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원하는 마음도 있지만 싫어하는 마음도 같이 있다. 옳은 것도 알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아는데 행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
율법을 행할 수 없는 사람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면 벌만 계속 쌓인다. 벌이 너무 많아지면 그 벌을 내릴 방법이 없어서 그 벌을 내린 사람이 오히려 불의하게 되고 만다. 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쉬운 것부터 가르치거나 다른 방법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도 쉬운 방법을 강구하셨다.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신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 하였다. 그 아들을 우리 앞에서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포함하게 하신 것이다. 아무리 죽으라고 해도 죽지 않으니까 우리와 똑같은 아들을 보내어 그를 죽게 하고 살게 하심으로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부모가 자녀에게 요구를 해도 안 되면 부모는 스스로 포기하고 자녀에게 맞는 것을 해 주려고 노력한다. 지혜로운 부모는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을 시킨다. 하나님도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아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포함해서 우리의 운명을 보여 주신 것을 누구나 보기만 하면 된다. 장대에 달린 뱀을 보기만 하면 살았듯이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율법의 요구는 무엇인가? 율법의 목적은 그 조항 하나하나를 지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과 친하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율법의 조항을 지켜서 그런 사람이 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된다. 자기가 죽었다는 것만 알면 하나님께 대해서 아무 문제가 없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내가 죽은 자로 알면 그 사람에게 아무 문제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대해서는 더욱 쉽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보여진다. 다른 사람과 매일 싸우면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사람과 싸우는 이유는 그 사람이 자기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과 이러한데 하물며 전혀 다른 하나님과는 얼마나 더 싸우겠는가. 사람과 화목하지 못하면 절대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다.
율법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람과 화목하는 것으로 다 이루어진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하셨다.(마 22:37-40)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에게 대하여 화목하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에 있는 우리의 운명으로 해결된다. 자기가 선과 악에 대해 죽은 자로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을 알면 아무 문제가 없다.
생명의 영의 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법이다. 생명의 영의 법은 부활의 영의 법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길은 이 길뿐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셨다. 그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셨다. 이 영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영이다.
4) 생명에 주의함
우리는 어디에 주의해야 할 것인가? 율법이나 계율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인가, 아니면 법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인가? 우리는 네 가지 법에 싸여서 살았다. 그런데 그 법은 모두 생명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이나 계율에 주의하면 안 되고 생명에 주의해야 한다.
성경의 서두와 말미는 생명과 사망의 문제를 계시하고 있다.(창 2장, 계 22장 참조) 선이냐 악이냐, 사랑이냐 미움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사망에 대해 계시하고 있다. 창세기 2장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계시했다. 생명나무는 생명이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망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결과는 사망이다. 동산 안에는 생명나무와 사망 나무가 있었던 것이다. 창세기 2장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표현되었지만 결과는 사망의 나무가 된다. 처음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보여서 사람이 먹었는데 그 결과는 사망 나무다.
지금도 선악을 아는 지식이 사망이 된다는 것을 알면 아무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망은 보이지 않고 선악을 아는 지식만 보인다. 독이 좋게 보이니까 먹는 것이지 독으로 보이면 아무도 먹지 않을 것이다.
창세기에 계시된 생명나무와 사망 나무가 요한계시록에서 열매를 맺어 하나는 사망으로 해서 불못으로 들어가고 하나는 생명으로 해서 새예루살렘이 된다. 새예루살렘은 생명나무의 결과고 바벨론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결과다. 처음에는 이것이 보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라가는 것이다.
창세기는 씨다. 전 성경의 모든 항목들의 씨가 창세기에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씨는 요한계시록에서 열매를 맺는다.
씨를 모르면 농사를 못 짓는다. 생명나무가 무엇인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무엇인지 모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계속 먹이게 된다. 그 결과가 사망인 줄도 모르고 먹이므로 싸움이 일어나고 갈라진다. 종교계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화해하거나 해결되는 법이 없고 반드시 갈라진다. 세상에서는 이해관계만 맞으면 화해하게 된다. 그러나 종교계는 이해관계가 아니므로 조그마한 일로 시작된 것이 커져서 결국은 갈라져 버린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만 먹이니까 마지막에는 사망이 오는 것이다.
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을 따름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이다. 다른 것은 버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생명만 찾아야 한다.
예수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셨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고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이 영을 좇아 살 때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된다. 십자가 안에서 그분과 함께 죽은 우리 자신, 이미 죽은 것을 붙잡고 살던 우리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담은 이미 선악과를 먹었을 때 죽었고 그 죽은 상태를 계속 살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우리는 그것이 죽은 것인 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것밖에는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영의 해방, 우리 생명의 해방을 얻게 된다. 그리고 해방된 사람이라야 교회로 건축될 수 있다.
교회 안에는 이런 법도 저런 법도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법만 있어야 된다. 교회 안에 다른 법이 있으면 싸움밖에 안 된다. 좋은 법, 나쁜 법, 선한 법, 악한 법, 그 어떤 법도 있으면 안 된다. 오로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법만 있어야 한다. 그 법만이 우리의 일상, 우리의 삶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여러 가지 법에 둘러싸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 곤고한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건축을 위해서 십자가 안으로 불러 모으시고 거기서 다 처리하셔서 죽은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산 사람을 산 사람으로 구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그 사람만 참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밖에는 산 자가 없다는 것을 보았고 그 영밖에는 산 영이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모든 것을 떠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사신 이만을 따르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그 법만을 따르고 그 법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영원한 목표인 당신의 몸을 이루는 사람으로서 그 몸 안에 있는 법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하고 이 법을 완성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