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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성부의 성자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
1.
마음이 바쁘게 움직일 때에 수도자인 원장님을 만났다. 난 인사는 않는다. 그가 나에게 이야기를 하여 알아들을 수 없는 괴물의 언어로 들렸다.
“사진촬영하지 마세요.”
나는 이제까지 나의 마음에 1%의 접근성이 없으면 그는 수도자도 성직자도 그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 이하로 보였다.
전혀 당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답에 원장님은 책임자로써 밖으로 나가라는 말씀을 들었다. 이해가 되지 않고 시설장이 단식을 한다면 쌍 손을 들 것입니다. 철이 없는 말에 그럼 불편한 분이 나가라고 하였다. 수사들은 군 의무를 대신한 종신의 수련을 한다는 말도 들었다.
내가 오는 날을 정하라고 하였다. 그 다음 요구조건으로 카메라를 가지고 디카, 디카로 넘어오면서 없어져버렸다.
“아직도 필름카메라로 시설장님이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만나자 마자 생 싸움이 진행될 것 같았다. 싸움은 명 긴 놈이 이긴다는 결말을 내면서 배식을 하였다. 경력자라도 짧은 배식이 아니라서 관절이 쑤시고 써빙 홀의 의자를 챙겨왔다.
“아이쿠, 다리야!”
홀이나 배식이 아닌 뒷 마당일을 하려고 하였지만 경로우대로 그 일마저 밀려 김치를 짤게 배식을 하였다. 이 때 총기가 빠른 비비안나가 있다면 아마도 덕수궁 나들이를 환상을 하기도 하였다. 너무 피곤하고 고단한 하루가 양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고 더러운 똥 밟지 말라고 충고의 말씀도 들었다.
“인천에서 심심해서 오는 것으로 아는 모양이지요, 이 곳에 저 보다 장애가 더 많은 분이 봉사하는 것은 알아요.”
어느 골짜기 골목을 따라 오다가 예수님 오른쪽 십자가 묶인 운 좋은 사람인지 모른다는 소리가 돌고 있었다.
“하느님, 이 분의 임무는 무엇인지요. 신자가 오면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길 잃은 양을 돌 볼 주민이 없는 그런 모양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이 명화 형님과 같이 다르게 계획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바보가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것인가요. 배고픈 천사들에게 밥을 적게 주거나 반찬을 나쁜 것을 주어 독립심을 키우는 방법도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천사도 아프고 자원봉사자 선생님도 아픈 것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지요,
“곤란도 시설장, 당장 이 곳을 떠나세요. 로마의 사규에서 정한 것으로프란치스꼬 교황님이 성직으로 배를 채우는 당장 떠나도 된다고 하였어요.”
해난사고로부터 보다 구체적으로 아닙니다. 가르다란 구명조우, 조명주분까지 유명무살하게 만든 분이 임춘원으로 기업의 대표이사이면서 수백에서 수천만원을 챙겨 드셨을 것이 위가 말합니다.
소방과장, 오늘은 시찰을 경인에너지가 있는 신현소방경찰소로 오신다는 소방계로 연락을 받았다. 이곳을 아무리 찾아도 없는데 석남동 가구공단 화재출동으로 1출동인 긴급차량이 없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손님이 오면 손님을 접대하거나 재떨이에 채워진 담뱃재를 입술이나 표정을 잘 간수하수하먼서 치우면 되었다.
급한다. 소나기는 시간을 두고 흐르지 않았다. 소방과장님이 화재진압순찰이 시작되었지만 임무를 맏은지 1분도 안되고 소방호스의 대응능력도 모르는 척 고참(구 역시 약간 신참)의 지시에 연기가 나오는 창문을 부수고 안으로 일차 안심하여 진압하여 안전밸브를 잠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웃으로 수다를 들면서 소방서가 오는 것도 몰랐다고 미안해하는 순간에도 이미 늦었다. 소방관의 습관은 아무리 좋은 길이 보여도 꼭 왔던 길이 안전하였다.
흩어진 유리 조각들, 인대 관통은 소방서에서 직권 사직의 지금의 현장으로 말 없는 길 이었다. 그 후에 간부후보생은 출신으로 어떤 직접적인 병원에서 아픈 부위에 대하여 직접 요구하는 삼성 서울병원과 여의도 성모병원의 경정전문 미팅이 있을 모양이었다. 같은 사 아니 호적으로 한 살 아래인 나는 정 반대였다. 인대가 끊어진 상태에서 하위의 병원으로 옮기라는 그대로 수술을 요구받고 이웃의 단과1병원으로 가고 말았다.
