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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 1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 약 2: 3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제 2 장 : 참된 마음
1. 형제 차별에 대한 경고 ( 2: 1 – 13 )
①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②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③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④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⑥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⑦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⑧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⑨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⑩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⑪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⑫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⑬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약 2: 1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
원문을 직역하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서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지 말라."이다.
영광의 주라는 표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 한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2: 8에서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증언하였다.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복음 신앙이며 구원 신앙이다. 이런 표현은 야고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교훈하고 있음을 보인다.
야고보는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며 차별하며 편애하면서 영광의 주를 믿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한다.
존귀하신 영광의 주님께서 낮고 비천한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라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광의 주님께서 친히 낮고 비천한 인생의 모습을 취하셨는데,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낮고 비천한 자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예수님도 무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내 형제들아.
'내 형제들아'(아델포이 무)는 수신자들에 대한 야고보의 사랑의 감정을 잘 나타내며, 또한 이는 새로운 주제로 전환시킬 때 사용하는 표현 방식이기도 하다(5절. 1: 19. 3: 1. 5: 7).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경건한 삶을 어떻게 실천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권면한다.
2]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받았으니)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케테 텐 피스틴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 테스 독세스'이다. '테스독세스'(영광의 주)와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다섯 가지이다.
Ⓐ '영광'을 '믿음'과 연결시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 있는 믿음'이라고 해석한다(Zahn, Schlatter, Grotius).
Ⓑ '영광'이 '주'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해석한다(KJV, RV, Moo, Burchard).
Ⓒ '영광'을 '사회적 지위'로 보고 본문이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Erasmus, Calvin).
Ⓓ '영광의 주'(테스 독세스)를 형용사적으로 보아 '우리의 영광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해석 한다(Cantinat, Chaine, Ropes, Hooker, Luther, Mayor).
Ⓔ 동격으로 보아 '영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Bengel, Lenski, Tasker, NEB).
다섯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테스 독세스'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지니신 '영광'이시다.
* 눅 2: 32 -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 이다 하니
* 요 1: 14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 17: 5 -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히 1: 3 -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영광의 우리 주'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 한다. 바울 사도도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증언 한 적이 있다.
* 고전 2: 8 -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영광은 본래 하나님께 속한 속성이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구원적 믿음이요 복음적 믿음이다. 이런 믿음에 대한 언급은 야고보서가 구약적이지 않고 신약적임을 나타낸다.
'받았니'(에케테)는 시상이 현재로서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3]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외모로 취하지) 말라.
'외모로'(엔 프로소폴렘프시아이스)는 70인 역에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경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래 이것은 '한 사람에게 얼굴을 들다'라는 의미로서 한 사람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 즉 같은 상황에서 서로 차별을 두고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Manton).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며 그 중심을 보신다.
* 삼상 16: 7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행 10: 34 -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 롬 2: 10-11 -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 엡 6: 9 -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 골 3: 25 -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유익을 취하기 위하여 외부적인 조건에 얽매이는 것은 잘못이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걸맞지 않는다.
야고보는 우리가 영광의 주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교훈한다. 그 교훈은 존귀하신 영광의 주님께서 낮고 비천한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증언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다(빌 2: 5-8).
주님의 비하(卑下)의 사실을 깨닫는 자라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을 것이다. 영광의 주님이 낮고 비천한 인생의 모습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약 2: 2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 -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2-4절까지가 1절의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권면의 논중 임을 나타낸다. 본 절과 3절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행위에 대한 예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교훈하는 이유는 당시에 교회 안에 이런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배당에서 교인들은 금반지를 끼고 좋은 옷을 입은 부자에게는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친절히 대하지만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자에게는 거기 섰든지 내 발판 아래 앉든지 하라고 불친절하게 대했다.
그들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였다. 그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였다.
1]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회당'(쉬나고겐, assembly, 예배당)은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일이나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를 의미한다.
* 눅 12: 11 -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 눅 4: 15, 20, 28 -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야고보가 본 절에서 '쉬나고겐'을 사용한 것은 이 서신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모임, 장소를 자연스럽게 '쉬나고겐'이라고 부른 듯하다(Burdick).
야고보는 회당에 들어오는 사람 중 두 부류의 사람을 예로 들고 있다.
(1) 금가락지를 끼고
'금가락지를 낀 사람'은 본 절에서만 등장한다. 이것은 본래 '금 손가락의 남자', '금 가락지 낀'이라는 의미로 '명예와 존귀를 소유한 사람'을 의미한다.
* 창 41: 42 -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2)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
'아름다운 옷'(에스데티 람프라)은 '밝고 찬란한 옷'이란 의미로서 부유한 사람이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옷을 가리킨다.
당시 유대 지방에는 자신의 부와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반지나 아름다운 장신구를 달고 과시하는 풍습이 있었다.
* 눅 15: 22 -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 또 남루한(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1) 남루한(더러운) 옷을 입은
'더러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파라'는 '불결한'을 의미 한다.
(2) 가난한 사람
'가난한 사람'(프토코스)은 '구걸하는 사람'을 가리킨다.(Mayor)
* 마 19: 21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야고보는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과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을 대조시켜서 당시 수신자들이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죄를 지적했다(Hort, Burdick).
약 2: 3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
성도를 경제적 기준으로 차별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사람이 소유한 돈의 많고 적음이 그의 인격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부자가 아니셨다. 선지자들도 사도들도 부자가 아니었다. 우리들도 부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사람들이다.
사람의 가치는 그의 인격적 덕성 즉 그의 경건과 믿음, 그리고 그의 의와 선과 진실의 도덕성을 가지고 판단하여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보이는 사람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다.
세상 사람들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람을 무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바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단지 그의 소유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무지하고 악한 일이다.
1]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돌아보아) 말하되(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돌아보아'(에피블렙세테)는 '올려다 보다'라는 뜻의 '에피블레포'에서 유래한 단어로 '좋은 동기를 가지고 쳐다보다'라는 의미이다(Burdick).
* 눅 9: 38 -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 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좋은 자리'는 특별히 마련된 좌석보다는 앉을 자리를 권유하는 의미이다(Adamson).
따라서 본 절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들을 존경하여 그 표시로 자리를 정중하게 권유함을 시사한다(Ropes).
2]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이르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먼저와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대하는 태도에 관해 언급된다.
'섰든지'(스테디)는 '배치하다'의 의미를 지닌 '히스테미'의 명령법이다. 이것은 아무렇게나 자리를 차지하라는 것으로서 아마 회당의 맨 끝이나 구석진 한 곳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
'네 발등상 아래 앉으라.'는 '내 발 아래 앉으라.'는 표현이다. 당시에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발을 피정복자들의 목 위에 두었다.
* 눅 20: 43 -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본문에서는 그러한 의미보다는 발아래의 마루 바닥에 앉으라는 의미로 사람을 차별하는 모욕적인 행위를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