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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부천sk를 떠나 중국 선양, 일본 히로시마, 타슈켄트를 거쳐 2006년에 우즈베키스탄 감독을 맡았다가 건강 문제로 사임한 뒤 러시아의 톰 톰스크 감독을 역임했던, 지금은 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발레리 니폼니시(Valeri Nepomniachi)는, 축구장의 신사였다.
그건 그저 멋진 수트 차림으로 기자회견을 잘 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감독이라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절제하였으며 이로써 기품 있는 ‘권위’를 만들어냈던 축구장의 신사였다. 그와 함께 뛰었던 코치 조윤환, 최윤겸, 하재훈이 그를 지장 중의 지장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김기동, 윤정환, 이을용, 강철 등은 자신들의 축구 인생을 니폼니시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누어 말한다. 1994년 니폼니시를 만나면서 ‘개안’을 했다는 인터뷰가 부지기수다.
축구장의 신사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 그는 ‘사람은 공보다 빠르지 않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국 축구에 패스의 중요성을 심어주었다. <출처: (cc) Yelena Rybakova at en.wikipedia.org>
니폼니시는 축구를 존중하였고 또한 축구장을 존중하였다. 그는 구두를 신은 채로는 결코 잔디를 밟지 않았다. 언제나 드넓은 운동장 트랙을 돌아서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1997년 4월 26일 정규리그 개막전도 언제나 귀감으로 기억된다. 목동에서 열린 부천 대 울산의 경기. 경기 도중 부천의 윤정환이 드리블 돌파를 하다가 하프라인에서 부상을 입었고 이에 울산 선수들이 볼을 바깥으로 내찼다. 경기가 속개되자 윤정환은 공을 울산에게 넘겨주기 위해 길게 찼는데, 그만 골문 앞에 나와 있던 울산의 골키퍼 김병지를 넘어 골이 되고 말았다. 윤정환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연신 지었고 니폼니시는 한 골 넣어주라고 지시했다. 하프라인에서 울산의 공격이 진행되자 부천 선수들은 수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외국인 선수 두 명이 사인을 알아듣지 못하고 악착같이 수비를 하게 된다. 골키퍼 샤샤와 수비수 보리스는 무려 5분 가까이 성난 울산의 공격을 연거푸 막아낸다. 이때 니폼니시는 짙은 선글라스를 벗고 트랙으로 나와서 빨리 한 골을 넣어 주라고 지시한다. 통역도 옆에서 소리친다. 이어지는 세트피스. 정말 어렵게 한 골 헌납하게 된다.
한가지 토막 상식. 부천sk의 옛 팀 이름은 유공코끼리. 서울을 연고로 하여 목동종합운동장에서 뛰었다. 1996년에 부천으로 연고지 이전을 하면서 부천sk가 되었으나 부천종합운동장의 완공 전까지는 목동을 홈구장으로 썼다. 그래서 부천 연고지 팀이 서울 목동에서 꽤 뛰었는데, 그렇게 연고 이전이 힘들어서였을까. 2001년부터 부천종합운동장에서 뛰다가 5년도 못 되어 저 남쪽 서귀포로 내려갔다.
아무튼, 니폼니시가 한국 축구에 남긴 결정적인 교훈은 ‘사람은 공보다 빠르지 않다’는 특유의 철학이었다. 그는 패스를 중시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전의 한국 축구에서 패스는 더 이상 드리블을 할 수 없을 때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니폼니시에게 패스란 드리블의 변수가 아니라 축구의 공격을 구성하는 관건이었다. 몇몇 선수의 증언을 들어보자.
니폼니시는 1995년 시즌의 정식 감독 취임에 앞서 기술고문으로 1994년에 부임한다. 조윤환 감독 대행을 앞세운 상황에서 그는 1994년 시즌의 잔여 4경기를 2승 2무 무패로 마무리한 후, 1995년을 준비한다. 그가 보기에 당시 부천의 선수들은 개인 능력만큼은 모자람이 없었지만 ‘하나의 팀’으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특정 지역에서의 순간적인 의사소통과 합리적인 선택이 거의 불가능한, 일단 드리블을 하다가 막히면 횡으로 패스를 해버리는 그런 경우도 많았다. 당시 수비수로 활약했던 강철(현 포항스틸러스 코치)의 회고를 들어보자.
