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시당하고 있다. 감옥에 갇힌 죄수의 운명이 되어 창살 바깥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감시자는 보이지 않는다. 감시자의 행동이라도 볼 수 있으면 탈출을 시도해볼 수 있을텐데 말이다.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팬옵티콘'. 감시초소가 중앙에 위치해 있어 감시자는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감시자를 볼 수 없다. 지금은 2025년 3월 12일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5000만 명의 시민이 이 곳에 갇혀있다. 현대 사회는 감시받는 사회다. 권력자들은 트위터와 인스타그램같은 SNS를 통해 대중들의 취향을 접수했다. 비방과 음모, 도파민을 좋아하는 대중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순수해서 무지의 상태에 놓여있다. 우리가 선택하는 데이터는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권력자들이 선택하고 집중한 데이터들이다. 우리는 시험에 든 것이다.
평소 길거리를 걸어다니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 다수인 듯 하다. 이들은 무지의 장막 하에서 '연령, 성별, 신분'과 같은 제약을 탈피하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존중하여 좋은 공동체를 만든다. 그리고 정해진 규칙을 지키기 위해 철저히 행동한다. 그러나 남들이 시선을 두지 않는 그 찰나의 순간, 우리는 적당히 눈에 띄이지 않을 만한 부적절한 짓을 저지른다. 길거리에 침을 뱉거나, 무단횡단을 하거나, 바닥에 떨어진 돈을 슬쩍한다. 그래서일까. 온라인 사회에서는 눈에 띄일 만한 부적절한 짓을 저질러도 현실보다 눈에 띄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좀 더 남에 대한 비방을 서스럼없이 하고, 음모론을 퍼뜨린다. 이성을 연기하던 사람들이 온라인에서는 본성을 보이는 것이다.
인터넷 세계는 선악과를 베어먹기 전의 에덴동산과 같다. 위험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자유로운 아담과 하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권력자들은 팬옵티콘의 중간에서 뱀과 같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리고 시민들 사이에서 '부정선거 음모론, 공산주의 음모론, 마녀 음모론'과 같은 의견들이 주류에 들기 시작하면 선악과를 건넨다. "그래, 이제 선악과를 한 입 베어물고 선과 악을 알게 되렴. 다만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선을 악이라, 악을 선이라 칭할 것이야." 그래서 시민들은 음모론이 사실이라 믿게 된다. 권력자들은 다 차려진 음모론에 '하나의 트윗, 1분짜리 발언'과 같은 쐐기를 박음으로써 음모론을 부상시킨다. 우리는 그들이 준비한 시험에서 진 것이다.
공자는 "군자는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즉, 군자는 사회에 책임을 지면서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걸 경계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다. 시민이 군자여야 하는 사회 즉, 시민이 팬옵티콘의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부당한 권력을 남용하고 시험에 들게 하는 권력자들을 심판하고 무지의 장막을 거둬 우리가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권력자들을 심판하는 주민소환제, 매니페스토와 같은 좋은 제도가 있었음에도 그것들에는 거미줄이 쳐졌다.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잊혀진 도구가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도구들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 심판 최후 발언에서 "국가의 주적인 공산주의자들과 거대 여당을 심판하기 위해 비상계엄의 형태를 띈 대국민 호소를 벌였다. 이를 직시한 국민들은 나라 지키기에 나서고 있다"고 발언했다. 그의 발언은 헌법을 수호하고, 탄핵으로서 잘못된 권력자를 끌어내려는 국민들을 기만하는 말이었다. 자신이 팬옵티콘의 영원한 감시자로 남기 위해, 포퓰리즘을 지향하고 혼란스러운 국민들에게 '윤석열 탄핵 반대'라는 선악과를 쥐어주는 행위였다. 이제 시민들은 팬옵티콘의 감시자가 되어 무지의 장막에 빠뜨리려 하는 권력자들에게 정당한 철퇴를 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