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1-29
아합 vs. 하나님 / 이수관 목사
몇년 전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가 이륙한지 두어시간만에 기류변화를 만나서 아주 심하게 흔들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서있던 사람은 붕 떠서 지붕에 부딪친후에 떨어졌고 식기는 여기 저기로 튀어 날아가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몇사람의 부상자가 생겼고 결국 그 비행기는 기수를 다시 돌려서 출발지였던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한명이 TV에서 그 때를 표현하는데 처음에 와장창하면서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 비행기안은 삽시간에 엉망이 되어 버리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울고, 비명을 지르고 그러는 가운데 이 사람은 퍼뜩 “아! 우리가 여기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이런 표현을 쓰더군요.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건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저는 오늘 이 성경구절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는데 그 사람의 말이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지점을 지난 사람 바로 이 아합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합은 한 마디로 얘기하면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가 다스리던 시절 이스라엘의 국력은 어느 정도 강했고 그 당시에 세력이 조금씩 커지고 있던 앗시리아를 견제하면서 국제 정세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정치를 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견된 앗시리아의 살만에셀왕의 컬크 석비에도 나오고, 모압 비문에도 그 이름이 나옵니다. 썩 좋은 일로 쓰여진 것만은 아니지만 어째튼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것이지요.
그런 유능한 사람이 영적으로는 어떻게 그렇게 둔감한지 하나님이 싫어 할만한 짓만 골라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그를 기다려 주시고, 또 예언자들을 보내서 끝도없이 음성을 들려 주시는데 그는 듣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멸망의 길로 갑니다. 그리고는 어느날 그는 결국 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나고 마는데 우리가 오늘 살펴볼 이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바로 그 마지막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아합의 삶의 태도에 대하여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렇게 하나님께 반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의 인생에 어떻게 심판은 닥치는지 하는 것을 살펴보면서 우리들의 삶 속에는 그런 점이 없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아합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다시한번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1. 철저하게 하나님을 외면한 아합의 인생
1) 너무나 세상적인 삶의 태도
첫번째 아합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그 철저하리만큼 세상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의 인생 전반을 걸쳐 죽 보면 아합은 일생동안 얼마나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나 하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먼저 두로와 시돈으로 유명한 페니키아의 왕이며 동시에 아스다롯신의 제사장이었던 사람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을 합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금하셨던 이방인과의 결혼이었고 특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마술하는 자의 딸과의 결혼이었습니다.
이 결혼을 통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얼마나 우상숭배에 빠지는지는 굳이 성경을 읽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유가 나오지 않지만 아마 이것은 몇가지 이득을 노린 정략 결혼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지중해의 무역 상권이 시돈과 두로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그 이득의 참여를 노린 측면도 있을 것이고, 또 이스라엘은 좌측이 바다이고 우측이 사막이어서 적은 항상 북쪽에서 오는 법이니 북쪽의 강국과 결혼을 함으로써 방파제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겠지요.
그는 또 이 이야기 바로 전 20장에 나오는 벤하닷과 전쟁을 하는 장면에서도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시리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직접 싸우시고 그리고 난 후 벤하닷을 죽이라고 하시거든요.
그런데 그는 그를 살려보내면서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이것도 보면 그가 인정이 많아서 살려주었다기 보다는 무역 협정을 통한 이득을 얻을려는 심산이 있었던 것 같고 또 앞으로 다가오는 앗시리아의 남진에 대한 연합이 목적이었던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합은 정말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 지혜와 술수를 앞세워 내 머리로 살려고 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 반대로 좋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왕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무역에 신경을 쓰고,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건가?”
그렇지요.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것 자체에는 잘못이 없지요.
하지만 이 사람의 잘못은 그런 일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17:18절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은 자기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기를 힘써야 하는 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방법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그의 철저한 세상적인 삶의 태도가 그를 멸망의 길로 내 몰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 세상적인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나라로 불러주시면서 이제는 네 방법과 네 생각대로 살지 말고 나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살아라 하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럼에 불구하고 우리는 많은 경우 여전히 내 방식으로 삽니다.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도 여전히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업을 하고, 그것이 나에게 이득이 된다 싶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에 대해서는 고민도 한번 안해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뭐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는것이 참 힘이 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을 해도 무슨 문제만 생기면 어느새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내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는 나를 발견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왜 이렇게 하나님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힘이 드는가?
그것은 우리의 습관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너무 내 방식대로 사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꼭 무슨 Program이 되어 있는 사람처럼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자동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취하는가 하는 것이 결정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기면 0.1초내에 내 머리가 막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고, 저런 상황에서는 저렇게 하고 그리곤 자동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런 내 방식이 의로울 때가 얼마나 되냐 말이예요.