“혹독한 동계훈련을 예상하고 있던 우리로서는 깜짝 놀랐죠. 한 달 정도는 가벼운 에어로빅과 웨이트 트레이닝, 수영 등을 중점으로 훈련을 했는데, 궁금해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처음부터 무리하면 고장난다’라는 것이었죠. 시즌 개막에 포커스를 맞춰 차근차근 세밀하게 준비해나가는 니폼니시 감독님의 모습이 정말 존경스러웠어요(중략). 내가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움직이고, 동료들은 어떻게 움직이는 그런 것들이 모두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수준까지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인터풋불], 2013년 5월 13일자
1998년 부천 SK와 주택은행 사이에 벌어진 경기에서 윤정환(왼쪽)이 수비수와 공을 다투고 있다. 윤정환은 ‘니포 축구’의 미드필드를 책임지는 선수였다. <출처: 연합뉴스>
1995년에서 1998년까지 4년 동안 그는 짧고 빠르게 패스를 전개하며 적진의 빈 공간을 즉시 전략 공간으로 만들어버리는 '니포 축구'로 일대 바람을 일으켰다. 두텁게 수비에 치중하면서 조금은 단조로운 패스와 기동력으로 밀어붙이던 '3-5-2' 대신 미드필더의 숨가쁜 판단과 행동이 필요한 '4-3-3'으로 한국 축구에 패스의 개념을 각인시킨 것이다. 특히 미드필드의 중심 윤정환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실전에 활용하였다. 수비형 미드필더 2명을 그의 아래에 배치하자, 윤정환은 상대 팀이 아무리 천라지망(天羅地網)의 수비술을 들고 나와도 그 혈맥을 순식간에 끊어가며 성동격서로 혼을 빼고 팔방풍우로 얼을 뺐다. 그리하여 그의 발끝에서 신묘한 패스가 빈 공간으로 이어지면 부천의 공격수 조정현이나 이원식은 격산타우(隔山打牛)의 기개세로 자기 눈 앞의 그물을 뒤흔들었다. 다음은 윤정환(일본 사간 도스 감독)의 회고.
“그 당시 한국에 없던 축구를 했었다. 미드필드 지역에서 원터치 패스 같은 것이 재미있게 잘 됐다. 감독님께서 항상 ‘생각을 많이 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생각을 하며 축구를 했다(중략). 하다 보니 나중에는 안 보고도 원터치 패스를 하면 동료 선수가 있었다. 정말 축구를 편하고 쉽게 했다. 그 선수들이 있었으니 나도 그런 축구를 할 수 있었다.”
니폼니시는 말한다. “사람은 공보다 빠르지 않다.” 그러니 패스를 하라는 뜻이다. 그래야 공격 속도가 빨라지고 공격 루트도 다양해진다. 그는 또 말한다. “슛은 골문을 향한 마지막 패스다.” 침착하게, 정확하게 슛하라는 얘기다. 무작정 질러대면 공은 안드로메다로 간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니폼니시만 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히딩크도 자주 그렇게 말했고, 영화 '골(Goal)'을 보면 멕시코 출신으로 미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일하며 축구 스타의 꿈을 키우다가 마침내 잉글랜드 뉴캐슬에서 뛰게 된 산티아고 무네즈에게 에릭 돈헴 감독이 말한다. “사람은 공보다 빠르지 않다!”
이렇게 니폼니시의 패스 축구를 전수 받은 윤정환은 부천에서나 대표팀에서 흡사 경신술을 제대로 익힌 협객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날카로운 패스를 선보였다. 비록 히딩크의 대표팀에서는 크게 빛을 보지 못했지만, 이를테면 유럽 전지훈련 핀란드와의 평가전에서 후반에 안정환과 교체되어 들어가서 한순간에 지지부진하던 판을 흔들었던 장면을 기억해보자.
