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9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원
중대부속고등학교 3학년 이원희
혐오
채도 낮은 하늘은 위에 반투명한 스크린을 덧씌운 것처럼 흐렸다. 나무 그늘 아래서 이마를 괴고 엎드린 듯, 하늘이 왠지 낮아진 것 같았다. 먹구름이 세상을 가리고 있었다. 어깨를 가볍게 두 번 두드리는 감각에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애 공책 한가운데에 가지런히 글씨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수화는 어떻게 배웠어?
첫 학기 자기소개 시간에 말없이 한참을 서있다가 대뜸 오케스트라라도 지휘할 듯 양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는 빠르게 움직여 모두를 놀라게했던 애였다. 그 때 그 자기소개를 통해 그 애의 이름을 안 것은 교실에서 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내가 그 애의 옆자리에 앉게 된 이유다. 왁자지껄한 교실 가운데서, 관객이라곤 그 아이밖에 없는 내 방백이 작게 퍼졌다.
“보청기를 끼고 다니는 친척이 있거든. 수화로 대화하진 않는데, 예전에 가르쳐준 적이 있었어.”
그 애는 내 말을 듣고는 써놓았던 글씨 아래에 빠르게 그렇구나, 라고 적었다. 그러는 너는? 하고, 돌아온 질문에 그 애는 망설이는 기색없이 샤프를 움직였다. 검은색 제도샤프의 끝이 기울었다. 나는 그 애가 글을 써나가는대로 족족 읽었다. 아예, 말을, 못하게, 된 줄, 알았어서. 근데, 아니더라. 그렇게 대답하고 그 애는 그저 웃었다.
말하자면, 꼭 민들레 씨같은 애였다. 작고 하얗고 가볍고 꼭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자기 목소리가 없는 대신 그 애는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는 민들레 씨처럼 수많은 소리를 달고 다녔다. 꽃이 시든 자리에 어느샌가 피어났던 작은 민들레, 그것을 보고 반갑다는 듯 웃어보였던 그 애의 얼굴이 인상에 깊게 남아서였을지도 몰라. 그 애 곁에 머무르는 사람은 없어도 곁을 떠도는 소문은 많았고 그래서 그 애는 늘 외로웠다.
함묵증. 장애인이라는 소문이 돌 때도 그랬지만, 그 애를 향한 혐오가 언제나 가시를 두르고 달려오지는 않았다. 그림자처럼 그 애 뒤에 붙어서 천천히 그 애에 대한 말들을 퍼뜨렸다. 정신병자, 겁쟁이, 타인과의 관계를 쌓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 많은 수식어들이 그 애 등에 달라붙어 피부에 스며들어 그 애가 가진 수많은 것들이 존재를 지워나가고 있었다. 그런 태도는 선생님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네가 걔 아니냐? 말 못한다던 애. 요즘 세상이 너무 쉬워져서, 너같은 애들도 잘 살고 그러잖냐, 너 참 운이 좋다.”
교탁의 자리 배정표 위, 그 애 이름이 유난히 돋아나 보였는지 선생님은 수업을 끝내고 대뜸 그 애에게 말을 걸었다. 반 아이들은 불안한 듯 그 애를 살펴보고 있었다. 반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요즘은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데. 잘 해라, 응?”
분위기는 점점 굳어가고 있었지만, 다들 그 애를 따라하기라도 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 사람은 선생님이고, 우리는 학생이니까. 공포를 머금은 어둑서니처럼 부푼 고요가 그 애의 등을 짓누르고 있었다. 끄덕이는 그 애의 움직임이 이상하리만치 부자연스러웠다. 먹구름이, 세상을 가리고 있었다.
“그 선생님 무례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잖아. 어쩔 수 없었어.”
하필 마지막 교시에 그 선생님이 들어오다니! 나는 우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그 애 표정을 살피려 할 수 있는 한 옆에 바짝 붙었다. 유기되어버린 것처럼 세상 모든 소리로부터 떨어져나와 신발 아래 물 웅덩이의 찰박이는 잡음조차 그 애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닌 듯 했다. 나는 어떻게든 그 애를 위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있지. 비 오는 날에는 목소리가 더 아름답게 들린대. 음파가 빗방울에 부딪혀서 그렇다던데.”
“….”
“응…. 지금은 그래도, 나중에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주 말을 못하게 된 것도 아니고….”
거기까지 말을 했을 때, 그 애의 얼굴이 보였다. 그건 분명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내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당황할 무렵, 그 애 우산의 물미가 뒤쪽으로 기울자 그에 세계의 회전축이 기우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둘러싼 복도 위 이런저런 소문들을 상기하는 듯한, 복잡한 슬픔이 그 애의 얼굴을 느릿하게 덮어갔다. 먼 발치서 우레처럼 몰려오는 빗소리와 함께 물안개가 빌딩숲을 감싸고 돌았다.
민들레는 대홍수 속, 노아의 방주에 타지 못한 채 씨만을 양지로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애 발치에 민들레 씨가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애의 등이, 기도하듯 굽었다. 빗소리가 소문처럼 그 애의 목소리를 퇴색시켰으니 나는 처음으로 그 애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나, 나는, 너, 같은, 애들이, 제일, 시, 싫어….”
