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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동의 기억-통복동의 이동자(1943년생), 김종예(1935년생)씨
2020.10.09.
이동자씨는 천안에서 살다가 1972년 세교통으로 이거했다. 연탄배달, 문방구 등을 하며 돈을 모아서 통복동 삼성아파트 앞에서 평택정미소를 운영해서 돈을 벌었다. 김종예씨는 오성면 길음리에서 1967년 경 원평동에 이거했다. 남편은 대동연탄공장에서 일했고 김종예씨는 품팔이에서부터 남의 집 일 등 많은 일을 하며 살았다.
여기는 통복동에 속하죠?
통복동인데 동사무소는 원평동이예요.
얼마나 거주했어요?
(이동자)평택에는 23살에 시집왔어요. 세교동에서 살다가 여기로 온 거지.
친정은 어디세요?
(이동자)천안이요.
세교동에서 여기로 이사 온 것은 얼마나 됐고요?
(이동자)30살(1972년)에 왔나.
바깥 어르신 함자는?
(이동자)김종환.
어떻게 결혼했어요?
(이동자)우리는 중매했죠. 직산 사는 사람이 중매를 해줬어.
결혼식은?
(이동자)구식으로 했지. 가마도 타고, 족두리도 쓰고. 초례할 때 닭 가지고 하고.
통복동으로 이사 온지도 50년 가까이 되네요. 그 당시 동네 풍경은 어땠어요?
(이동자)그 때는 동네가 초라했지. 집도 없었고. 드문드문 초가집 몇 채 있고, 슬레이트집 몇 채 있었고. 하여튼 집들은 별로 없었지. 나마지는 논이었지.
그럼 통복동 일대는 집들도 얼마 없던 동네네요?
(이동자)얼마 없었어. 순전히 논이지.
(김종예)우리는 오성면 미삐에서 왔는데 63살 먹은 우리 아들 8살 때 왔슈. 그 때도 논이었어.
이 동네 분들 직업은 뭐였어요?
순 품 팔러 다녔지. (김종예)우리 남편은 연탄공장(대성연탄) 다녔슈.
품은 뭐로 팔았어요?
(김종예)모심으러 다녔지. 논이 있어야 농사짓지. 우리 남편은 연탄공장 다녔고. 대동연탄공장이예요. 그 시절은 다 어려웠지 뭐.
농사짓는 집은 없었어요?
(김종예)자기 땅으로 농사짓는 사람은 없었고 소작 짓거나 품 팔러 다니고 그랬죠.
(이동자)다 어렵게 살았지. 지금은 반찬 없이 먹어도 부자로 사는 거지.
이 동네 분들은 교회 많이 다녀요?
(김종예)우리는 평택감리교회 다녀요. 김준경 장로하고는 한 속이라 데리러 오고 그랬지.
이 동네에 집들이 많아진 것은 언제부터예요?
(이동자)한 20년 되었나. 원룸 짓고 집들이 들어서고 그러더라고.
큰 길 나고 집들이 많이 생겼나요?
(이동자)그렇지. 집들이 많아진지 얼마 안 되야. 길나고 집들이 들어서더니 금방 변하더라고.
통복육교 만들어지기 전 모습은 기억나세요?
(김종예)잘 안나. 우리는 살았어도 쫓아가 보지는 않아서 잘 몰라.
옛날에 통복육교 쪽에 큰 사고 났었잖아요?
(김종예)그려, 아주 크게 났지. 협진여객 버스인가. 우리는 살았어도 쫓아가 보지는 않았지. 미군차가 안정리서 오잖어. 그게 오면은 도둑놈들이 트럭에 올라가서 훔치는 놈들이 많았어.
도둑놈요?
