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무기물질을 가공하는 것은 이미 동물에게서 본능의 날개 위에서만 올라갈 수 있고, 유기체화의 고차적 단계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은 절지동물에서 본능을 향해 거침없이 진화한 반면에, 거의 모든 척추동물이 지성을 활짝 꽃피우기보다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우리가 볼 뿐이다. 척추동물의 심리적 활동에서 기초를 형성하는 것은 여전히 본능이며, 거기서 지성은 본능을 보충하기를 갈망하고 있다. 지성은 도구들을 발명하는 데 이르기 못하고 있다. 지성은 본능 없이 지내고자, 본능에다가 가능한 한 최대한 변화를 행하면서 시도하고 있다...... 그래도 자연은 하나는 성공이 보장되지만 결과가 한정된 것과 다른 하나는 불확실하지만 독립적으로 되면 정복이 무한히 확대될 수 있는 것, 두 가지 심리적 활동성의 양태 사이에서 주저했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가장 큰 성공은 가장 큰 위험을 무릅쓴 쪽에서 이루어졌다. 본능과 지성은 단 하나의 동일한 문제에 대해, 똑같이 능숙하게, 분화된 두 해결 방식을 나타낸다.(EC. pp. 142~144) 굵은 글자는 원문의 강조 표시임). 물론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혼동하는 두 종류의 질서를 서로 구분하고 서로 대립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혼동이 인식문제의 원칙적인 난점들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다시 한번 구분되는 두 질서의 특징들을 강조하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적 방식에서 실재성은 정확하게 우리의 사고를 만족시키는 한에서 정돈되어 있다. 따라서 질서는 주체와 대상 간의 일종의 일치이다. 그것은 정신이 사물 속에서 스스로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신이 대립되는 두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때로는 그것은 자신의 자연적 방향을 좇는다. 그때 그것은 긴장의 형태를 띤 과정이며 연속적 창조이자 자유로운 활동성이다. 때로는 그것은 자연적 방향을 역전시키는데 이 역전을 끝까지 밀고 가면 연장에 도달하고, 상호 외재적인 요소들이 필연적으로 상호 결정하는 데 이르며, 결국에는 기하학적 메커니즘에 도달한다. 그런데 경험이 첫째 방향을 채택하는 것으로 보이든, 둘째 방향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든. 두 과정에서 다 정신은 스스로를 재발견하기 때문에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질서가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둘 사이의 혼동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 두 종류의 질서에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하는데, 그것은 두 질서가 취하는 다양성과 변화 가능성으로 인해 쉽지 않다. (p.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