띄엄띄엄 목구멍 밖으로 끌려나온 음절과 음절 사이로 끝없는 장마를 선포하듯 빗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혐오와 동정에 파묻힌 그녀는 민들레를 닮았다. 대홍수 속 도망치지 못하고 물 밑에 잠겼던 민들레. 나는 상체를 숙이고 오래간 울음을 내뱉는 그 애를 그저 바라보았다. 등을 감싼 교복의 흰 천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민들레의 마지막 기도였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9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상1
고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이수정
이것이 혐오입니까
1.
나는 닭다리를 싫어해. 마치 네 다리 같아서.
광수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순간 집 안이 고요해졌다. 내 기침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광순ㄴ 잠시 내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그러니까 헤어지자고,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거기에 대고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오면서 샀어. 마지막이니까.
광수가 내 침대 위에 치킨 한 마리를 올려놓았다. 이럴려고 사온거니. 나는 따지고 싶었지만, 기침이 계속 새어나오는 까닭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오전 11시, 닭다리를 싫어한다던 광수가 나를 떠났다. 나는 혼자 닭다리를 뜯었다. 내 다리 살점도 이런 느낌일까. 나는 내 허벅지에 입을 가져다댔다. 기름기 가득 묻은 입으로 허벅지를 깨물었다. 고름과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생각보다, 맛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허벅지를 깨물었다.
2.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치킨 공장 안에서 매일 닭비늘을 벗겨냈다. 목덜미 비늘에 작은 갈고리를 걸고 아래로 잡아당기면 닭은 맨몸이 되었다. 월 130만원-학비, 식비, 월세 등등을 빼고 나면 남는 돈 8만원을 받으며 일하던 나는 생각했다.
역겨워. 물론 이 닭비늘 뿐만이 아니라 그냥 이 상황 자체가 역겹다. 진짜 역겨워.
나는 매일 구역질을 했다. 처음엔 ‘역겨워서’ 그런 건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리에 난 20cm짜리 종용 때문이었다. 나는 더이상 ‘역겹다’라고 말하고 못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 몸에 달라붙은 꼴이 돼버렸으니까. 종양은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어떤 날은 이것이 다리인가. 종양인가 헷갈리기도 했다. 내가 수술대 위에 올라간 날, 의사는 처치불가능이군요, 이 종양은, 이라고 말했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 더 불어난 종양만을 매달고 - 수술대 위에서 내려와야했다. 분명 그날 광수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네 종양조차도 사랑해. 진심으로 말야.
3.
나는 허벅지에 대강 붕대를 둘러 감으며 그날 들었던 광수의 말을 생각했다. 왜 두달만에 너는 내 다리를 닭다리로 보게 되었니. 대체 왜 그런거야.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입에 남아있던 치킨 살점들 때문에 말소리가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치킨 몇 조각을 입에 더 우겨넣고 광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광수는 통화연결음이 한참 울리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내 번호를 벌써 지운 건지. 여보세요, 누구세요, 라고 말했다.
광수야. 난데. 물어보고 싶은 게…….
전화가 끊겼다. 나는 까만 화면을 멍하게 바라보아다. 내 얼굴이 점점 흐릿하게 보여왔다.
광수야. 묻고 싶은 게 있었어. 네가 날 보며 느낀 것과 내가 닭비늘을 보며 느낀 것, 그리고 지금 치킨을 보며 느끼는 것과 네가 그날 사랑해라 말한 것, 이게 모두 무엇일까? 나는 답을 알고 싶어. 그러니까 전화를 한 번만 더 받아주면 안 될까?
광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묵묵히 치킨을 뜯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9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상2
주성고등학교 3학년 김 현
혐오 교실
3반의 반장은 밤하늘보다도 새카만 머리카락과 나잇대에 맞지 않게 유달리도 말간 얼굴을 가진 아이였다. 교실의 천장만큼 높은 웃음소리가 퍼질 때면, 나도 모르게 그 아이를 훔쳐보게 되었다. 창가에 앉은 아이. 창의 유리가 빛을 투영하고 속눈썹에 햇살이 내려 앉은 것을 본다면. 누구도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내가 3반이란 사실이 좋았다.
화요일의 교실답지 않게, 반 전체가 붕 떠있었다. 금방 날아오를 준비를 하듯 지면에 살짝 떨어진 열기구처럼.
“너 들었어?”
뭔일이냐 묻기도 전에 짝꿍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 학년 애가 야자 끝나고 교실에서 2학년 선배랑 키스하다 걸렸대.”
그제서야 이 달뜬 분위기가 이해됐다. 별로 넓지도 않은 교실에 여러 소리들이 갇혀 웅웅댔다. 이쪽 모서리에서 떠들던 아이는 저쪽 모서리로 말을 옮기기 바빴다.
“걔가 누군데?”
“모르지. 우리 중에 숨어있다고 생각하면 소름 돋아.”
