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환상과의 적절하지 않은 조화라고 생각하며 보았지만 상당히 흥미롭게 보았던 영화.
스페인 내전이야기만 다루거나 판타지만을 다루었더라면 나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을까?
아직 먹어보지 못한 우동에 짜장을 섞은 우짜를 먹은 느낌??
1. 영화의 역사적 배경
〈판의 미로〉의 배경인 스페인 내전은 1936년에서 1939년 사이 인민전선 정권과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반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일컫는다. 좌익 연합인 인민전선 내각이 집권하자 군부를 동원한 프랑코 장군이 반군을 조직해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인민전선 내각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프랑코 반군과 맞서 싸웠지만 파시스트들이 프랑코 반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프랑코 장군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막대한 물량 지원을 등에 업고 1939년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프랑코 독재체제는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며 스페인은 내전의 깊은 상처를 아직도 안고 있다.
복잡한 맥락으로 전개된 스페인 내전을 간단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국제적인 상황을 짚어보면, 소련은 인민전선을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지만 미국, 프랑스, 영국 등은 정부 차원의 지원을 하지 않았다. 내전에 참여한다는 부담감도 있었고 좌익 성향의 정권을 지지한다는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수십만명의 시민이 희생된 스페인 내전은 세계의 지성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내전에 참여하였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다양한 신분의 의용군은 ‘국제여단’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하였다.
작품을 통해 내전의 실상을 고발한 예도 많다. 앙드레 말로,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피카소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스페인 내전의 종군기자였던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소설로, 피카소는 게르니카에서 자행된 시민 학살을 묘사한 〈게르니카〉라는 명화를 남겼다.
〈판의 미로〉의 시간적인 배경은 1944년으로 프랑코 반군이 이미 전군을 장악한 시기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반란군으로 지칭되는 세력은 인민전선을 지지하는 게릴라 부대이다. 프랑코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반란군은 내전이 끝난 1939년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저항했는데, 한국전쟁이 공식적으로 종전된 뒤 빨치산의 저항이 계속되었던 것을 떠올리면 어떤 상황인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1944년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 겹쳐 더욱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스페인 내전에 관한 정치적, 역사적 평가는 더욱 심도 깊게 이루어져야겠지만, 〈판의 미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시스트 정권과 이에 저항하는 반정부군의 싸움이라는 정도를 이해하면 될 것 같다.
2. 세 가지 과제의 의미 - 통과의례
신화, 전설 등 옛이야기에는 주인공이 몇 가지 과제를 수행하고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이 과제를 수행하는 동기나 목적은 누군가를 구출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병을 낫게 할 묘약을 찾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판의 미로〉에서 주인공 오필리아는 지하왕국으로 돌아가는 비밀의 문을 열기 위해 세 가지 과제를 수행 한다.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세부적인 내용은 달라지지만 궁극적으로 이런 서사들에서 과제는 모두 통과의례라는 의미를 띤다. 인간의 성장발달 자체가 무수한 통과의례를 치르고 이루어진다. 프로이트 같은 심리학자는 그런 발달과정에 구순기, 항문기, 거울 단계 등의 명칭을 붙이기도 하였다. 옛이야기에서 과제는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제시되나 그 의미로 따져보면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별된다. 하나의 타자, 즉 대상과 겨루어 이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 즉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타자는 힘센 악당이나 괴물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자신과의 싸움은 두려움이나 유혹을 견디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오필리아도 괴물에게 쫓기고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는 과정을 겪으며 과제를 수행한다.
첫 번째 과제
오필리아의 첫 번째 과제는 황금열쇠를 찾는 것이다. 깊은 밤 흉측한 두꺼비의 점액질 토사물 속에서 열쇠를 찾을 때 오필리아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물질에 손을 넣어야 했다.
