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택 李根澤 1865~1919
을사오적 ・ 자작 ・ 중추원 고문
1865년 8월 11일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다. 남작 작위를 받은 이근호(李根澔)의 동생이고, 남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을 지낸 이근상(李根湘)의 형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충주에 가 있던 명성황후와 인연을 맺으면서 1883년 12월 남행 선전관(南行宣傳官)에 임명되었다. 1884년 5월 무과에 합격해 1885년 3월 선전관에 임명되어 1886년 8월 단천부사, 1887년 5월 희천군수, 12월 길주목사, 1888년 10월 동부승지(同副承旨), 1889년 6월 전라도 병마절도사, 1890년 3월 병조참판, 1894년 2월 부평부사, 7월 좌부승지를 지냈다. 1896년 3월부터 11월까지 친위대 제3대대장을 지냈다. 아관파천 때 협가환어(脅駕還御)의 계획을 도모했던 일로 1897년 1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0월에 풀려났다. 1898년 10월 징계를 면한 후 독립협회를 해산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1월에 한성판윤에, 12월에 경무사에 임명되었다. 1899년 6월 함경북도관찰사에, 11월 중추원 의관(議官)에 임명되었다. 1901년 6월 경부(警部) 협판으로 경부대신사무를 서리했고, 10월부터는 평리원 재판장과 육균 참장으로 헌병사령관을 겸했다. 1902년 7월 의정부 찬정에, 9월 원수부(元帥府) 검사국총장에 임명되었다. 1903년 5월 육군 부장에 임명된 직후 5일간 군부대신에 임명되었다. 1904년 2월 호위대 총관(扈衛隊摠官), 강원도관찰사,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1905년 4월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6월 농상공부대신, 7월 법부대신에 임명되었다. 8월에는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받았다.
1905년 9월부터 1906년 11월까지 다시 군부대신을 지내면서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함으로써 박제순(朴齊純 : 외부대신), 권중현(權重顯 : 농상공부대신), 이완용(李完用 : 학부대신), 이지용(李址鎔 : 내부대신)과 함께 ‘을사5적’으로 지탄받았다. ‘을사늑약’ 체결 후인 1906년 2월 기산도(奇山度) ・ 이근철(李根哲) 등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고 여러 날 치료를 받았다. 나인영(羅寅永) ・ 오기호(吳基鎬) 등이 주도한 ‘을사오적 척살 계획’의 척살 대상자로 지목되었으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1906년 11월 중추원 의장에, 1907년 3월 배종무관장(陪從武官長)에, 5월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고, 9월에는 군대해산으로 육군 부장에서 예편했다.
1908년 5월 대한여자흥학회 고문을 맡았고, 10월에는 일본적십자사에서 주는 유공장(有功章)을 받았다. 같은 해 8월 기호흥학회 찬무부 주무원(贊務部主務員)으로, 12월에는 특별찬성회원으로 활동했다. 1908년 11월에는 기호흥학회 유지를 위해 형 이근호와 함께 1200환을 매달 20환씩 기부하여 부족한 재정을 도왔다. 같은 달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을 맡았다. 대한산림협회는 일제가 전국의 산림 측량 등을 목적으로 설치한 단체로 일본인 측량기사를 초빙해 산림 측량기사를 초빙해 산림 측량 등을 비롯한 산림사업을 주관했다.
합병 직후인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19년 12월 사망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매년 1600원의 연수당을 받았다. 1910년 10월 7일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5만 원을 받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爵記本書捧受式)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했다. 1912년 2월 조선상업합자회사 총재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데 이어 12월에는 정5위에 서위되었다. 1915년 1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한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7월에는 유공(有功)회원으로 기부했다. 1917년 10월 일제의 협력과 지원하에 조직된 친일불교단체인 불교옹호회(佛敎擁護會)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18년 4월 종4위로 승서했고, 9월에는 경성구제회(朝鮮農事京城救濟會)에 기부했다. 1919년 6월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朝鮮農事改良株式會社)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9년 12월 17일 사망했다. 사망 후 일본 천황이 ‘생전의 공로를 인정해’ 2500원을 주었다. 작위는 장남 이창훈(李昌薰)이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