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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9: 14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 고후 9: 15 말할 수 없는 은사
고후 9: 14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
1]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고린도 교인들의 예루살렘 성도들에 대한 헌신적인 섬김은, 위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했고 자신들로서는 중보의 기도를 받을 수 있는 동지를 얻는 결과로 나타났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중보(仲保) 기도를 한다는 것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에 형제애가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이처럼 두 교회가 민족과 역사 그리고 문화적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연대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기독교가 더 넓게 뻗어나가는 역사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뜻한다.
이런 변화는 할례를 받아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을 만큼 유대인 성도와 헬라인 성도 사이에 있었던 좋지 않은 감정들을 생각한다면 대단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 행 15: 1-21 –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2]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이며 증거이다.
우리는 성도의 헌금을 통해 헌금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본다.
즐거이 드리는 후한 헌금은 그것을 보는 이, 그 일을 듣는 이로 하여금 ‘오 주여, 그에게 이런 은혜, 이런 믿음, 이런 사랑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게 한다.
돈이 귀한 줄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풍성한 헌금을 즐거이 할 자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가 역사상 땅 위에 곳곳에서 나타났고 지금도 나타난다.
3]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사모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포둔톤'(*)은 '그리워하다', '애정을 보여주다.'라는 뜻으로 바울이 그의 개종자들을 만나보고 싶어 하는 것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였다.
* 롬 1: 11 -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 빌 1: 8 -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 살전 3: 6 –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본 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고린도 교인들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을 묘사한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과 교우 관계를 맺고 형제애를 나누기 원한다는 것은 단지 예루살렘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과 교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한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이 기꺼이 구제 연보를 하는 것은 단순한 구제의 행위를 지나 하나님의 은혜를 성취(成就)하는 것이었다(8: 6).
고후 9: 15 말할 수 없는 은사 -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1]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인들이 베푼 은혜는 그들 스스로에게서 온전한 의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그 참된 의미가 발견된다.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또 도울 수 있는 물질적 여력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은사'(*, 카리스)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풍성한 연보와 성도들 간의 화해
고린도 교인들의 풍성한 연보와 그것으로 말미암는 예루살렘 성도들과 고린도 성도들 간의 화해를 포괄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14절)를 의미한다(Calvin, Tasker).
(2)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즉 복음을 의미한다(Martin, Bruce).
연보에 대하여 언급하는 전후 문맥상으로 볼 때 (1)의 견해가 적합하다.
'은사'에 대한 바울의 용례를 살펴보면,
* 롬 8: 32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 앞에 '말할 수 없는'(*, 아네크디에게토)이란 수식어가 있다.
이를 보면 (2)의 견해도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Harris)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은사는 거저 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선물이라는 뜻이다. 댓가를 주고 받는 것이라면 선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의 은사라 했으므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본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얼마를 주시든지 선물이다.
2]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따라서 바울은 모든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많은 비가 내린다. 어떤 곳에서는 생명과 재산의 큰 피해를 보기도 한다. 또한 비가 오면 성도들이 예배당에 나올 때도 얼마나 불편한지 모른다. 그래서 비가 오면 ‘왜 이렇게 비가 오나?’ 하면서 불평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비는 필요하다. 비가 와야 수목이 자라고, 곡식이 자랄 수 있다. 비가 오지 아니하면 모두 말라 버리고 만다. 비가 오지 않는 광야나 사막을 보면 아무것도 자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비를 넉넉히 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물이 있어야 곡식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나무가 자라고, 사람이 살 수 있다.
물이 있어야 깨끗하게 살 수가 있다. 거리에 먼지가 많다가도 비가 흠뻑 오게 되면 먼지를 다 씻어 주기에 거리가 깨끗해진다. 나무들에 먼지가 묻어 보기 싫게 되었다가도 비를 맞게 되면 먼지가 다 씻겨 내려가기에 얼마나 깨끗하고 싱싱해지는지 모른다. 이 귀한 물을 하나님께서 주시는데, 이것은 선물이다. 거저 주시는 것이다.
햇빛은 우리에게 광명을 준다. 우리에게 열을 준다. 모든 에너지가 태양으로부터 나온다. 해가 있기에 초목이 자란다. 해가 있기에 꽃이 열매를 맺고, 해가 있기에 식물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해가 없으면 우리는 모두 어둠 속에서 얼어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햇빛도 거저 주신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햇빛을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다. 거저 주시는 것이다.