전부 내 잔머리 내술수 아니냔 말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일단 내 안에 Program 되어 있는 내 생각, 내 방법이 위험하다는 것, 일단은 하나님과 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새로 시작하시는 분 들일수록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단은 멈추어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내 방법이 나를 점령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럴려면 조바심을 내지 말아야 해요.
왜냐하면 어떤 일이 탁 벌어지면 나한테 가장 먼저 오는 것은 조바심입니다. 이거 빨리 처리해야해. 이거 이렇게 대처해야해. 그리고 이런 조바심이 나를 옛날 생각과 옛날 방식대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빌립보서 4:6에서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면서 일단 조바심을 조심하라고 하지요. 그리고나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을 묻는다는 것 아닙니까.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도 이긴다고 했습니다. 먼저 나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Program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 있을 때 우선 멈추어 서서 이것이 누구의 생각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방법은 아닌가 꼭 여쭈어 보시고 행동하셔서 세상적인 눈으로 살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탐욕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함
두번째 그를 진노의 자리로 모는 것은 탐욕입니다. 아합의 궁전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있는데 아마도 이스르엘 지방에 그의 두번째 궁전, 즉 여름용 별장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그 별장옆에 정원을 만들려고 포도원을 팔으라고 하는데 나봇이 율법을 이유로 팔지를 않으니까 아합이 속이 상했다 는 그런 얘기입니다. 이것은 레위기 25장에 있는 규정인데, 하나님께서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땅은 사고 팔지 못하고 혹시 피치못할 사정에 의해서 팔았다 하더라도 7년이 지나면 다시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간다는 규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규정의 배경에 있는 생각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까 이 땅에서 과도한 욕심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재산을 불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갖 촌부인 나봇이 이 율법의 규정을 얘기하면서 왕의 얘기를 거절하니까 아합이 속이 상한 겁니다.
그런데, 한편 이 아합의 별장이 있었던 궁터는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견이 되어서 지금은 일반인들에게 공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갔다 온 사람에 따르면 그 주위 경관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답니다. 동쪽으로는 20마일 떨어진 곳에 요단강이 보이고, 동북쪽으로는 갈릴리 호수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30마일정도 떨어진 곳에 지중해가 보이는 기가 막힌 전망을 가지고 있는 곳인데 여기에 별장이 있었던 거에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별장이지요.
그런데 그는 이런 아름다운 별장에 또 더해서 정원에 욕심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가난한 농부의 포도원을 탐을 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탐내어도 갖지 못하니까 살인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야고보서 4:2-3절의 말씀과 이렇게 똑같은지. 그래서 문제는 탐욕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시점에서 탐욕에 대해서 좀 생각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아무도 탐욕에 자유스러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분은 나는 돈에 욕심이 없다고 하실 분이 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분은 대신 뭔가 다른 것에 욕심을 가지고 있을 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명예를 얻는 것에 욕심이 있고, 어떤 분은 뭔가를 수집하는데 욕심이 있고, 어떤 분은 집을 꾸미는데 욕심이 있고,
또 어떤 분은 더 좋은 차를 가지는데 욕심이 있고. 뭔가 분명히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욕심의 마음은 만족시키면 시킬수록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자랍니다.
아합도 그랬겠지요. 그는 먼저 사마리아에 있는 자기의 궁전을 예쁘게 꾸몄을 겁니다. 그리고 나서 더 이상 할 것이 없으니까 그 다음은 별장을 만들고, 그리고 나니까 이제는 이제 정원이 아쉬운 거예요. 이렇게 우리의 욕심은 채우면 채울수록 끝없이 자랍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심해지면 탐욕이 되고, 탐욕은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가린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이런 경험이 있지요? 탐욕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리는 것을 경험해 봤지요. 예를 들면, 뭔가 한번 가지고 싶은 생각이 나면 그것만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잠에서 깨면 그 생각이 나고, 직장에 와도 그 생각이 나고,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아도 그게 왔다갔다하고… 뭐 완전히 우상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골로세서 3:5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이 탐욕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그 욕심을 이기기 위해서, “Okay, that is it.” “자 이걸로 됐다.” 즉, 이 일에 대해서는 이걸로 끝이다 하는 어떤 선언이 도움을 주더라구요. 그래 이 일에 대해서는 이걸로 만족한다는 선언입니다. 즉 내 욕심에 한계선을 긋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꾸 내 욕심에 끌려갑니다.
자동차도 그래 나한테는 이걸로 됐다. 집도 그래 나에게는 이걸로 됐다 하고 자꾸 한계선을 긋지 않으면 우리는 늘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 하면서 그것을 쫒아 다니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욕심을 제어하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세요. 많은 분들이 2,000불을 벌때 허덕허덕하면서 내가 1,000불만 더 벌면 조금 낫겠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1,000불을 더 벌어도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가 않아요. 왜 그런줄 아세요?