그 평가전의 22분, 상대의 공격 때문에 모두가 수비 진영으로 내려와 있었으나 핀란드의 공격이 어수선하다는 것을 직감한 황선홍이 몸을 돌려 하프라인을 넘어 질주한다. 이때 공을 확보한 윤정환은 마치 고속도로 공사현장의 측량사처럼 길고도 아득하지만, 그러나 한걸음의 오차도 없는 스루 패스를 선보인다. 비록 골은 터지지 않았으나 골키퍼와 1:1로 맞서는 상황이 불과 3초도 안 되는 순간에 발생한 것이다. 그 후로도 그러한 풍경이 여러 차례 벌어지면서 황선홍과 최용수가 그 이전보다 훨씬 공격에 몰두할 수 있었고, 마침내 황선홍은 후반 막판에 두 골을 몰아치며 2002 한일월드컵의 첫 상대 폴란드 전에서의 골을 예감케 했다.
포항스틸러스에서 패스 축구를 완성시키고 있는 황선홍 감독. <출처: 연합뉴스>
지금 황선홍은 외국인 선수 한 명 없이 포항스틸러스를 리그 1위로 이끌고 있다. ‘포항셀로나’, ‘스틸타카’ 같은 별명까지 붙었는데, 축구팬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이다. 조광래 감독이 대표팀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했던 패스 축구를 황선홍은 포항스틸러스의 후배들과 완성해가고 있는 중이다. 포항의 신진호는 “이렇게 패스하면 그에 따라 동료가 움직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반대로 동료가 패스하면 내가 이렇게 뛰어야 할 것 같은 감이 온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십수 년 전 윤정환이 니폼니시 밑에서 공을 찰 때 느꼈던 감정이다. 의미 없는 백패스와 횡패스 대신 빠른 템포의 짧은 패스가 시종을 일관한다.
티키타카(Tiki-Taka), 즉 탁구공이 쉼 없이 랠리를 거듭하며 왕복하는 것을 가리키는 이 스페인어가 오늘날의 패스 축구를 대변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사비는 동료가 왼발잡이냐 오른발잡이냐에 따라 패스 방향과 속도까지 달리한다고 한다.
과연 그들은 패스 축구의 완성자들이다. 바르셀로나는 2012-13시즌 전반기 19 경기 동안 무려 13,475개(경기 당 평균 약 700개)의 패스를 했다. 2위의 레알 마드리드(8,031개)보다 5천 개 이상 많은 수치다. 이는 볼 점유 시간과도 비례한다. 바르샤의 19경기 점유 시간은 690분이었고, 2위 레알 마드리드는 498분이었다. 우리 모두가 목격한 바와 같이 그들이 약체 팀이라서 자기 진영 밑으로 공을 빙빙 돌리다가 그렇게 점유 시간이 늘어난 것은 물론 아니다. 2011년 3월 10일 열린 유럽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아스널과의 홈 경기에서 바르샤는 완벽하게 축구장을 장악하였고, 그 바람에 아스널은 단 한 개의 슈팅도 시도하지 못했다. 단 한 개의 슈팅도, 단 한 개의 슈팅도. 반면 바르셀로나는 17개의 슈팅을 날렸으며 패스 또한 724번이나 했다. 아스널은 199번. 패스 성공률 역시 84% 대 59%. 단, 한가지 이 경기에서 아스널이 바르셀로나를 압도한 분야가 있다. 아스널은 무려 4명의 선수가 경고를 받는 등 모두 19개의 파울을 범했고 바르셀로나는 8개에 그쳤다.
2012년 10월에 열린 셀틱과의 챔피언스리그 경기도 기억해보자. 추가 시간 때 바르셀로나가 역전 결승골을 넣어 2-1로 이겼는데 이 경기에서도 메시, 사비, 이니에스타 등은 쉼 없이 패스를 했다. 무려 75%의 공 점유율, 996개 패스는 883개의 성공으로 89%의 성공률! 반면 셀틱은 337회 시도, 182회 성공으로 54%의 패스 성공률을 기록했다.
