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상22:1-23) 도망자가 비빌 언덕(?)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도망자가 비빌 언덕(?)’ 이라는 제목의 말씀 증거 합니다.
'도망자가 비빌 언덕(?)'
도망자가 비빌 언덕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제목이 되겠습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의지할 데가 있어야 발판을 삼아서 사람이 제구실을 할 수 있다'는 그런 뜻이 될 것입니다. 도망자는 자기 자신도 추스를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누가 의지하는 게 사실 불가능한데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도망자 다윗이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그런 이야기가 오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사건이 있는데 말씀드린 대로 이제 다윗이 아둘람 굴로 도망을 갑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있다가 사울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아둘람 굴로 가서 숨게 됩니다. 그 아둘람 굴에 숨어있을 동안에, 다윗의 온 집안의 부모와 형제와 친척뿐 아니라,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 자의 건 타의 건 사회의 낙오자가 돼 버린 사람들이 다윗이 아둘람 굴에 숨어 지내고 있을 때 몰려들었는데 숫자가 한 400명가량입니다. 이 내용이 기록이 돼 있고, 또 하나 22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은 아히멜렉 제사장의 수하에 85명의 제사장과 및 성전 일을 담당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윗에게 떡을 주고 칼을 주고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로, 사실은 도운 것도 아니지만 다윗이 그만큼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 정도 요청하는 것에 대해서 안 들어 주었겠습니까? 그리고 제사장 아히멜렉은 사울과 다윗이 서로 등을 돌리고 다윗이 도주하고 있었던 사실도 몰랐고, 다윗이 거기를 거쳐 지나갔다고 하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아히멜렉 제사장 집안 전체가 몰살을 당해 버립니다. 85명을 다 잔혹하게 죽여 버리고 마는데 이 두 가지 사건이 기록이 되었습니다.
자, 이 두 가지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도망자가 비빌 언덕이 될 수도 있다니?’라고 하는 뜻의 제목을 가지고 한 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도망자 다윗에게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몸을 의탁합니다. 자기 생애 전체를 의탁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들이 다윗을 군대장관으로 삼게 되는데참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지금 다윗은 자기 한 사람의 끼니조차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사람이에요. 먹고 살길이 없어요. 그런데 이 사람에게 400명이 몰려들고 다윗은 또 그 사람들을 아둘람 굴로 받아들이고, 도대체 그 사람들이 뭘 먹고 살았고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다윗의 도망자 세월이 10년이나 지속될 것인데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려고 400명을 받아들였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 마디로 다윗의 삶의 영역에는 타인을 받아들여서 그들이 같이 공존하게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줄 수 있는 여지가 지금 없습니다.
목회할 때 이제 구역기도회를 하게 됩니다. 기도회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구역 내에서 자발적으로 모임을 갖게 되는데, 들어보면 그래도 집이 좀 넓은 집에 한 번이라도 더 모이게 돼요. 어떤 구역은 사람이 열 몇 명이 모일 때도 있는데, 그렇게 모일 수 있는 집이 많지 않아요.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어디 열 몇 명이 앉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넓은 집에 모이게 됩니다. 이처럼 여지가 있어야 돼요. 이민을 가도 베네룩스 3국(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이런 나라가 이민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민을 받았다고 하면 살기도 웬만큼 살면서 땅이 넓어야 돼요.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미국 등 국민과 영토대비 그래도 여지가 많은 곳에서 이민을 받아들이지, 무슨 스위스, 오스트리아에서 이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들어 본적도 없습니다. 마찬가지예요. 어떤 사람이 타인에 대해서 비빌 언덕이 돼 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여지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재벌 같은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그늘 밑에 와서 일하면서 먹고 살지 않습니까?