이럴려고 여고 온 거 아냐?쉴 새 없이 떠들며 혐오감을 여과없이 드러내던 짝꿍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방송을 할 요량인 듯 소음이 새나왔기 때문이다. 짝꿍의 입을 막아 준 스피커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아, 아. 1학년 3반에 강언주 학생. 2학년 5반 오연수 학생은 지금 당장 본 교무실로 오세요.”
교실이 얼어붙었다. 이곳 저곳 부유하며 소문의 주인공을 찾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육십개의 시선을 받아내던 한명이 일어났다. 시선을 진 뒤통수는 푹, 떨군 채였다.
“아.”
침묵의 교실에 짝꿍의 외마디 외침만 울려 퍼졌다.
강언주, 3반의 반장은 소리도 없이 교실을 나간 후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교실을 띄웠던 소문은, 삽시간에 전교로 퍼져 나갔다. 각 교실을 울렸던 방송을.
수업시간에 들어와 빈자리가 누구냐 묻던 선생님들도 좌석표에 적힌 이름을 보며 그저 출석부를 덮고 수업을 진행하셨다.
“야, 진짜 몰랐다.”
“잘도 숨겼네.”
모두의 선망을 받던 반장이 한순간의 얘깃거리고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한 아이가 비워져있는 자릴 가리키며 말했다.
“가까이 가지 마라. 옮는다.”
무엇을? 이라 묻기도 전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번졌다. 깔깔, 더러워. 톤 다른 웃음소리가 귓가에 섞여 들었다. 무수한 웃음소리, 입술들이 움직였다.
그 안에서 하하, 한숨같은 웃음을 내뱉는 내가 있었다.
반장에 대해, 동정인지. 뭔지 모를 감정이 싹텄다.
열기가 가시고 불이 꺼져, 별빛인지 조명인지 모를 빛만 새어오던 교실. 가만히 창 밖을 내다보노라니. 혼자라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나 보다. 아직 환한 복도 쪽에서 어두운 교실로 얼굴을 내민 아이가 물었다.
“소혜야, 너 안 가?”
“……주번이라서.”
그렇구나, 먼저 갈게. 얼굴은 금세 빛 속으로 사라졌다. 타박 타박, 멀어지는 걸음소리를 듣고 있는데. 질질, 저 멀리서 실내화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 한 쪽 드는 것조차 버겁단 듯. 세상 모든 무게를 끌어오던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곤 빛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언주였다.
반나절 만에 재회한 얼굴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우리가, 내가 사랑했던 반장의 모습 그대로. 별을 담아 총기로 반짝이던 눈동자도 여전히.
난 뭘 기대했던 걸까.
날보고 멈칫하던 움직임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싸려는 듯 했다.
“좋아해?”
그 여자를, 덧붙이는 질문에 못들은 걸 들은 것처럼 눈동자가 커다래진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교실에서 무수히 들었던 단어를 입에 담았다.
“불쌍해.”
그리고 더러워. 한음절마다 강언주의 고개가 꺾였다. 그때, 그때 처럼 단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겠단 양. 꺾여가던 상체. 강언주는 그렇게 부서져 내렸다. 나는 부서진 조각을 보지 않으려 고갤 돌린 채, 그대로 나아갔다.
복도에 내리쬐는 조명들이 햇살같다 느꼈다.
햇살을 향해 발을 내딛는데 시야는 여전히 캄캄했다.
난 분명 떠나고 있는데 이상한 감각이었다.
캄캄한 교실을 떠나 복도로 향했다.
강언주의 조각들을 교실에 남겨두고, 그 모든 혐오를 남겨두고, 나 자신도 남겨두고. 혐오스런 교실을 떠났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9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1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 3학년 추예원
혐오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쇠냄새가 실려 있었다. 천장에 달린 정글도가 바람에 흔들렸다. 화로 속에서 자두같은 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집게를 들어 화로 안을 쑤셨다. 화로 안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물기서린 눈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리고 화로 안에 있던 작은 스테인리스강 조각을 집게로 꺼냈다. 스테인리스강 조각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철판 위에 스테인리스강 조각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철판 옆에 녹인 망치를 들었다. 딱딱딱…. 대장간 밖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장간 밖으로 발을 옮기고, 소리를 향해 눈을 돌렸다. 마당 구석에 있는 작은 나무 위에 쇠딱다구리가 메달려 있었다. 쇠딱다구리는 갈색 나무기둥을 향해 부리를 내리찍고 있었다. 그때, 언덕길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식이, 쇠는 식혀놨나?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크게 ‘네’라고 답했다. 나는 대장간 안으로 빠르게 발을 옮겼다. 그리고 망치를 치켜들어 붉게 달아오른 스테인리스강 조각을 향해 내리쳤다. 탕탕탕! 스테인리스강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내 얼굴을 덮었다. 그때, 내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메질…똑바로 혀! 각이 안 나오네! 내 옆에 선 아버지는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목구멍을 긁고 나온 아버지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입밖으로 나올려는 욕을 간신히 먹고, 다시 망치를 천장을 향해 치켜들었다.