물론 ‘원 패스, 원 샷, 원 킬’도 있다. 패스를 잘 한다고 해서 축구 전체를 잘 하거나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여행지를 샅샅이 안다고 해서 연애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비범한 연애술사라고 해서 꼭 아름다운 결혼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듯이 말이다. 2013년, 세계 축구를 뒤흔들어버린 독일 바이에른 뮌헨이 보여준 궁신탄영(弓身彈影)의 속도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검기성강(劍氣成鋼)의 공격력은 반드시 500회 이상의 패스를 기반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는 해도 축구의 관건이 되는 패스, 그 성취의 결정판을 바르셀로나라는 금자탑으로 이뤘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메시, 사비, 이니에스타 그리고 펩 과르디올라 감독의 성취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미 바르샤 1차 전성기인 1990년대 초반에 당시 요한 크루이프 감독은 “패스 길이는 10m를 넘지 말아야 한다”고 천명한 적 있다. 물론 이는 공격을 전개해 가는 과정에서의 패스를 말한다. 상대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돌파하거나 그 이후의 빠른 슛 과정에서도 10m 이내를 지키라는 뜻이 아니다.
2007년 우즈베키스탄전에서 패스 공격을 하고 있는 한국 대표팀. 개인기에 의존하는 데에서 벗어나 패스가 일반화되면서 축구는 보다 아름답고 풍성해졌다.
그렇다면 왜 패스가 축구의 관건이 되었을까. 그 비밀은 이미 19세기 중엽에 밝혀졌다. 이 연재의 앞부분에서 밝혔다시피, 19세기 중엽, 축구는 중세적 민속놀이는 물론이고 그 무렵의 럭비와도 분화되기 시작한다. 그 첫째가 손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골키퍼 보호구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간에서 특정한 위치를 고수하는 원칙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선수들은 손에 비해 여러모로 역부족인 발만 이용해서 차고 달려야 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패스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결정판은 1872년 11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벌어졌다. 최초의 국가 대항전이 글래스고에서 열렸던 것이다. 퀸스파크 글래스고 선수들이 주축이 된 스코틀랜드 대표팀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2-2-6’ 시스템으로 잉글랜드를 몰아쳤다.
그 경기에서 잉글랜드 선수들은 오로지 드리블로 일관했다. 그때는 다 그렇게 하는 줄만 알았다. 럭비처럼 우선 차고 달리다가 뭔가에 가로막히면 옆으로 패스했다. 그것은 참다운 의미의 패스는 아니었다. 그렇게 공을 넘겨 받은 선수 역시 난공불락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뻔한 이치다.
반면 스코틀랜드 선수들은 패스로 공격했다. 차범근 해설위원의 익숙한 말투대로 한다면 스코틀랜드 ‘공격자들은 공격 작업을 하는데 있어 우선 좌우측면으로 패스를 전개’했다. 스코틀랜드는 습기가 많고 축구장 사정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드리블이 용이하지 않았고 롱 패스를 하면 제 뜻대로 날아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짧은 패스로 공간을 열어가는 경기를 처음 시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축구의 오묘한 세계를 여는 아름다운 열쇠가 된 것이다. 이 경기에서 스코틀랜드는 7:2로 대승했다.
188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 잉글랜드 축구도 패스가 일반화되었다. 글래스고 쇼크에 더불어 노동자 계층이 대거 축구를 수용하면서 발생한 일이라고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은 말한다. 미국의 하이틴 영화에 자주 나오듯이 ‘개인기’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중산층 리더십의 한 표현이다. 반면 노동자 계급은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우젠바인은 “역사적으로 보면, 개인주의적 경기가 ‘젠틀맨다운(gentlemanlike)’ 것으로 뿌리내렸다면 완벽한 콤비플레이에 입각한 쇼트패스 플레이는 ‘노동자다운(workerslike)’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팀워크는 공장의 분업 원칙에서 생겨났고, 또한 어느 정도는 특출난 개인과 반대되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표현”한다고 분석한다.