이런 여지가 있어야 되는데 도대체 신앙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비빌 언덕은 너무나 이상합니다. 도망자가 비빌 언덕이 되어 주는 것이에요. 오갈 데 없고 환난당하고 어려움 당한 사람들이 자기 일생을 다 맡깁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분명 외관상으로는 다윗이 어떤 사조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사적으로 영토를 갖고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재물이 많았던 사람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알거지에 도망을 다니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에게 어떤 여지가 있어서 400명이 자기의 일생을 다 맡기고 비빌 언덕으로 삼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의 비밀이 있어요.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얼마든지 비빌 언덕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기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못 보는 기업이 있어요. 우리는 눈에 보이는 부동산에만 투자하려고 하고 영토를 확장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기업이 될 때에 다윗이 떠맡는 게 아니에요. 발을 들여놓는 여지는 하나님이 기업이 될 때입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가 지팡이 하나들고 출애굽을 시도합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모세가 갖고 있는 게 영토도 아니고 재물도 아니고 어떤 조직체의 능력과 힘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지팡이 하나입니다. 그런데 250만 명이 모세를 비빌 언덕으로 삼습니다. 그러면 그 250만 명을 모세가 먹여 살렸습니까? 아닙니다. 모세가 알고 있는 하나님, 모세가 믿고 있는 하나님, 모세가 실감하며 느끼고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250만 명을 떠맡고 그들을 먹여 살린 것이에요. 그러므로 다윗에게 허락된 여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허락되는 기업은 하나님을 얼마나 실감하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알고 넓게 알고 많이 아느냐? 하나님을 알고 실감하고 느끼는 그 정도만큼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역량이 생기는 것이에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땅위에서 역사하실 수 있고, 이 땅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시고 계시는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을 느끼는 그 느낌의 크기가, 곧 역량이 되고 여지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뭘 가지셨습니까?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어요. 그런데 그 분이 하나님을 느끼는 느낌, 또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실감하시는 그 정도가 얼마나 컸든지, 이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태어날 모든 아이까지를 다 떠맡는 비빌 언덕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착각하는 게 있어요. 진짜 사람을 사람 노릇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사람을 살려주고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의지의 판, 비빌 언덕이 되어 주는 것이 세상적인 조직이 있어야 되고 돈이 있어야 되고 영토가 있어야 되는 줄 알고 있는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녀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그 자녀가 내 삶의 영역 안으로 들어와서 그 발판을 딛고 사람 노릇할 수 있게 해주고 내 아내가 그렇고 내 남편이 나를 비빌 언덕으로 의지하고 비빌 언덕이 되어 주는 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실감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정도에 따라서 모세처럼 비빌 언덕이 되기도 하고, 주님처럼 비빌 언덕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모세가 지팡이 하나 들고 있는 것이나,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도 없이 떠돌아다니시며 사셨던 것과, 지금 다윗이 도망자의 신세나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의 비빌 언덕이 돼 가고 있어요. 400명이 와서 자기 평생을 그 옆에 와서 살 수 있도록 한다고 해서 다윗이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에요. 모세를 250만 명이 비빌 언덕으로 의지한다고 해서 모세가 먹여 살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여호와가 나의 기업'이라고 하십니다.
자, 이제 태승철 목사가 비빌 언덕이 됩니다. 여러분도 비빌 언덕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특별한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는 만큼 여러분이 비빌 언덕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살리게 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살리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알고 느끼고 계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비빌 언덕으로 생각해서 다가온 사람들을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러분!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와서 다윗이 어제 말씀드린 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골리앗의 칼을 찾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전쟁의 승패가 달려 있다고 외치면서 칼을 들고 오던 그 골리앗을 죽였는데 그 골리앗의 칼을 왜 의지합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칼을 더 의지하는 급류에 떠내려가는 마음상태가 되어서,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사람을 살리기는커녕, 다윗이 스쳐 지나갔다는 그 이유 때문에 아히멜렉의 집안의 85명이 참혹한 학살을 당합니다.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칼을 의지하고 거짓말을 하고 그리고 아기스 왕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자기의 생존을 자기가 만들어 낸 미친 짓에 의지할 때, 스쳐지나간 아히멜렉 제사장 85명을 다 죽음을 당하도록 만들고 맙니다.
그런데 다윗이 제 정신을 찾기 시작합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도망자로서의 현실을 수용하는 것이에요. '수용한다'는 것은 "아, 이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로구나."라는 것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지금 다윗이 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다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대목이 3절에 보면 이방 왕 모압 왕에게 한 것과 아기스 왕에게서 살아남으려고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짓을 했던 것과 한 번 비교를 해 보세요.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하나님이 내게 알려 주실 때까지 내 부모를 맡아 달라고 합니다. 모압 왕으로서는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뭐고 하나님이 너에게 어떻게 하라는 지시를 알려 줄 때까지라는 말은 뭐고, 내가 왜 네 부모를 맡아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십니까? 골리앗 앞에서 물맷돌로 골리앗을 죽인 것과 같아요. 단지 그때 상황은 전쟁이고, 지금은 거래인데 외교적 거래에요. 지금 도망자 주제에 왕 앞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를 알려 주실 때가지 자기 부모를 맡아 달라고 합니다.