(김종예)옛날에는 미국사람들 트럭 지나면 트럭 위로 뛰어 올라서 막 집어 던져. 골목 지나면서 막 집어 던지면 다른 놈이 그걸 집어가. 그거 가지고 쏙 들어가면 그걸 어떻게 찾냐고. 땡땡거리서 도둑놈들이 많았어. 다 패거리가 있어. 그 전에는 많았어. 지금은 어디 다 갔는지 없지만. (이동자)이 동네에 그 패거리들이 살았어. 다들 나이가 먹었지만 그전에는 많았다구.
그게 언제 때예요?
(김종예)우리 이사 왔을 때였지.
그럼 1970년대 초였네요?
(김종예)그렇지.
그러면 미군들이 잃어버린 물건 찾아요?
(김종예)차 위에서 던지면 다른 놈이 갖고 뛰어. 그러면 그걸 어떻게 찾어. 조금 찾다가 그냥 가버리지. 도둑놈들이 패거리를 짜갖고 허니께 찾을 수 없었지. 우리가 전에는 높은들(고평)에서 살었어. 우리 옆에 살던 사람네 아들이 논에서 돈 가방 주웠다고 소문났었어. 하여튼 도둑놈들이 많았어.
그러면 동네 분위기가 썩 안 좋았겠네요?
(이동자)안 좋았지. 옛날에 철둑 가생이에는 고물장사 쓰리꾼만 산다고 그랬어. 옛날에는 여기 땅값도 없었슈. 맨 하바리들, 도둑쟁이, 쓰리꾼, 병장수만 살았고 가치관도 없는 놈들이 살었어. 평택에서도 하바리지. 둑너머 산다면 택시도 안 갔어.
맞아요. 옛날에 둑너머 산다면 창피하게 생각했어요?
(이동자)챙피해서 거짓말했어. 그래도 삼성아파트 생기고 나서 1993년도에 생겨갔고 차츰차츰 좋아진 거여. 여기가. 여기가 다 논였어. 지금은 살기 좋아졌어. 시장 가깝고 역전 가깝고.
김종예 어르신 바깥 분은 연탄공장 다녔잖아요. 당시 연탄공장은 언제까지 있었어요?
대동연탄, 일자표 연탄 다 있었어. 옛날에는 일자표 연탄이 동보연탄이라고 했어. 저기 색시들 있는 삼니 골목에는 일자표 연탄, 이쪽(통복리)에는 대동연탄.
맞아요. 삼니 색시골목 바깥쪽은 시커맣어요?
(이동자)지금도 듣자하맨은 이쪽 연탄공장 쪽에는 순 하바리만 있고 저쪽으로는 급수가 있다고 했어. 다방아가씨도 급수가 있고 똥갈보도 급수가 있다고 했어. 들이는 말에.
그럼 삼니는 일자표, 통복지하도 쪽은 대동연탄 있었단 말이죠, 그럼 광신연탄은요?
(이동자)광신연탄은 역전 옆에 있었지.
역전육회골목 쪽에도 아가씨집이 있다고 하던데요?
(김종예)거기에도 있었지. 방무용이라고 우리가 그 집 농사 졌는디, 그 사람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했었슈. (이동자) 비밀로 했지. 만약에 (경찰한테)걸리면 식모라고 하고 친척이라고 하고 그랬다고 하더라고. 아가씨라고는 안 하고.
많았던 것은 아니고 몇 집 있었네요?
(이동자)그렇지. 많은 건 아니지. (김종예) 아이구 그 집 사람들 짜기는 얼마나 짠데.... 일하러 가서 밥 해 놓으면 항상 모자라. 밥이 모자라서 또 가져오면 또 모자라. 옛날에는 일하러 가면 애들도 밥 먹으로 오잖어. 그럼 넉넉하게 해 나와야지. 항상 모자라. 부잔디도 그렸어. 그 집이 부자였지. 여관도 하고 여기 저기 땅도 많았고. 그 집 여관에서 아가씨 불러 달라고 하면 불러주고 그랬지.
여관해서 돈을 많이 벌었네요?
