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를 생각하다>
지금 경험하는 걸 어떻게 진실인 줄 아는가? 이런 물음은 자기의 현실을 반성해보는 태도에서 나온다. 여기서 ‘경험’과 ‘진실’이란 개념을 확인해봐야 한다. 경험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진짜니, 가짜니 하는 사실 판단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경험하는 것과 상상하는 것의 차이는 없다. 상상도 경험이기 때문이다. 경험하는 방식에는 몸으로 경험하는 것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오근(안이비설신)으로 감각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은 의근으로 경험하는 개념화, 사변화하는 사유 활동이다. 오근이 오경을 경험하는 내용은 전오식으로 現量(직접적 인식)이라 한다. 의근이 경험을 분별하여 개념화하는 내용을 의식이라 하고 比量(추리적 인식)이라 한다. 현량은 순수체험(그런 의미에서 진상이라 하고)이라 하고 비량은 추리적 인식(그런 의미에서 실제가 아닌 실재의 모사 즉 가상)이라 한다. 그러면 산을 보고 산이라 하고, 물을 보고 물이라 하는 것이 진짜라는 말인가? 말로 표현된 물은 젖지도 않고 흐르지도 않는다. 그래서 말로 하는 물은 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언어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여기에 비추어보면 말로 된 모든 진술이나 표현은 오류를 내포한다. 그렇지만 언어생활 영역 안에서는 잠정적 한시적으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보르헤스는 언어로 구축된 도서관의 토대가 허구라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전승되는 모든 책의 권위를 흔들면서 책과 책을 서로 뒤섞어 전혀 새롭고 다양한 양식의 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서가 뒤쪽에 숨은 책을 앞으로 꺼내고, 서가의 앞을 장식하는 책을 뒤로 물리면서 주류와 비주류 책을 전도시켜 세계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시했다. 드러난 진실과 숨은 거짓, 드러난 거짓과 숨은 진실이 잡종화되면서 半-거짓, 半-진실의 현실을 폭로했다. 빛과 어둠이 섞이고 앎과 모름이 교차하는 명암교잡의 환영적 현실이다. 보르헤스는 개념의 윤곽이 흐려지면서 착종과 혼효된 경계에 착안하여 창작한 것이다. 이는 보르헤스의 문학이면서 데리다的인 포스트모더니트 세계이다.
그러나 보르헤스(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 1899~1986, 아르헨티나 문학가)는 불교를 독학했지만, 불이중도에는 이르지 못했고 결국 눈이 멀었다. 어둠이 빛을 삼키고 모름이 앎을 덮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붓다의 明暗雙雙명암쌍쌍의 지혜는 어떠한가?
我有一券經, 아유일권경
不因紙墨成; 불인지묵성
展開無一字, 전개무일자
常放大光明. 상방대광명
내게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종이와 먹으로 된 것이 아니니
책을 펼쳐 보면 글자 하나 없건만
항상 큰 빛을 발하고 있느니
春夏秋冬無字冊, 춘하추동무자책
白雲靑山自然經; 백운청산자연경
文史哲賢好緘口, 문사철현호함구
雨後落花漫晉城. 우후낙화만진성
춘하추동은 글자 없는 책이요
흰 구름 푸른 산은 자연의 경전
문학, 역사, 철학자여, 입을 다물라
비 온 뒤 낙화는 진주성에 질펀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