어이, 현식 애비! 내리막길 아래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에 나는 메질을 멈추었다. 해주 아저씨는 헉헉, 거리며 오르막길을 오르더니, ᄆᆞᆼ으로 들어왔다. 해주 아저씨의 손에는 신문지 덩어리가 잡혀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던 아버지는 천천히 해주 아저씨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해주 아저씨는 나와 아버지 앞에 신문지 덩어리를 내려놓았다. 신문지 덩어리의 살짝 벌려진 틈으로 서슬퍼런 칼날이 보였다. 서슬퍼런 칼날 위에 길다랗게 금이 가 있었다. 녹여서 더 단단하게 만들어줘! 해주 아저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대장간 구석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나는 대장간 중앙에 있는 아궁이로 발을 옮겼다. 아궁이 속, 앙상한 나뭇가지들의 몸에 주름이 자글자글 새겨져 있었다. 나뭇가지가 타들어가는 소리에 이어서 쇠딱다구리가 나무기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근디 현식이는 이 후진 산에서 잘도 사네. 해주 아저씨는 대장간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대장간이 있는 주변에 늘어선 산나무들이 바람에 몸을 흔들고 있었다. 너는 이 산 속에 있는 대장간보다는 저기, 밑에서 살고싶지 않나. 해주 아저씨는 손끝으로 산아래를 가르켰다. 하늘을 향해 치솟아오른 건물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지랄허지 마라. 내 아들은 여기서 철 두드리고 살꺼여!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아버지의 미간 위에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리셨다. 얼른, 술이나 사와! 아버지의 손에 잡힌 지폐에 검은 때가 묻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폐를 잡았다.
검은 비닐 안에 든 소주병에서 청량한 소리가 났다. 한손으로 얼굴을 쓸자, 손에 검은 철가루가 묻어나왔다. 길거리에 늘어선 상점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건물 위에 붙어 있는 네온사인들의 불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그때 내 앞에서 양복을 차려 입은 남자가 나를 지나쳐갔다. 나는 남자를 돌아보다가 입술을 물었다. 나는 옆에 있는 상점의 유리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리창 위에 내 모습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목이 늘어난 흰티에 철가루가 묻어있었다. 회색 운동화는 때가 껴, 검게 물들여져 있었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흉터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 아들은 여기서 철 두드리고 살꺼여! 아버지의 말이 귓바퀴에서 웅웅거렸다. 네온사인의 환한 빛이 내 눈앞을 뿌옇게 뭉개버렸다. 산길의 오르막을 오르는 발이 무거웠다. 가까스로 오르막을 오르자 연마 기계 앞에 앉아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아버지 앞에 술이 든 검은 봉지를 내려놓았다. 현식이. 너 풀무질 좀 해라. 아비 피곤타. 술병 뚜껑을 따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눅눅했다. 나는 화로 구멍에 길게 나와 있는 철막대기를 응시했다. 그리고 바닥을 보았다. 싫, 싫어요. 가까스로 내뱉은 내 말이 떨렸다. 아버지는 술병을 바닥에 냐려놓았다. 술병의 주둥이에 달려 있던 물방울이 땅으로 눈물처럼 떨어졌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네가 그러고도 내 아들이냐. 우리 집안이 이 대장간을 대대로 이어받았다! 아버지의 얼구은 화로 안, 불처럼 붉게 물들여졌다. 이제, 대장간에서 칼을 사서 쓰는 사람은 없어요! 내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돌렸다. 하, 하기 싫어요. 떨리는 내 목소리가 대장간 안을 채웠다. 딱딱딱! 대장간 밖에서 들려오는 쇠딱다구리의 나무기둥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귓속을 파고들었다. 닥치라, 너는 이 아비, 그리고 할비처럼 철! 두드려야한다. 저 쇠딱다구리 봐라. 나무를 엄청나게 두드리고 있잖냐. 너도 저렇게 두드려라! 아버지의 말에 술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는 술병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멍하니 대장간 안을 바라보았다.
화로 구멍에서 길게 나와 있는 철막대기를 빼고, 넣고를 반복했다. 팔뚝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딱딱딱. 여전히 쇠딱다구리가 나무기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끄러워!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마당으로 나갔다. 해는 붉게 충혈된 채,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노을빛에 바닥에 들어진 내 그림자는 붉게 멍들었다. 마당 구석에 심어진 잔디가 바람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하늘은 퍼렇게 멍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쇠딱다구리가 내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쇠딱다구리가 달라붙어 있는 나무를 보았다. 그래, 그만 두드려. 너도 힘들잖아!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쇠딱다구리가 달려 있는 나무로 발을 옮겼다. 나무의 피부는 벗겨져 살색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쇠딱다구리가 얼굴을 돌리더니, 날개를 폈다. 쇠딱다구리는 퍼렇게 멍든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나는 날아가는 쇠딱다구리를 보다 저 멀리에 있는 산밑을 보았다. 네온사인이 켜진 산 아래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있는 이 대장간이 암흑처럼, 터널처럼 느껴졌다. 저기로 가면 빛을, 출구를 볼 수 있을까. 혐오스러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저 멀리 날아가는 쇠딱다구리의 날개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산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혐오 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9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2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윤정은
광장
유진은 눈 앞에 펼쳐진 하와이를 다소 허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입구에서부터 길을 따라 심어진 플라타너스 가로수 너머에는 붉은색 튜브 몇 개가 떠다니는 해변이 있었다. 손바닥을 앞으로 쭉 내밀면 다 가려질만큼 좁은 해변이었다. 해변 양 옆에는 수목원이나 무대 광장같은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들어가서는 안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나뭇잎과 바닥에 낀 이끼가 이 여행은 잘못되어도 한참은 잘못되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유진은 해변가에서도 절대 신발을 벗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저만치 앞ㅇ서 걸어가는 가족들의 뒤를 따랐다. 녹슨 ‘하와이 랜드’ 간판이 바람에 끼익거리며 흔들렸다.