(김종예)원래 부잔데다가 여관해서 돈 많이 벌었지. 그 아저씨(방무용)는 서민금고 만들어서 다녔어. 돈 부자여. 아들은 하나였고. 지금 평택역전에 파주옥 앞의 건물이 그 사람 건디 크게 지어서 성형외과, 메이커 옷장사 하는 사람들한테 세 놨어. 여기 사람인디 아주 부자여. 여기 살 때도 논이 몇 섬지기였는디. 그런디 다 돌아가고 없어. 아들도 나이가 많고.
어르신은 그 분 댁에서 일을 많이 해줬네요?
(이동자)나는 안 했고. (김종예)그렇지. 밥해 달라면 해주고. 논일할 때도 일해 줬지. 그이네는 평생 남의 일 시키며 산 사람들이여. 부자니까 그렇지. 논이 몇 섬지기인디.
품일 해주면 삯은?
(김종예)그 때 품삯이 어딨어. 뭐가 있어, 있어도 쌌어. 줘도 쪼금 주고. 닷새 일하고 쌀 한 말 주고, 쌀 한 말 빌려 먹으면 이틀 일해주고 그랬어. 아이구 그만해. 그이네들이 내외가 다 짰어. 그 애기 그만 혀.
여기는 도시지만 농촌하고 다르지 않네요?
(이동자)그럼요 촌이었어요. 삼성아파트 저거 들어오기 전에는 완전히 논이었어.
연탄공장 다니면 임금은 얼마나 받았어요?
(김종예)월급 받으면 다 뭐혀. 오다가 놀음하고 술 먹고 다 날리고 그냥 빈손으로 와. 10원도 안 가져왔어. 월급타면 바께스로 술 몇 박스 사오잖아. 술 사오는 심부름 그거 심부름을 현국이 아버지가 허는 거여. 내가 쫓아 들어가서 야단해서 끌고 가려고 하면 ‘저년 돈 달라고 지랄하러 온다’하고 말해 허허. 그러면 꼼짝 못하지. 한 방 가득히 사람들이 차 있었어. 내가 그려. ‘차라리 돈 필요 하면 눈 뜨고 그냥 가져가라고’. 노름꾼들이 둘벅들벅 했어. 그랬던 사람들 다 죽었어. 이제는 다 죽어서 시원혀. 패거리들이 그랬어. 술태백이로 살았고 집안 식구는 품 팔아 먹거나 말거나 그렇게들 살았다고. 그러나 저러나 다 죽었어. 속 썩은 거 말도 말어. 돈 써보지도 못하고 그렇게들 살다 죽었어.
바깥어르신은 연탄공장 몇 년 다녔어요?
(김종예)우리 노인네 한 20년은 댕겼지. 그렇게 벌어서 술사고 윳 놀고 그이들 한테 다 바쳤대니께. 시계도 가져가 잽혀먹고, 5000원 주고 잽혔어. 그러면 내가 가서 찾아와. 동고리 가서 찾아왔어. 그러면 또 윳놀아 가지고 또 잽혀. (다른 노인들) 요즘에는 그렇게 하면 마누라가 안 살지. (김종예) 한 번은 대포집에서 노름을 한 대. 그래서 내가 우리 아들한테 ‘야 경찰서에다 신고해라’했더니 정말 경찰이 왔어. 그래서 몇 사람이 잽혀가고 우리 양반은 도망나왔더라고. 그래봤자 소용 있어 애가 한 건데. 그래서 샘통이다 했지. 국민핵교도 안다니는 앤데 뭐라고 헐 꺼여. 우리 양반이 그러더라고. ‘허 우리 애 땜에 잽혀갈 뻔 했네’.
그럼 주막은 어디에 있었어요?
(여러 노인들)거기 땡땡거리 앞에 화성이발소 이짝(반대편)에. 땡땡거리가 두 개 잖어. 저쪽 높은데(고평마을) 그 쪽에 술집들이 있었어. (김종예)내가 옛날이야기 하려면 끝이 없어. 술집이 많이 있었어.
통복육교 쪽에 술집은 몇 집이나 있었어요?
