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쓴 신화
고지전이 시작되다
한국전쟁은 정확히 3년 1개월 2일 동안 벌어진 장기간의 전면전이어서 현대사에 끼친 영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으면서도 끝을 맺지 못한 전쟁이기도 합니다. 그 여파는 아직도 계속되어 국토는 전쟁 이전처럼 분단 된 상태이며 군사적으로 팽팽히 대치중입니다. 그런데 3년이 넘는 물리적인 시간을 분석하다보면 군사적으로 가장 극적이었던 순간은 최초 1년간뿐이었습니다.
[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 중인 미 해병대 ]
전쟁이 발발한지 1년이 되었던 1951년 5월말 중공군의 제6차 공세 후부터 1953년 7월 휴전까지 전선의 변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쉽게 말해 최초 1년 동안 서울의 주인이 무려 4번이나 바뀌었을 만큼 전선이 남북으로 무려 2,300여 km를 쉴 새 없이 오르내렸지만, 나머지 2년 동안은 겨우 50여 km 정도를 밀고 당긴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전쟁 종결에 대한 목표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3년의 전쟁 중 극적인 전선의 변화는 최초 1년간 벌어졌습니다 ]
북한이 남침을 개시하여 낙동강까지 밀어붙였을 때, 우리가 반격을 개시하여 한만국경까지 달려갔을 때 그리고 중공군이 참전하여 여섯 차례의 대공세를 연이어 계속하였을 때만 하더라도 피아 모두 전쟁을 승리로 종결 짖겠다는 의지가 강하였습니다. 그것은 전쟁이 벌어진 이상 당연한 이치였고, 그렇기에 승기를 잡았을 때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켜 끝장을 보려하였던 것입니다.
[ 북진 당시 중공군의 포로가 된 미군 병사 (출처-Getty Image) ]
하지만 1951년 6월이 되자, 어느덧 전쟁을 주도하던 미국과 중국 모두는 승리에 대한 집념을 내려놓았습니다. 참전 후 3차례의 공세로 아군을 매몰차게 몰아붙여 재미를 보았던 중공군은 1951년 봄 이후에 벌인 4~6차 공세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실패하자 자신들의 능력으로 유엔군의 화력을 이길 수는 없다고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전쟁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온 미군도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 중국은 결국 미군의 화력을 넘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여야 했습니다 ]
처음에는 너무 낯설어 어이없이 무너졌었지만, 중공군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한 유엔군은 눈앞에 개미떼처럼 밀려오는 적들이 더 이상 두려운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돌적이었던 밴 플리트(Van Fleet) 신임 미 8군사령관은 북으로 내달리기 위해 유엔군사령부에 공세를 허락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을 정도였습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1951년 후반기에 유엔군이 북진을 개시하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 관련글 참조 )
[ 제한적이지만 북진을 주장하였던 밴 플리트 ]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지난 가을 북진 당시에 유엔이나 미 행정부는 한계선을 압록강과 두만강까지로 보았습니다. 유엔군 입장에서는 이곳까지 진격하여 적을 소탕하면 원론적으로 전쟁이 끝나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에 내려온 중공군은 엄연히 교전 대상이었는데 단지 이들을 만주로 몰아낸다고 과연 중국이 전쟁을 포기할 것인가 하는 점은 의문이었습니다.
[ UN군 중 압록강에 두 번째로 도달한 미 제7사단 ]
유엔군 입장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은 국경이라는 외교적 한계선이었지만, 중공군에게는 단지 하나의 강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미국이 만주로 확전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이곳까지 진격해도 전쟁이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였습니다. 따라서 외교적으로 종전을 이루지 못하는 한, 군사적 공세로는 전쟁을 마무리 짖지 못할 가능성이 컸기에 군사적으로 우위에 섰음에도 재북진을 주저한 것입니다.