유진의 하와이 행이 결정된 것은 약 이주일 전이었다. 그때 유진은 거실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잘라진 수박을 먹으며 가족들과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여름이 돌아오면서 부쩍 늘어난 휴양지 광고가 오 분에 한 번 꼴로 방송되었다. 유진은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쪽으로 고개를 내민 채로 반짝거리는 바다를 눈에 담았다. 그때였다.
“죽기 전에 다시 한 번만 하와이를 가봤으면…….”
소파에 비스듬하게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버지, 하와이요?”
“그래, 거 있잖냐. 너 어렸을 때 자주 가던 곳.”
할아버지는 먹던 수박을 접시에 내려놓고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텔레비전에서는 광고가 끝나고 다시 재방송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유진은 어쩐지 벙 찐 것 같은 아버지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수박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 비행기 한 번 못 타봤다는 아버지였는데 하와이라니. 유진은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옛날 이야기를 시작하면 기본이 한 시간이었다. 어제 저녁, 어머니가 여행을 갈 것이니 짐을 싸라고 말하기 전까지 유진은 그 이상했던 하와이 대화를 잊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여기는 어째 변한게 하나도 없냐. 할아버지가 상기된 얼굴로 짐을 풀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유진은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하와이를 가는데 짐을 전날 밤에 챙길 때부터 이상하기는 했다. 그런데, 진짜 하와이가 아닌 건 그렇다쳐도 이렇게 인적도 없이 휑한 다 쓰러져가는 워터파크라니. 간식도 츄러스와 핫도그가 끝이었는데다 선배드에는 개미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유진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선배드에 엉덩이만 걸친 채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SNS에는 진짜 하와이를 간 친구가 사진을 올리고 있었다. 유진이 그 사진에 좋아요를 누를 때였다.
“잠시 후 광장에서 돌고래 쇼가 이어질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를 스피커로 안내방송이 울려퍼졌다. 이런 곳에 돌고래라니 대단하다고 해야하는지. 이상하다고 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 분도 채 안되어 유진은 절대 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광장 의자에 앉게 되었다.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는지 열댓 명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안쪽에서 사육사와 함께 돌고래 두 마리가 나왔다. 공중에 매달린 원을 통과하고, 줄무늬 공을 코에 얹어 돌릴 때마다 객석에서는 소박한 박수가 터져나왔다. 평범한 공연이었다. 멍하니 돌고래의 지느러미를 바라보던 유진은 누군가 손을 잡는 감촉에 퍼특 정신을 차렸다.
“우리 손녀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랑 손잡고 이런거 저런거 많이 보러 다녔는데, 시간이 참 빨라.”
할아버진ㄴ 공연이 끝날 때까지 유진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맞잡은 손이 익숙한듯 낯설었다. 언제부터 할아버지의 손에 이렇게 주름이 늘었는지. 언제부터 이런 광장에 앉는 것을 깨끗하지 않다고 피하게 되었는지. 돌고래가 일으키는 물보라가 반짝이며 먼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돌고래를 보며 환하게 웃는 유진과 그런 유진을 보며 환하게 웃는 할아버지.
광장을 빠져나온 뒤 할아버지는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했다. 아버지는 재차 아쉽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할아버지는 대답 없이 주차장 쪽을 향해 걸었다. 유진은 이곳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 뒤에서 가족들을 따라 걸었다. 녹슨 하와이 랜드 간판은 여전히 스산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간판 밑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유진도 할아버지를 따라 뒤를 돌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돌고래를 보며 손뼉을 치던 때 그랬던 것처럼 할아버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저 멀리 수목원과, 좁은 해변과, 돌고래가 사는 광장이 보였다. 집에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하와이가, 아침과는 다른 빛으로 반짝였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9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3
양업고등학교 3학년 장예솔
혐오의 시간에 관하여
푸르스름한 안개가 고요한 파도 아래 짙게 깔리던 밤. 수평선 너머 차오르는 달빛이 바다를 채우고 출렁이는 물결 위를 비추자 현주는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의 발은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젖은 모래를 뒤집어 쓴 채 텅 빈 모래사장 위를 활보했고 공허한 시선이 머무르는 곳엔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시계소리만이 똑딱거리며 울리는 듯 했다.