아니 모압 왕 입장에서 보면 그래요. 하나님이 너에게 알려주시거나 말거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내가 네 부모를 맡아서 먹여 살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기 그대로 보면 모압 왕과 무슨 친분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골리앗을 향해서 전쟁의 승패가 칼과 창과 단창에 있는 게 아니라 만군의 주 여호와께 달려 있다'고 외치고 나갈 때와 다를 게 없는 겁니다. 모압 왕에게 가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 주실 때까지 내 부모를 맡아 달라.’ 아니 네가 무엇인데 네 부모를 맡고 하나님이 너에게 알려 주시거나 말거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인데, 다윗이 지금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해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이 성사가 돼 버려요. 골리앗을 죽였을 때처럼, 모압 왕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자기의 주장, 자기의 요구에 순응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할지를 알려주실 때까지’
이제 아둘람 굴에 와서 하나님을 찾은 것이에요. 아둘람 굴에 들어가서 다시 하나님께 매달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고 ‘아,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장하시는구나.’ 그러므로 도망자인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향하여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계시고 나와 동행하시고 도망자의 신세 자체가 하나님 모르게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그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때 스쳐지나간 아히멜렉의 집안에는 85명이 죽게 되고, 그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자 400명이 자기의 일생을, 여생전체를 걸고 다윗에게 이민을 옵니다. 맨 처음 룩셈부르크 같이 좁은 나라였다가, 이제 호주나 캐나다처럼 넓은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10년 동안을 도망자의 신세로 살면서 다윗이 실지로 영토를 다 점령합니다. 도망자 시절에 영토가 끝나 버리는 겁니다. 왕이 되기도 전에.
그만큼 하나님을 깊이 보고 10년 동안 도망 다니며 핍박을 피해 돌아다니고, 이 굴에서 저 굴로 이 황무지에서 저 황무지로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느끼고 한 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을 느끼는 정도가 점점 커지고 하나님을 실감하는 깊이가 점점 깊어지고 이스라엘 전체 백성을 담을 수 있는 비빌 언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느끼는 것입니다. 왕이 되기 위하여 나라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고, 외교는 어떻게 해야 되고 이런 것을 공부한 게 아닙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관심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시편 150편 전체의 주제가 시편 1편에 나와 있어요. “복 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지금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알려 주실 때까지, 그 말이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으로 연결이 되는 거예요. 왕이 되어서 한 것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묻고 교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을 10년 배워서 왕의 자리에 올라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이 우리 남편이 우리 가족 중에 누군가 이러한 비빌 언덕들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가르치고 저것도 가르치고 사람이 능력이 있어야 되고, 돈을 벌어야 된다고 얘기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비빌 언덕이 되는 것은 하늘의 영토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의 기업, 우리의 영토는 하나님이세요. 그러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실감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느끼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완전히 인정할 수 있는 그 믿음의 크기만큼 사람들에 대해서 진정으로 비빌 언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이 세상의 조직과 이 세상의 재물과 이 세상의 영토에 의해서 내가 비빌 언덕이 되어준다든지 그렇게 살아 갈 때에, 다윗이 하나님을 전혀 망각한 상태에서 잠깐 스쳐지나갔을 때, 아히멜렉의 자리에 죽음이 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고 스쳐지나가는 모든 자리에 우리로 인해서 불행과 실패와 사망과 그늘이 드리우게 될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느끼고 실감하지 못한 채, 나를 기대는 아이를 내가 기를 때 정말 생의 불행이 임하고 정말 잘못 지도함을 통하여 그에게 그늘이 임하고 사망이 임할 수가 있습니다.
아둘람 굴에 들어가서 도망자가 비빌 언덕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산적인 활동을 한 게 아닙니다. 아둘람 굴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찾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고 회복하고 실감할 때, 이미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느끼는 크기만큼 다윗은 큰 비빌 언덕으로 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읽어나가는 부분 10년 동안 다윗이 도망 다니면서 이 이스라엘 전체가 다윗을 기댈 수 있는 비빌 언덕으로 커가는 모습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모두가 주님을 비빌 언덕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부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우리 주님을 실감하고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을 실감하는 크기만큼 우리 또한 이 세상에서 타인을 향하여 비빌 언덕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셨사오니 오늘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감하게 될 때에 진정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람답게 될 수 있기 위한 비빌 언덕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다윗만 10년동안의 도망자 생활이 있었던게 아니더라고요.
다윗이 간 길을 우리도 지금 가고 있습니다. 광야로, 굴로, 황무지로 이게 다 뭡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요. 하나님을 찾는 곳이요. 하나님을 느끼는 곳이고요.
비빌언덕이 되어 가도록 하나님의 각본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
알거지가 되었으니 감사하고 어려움을 당하는자들로 모여들게 하시니 감사하고 ...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앞에 목을 내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아멘! 아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