(여러 노인들)술집이 천지지 뭐. 아주 많었어. 남자들이 행실머리가 못돼 쳐 먹었어. 그거 힘들게 번 것을 노름해가지고 돈 뺏어갈라고 욕심을 부려. 한 사람이 가서 술 먹으면 재미나니께 한 번 두 번 어울리다보면 거기가 아지트가 되는 거여. 돈 땄다고 먹고 잃었다고 먹고. 그러니 돈도 못 벌어. 남자들 여자들 섞어 노름하고. 그런 디가 지금도 구멍구멍 있어.
저기 화성이발관 앞 박명구 교장님댁이 마방이었다고 해요?
그이네가 마방여. 아버지가 말을 좋아해가지고. 박명구도 키가 작은디 가죽구두 신고서 말을 타고 다녔잖어. 지금은 집 지어가지고 살지. 요즘에는 몸이 안 좋아. 키가 작아도 강다구가 있었는디.
박명구 교장 아버님은?
그 양반도 키가 작고 새카맣고 그랬어.
이동자 어르신은 어떻게 돈 벌었어요?
(어른신들)방앗간 했지. (이동자) 방앗간만 해가지고는 돈 못 벌어. 땅 샀다 팔았다 해서 돈 벌었어. 옛날에는 얼마에 팔아도 세금 안 냈어. 지금은 세금으로 다 가져가서 얼마 안 남는데. 그거 몇 번 샀다 팔았다 하니께 금방 부자가 되더라고. 내가 빚 얻어서 샀어. 남들은 방앗간 해서 돈 벌었다고 하는데 그건 일꾼들 월급 주고 나면 남는 게 없어. 조합에서 땅 산다고 돈 빌려다라고 하면 얼른 줬어. 땅을 1만 5천원씩 사면 몇 십 만원씩 팔았어. 우리 건물(삼성아파트 앞) 있는 그 자리에서 방앗간 했어.
어떤 방앗간이예요?
(이동자)일반 벼 찧는 방앗간.
처음 평택 올 때는 품팔이해서 먹고 살았다면서 어떻게 방앗간을 했어요?
(이동자)방앗간도 본래는 옥이 시할아버지가 방앗간 주인이었어. 김영배씨라고. 그런데 여기 사는 사람이 사라고 소개해줬어. 세교동 살 때인디 925만원, 잊어먹지도 않어. 925만원에 여기 술태백이 아저씨 학구 아버지 그 양반이 소개해줬지. 소개비까지 합쳐서 1천만 원 들었어. 내가 어디 가서 물어봤어. 저기 배나무골이라고 거기 무당이 용하다고 해서 물어봤는디 사면 좋을 거래. 우리는 세교동 중앙초등학교 가는 길 입구에서 구멍가게 했어. 나는 계속 돈 벌잖어. 거기 일할 때 내가 밥을 못 먹었어. 어린애가 똥을 싸도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손이 안 나서 못 치웠다고. 코 뭍은 돈이라도 그게 돈벌이가 쏠쏠하더만. 그렇게 했는데 방앗간을 사려니 그렇게 돈 벌어서는 안 되더라고. 먹고 사는 것은 지장 없었지만 방앗간은 사기 힘들었지. 그런데 우리 남편이 방앗간 하겠다고 밀어 붙인 거여. 누구한티 그랬디야. 용한 무당이 잘 된다고 했으니께 잘 된다고.
품 팔아서 문방구하고 나중에 방앗간도 산 거네요?
(이동자)품도 팔았고, 연탄장사도 하고, 돼지도 먹이고. 문방구 하고 안 한 것 없지.
돈 복이 있으시네요?
(이동자)그려, 나는 뭘 해도 잘 되더라고.
연탄도매점도 했어요?