미래 고시원. 뜨거운 여름햇살이 고시원 이름이 적힌 낡은 간판을 뚫고 현주의 방 창틀에 내려와 앉았다. 작은 침대와 책상 한 개를 힘겹게 구겨 넣어야만 들어갈 법한 크기의 방. 벽에는 온갖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다른 한 쪽의 책꽂이에는 두꺼운 법전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현주는 슬며시 눈을 떴다. 지난 방에는 두 시간도 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째깍거리는 시계바늘이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바람에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현주는 그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이불속에서 귀를 딱 틀어막았다. 암막커튼 아래로 몰래 비져나온 햇살이 방바닥에서 넘실거렸다.
그녀의 방에는 네 개의 시간이 흐른다. 한 쪽 벽면 위에 시계가 한 개, 이부자리 머리맡에 한 개, 그리고 책상 한켠에 놓인 스톱워치와 현주의 손목을 감싼 손목시계에서의 시간이 제각각으로 흐른다. 현주는 삼수생이었다. 그녀가 이 작은 단칸방에서 해야 할 일이라곤 스톱워치의 전원을 올리며 하염없이 책장을 넘겨대는 것 뿐이었는데,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소리없는 경쟁에 맞서야하는 것은 고욕이었다. 그건 마치 이 상황을 못마땅해하며, 암막커튼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실오라기같은 희망줄을 잡고있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현주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소주병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짙은 초록의 투명하고 주둥이가 길쭉한 모양새의 소주병. 그것이 아버지였다. 와장창 깨져서 그 조각이 왠만한 다른 칼날보다 날카로운 소주병. 아버지가 이렇게 변한 것은 아마도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그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렸을 적, 숙에 취해 들어오는 날의 아버지는 항상 물건을 집어던져 산산조각을 내기 일수였기 때문에 현주는 집안에서 깨질만한 물건들을 모두 서랍이나 선반 깊숙한 곳에 숨겨 놓곤 했다. 도 아버지가 고함을 지르거나 화를 낼 때면 밖이 잠잠해질 때까지 옷장 속에 숨어있는 것도 그녀의 일상이었다. 그럴 때마다 현주의 손목에 매달린 시간은 째깍째깍, 하는 소리만 낼뿐 고장난 기차처럼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쭈그려 앉은 그녀의 약을 올렸다. 재수없어. 현주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다기 책장을 넘겼다. 평소처럼 한 손에는 스톱워치를 들고 또 다른 한 손에는 펜을 쥐었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회상의 굴레에 그녀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나도 모르는 새 아버지를 향했던 불편한 감정은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가시덩굴이 되어 나를 아프게 옭아맸다. 딱 방 한칸. 그래, 이곳이 내 한계인거지. 나는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그때 선반에 놓은 휴대폰이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진동했다. 아버지였다.
네에 아버지. 그래, 현주냐. 몇 마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십 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전화기 사이로 정적이 흘러들어왔다. 알 수 없는 감정에 나는 몸을 떨었다. 잘 지내고 있니? 다정하고 따뜻한 말투. 잠시 무어라 대답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새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아부지, 이제 술 안마신다. 소주 끊었어. 담배도 안피고 보건소 다니면서 치료도 받는다. 그러니까 공부가 힘들면 그만 집으로 돌아와라. 조급하게 생각진 말고. 그럼 끊는다.
무언가 대답을 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신호음만 가득한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선반의 두꺼운 법전들과 먼지 쌓인 벽시계 위로도, 창틀의 햇볕에도 방바닥의 그림자에도 차츰 번졌다. 눈물이 한 방울 툭, 하고 그녀의 손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현주는 슬리퍼를 끌고 고시원에서 조금 떨어진 부둣가로 향했다. 어수선한 배들의 경적소리와 멀리서 쓸려오는 짭쪼름한 바닷바람이 이곳이 항구임을 알려주었다. 방에서는 들리지 않던 작운 소음들이 밤바람과 함께 그녀의 귓바퀴를 스쳐 지나갔다. 손목에서 알짱대던 시곗바늘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검은 바다 위에서 하얗게 빛나는 달이 파도의 표면으로 내려와 또 다른 모습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녀는 그 그림자가 항시 무언가에 얽매여 있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혐오라는 감정또한 자기자신의 일부임을 깨닫는 데에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손목에 감긴 체인을 풀어 바다에 비친 그림자를 향해 힘껏 던졌다. 알 수 없는 해방감에 그녀는 몸소리 쳤다.
현주가 던진 시계는 아버지를 닮았고, 현주를 닮았다. 매번 엇갈리는 시침과 분침이 만나는 곳에는 늘 아픔이 있었다는 것이 그랬고, 서로가 그 아픔을 마주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랬다. 그 아픔이 또다른 혐오를 불러오게 됨으로서 그 시계의 시간은 멈추게 된다.