[ 휴전이 가시화되면서 고지전으로 바뀌었습니다 ]
이처럼 중국도 미국도 전쟁을 일방의 승리로 끝낼 수 없다고 판단이 서자, 패하지 않고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짖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전선이 전쟁 이전과 비슷한 상태에서 형성된 지금 휴전을 하는 것이 양측 모두에게 실리적이었습니다. 그렇게 회담은 시작되었고 이후 전쟁의 목표는 휴전 시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로 한국전쟁 후반기를 상징하는 고지전이 개시된 것입니다.
고지전에 대한 선입관
우리나라는 군사적으로 첨예한 곳이어서 사람이 살거나 굳이 지나 갈 것 같지도 않은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대에도 군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사실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이어서 굳이 강원도가 아니더라도 산악전투와 관련한 훈련은 국군의 일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는 당연히 고지전의 무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엄밀히 말해 그것은 일종의 선입관입니다.
[ 산이 많다 보니 고지전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흔합니다 ]
엄밀히 말해 전략적으로 최종 승리만 생각한다면 고지를 점령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물 한방울 나오지 않는 고지는 전적으로 보급을 외부에 의존해야 하므로 설령 점령하고 있어도 보급로가 봉쇄되면 쉽게 고사당합니다. 결론적으로 전쟁도 사람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것이 원칙이므로 사람이 살지 않는 산악지대는 차후 점령 목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 전쟁은 일단 중요 거점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
반드시 확보하여야 할 통로처럼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전쟁 중 고지에서 굳이 전선을 형성하여 밀고 당길 이유는 드믑니다. 예를 들어 아프가니스탄의 험준한 산악은 후방 교란을 펼치는 무자헤딘이나 탈렌반 같은 비정규전 조직이 활동하기 좋은 무대고 대부분을 점령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요충지를 장악한 소련군이나 미군을 군사적으로 제압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저항을 이끈 무자헤딘 ]
1951년에 벌어진 중공군의 제4~6차 공세에서 보둣이 한반도는 종심이 짧아 험준한 산악지대도 경우에 따라 충분히 돌파구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화망에 걸려 중공군이 참혹하게 종말을 맞이한 이들 공세의 결과를 반추하자면 진격로가 극히 제한 된 산악지대로의 돌파는 상당히 위험한 방법임을 알수 있습니다. 결국 고지를 점령하여 전투는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전쟁의 승리를 거둘 수는 없습니다.
[ 산악지대를 급속 돌파하는 중공군 ]
원론적으로 고지전은 공격이 아니고 방어를 목표로 하고 있는 전투입니다. 따라서 전쟁 후반기가 고지전으로 일관하였다는 것은 전쟁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이긴 전쟁이라고 주장할 수 있어야 휴전도 가능한 상황이었는데, 1952년이 되자 거의 6개월 이상 전선의 변동없이 팽팽한 대치가 이루어지자 암묵적으로 이쯤에서 휴전하는 것이 피차에게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무명 고지에서 공산군 지역으로 포탄이 탄착된 지점을 관측하는 영국군 ]
때문에 전투도 휴전선이 그어졌을 때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상대를 감시하기 쉬운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 관건이되면서 이전에 이름조차 없던 무수한 산봉우리조차 격전의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전쟁 첫해와 같은 급격한 전선의 이동과 거대한 작전이 없었음에도 불과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발생하는 사상자는 오히려 급증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 고지전으로 바뀌면서 희생이 대폭 커졌습니다 ]
아군이건 적군이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면 참호를 깊게 파서 상대의 공격을 막았고 반대로 고지를 빼앗기면 다시 찾기 위해 어떠한 시도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결국 좋은 위치를 선점한 상태로 휴전을 이루기 위해 세계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고지전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피를 받쳐 싸웠던 자존심 때문이라도 내가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하는 경쟁에서 결코 발을 뺄 수 없었던 것입니다.
[ 철원 평야에서 바라 본 395고지 ]
당시 전선의 중앙인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던 395고지는 특히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연일 혈전이 계속되던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 중에서 이 고지가 서남쪽 꼭짓점의 견부(肩部)를 구성하게 되자 순식간 전쟁의 핵심지역으로 부각되었습니다. 험준한 산악이 연속하여 하늘과 맞닿은 강원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야산에 불과했지만 이곳에서 국군의 전설이 피로 쓰여 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