(이동자)도매점이 아니라 일자표 연탄 배달했지. 아침에 세교동 가는디 도석장(채석장) 앞에다 한차, 중앙학교 앞에 한 차 쌓아 놓으면 아침에 하나 배달하고 오후에 한 차 배달하고. 연탄배달 아무나 못하는 거여. 옛날에는 길이나 좋아. 연탄리어커는 사람들이 밀어주지도 않아요. 시커멓다고, 손에 시커멓게 뭍잖아. 아이고 고생한 것 생각하면....
그 다음이 문방구였어요?
(이동자)문방구는 지금으로 하면 잡화점이지.
문방구하다가 방앗간 한 거네요?
(이동자)그래서 저기 용이동 배밭골 무당한티 물어보니께 사라고 했다니까. 오늘 사면 내일 두 배로 오른디야. 그래서 무리해서 샀지. 그래서 사가지고 (운영)허는디 다들 우리 방앗간으로 (도정하러)오는 거야. 내가 오면은 고기 볶아서 밥해주고 그러니께 소문이 좋게 났어. 그 집에 가면 밥도 잘 주고 인심도 좋고 계산도 잘해준다고.
방앗간 위치가 어디예요?
(이동자)여기 삼성아파트 입구 카센터 앞에 있는 24시간 마트 그 건물자리. 지금은 유천리 장례문화원 가는디 철둑 넘는디 거기에 있는 게 우리 방앗간이야.
언제 옮겨갔어요?
(이동자)오래됐지 거기두. 한 10년쯤 됐나. 우리 노인네가 돈을 많이 버니까 딴 맘을 먹어서 옮겨간 거여. 싸게 잡아도 우리 재산이 50억이여. 우리 바깥양반이 40년 전에 바람 난 것 내 사는 것 지장 없고 내 새끼한티 영향 미칠까봐 아무 말 못하고 산거지. 거기에 미쳐서. 지금은 따로 살어.
바깥어르신이 처음에는 열심히 일했을 거잖아요?
(이동자)그럼 처음에는 열심히 일했지. 처음 마음 버리고 처자식도 버리고 하니 내가 마음을 바꾼 거지.
방앗간 운영할 때 어디에서 방아 찧러 왔어요?
(이동자)숙성리 사람들이 많았지. 대추리 사람들도 많이 오고. 미군부대 오기 전까지는 우리 집에 많이 왔어.
예전에는 방앗간에서 논까지 가서 벼를 실어오고 했다는데요?
(이동자)그건 작은 방앗간이나 그렇고 우리는 차로 실어왔어. 우리도 차 놓고 부렸고 주차장에 8804트럭에다 말하면 실어다 줬지. 그러면 찧어다 실어다 말려서 주고 그랬어. 근동에서 큰 거는 우리 집에 다 왔어.
원평동에도 큰 방앗간 있었잖아요?
(이동자)있었지 다리 넘어서(신궁정미소를 말함). 영단방앗간은 정부미를 찧었고. 그거 말고는 우리 것하고 재랭이 것하고가 제일 컸지. 거기하고는 경쟁자였지.
어르신이 운영했던 방앗간 이름은?
(이동자)평택정미소
삯은 어땠어요?
(이동자)한 가마에 6되. 직접 싣고 오면 4부였고.
이정도 받았으면 돈이 좀 벌렸겠네요?
(이동자)그렇지. 쌀 몇 가마씩 떼지. 그래도 방앗간은 가을 한철 뿐이여. 가을에 추수하면 그거로 임금 주고 세금내고 하면 별거 없어. 아까 말했지만 땅 사고팔아서 벌지 않았으면 별 거 없어. 옛날 세금 안 낼 때 말이지. 지금처럼 살 때 내고 팔 때 세금내면 헛거지만. 돈을 벌려고 쫓아가면 안 되고 돈이 쫓아오게 만들어야해. 그래야 돈이 벌려.
자녀는?
(이동자)아들 둘 딸 하나. 딸은 한광학교 다녔는디 장학금 받고 다녔어.
어르신(김종예)네는 살만해진 것은 언제쯤예요?
(김종예)지금이 조금 나아졌지. 애들이 제 앞가림 허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