다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면 발목 그 쯤 부근에서 차가운 바닷물이 찰랑거렸다. 현주는 한 여자의 손을 잡은 채 활짝 웃고 있다. 아아, 이 사람이었나. 나의 어머니.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의 얼굴이 웃음소리에 묻혀 점점 흐려졌다. 낯선 아버지의 미소는 온화하고 따뜻해서, 그 온기는 순식간에 현주를 덮어 버렸다. 그 이후로 십년이 훌쩍 넘은 추억은 시간과 함께 나이를 먹어갔다. 가족이 있었구나. 다정한 어머니와 그리운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해변을 거닐었었지. 새초롬하게 빛나는 달빛이 현주가 서 있는 모래사장 가득 차올랐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9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4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3학년 양 지
A군과의 인터뷰
면담실의 문이 열린다. A군이 걸어들어온다. 조금 긴장감이 서려있는 표정이다.
본인: 의자에 편하게 앉으세요. 아, A군이라고 불러도 되죠?
A군: 아, 네.
A군이 의자에 앉는다. 엉덩이가 의자의 앞쪽으로 쏠려있고 손가락을 쉴새없이 꼼지락거리다가 허벅지 사이에다 끼워넣는다. 불안감이 있을 때 나타나는 행동이다.
본인: 그래요. A군. 간밤에 잠은 잘 잤어요?
A군의 눈동자가 오른쪽을 향했다가 허벅지로 옮겨간다.
A군: 잘 잤다고 해야하나? 악몽을 꾸긴 꿨는데, 편안해요.
본인: 악목이요?
A군: 네.
본인: 혹시 꿈 내용이 기억 나시나요?
A군이 길게 눈을 감았다가 뜬다.
A군: 시작은 교실 바닥이였어요. 음, 그리고 B군이 나를 발로 밟았어요. 아, B군은 우리 반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애에요. 싸움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집도 부자에요. 어쨌건 B군이 나를 밟는 일은 자주 있으니까 그런 꿈을 꾼 게 전혀 이상하지는 않았어요. 나는 계속 맞다가 코피를 흘렸고, 그게 B군의 신발에 묻었어요. 그러자 B군은 그대로 나를 끌고 화장실로 갔어요. 아무도 말리지 않았어요. 그리고 나는 또 맞았어요. 이도 부러졌어요. 그래서...
A군이 잠시 말하는것을 멈췄다. 지금 맞고있는 것 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어깨를 둥그렇게 만다.
본인: 그게 끝인가요?“
A군: 아뇨, 더 있어요.
A군이 말 끝을 흐리고 한참동안 말하지 않는다. 허벅지 사이에 끼워넣었던 손 중 오른손을 들어 손톱을 물어뜯는다. 모든 손톱의 상태가 엉망인것을 보니 손톱을 물어뜬는 게 습관인것 같다.
본인: A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본인의 질문에 A군이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A군: ... 그래서 제가 B군의 머리를 옆에 있던 껌칼로 내리쳤어요. 날카로운 면으로 찍어서 피가 났어요. B군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마구잡이로 나를 쳤어요. 나는 너무 아파서 이번에는 껌칼로 B군의 목을 찍었어요. 피 냄새가 지린내에 섞여서 지독했어요. B군은 화장실 바닥에 쓰러졌고, 어... 그리고 그게 끝이에요.
A군이 크게 숨을 내쉰다. 책상 위로 두 손을 올린다. 더 이상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지 않는다.
본인: A군, 오늘이 며칠인지 아세요?
A군: 7월 8일이요.
A군이 어제의 날짜를 말한다.
본인: 오늘은 5월 9일이에요.
A군의 눈동자가 커진다.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어깨가 위로 올라간다. 놀라움을 느낄 때 나타나는 행동이다.
본인: A군, B군은 죽었어요.
A군의 입술이 더 벌어진다.
A군: B군이요? 왜요? 계딴에서 굴렀대요? 교통사고라도 났대요?
A군의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말하는 속도도 앞서보다 빠르다.
본인: A군, 잠에서 깬 기억이 있나요?
A군이 벌렸던 입을 다문다.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계속 이리저리 옮긴다.
본인: A군, 당신이 B군을 죽였잖아요.
A군이 환하게 웃는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9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5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이희정
비둘기 광장
또 한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왔다. 기름기로 뭉친 회색 깃털엔 음식물 쓰레기라도 뒤졌던 것인지 김치국물이 배어 있었다. 나는 마스크를 더 올려썼다. 거의 눈가 아래까지 올라온 마스크를 단단히 고정시킨 후 광장 가운데로 다가갔다. 중앙에는 비둘기 모양의 분수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비둘기 부리에서 굵은 물 한 줄기가 쏟아졌다. 몇몇 비둘기들은 이미 먹이냄새를 맡았는지 고개를 가닥이며 나에게로 왔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손에 든 좁쌀을 널리 뿌렸다. 뿌림과 동시에 비둘기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비둘기의 날개가 파란 하늘을 가리웠다. 이곳은 비둘기 광장이다.
비둘기 때문에 들어오는 민원은 한 둘이 아니었으나, 하루 이틀 역시 아니라. 시청 직원은 그 문제를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그 해따라 햇살은 피부를 따갑게 내리쬐었ㅇ며 아스팔트도 흐물흐물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비둘기가 음식물 쓰레기를 파헤치기라도 하면 그 냄새는 시 전체를 맴돌았다. 비둘기 시체처리도 문제였다. 하루는 시장의 딸이 길을 가다 차 바퀴에 깔려 껌딱지처럼 늘러붙은 비둘기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 이유 때문인진 몰라도 시장은 비둘기 특별령을 내렸다. 바로 비둘기 광장이었다. 나는 그 얘기를 옆에 있던 노숙자에게 전해들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노숙자에게 물었다.