차를 조금 큰것으로 바꿨거든요. 그래서 1,000불을 더 버는 데도 전과 똑같이 쪼들리면서 살아요. 그리고는 아 여기서 1,000불만 더 벌면 괜찮겠다 싶은데 또 시간이 지나서 1,000불을 더 벌어 4,000불을 벌게 되었는데도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아요. 왜? 남는 돈 만큼 집을 늘렸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2,000불 벌 때도 쪼들리고, 4,000불을 벌때도 쪼들리고 10,000불을 벌때도 쪼들려요. 남이 보기에는 부유해졌지요. 하지만 그러면 뭐해요. 평생 쪼들리고 살면서 좋은 일도 한번 못해 보는데요 뭐.
그래서 우리가 평생 쪼달리고 가난하게 살지 않으려면 내가 어디에 욕심을 가지고 있는가 살피고 내가 여기에 욕심을 가지고 있다 싶으면, 이 분야는 이걸로 끝이다 하는 선언을 해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가 탐욕에서 자유로와 지고 진정으로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욕심의 한계를 정하시고 규모있는 삶을 사셔서 탐욕을 극복하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3) 건전하지 못한 부부관계
세번째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아합의 문제점은 늘 악한 아내에게 끌려다닌다는 것입니다.
5절부터 읽어 보면 결국 이세벨은 모함을 해서 나봇을 죽여버리고 맙니다. 참 악한 사람들이지요. 지금 이글에서는 나봇만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열왕기하라든지 다른 곳에 있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을 보면 나봇뿐만 아니라 일가족을 다 몰살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맞는 것이 그래야 남은 재산이 국가의 소유가 될 수가 있지요.
우리는 이글을 읽으면서 이세벨이 악한 여자라고 분노를 하지만, 사실 아내에게 끌려다니는 아합이 더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이세벨은 어쩔 수 없는 여자입니다. 아스다롯을 섬기는 제사장의 딸인데 그 종교는 제사 지낼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종교니까 사람 죽이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지 않겠어요.
게다가 페니키아와 같은 전제군주국에서 공주로 자랐으면 이런 행동은, 물론 사람에 따라 조금 다르기는 하겠지만, 예상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상황에서 만약 아합이 조금만 책임감을 가지고 아내를 다루었다면 이렇게 까지야 됐겠나 싶으면서 바로 그와 아내 사이의 건전하지 못한 관계가 문제라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말을 좀 바꿔서, 가족의 문제를 다루는 심리 치료의 이론중에는 Structural Model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뭔가하면 문제가 있는 가족중에 많은 경우는 그 가족의 구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된다는 이론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와 자녀 그리고 제 3자,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로 지켜야 할 자기의 영역을 지키지 않고, 부모가 얘기하는데 아이가 끼어든다든지 부모가 아이를 가르치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끼어드는 그런 가정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가정의 문제는 서로가 있어야 할 위치를 잡아주고 해야 할 책임을 다하도록 해주면 자연적으로 문제가 치료된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루는데 가장 핵심이 뭔가하면 바로 boundary, 즉 경계와 영역이 잘 세워져 있느냐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족이 잘 되려면 가족이라는 전체 system 속에서 부부라는 영역, 그리고 자녀라는 영역, 이런 boundary가 먼저 견고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먼저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서 부부의 영역이 튼튼할 때 전체 가족은 안정을 느끼고 아이들이 잘 자랍니다. 뭔가를 가르칠때도 부부가 한팀이 되고 한 목소리가 되어야지, 즉 먼저 부모의 boundary가 든든해야지 교육이 되지 아빠는 “애들아, 이제 10시니까 자라.”그러는데 엄마가 “아이 방학인데 뭘 그래요. 좀 놀게 두세요.” 매사가 이런 식이면 애들이 혼선을 일으키면서 교육이 안된다는 겁니다.
또 부모가 아이들을 훈계하는데 할머니가 와서 “얘, 애 좀 내버려둬라. 이 이눔아, 넌 얘만 할때 얘보다 더 심했어,” 이러면 부모와 자녀라는 boundary안에 할머니가 끼어든 것이고 그럴 때 교육이 잘 될 수 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유의 영역과 boundary를 잘 잡는 것이 건강한 가족의 열쇠라는 겁니다.