“찍어 빨리 와”
어떤 명령도 없는 고요의 시간이 흘렀다. 고위직은 상처를 받으면 훈장으로 올라가고 하위직은 시궁창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시궁창도 이렇게 더러운 것은 처음이었다. 공무원만큼 섞은 조직이 있겠느냐는 물음을 가지면서 왜 그 조직에 가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 공부 잘해봤자
(전,월세 잘 얻어 봤자
예쁜 년 못 당하고
(부동산 매도, 매수 못 이기고)
예뻐 봤자 팔자 좋은 년 못 이기더라!
못하더이(안목 좋은 공인중개사의 안전한 작업만 못하더이다)
공무원의 할 일은 없었다. 사면초가의 바람만 안 불면 편안하기에 고개를 저어가며 자전거의 바람개비는 돌아갔다.
바람도 불면 꽃이 피고 물길이 보이면 작은 돌도 치웠다. 흙과 이끼 그리고 작은 꽃이 핀 그곳에서 차가움을 보증하는 길가의 리어차를 만났다.
“항상 오빵지요!”
가장 어려울 조건에 나타나 슬며시 손을 내민 나의 외삼촌입니다. 신의 손으로 점포 안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토끼 풍선, 하늘 풍선, 비누방물처럼 올라오는(거품) 곳을 지나고 있었다.
형과 나는 피가 다르다. 어른들 간의 거래로 1년이 지나면 논이 늘어나고 밭이 오빠의 힘으로 생겨났다. 착실하게 노동을 하거나 공직에 있지 않으면서 작은 부인을 다시 두었다. 투박하게 생긴 몸으로 보아 일꾼으로 잠시 있다가 가는 그런 여자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다.
그렇다고 아주 미운 얼굴은 아니었다. 잠시 머물면서 일도 해주고 몸에 이상이 생기면 그것까지 책임을 묻지 않고, 그것까지 묻는다면 일자리는 거의 없거나 걸인의 신세로 변하였다.
“내일 아침까지 부엌에서 보내고 나 좀 봅시다.”
일손보다 더 급한 사람이 주인이었다. 조선의 값비싼 골동품 또는 당장 옮길 수 없는 물(건)품이 제물포 또는 군산으로 쌀로 위장하여 빠져나가고 있음을 관리들은 알고 있었다.
우리도 이제 가야 한다. 맨드롱 로똣은 기분을 조절할 수 없다는 따뜻하다는 뜻입니다. 시작과 눈물은 마음의 피로 생긴다.
나에게 반 말을 하였다. 이창연님이라고 부르는데 존칭이 아니다. 듣는 사람의 느낌이 놈으로 들렸다면 그것이 놈이 되었다.
실비를 지급하지 않는 곳에 고양이의 방울을 달아야 하비다.
“하느님의 종이 울리지 않는 곳입니다?”
직원이나 노예에게 심부름을 시켜도 차비를 주고, 기계를 작동시켜 고장이 나면 자원봉사자 선생님들이 자비를 틀어 수리를 하는 등 시설이 매우 영악하였다.
그냥 물러나면서 현실이 비용을 사용하지 않고 호흡할 수 없을까를 생각하였다. 마음의 상처가 생기면 쉬는 날인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새벽까지 방향을 바꾸는 치료를 하였다.
“기적”
이것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야로군 가야면을 산일을 보면서 내가 다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일본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 면장으로써 남의 것을 탐하지 말고 가진 것을 빨리 나누어 주고 떠나야 함이 느껴졌다. 이론의 실천이 어렵다.
내가 되는 일은 남도 나도 되기에 다 되었다. 내가 안 해도 될 것이 아침이 되어 꼭 펑크를 내시지 말라는 당부를 만났다. 미안하다는 전화와 함께 다른 일에 내 몸을 맡기면서 삼식이를 현장에서 해결하였다.
창동 역에 도착을 하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희영이가 너무 빨리 세상을 알게 한 것도 미안합니다. 먹는 것 외에는 엄마와 아빠의 믿음을 주지 못한 것도 미안합니다. 나는 가족을 사랑합니다. 나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삶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하였다. 싸움은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당하지 않겠다는 눈빛이 필요하였다. 결혼 생활은 이해하고 참는 것이 연습이었다.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살아가야 한다. 꼭 버림을 받은 상태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앞날이 부숴진 안경처럼 서 있을 때 누군가 콘서트에 입장을 같이 하자고 제의를 받았다. 그냥 쉬는 것이 좋은 날에 장애인의 진화가 해고가 당한 충격의 날이었다. 진화의 지능지수는 영리한 애교를 떠는 정도이었다.