공기는 얼마나 중요합니까? 밥은 며칠 동안 먹지 않고도 살 수가 있지만, 공기는 몇 분만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우리가 한 순간도 호흡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물고기가 물속에서만 사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공기 속에서라야 살 수 있다. 그러니 공기가 얼마나 귀한가?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공기로 감싸주어 언제나 시원하게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신다.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이 세상의 나무와 풀, 짐승, 오곡백과, 산, 해와 별, 금, 은, 동, 철 모든 보석, 자연계를 통해서 우리 인간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아침에 일어나서 동편에 뜨는 해를 보면서 감사해 본 일이 있는가? 호흡을 하면서 감사해 보셨는가? 사실 이것이 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들이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어떤 선물보다도 가장 귀하고, 값지고, 고귀한 선물 하나가 있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이다. 바울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는 말로 형언 할 수가 없었다. 말의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다.
골로새서 2장 9절에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록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여기 ‘신성’이란 말은 ‘하나님’이란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충만한 것이 육체 가운데 거하신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무한하므로, 우리의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권능은 무한하시기에 우리의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도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겸손도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도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 넓고, 너무 깊고, 너무 높아서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인간의 지각과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요, 이 땅 위에서도 그 이상 가는 선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자연계를 통해서 인간에게 주시는 은사에도 감사해야겠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큰 은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은사를 받았고, 여러 가지 선물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참으로 말할 수 없이 큰 선물을 받았다. 그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울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힘 쓸 때, 다메섹에서 주를 만난 후, 자기가 전에 깨닫지 못하던 것을 즉 자기 육체 속에 다른 힘이 있어서 자기가 아무리 힘쓰고 애쓰더라도 그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속에는 죄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육신을 기초로 하는 죄의 능력이 있기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라고 긴 탄식을 하였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게 되었다. 십자가의 뜻을 깨닫게 되고,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되었다. 새로운 생명의 복을 깨닫게 되고, 성령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울이 바울도 변했다. 이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는 외쳤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리스도를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을 받았기 때문이다. 죄에서 구속을 받았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 구속과 해방의 기쁨은 그로 하여금 언제든지 이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울이 만난 그리스도는 옛날에 하늘로 올라가신 분만이 아니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만이 아니었다. 바울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언제나 그의 안에 계신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그가 말한 것처럼 육에 속하던 자기는 죽었다.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속에 살아 계시는 것을 항상 깨달았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내가 나를 위해서 변명할 때 내 친구들은 다 나를 떠났다. 한 사람도 나를 도와 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강한 믿음을 주셨고, 주께서 언제든지 나와 같이 계셨다”고 말씀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전도하러 갔다. 반대하는 유대 사람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어떻게 할까?’ 하는 바울에게 주님께서 특별히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 도시에 내 백성이 많으니 입을 다물지 말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라.” 이처럼 살아 계신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사도 바울과 같이하셨다. 지중해에서 큰 풍파를 만났을 때도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바울을 격려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3절에 있는 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현재 자기와 같이 계셔서 끊임없이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였다. 그러므로 풍파를 만날 때도, 핍박을 당할 때도, 돌에 맞을 때도, 파선을 당할 때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주님의 능력이 같이 했다. 이 모든 일을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은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신앙이 있나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에서 구속함을 받았나요? 우리가 다 해방을 받았나요? 우리가 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산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그러면 우리도 환난이나 역경이나, 괴로울 때나 평안할 때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밤이나 낮이나 언제든지 감사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본 장도 헌금에 대해 교훈한다.
첫째, 헌금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
헌금은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미리 준비하며 해야 한다.
둘째, 헌금은 복이다.
우리의 헌금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드리는 복된 선물이다.
셋째, 헌금은 심은 만큼 거둔다.
많이 헌금한 자는 땅 위에서도 많이 거둘 것이다.
넷째, 헌금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거지가 아니시다.
우리는 마땅히 두려움과 기쁨과 감사함으로 헌금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헌금하는 자들을 기뻐하실 것이다.
다섯째, 헌금은 우리에게 의가 된다.
그것은 창조자와 구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이며 의의 열매이다.
여섯째, 우리에게 주신 재물의 용도는 두 가지다.
하나는 먹을 양식이며 또 하나는 심을 씨이다.
먹을 양식은 우리가 먹을 수 있지만, 심을 씨는 우리가 먹지 말고 심어야 한다.
우리는 먹을 양식 외에는 전도와 구제의 일을 위해 써야 한다.
일곱째, 헌금은 헌금하는 사람의 믿음과 순종의 진실함의 증거이다.
여덟째,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가 아니면 결코 풍성한 헌금을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