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3,1-10; 루카 11,29-32
고전 유대교의 기초를 놓은 사람을 모세라 한다면, 오늘날 유대교의 기틀을 놓은 사람은 에즈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587년부터 538년까지 겪었던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제2의 출애굽 사건이었는데요, 유배에서 돌아와 이스라엘 재건에 힘쓴 지도자가 에즈라와 느헤미야입니다.
이들은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했는데요, 무너진 성전을 새롭게 건축하고 율법을 재정비했습니다.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났던 이유가,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율법을 철저히 지킬 것을 주장했는데, 이를 위해 함께 사는 이방인들을 내보내라고 했고, 심지어 유다인 남자가 이방인 여인과 살고 있으면 부인까지 내쫓으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배타적이고 철저하게 율법을 지킬 것을 강조하던 때에 기록된 성경이 요나서입니다. 요나서는 에즈라 개혁 시대에, 이 개혁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지적하면서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성경인데요, 이방인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딱 한 가지만을 정해 놓고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긴장 속에 하느님 뜻이 펼쳐진다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군중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데, 속마음은 사실은 ‘그러한 표징이 없으면 좋겠다. 나는 회개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군중에게 예수님께서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을 얘기하신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심판 때에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라는 말씀은 더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어서 남방 여왕 얘기를 하시는데, 남방 여왕 역시 남쪽에서 온 이방인입니다. 니네베 사람들과 남방 여왕의 공통점은,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요나의 말에, 솔로몬의 말에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응답’하지 않고, ‘표징을 보이라’는 요구만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하느님을 어렵게 하는 것이 반응하지 않는 것, 응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은총으로, 감사와 회개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거기에 응답하지 않을 때 하느님도 더 이상 어떻게 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고래 뱃속에 사흘을 있었던 것처럼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요나의 표징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선포에 응답하는 니네베 사람들이 될 것인지, 응답하지 않는 악한 세대가 될 것인지 복음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104년 전 3·1 운동으로 삶을 바친 많은 독립운동가들 역시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응답은 복음 환호송에 나와 있습니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첫댓글 요나 예언서가 율법학자 에즈라와 유다 지방관 느헤미야와 관련된 예언서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신부님 강론으로,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제가 요나여도,
북 이스라일을 멸망시킨 앗시리아(니네베)는 가기 싫었을꺼예요^^
꼴보기 싫은 일본에 가라서 그놈들을 구하라는 거잖아요 ㅠㅠ
제가 신학교에서 안소근 수녀님 구약 강의를 5과목 청강했어요. 그때 수녀님께 배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