두 번째 과제
비교적 손쉬웠던 첫 번째 과제를 무사히 수행하자 요정 판이 보다 힘든 두 번째 과제를 전달한다. 이번에는 마법의 분필과 곤충 형태의 작은 요정들을 주면서 과제를 수행하면서 사용하라고 일러준다. 마법 분필로 벽에 문 모양을 그리면 두 번째 과제를 수행하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판은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주의사항을 당부하는데 하나는 시간을 지켜야 하는 것이고 하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판이 일러준 대로 벽에 문을 그리자 입구가 열리고 모래시계가 생긴다.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가 떨어지기 전까지 오필리아는 돌아와야 하며 만약 그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문은 저절로 닫혀버린다는 것이다. 오필리아는 요정들이 안내하는 대로 통로를 따라 들어가자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 앞에 이르게 된다. 갖가지 과일과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진 식탁의 끝에는 해골에 가죽을 입혀놓은 형상의 괴물이 앉아 있다. 판의 경고를 상기하며 오필리아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무서운 괴물 곁을 지나 열쇠 구멍을 찾는다.
첫 번째 과제에서 찾은 황금열쇠를 제자리에 찾아 넣자 두 번째 과제물인 단검이 나타난다. 여기서 오필리아는 방심하게 되고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만다. 이제 다시 입구로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오필리아는 너무나 탐스러운 포도송이에 눈길을 뺏기고 하나쯤은 먹어도 된다고 합리화한다. 곤충 요정들이 오필리아의 얼굴 앞을 가리며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막아보지만 요정들을 뿌리치고 결국 포도를 한알 입에 넣는다.
오필리아가 음식을 먹자 괴물이 잠에서 깨어나고 또 한알을 입에 넣자 괴물이 눈을 뜬다. 얼굴은 있으나 눈은 없었던 괴물 앞에는 눈알 두개가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괴물은 접시에 담긴 눈알을 얼굴이 아니라 손바닥에 있는 구멍에 넣는다. 손바닥으로 사물을 구별하는 괴물은 손을 들어 오필리아가 있는 곳을 확인하고 그녀를 잡으러 발걸음을 옮긴다. 괴물이 움직일 때까지도 포도의 단맛에 취해 사태 파악을 못하고 있던 오필리아는 비로소 도망치기 시작하는데 오필리아를 도와주던 요정들은 괴물의 먹이가 되고 만다. 요정들의 희생까지 치렀지만 오필리아가 입구에 도착했을 땐 이미 문이 닫혔다. 괴물에게 잡히기 직전 오필리아는 부러진 분필로 천정에 다시 문을 그려 가까스로 탈출한다.
세 번째 과제와 결말
매우 환상적인 두 번째 과제에 이어지는 마지막 세 번째 과제는 현실과 초현실의 접점에서 수행된다. 오필리아의 엄마는 남동생을 출산하다가 사망하고 오필리아를 돌봐주던 하녀 메르세데스는 반란군 스파이라는 것이 발각되어 창고에 갇힌다. 판은 시간이 없다며 남동생을 정원의 미로 가운데로 데려오라고 세 번째 과제를 준다. 비달 대위의 눈을 피해 겨우 남동생을 안고 미로에 도착한 오필리아는 세 번째 과제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 그것은 순결한 피 한 방울이며 그 피는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천진무구한 남동생의 피를 말한 것이었다. 선택의 책에 글씨가 없었던 이유는 오필리아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보름달이 뜬 그 밤이 지하왕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기회라고 판은 오필리아를 재촉한다. 갈등하던 오필리아는 남동생의 피를 포기하고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다. 그 시각 반란군은 부대를 습격하고 메르세데스를 구출한다. 비달 대위는 체포되고 아이는 메르세데스의 품에 안긴다. 이제 아이는 오필리아의 남동생이나 비달 대위의 아들이 아닌 반란군의 자식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3. 영화의 주제
미로(labyrinth)는 그리스 신화에서 기원한다.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은 왕비가 낳은 사생아를 가두기 위해 미로를 만들게 된다. 왕비가 낳은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몸과 황소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었다. 미노스 왕은 빠져나올 수 없이 설계된 라비린토스라는 미궁 속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어버린다. 그리고 미노스 왕은 아테네에서 제물로 바쳐진 처녀들을 매년 라비린토스에 넣어주었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아테네 처녀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라비린토스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무사히 빠져나온다. 테세우스가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미노스 왕의 딸인 아리아드네가 기지를 발휘해 도와준 덕분이다. 아리아드네는 라비린토스에 들어가는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주어 되돌아나올 때 길을 찾을 수 있게 한 것이다.