또 아이들끼리도 마찬 가지 입니다. 만약 아이들 형제가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큰 System안에서 그들 나름대로 어떤 형제 영역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사회성을 배워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 사이에 문제가 있을 때 어느정도는 자기들끼리 해결하도록 두어야지 엄마가 항상 간섭을 하면 않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조금만 문제가 있으면 “얘 형에게 그렇게 대들면 되니?”하고 중재를 해주고, 또 조금만 문제가 있으면 “얘 동생에게 양보해야지.”하고 중재를 해주면 그들 스스로 협상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기네들의 boundary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친구들의 boundary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어느정도는 자기들 안에서 해결하는 법을 배워야지 우리에게 맞았다고 뛰어가고 그러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아이를 만든다는 겁니다. 하여튼 이렇게 저렇게 boundary, 영역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족이라는 System안에는 그런 개인이면 개인, 그룹이면 그룹 이런 영역이 튼튼하게 세워져야 가족이 건강하다는 얘기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지금 부부사이의 그런 개인의 영역이 무너져 있는 겁니다. 아합은 지금 자기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은근히 아내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기의 신앙적인 양심으로는 조금 어려우니까 와이프가 해주기를 바라면서 자기가 책임지지 않겠다는 심산입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잖아요. 그리고 아내는 그 투정을 해결하기 위해서 악한일을 저지르고. 아주 심각한 boundary 문제를 가지고 있는 부부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부들이 많아요.
따라서 건강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가족안에서 그런 boundary 즉 자기의 영역이 튼튼해야 하고 그안에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부부면 부부의 영역을 지키고, 그러면서 자녀들의 영역도 인정해 주고, 그래서 자녀를 결혼시킨 어른들은 절대로 결혼한 자녀들에게 부모라고 이렇구 저렇구 그 부부 사이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않됩니다. 마찬가지로 또 부부 지간에도 서로가 자기의 영역에 바로 서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영역안에서 자기가 해야 될 책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족의 전반적인 책임을 지고 가야하는 바른 방향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그러면서 집안의 경제를 해결하는 책임을 지고 가능하면 어려워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아내는 내조하는 사람으로서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그러면서 누가 봐도 들어오고 싶은 따뜻한 가정의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을 하고, 이런 분명한 역할의 boundary 가 세워져 있어야지 되지, 남편은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안하고 그러면서 집에 오면 짜증만 내고, 아내가 뭘좀 해주지 이러구 바라고, 아내는 아내대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투정부리고 그러면 건강한 가정이 되기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그런 분명한 boundary를 유지하고 세우는 것이 행복한 가정을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상대의 영역을 존중하고 자기의 책임을 다하셔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죄인을 징벌하시는 하나님
자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을 외면한 삶을 사는 아합에게 하나님은 결국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다시 얘기해서 아합은 이제 돌아설 수 없는 지점까지 간 것입니다.
17절부터 24절까지는 섬뜩할 정도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결국 죄인을 징벌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되기 전에 하나님은 여러번 아합이 회개할 수 있도록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자기에게 온 회개의 기회를 얼마나 많이 놓쳐버리고 있는 지 모릅니다.
먼저 16장 34절을 보면 그는 여리고를 건축할 때 하나님의 예고가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야 하나님이 하신다면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대도 자기의 삶을 회개하지 않습니다.
두번째 아합은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 400명과 갈멜산에서 대결을 벌일 때 그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고 3년동안 비가 오지 않던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는 광경을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가까이서 경험하고도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20장에서 벤하닷을 살려주었을 때 예언자가 네가 잘못했다고 깨우쳐주니까 도리어 화를 냅니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고 계시는데 그 말을 안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참다 참다 못한 하나님은 벌하기로 마음먹으십니다. 즉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겁니다.
그런데 이 얘기의 반전은 27-29절입니다.
이 구절을 읽어보면 참 답답할 정도로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용서의 여운을 남기십니다.
이게 지금 말은 그의 아들대에 가서 재앙을 내리겠다고 들리지만 의미는 뭡니까 한번 더 기회를 주겠다는 얘기지요. 그리고 사실 아합은 지금 진정한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어지는 22장에서 또 나쁜짓을 하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록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고 해도 그것으로 기회를 주고 계신 거예요. 하나님은 정말 답답할 정도로 죄인을 벌하시지 못하십니다. 정말 참다 참다 못해서 모든 저주를 쏟아 부으셨으면서도, 또 마지막에 혹시 돌아 올까 하면서 여운을 남기시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베드로후서 3:9)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던지 회개하고 돌아오면 우리를 받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아서 31:34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눈물로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셔서 새로운 관계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제가 왜 오늘 설교의 제목을 아합 대 하나님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아합은 평생 하나님을 적으로 만들면서 살았습니다. 사사건건 하나님이 진노할 일만 하면서 산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도 사사건건 하나님이 진노할 만한 일만 하면서 하나님을 적으로 만들며 살았지만 그런 우리의 죄를 하나님은 기다림으로 갚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셔서 주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