그의 평상시 지능지수는 강아지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누가 그의 아픔에 돌을 던졌는지 모른다. 일을 못한다. 안 한다. 여러 거지 말이 돌고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 의지하고 싶은 있은 단어로 아빠라고 나를 불렀다. 나 역시 도와주고 싶지만 한계에 서면 먼 여행을 바다의 사나이가 되고 싶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불을 보지 않으려고 세상을 배우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실패만 있고 성공은 세상에서 나는 만족을 하는 원칙이 있었다. 최고가 아니고 최상으로 달렸다. 달리다가 넘어져도 나의 내가 마시는 자세가 필요함을 알게 하였다. 징기즈칸도 힘이 센 남자보다 강한 남자로 변하기를 원하였다. 나의 경우에도 그림자 외에 친구가 없었다.
이제 나의 친척도 친구는 없었다. 가족이란 혼자 있을 때 생각나는 분이 외할머니였다. 지금은 나의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이란 얼룩이 보이면서 눈망울이 얼굴에 모여들어 폭포수로 변하였다
“미안합니다. 아버지”
내가 너무 좋아 흥분하면 실패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전학과 함께 심한 따돌림으로 일명 혼자 세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단 하루를 살아도 사랑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꽃이 피고 향이 나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집의 방문의 느낌은 방금 짠 참기름 냄새였다. 이 때의 느낌은 단 하루를 살아도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이때 식초가 부패의 효소가 아니라 맛의 사랑으로 느끼어왔다.
바닷물은 2.5이고 0.8은 우리나라 염도의 기준이었다. 전혀 관계가 없는 사진을 전공한 사람으로 지금은 음식보다 핫셀브러드 카메라가 갖고 싶다. 필름 카메라로 단독주택 한 가구의 값으로 가질 수 없는 것보다 꿈의 사랑이었다.
2.
모든 것을 뒤로 미루자.
직원은 자원봉사자 선생님의 지휘, 감독이 아니고 전달매체인 협력자를 것을 최선을 다하게 하였다. 지금도 유사기능과 나의 갈등이었다. 안 되는 곳의 조약돌을 던졌다.
“자원봉사 조건이 20세부터 40세라니, 까이꺼 안되면 말고”
그 뒤로 기억에서 지웠다. 조건도 막지 않고 스키장 봉사는 신청조건이 까다롭지 않았지만 위험도가 높은지 그냥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동에 대하여 봉사를 하는 것으로 문제가 나에게 있었다. 만약 스키를 타다가 뼈가 부서지는 꿈을 자주 꾸기에 참가 2일 전에 핑계를 대면서 웃었다. 제기동 프란츠스코 빈민식당에 급식봉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었다. 내가 제일 막내로 일도 하면서 봉사를 하는 것으로 당연시 하였다. 이곳에서 썰매 캠프에 대한 참가여부를 묻는 전화를 받았다.
“그냥 장난으로 한 것이 아니고 썰매 캠프에 참가를 할 것이지요.”
군대에서도 그렇고 하얀 눈물과 인연이 많았다. 이번에 자원봉사도 그렇다는 예감이 들었다. 참석에 동의를 하고 예정된 순서로 오리엔테이션이 있다는 말에 놀랐다. 지적장애와 자폐증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며 자격증을 않은 상태로 사회복지에 대하여 그냥 공부를 한 사람이었다. 한때는 심한 토탈돌팔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소방서에서 약 구급요원의 업무를 하였으니, 응급사고에 대하여 적응문제가 없기에 스키 캠프에 초청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이었다.
“언제 어느 장소이든 사고가 발생하면 죽지 않도록 응급처치를 하면서, 편안하게 병원에 후송만 하면 되는 것이 평생 나에게 주어진 임무이지요.”
사고로 인하여 발생한 사람을 많이 구하여 주었지만, 구해주지 않은 영혼에 대하여 후회도 많이 하였다.
구급차로 환자를 모시고 갔을 때에 이상한 말이었다. 의사가 한 밤중에 난 교통사고에 대하여 절단되어 잃어버린 다리를 할 때에 직업에 대하여 심한 모욕감을 느끼었다. 구급요원으로 현장에 도착당시 왼쪽 발이 없는 것도 확인하였으며, 이것을 찾는다는 것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기에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긴급으로 후송을 하였다. 현장을 재확인 후 다른 자동차의 바퀴에 의해 흔적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돌아왔다는 추억이 왔다.
이런 생각을 접으면서 승강기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분에게 장소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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