〈판의 미로〉에는 실제 미로 형태의 정원이 등장한다. 신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거대한 미로는 아니지만 미로 형태로 나무들이 심어진 구불구불한 모양의 정원이다. 그 정원의 한가운데 지하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있다. 오필리아는 테세우스가 미로를 헤치고 괴물을 죽이는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 나오는 것처럼 판이 제시하는 세 가지 과제를 정해진 시간에 해결해야 한다. 보름달이 뜨기 전에 제대로 과제를 수행하면 지하왕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고 모안나 공주의 신분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새아버지 밑에서 살아야 하는 비루한 삶 대신 왕국에서 공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오필리아가 첫 번째로 수행한 과제는 황금열쇠를 찾는 것이었다. 열쇠는 말 그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물건이다. 〈판의 미로〉는 매우 상징적인 영화이면서 이처럼 가시적인 기호로 의미를 제시하기도 한다. 즉, 미로 형태로 설계된 눈에 보이는 정원이나 문제를 푸는 황금열쇠처럼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형상으로 의미를 보여준다. 오필리아는 신화 속 영웅 테세우스와 달리 완벽하게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오필리아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남동생을 죽여야 지하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 오필리아는 자신의 희생을 선택한다.
신화가 존재하는 그리스 시대와 내전으로 곪아터진 1944년 스페인은 다른 시간과 공간이다. 〈판의 미로〉는 그리스 신화의 모티브를 가져와서 새로운 시대의 신화를 쓴 셈이다. 오필리아가 황금열쇠를 찾는 것과 게릴라를 돕는 메르세데스가 비달 대위의 열쇠를 훔치는 것은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같은 의미다. 오필리아도 메르세데스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쇠를 찾는 것이다.
스페인 내전이 진행되고 있는 현실과 지하왕국의 공주로서 과제를 수행하는 오필리아의 환상적인 이야기가 팽팽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둘은 내적인 의미의 조응으로 화합된다. 오필리아의 미래상은 메르세데스다. 오필리아는 오직 자신을 위해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열쇠를 찾지만 메르세데스는 대의를 위해 열쇠를 훔친다. 하지만 마지막에 오필리아가 희생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깨달게 되고 메르세데스의 모습과 합쳐진다. 전혀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혼란스럽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합일되는 까닭은 두 이야기의 심층적 의미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희생이라는 가치에 대한 추구가 〈판의 미로〉의 중요한 주제이나 다른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동화에서 새아버지나 새어머니의 형상은 아이들의 근원적인 공포를 환기시킨다. 동화 속에서 아이들을 학대하는 새아버지나 새어머니는 진짜 자기 자식이 아니어서 그럴 것이라고 아이들은 동화를 이해한다. 그러나 새아버지와 새어머니의 모습은 아이들이 친부모에게서 느끼는 것이다. 〈신데렐라〉 〈장화홍련〉류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동화나 민담으로 전해지는 까닭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사랑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오필리아도 새아버지 비달 대위를 두려워하며 그의 폭력성을 두려워한다. 주머니에 든 회중시계를 항상 꺼내보는 비달 대위는 시간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영원한 시간이 존재하는 지하왕국으로 돌아가려는 오필리아와 대조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결국 현재의 삶을 포기한 오필리아는 영생을 얻고 현재의 시간에 사로잡힌 비달 대위는 죽음을 맞이한다.
오필리아의 영생은 에필로그식으로 덧붙여진 장면으로 묘사된다. 물론 현실의 오필리아는 죽지만 그녀가 죽는 순간 “지혜로운 공주님”이라는 판의 목소리가 들리고 지하왕국에서 들어간 오필리아의 모습이 보인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스페인 내전의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현실에서는 오필리아처럼 희생되나 지하왕국에서 영광된 삶을 누리는 보상을 받고 있다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유치해질 수 있지만 〈판의 미로〉처럼 판타지로 보여주면 거부감 없이 보상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다.
희생과 보상, 이 두 가지 가치가 강한 설득력을 가지면서도 너무 앙상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이를 위해 〈판의 미로〉는 현실과 환상이 조합되어야만 했다. 〈판의 미로〉는 현실이 환상을 비추고 환상이 현실을 지시하는 훌륭한 예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