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산최씨는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본관(本貫)이지만 신라 시대 본관은 실효성이 없어서 흐지부지되고, 경주김씨, 경주최씨 등 귀족들만 외국에서 수입한 장식품처럼 사용해 오다가 고려에 이르러 다시 분정(分定)되었다. 완산최씨도 만약 귀족 반열에 들지 못했다면 역시 흐지부지되고 전해오지 못했을 것이다.
『삼국사기』<헌덕왕 14년(822)>에는
“3월에 웅천주(공주) 도독 김헌창[1]이 아버지 김주원[2]이 임금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면서,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 청주(진주), 사벌주(상주) 네 주 도독과 국원경(충주), 서원경(청주), 금관경(김해) 사신 그리고 여러 군현 수령들을 협박하여 부하로 삼았다. 청주 도독 향영은 추화군(밀양)으로 도망가고, 한산주(서울), 우두주(춘천), 삽량주(양산), 패강진(평산), 북원경(원주) 등 여러 성은 김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18일에 완산주 장사[3] 최웅이 아찬 정련의 아들 영충 등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도망쳐 와서 반란이 일어난 사실을 알렸다. 임금은 즉시 최웅에게 급벌찬 직위와 함께 속함군(함양) 태수 벼슬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벌찬 직위를 주었다.” {영인}
김헌창이 세운 장안국(長安國)이 한강 이남, 낙동강 상류 서쪽, 남강(낙동강 지류) 유역을 장악하여 나라가 둘로 나누어졌으니 삼국통일 이래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옛날 백제 영토에다 한강 이남과 낙동강 상류 서쪽 그리고 남강 유역 신라 영토가 모두 장안국 영토로 되어버린 것이다.
김헌창이 짧은 기간에 넓은 지역을 차지한 배경에는 왕위 계승서열 1위에서 밀려난 김주원의 아들이라는 점이 작용한 것 같다. <헌덕왕 7년(815)>에는 “가을 8월 초하루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서쪽 변방 주군에 큰 기근이 들어 도적들이 봉기하자 군사를 파견해 토벌했다. 큰 별이 익성과 진성 사이에 나타나서 서쪽으로 움직였다.”[4] <헌덕왕 10년(818)>에는 “3월에 떼도둑이 여기저기서 봉기했다. 임금이 모든 주군 도독과 태수에게 명하여 붙잡아 오라 했다.”[5] 특히 충청 전라도 지역은 기근으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데에다가 일식 등 천문현상이 나타나고, 도둑이 창궐하니 신라 조정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마침 정통성을 갖춘 김헌창이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니 호응한 것 아니겠는가?
신라가 백척간두(百尺竿頭) 위기에 처했는데, 완산주 장사 최웅(崔雄)이 탈출하여 서라벌로 달려와 사태를 보고하니 조정에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가장 시급한 일은 남쪽 금관경(김해) 방면과 북쪽 사벌주(상주) 방면의 반란군을 제압하는 일이므로 당연히 정예병력을 두 곳으로 우선 보냈을 것이다. 고대 백제와 전쟁은 대개 상주에서 보은을 거쳐 청주로 이어지는 축선(軸線)과 합천에서 함양을 거쳐 남원으로 이어지는 축선에서 벌어졌다.
금관경과 사벌주 방면으로 정예부대를 보내고 나면 합천 방면이 비게 된다. 그곳은 덕유산과 지리산에 가리어 아직 장안군이 공략하지 못하고 있지만, 남원과 합천이 무너지면 신라는 다시 남북으로 갈라지고 사벌주와 금관경 방면군(方面軍) 배후(背後)가 차단될 수 있으며, 서라벌이 직접 공격을 받을 수도 있어서, 급소(急所)라고 할만한 곳이다. 신라 조정은 최웅을 6두품 급벌찬으로 승진시켜 속함군 태수로 발령하여 그곳을 지키게 했다.
속함군은 신라로서는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급소다. 그곳을 지킬 수령은 첫째 김헌창에게 넘어가지 않을 충성심이 있어야 하고, 둘째 그곳을 지켜 낼만 한 역량(力量)이 있어야 한다. 최웅은 완산주 탈출을 통해 신라에 대한 충성심이 증명되어 있고, 역량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증명할 수는 없으나, 완산주 관리이므로 가까운 속함군에 관해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완산주에서 속함군으로 통하는 주변 지리도 서라벌 사람들보다는 훨씬 자세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완산주를 탈출해 서라벌로 달려올 때도 그 길로 왔을 가능성이 있다.
신라 태수는 4~5두품도 오를 수 있는 벼슬이고, 완산주 장사 역시 4~5두품 벼슬이다. 즉, 최웅을 승진시키지 않아도 속함군 태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관례를 깨고 6두품 급벌찬으로 승진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김헌창의 반란 사실을 고변(告變)한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속함군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인데 그곳에도 4~5두품 관료들이 있을 것이다. 갑자기 최웅을 부임시켰을 때 수령과 부하가 두품이 비슷하면 지휘명령이 먹히지 않을 수 있으므로 6두품 귀족으로 만들어서 현지 관료들을 제압할 수 있도록 지휘권을 강화한 것일 수 있다.
최웅은 신라인 중 가장 먼저『삼국사기』에 이름을 올린 최씨다. 경주최씨에서 가장 이른 최이정(崔利貞)은 헌덕왕 17년(825) 수록되었다. 최웅이 6두품 급벌찬이 되므로 인해 완산최씨가 귀족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는데, 후계자가 귀족인 급벌찬 지위를 세습(世襲)함으로 인해 완산최씨라는 본관이 흐지부지되지 않고 전해올 수 있었으니 최웅이야말로 완산최씨 원조(元祖)인 것이다.
* 각주 ------------------
[1] 金憲昌. 무열왕 7세손 진골. 807년 시중(장관), 813년 무진주 도독, 814년 시중, 816년 청주 도독, 821년 웅천주 도독 등 외직을 전전하며 인사상 홀대를 받았다.
[2] 金周元. 무열왕 3남 문왕(文王)의 5세손. 785년 선덕왕이 죽자 왕위 계승서열 1순위였으나 원성왕에게 밀려 왕이 되지 못했다.
[3] 長史. 주 소속 관리. 도독(都督)과 주조(州助)를 보좌했다. 사마(司馬)라고도 불렀다. 4~5두품으로 사지(舍知, 13등급)~대나마(大奈麻, 10등급)가 임명되었다.
[4] 秋八月己亥朔日有食之西邊州郡大飢盜賊蜂起出軍討平之大星出翼軫間指庚.
[5] 三月草賊遍起命諸州郡都督太守捕捉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