패스해준 이니에스타를 가리키고 있는 메시. 패스에 의해 공간이 창조되고 패스에 의해 슛이 가능하며, 패스에 의해 골이 만들어지는 축구 경기에서 나의 슛은 누구 때문에 가능했던가.
보통의 구기 종목은 엄격하게 개별 선수의 위치를 특정한다. 투수는 마운드 위에서 던진다. 주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상의 라인을 따라서 달려야 한다. 설령 태그가 되지 않았어도 그 범위를 넘어서 달리면 아웃이다. 배구는 규칙적으로 회전한다. 후위의 선수들이 네트 앞으로 전진하여 스파이크를 하면 반칙이다. 축구의 이란성 쌍생아인 미식축구도 엄정하다. 선수마다 정해진 위치와 역할이 있어서 일단 플레이가 중단되면 그 위치와 역할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인플레이가 된다.
그러나 축구는(골키퍼를 제외하고) 이 모든 규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리하여 축구장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직사각형이 아니라 바람이 80% 정도 들어가 있는 풍선과도 같다. 한 쪽을 누르면 반대쪽으로 삐져나오는 게 풍선이다. 축구장이 꼭 그와 같다.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화학적인 공간이다. 당장은 비어있는 공간이지만 한순간에 건곤일척의 싸움터로 변한다. 골키퍼가 멀리 차낼 때를 보자. 상대편 골키퍼를 제외한 20명의 선수들이 하프라인 부근에 대거 몰려 있다가 순식간에 저마다의 의미 있는 공간을 찾아서 흩어진다.
옛 서독의 국가대표 출신으로 쾰른, 샤흐타르, 헤타페, 레알 마드리드, 베식타쉬 등 유럽 각지의 명문 클럽을 거쳐 지금은 말라가의 감독으로 있는 베른트 슈스터는 말한다. “내게 공이 왔을 때, 적어도 두 군데 이상의 패스 활로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의미 있는 공격이 전개된다. 이탈리아의 명장 지오바니 트라파토니(2002 월드컵 때 우리 팀에게 졌던) 감독은 “작은 상황들이 위대한 경기를 결정짓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감독들이 말한다. “사람은 공보다 빠르지 않다!”
이렇게 흩어진 쌍방간의 관계에서 패스가 놀라운 기능을 한다. 패스는 물리적 공간을 찢어버린다. 패스는 점점이 박혀 있던 개별 선수들에게 혼을 불어넣는다. 패스는 잔디의 홈을 파고 균열을 내며 확장시킨다. 패스는 축구장의 ‘숨어 있던 1인치’를 찾아낸다. 동료에게 패스하고 뒤로 돌아가면 상대방은 이쪽 팀의 잠행술에 기겁을 한다. 서너 차례의 패스로 혈도를 짚어가며 움직이면 상대 수비수들은 미혼산에 취한 듯 제 풀에 나가떨어진다. 패스에 의하여 공간이 창조되고 패스에 의하여 슛이 가능하고 패스에 의하여 골이 터진다.
축구장에서나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다. 패스가 축구를 살리고 사회를 살린다.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 제 4장의 ‘가난한 자’를 원용하여 말하건대, 가난한 자들의 패스(연대)가 세상을 구한다. 물론 특출난 리더의 단독 드리블 돌파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카메라를 독점하며 모든 과실을 먹어치운다.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그러나 패스에 의한 골이나 성취 또한 아름답다. 보라. 저기 동료가 달려온다. 나의 슛은 누구 때문에 가능하였던가. 내가 과연 공보다 빨리 달렸던 것인가. 나의 골은 누구의 도움으로 이뤄진 것인가. 과연 나 혼자 적들의 천라지망을 파괴했단 말인가. 아니다. 패스 때문이다. 그러니 이 슛의 성공에 49%의 정신적 지분을 가진 저 동료에게 달려가 얼싸안으며 골 세리머니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바르셀로나만큼이나 우리의 축구장과 우리의 사회에 더 많은 패스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