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기독교사회운동을 열심히 해온 단체들이 모여 이야기 나누는 자리에 갔다. 기독교사회운동의 현주소와 과제를 60에 접어든 활동가가 발제했다. 본인의 시선일까? 아니면 동년배의 시선을 전한걸까? 현주소를 짚으며 세대 간 운동의 편향이 깊어지고 있다는 말이 나왔다. ‘거대 담론에서 일상으로’, ‘광장에서 골목으로’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에서 일상의 파시즘을 타파하는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정치적 체제를 문제 삼는 운동은 꼰대들의 구닥다리 운동으로 외면받고 있다고 평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어."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점토판에도, 이집트 피라미드 내벽에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남긴 글에도 비슷한 얘기가 쓰여 있다. 그처럼 세대 갈등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세대 갈등이 더욱 심각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돈다.
세대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시대와 환경을 살아온 존재들이 같은 시공간에서 살아가며 나오는 일상의 주제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 쟁점이 되는 과정에서 어느 특정 주제를 거론하여 그것에 바탕을 둔 공통분모를 확대하여 세력으로 활용한다. 최근 한국에서 붉어지는 세대론은 선거를 전후하여 극심한 양상을 보였다. 정치인들이 당선을 위해 사회 현상의 한 모습을 세대로 엮어 표로 결집한다. 다른 한편, 자본과 기업은 젊은 세대의 새로움을 새로운 문화의 상징으로 그리고 이를 엮어서 새로운 상품을 소비하는 주체로 호명한다.
결과적으로 지금 붉어지는 세대론은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꼴이다. 권력과 자본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운동에서도 이 문법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각 세대가 서로 바라보고 있다면 누가 좋아할까?
관계를 맺을 줄 모르고 관계가 파편화된 시대에, 같은 세대 내에서도 대립과 갈등이 만연하는 때에 세대 사이 연대는 가능할까? 세대 간 차이가 대립과 갈등이 아닌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더 깊어지는 관계를 맺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 큰 영향력을 끼친 선배와 어른이 그 말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면서 가까이에서 지내는 그런 시공간을 그려 볼 수는 없을까? 이것은 사실 세대 문제 이전에 관계 맺음의 문제이다.
말세에 내가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며 너희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노인들은 꿈을 꿀 것이다.
압제의 시대에서 하나님나라의 새 세상을 선포한 선지자 요엘의 이야기를, 예수의 제자공동체는 이어 받는다. 예언, 환상, 꿈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예언, 환상, 꿈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현실화 하는 것이라면 차이는 없다. 새로운 세상을 일구기 위해 청년과 노인은 한 뜻으로 동지가 된다. 죽임의 힘 가득한 세상에서 살림의 세상 내다보며 그 삶을 함께 만들어가는 걸음 가운데, 정말 '그런' 세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