“왜 잡지 않고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해요?”
노숙자는 뭘 모른다는 듯이 검지를 들어 까닥까닥 흔들었다.
“날아다니는 녀석을 쉽게 잡을 수 있겠냐? 그거 몰라, 그거, 성북동 피-죤. 한 곳에 몰아넣는다는 거지. 피-죤 광장인거여.”
확실히 비둘기 광장은 효과가 있었다. 광장은 사거리 한가운데에 지어져 조금이라도 밖을 나가면 차 바퀴에 깔렸다. 그럼 날아가면 될 터인데, 먹이를 먹으며 뒤룩뒤룩 살이 찐 비둘기들은 나는 방법조차 까먹은 건지 날개를 한 번도 핀 적이 없었다. 비둘기 사이에서 소문이라도 돌았는지 시에 있는 비둘기들은 점차 광장 안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곳의 먹이담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건 정말 좋은 일거리였다. 내가 거처하고 있던 지하철역에 전단지가 붙었다. 바로 이 먹이주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전단지를 뜯어 품 속에 감췄다. 그리고 구석으로 가 전단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기름으로 떡진 내 머리와 음식물 묻고 빨지않은 후레한 티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집 없는 노숙자에게 일을 건네주는 곳은 얼마 없었다. 그러나 그 전단지에는 아예 노숙자 우대라는 빨간 글자가 적혀 있었다. 수상쩍기는 했으나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가족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 나와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나는 옆자리 노숙자와 같은 조에 편성되어 B구역에 먹이를 준다. 처음에는 마냥 징그럽게만 느껴지던 비둘기들이 점차 귀엽게 보였다. 먹이를 하도줘서 그런지 이젠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애교까지 부렸다. 나는 먹이를 뿌리며 옆 노숙제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이 시장은 인간적이네요. 비둘기도 좋고, 시민도 좋은 이 방법을 채택하다니. 앞으로 비둘기들이 여기서 계속 살면 좋겠어요.”
내 말에 노숙자는 코웃음을 쳤다.
“미쳤어? 이걸 계속 유지하게. 돈이 얼마인데.”
나는 노숙자의 대답에 깜짝 놀라 눈만 껌벅였다. 그 당시엔 노숙자의 말이 이해되지않았다. 그저 구구, 울며 돌아다니는 비둘기에게 계속 먹이를 줄뿐이었다.
노숙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 때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날은 시의 비둘기가 모두 광장에 있게 된 기념비적인 날 바로 다음날이었다. 광장 안에 있는 직원 숙소에서 자고 일어나 여느때처럼 먹이를 주려고 나갔다. 나는 문을 열자마자 내 눈을 의심했다. 광장 전체를 이루었어야 할 비둘기들이 전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나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광장 안을 돌아다녔다. 남은 것은 먹다 남은 좁쌀과 회색깃털뿐이었다. 비둘기를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비둘기가 어떻게 되었는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차오르는 화를 견딜 수가 없어 길거리에 있던 나무를 발로 찼다. 어느새 노숙자가 내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진정해. 어차피 걔들은 유해동물이었어.”
나는 노숙자의 손을 뿌리쳤다. 먹이를 달라며 푸득이던 날개짓, 나뭇가지에 앉아 구구, 노래하던 그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유해동물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그건 누가 정한걸까. 누가 누구에게 유해하다는 걸까. 비둘기는 결국 성북동을 떠났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지만 맥없이 다시 풀려버렸다. 나는 말없이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는 직원들이 모여있었다. 공지사항을 듣는 듯했다.
“비둘기는 이제 사라졌으니 여러분의 일거리도 없어졌습니다.”
그 말에 직원들은 분개하며 이건 부당한 해고라고 외쳤다. 그러나 다음 말에 직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대신 이 광장에 남으셔도 됩니다. 음식은 무료로 제공되며, 나가시는 것 역시 자유입니다.”
분위기가 술렁였다. 하지만 아무도 나가려하지 않았다. 나는 숙소를 나서서 광장 끝에 섰다. 사거리 한 가운데에 있는 공원은 한 발자국만 나가도 차에 치일 게 뻔했다. 이 광장에는 이제 노숙자들밖에 남지 않았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9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1
안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강정호
광장
이빨이 없는 거대한 악어가 입을 벌렸다. 자신들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채, 사람들은 악어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악어의 입 속으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내가 있었다. 뱃 속 깊은 곳에서 매캐한 휘발유 냄새와 먼지가 섞인 바람이 불었다. 악어의 트림을 정면으로 맞은 나는 재채기를 했다.
무의식 적으로 몸을 90도로 숙이며 표를 건넸다. ‘즐거운 쇼핑 되세요.’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자 악어가 입을 한 없이 크게 벌렸다. 아반떼를 탄 중년 남성이 표를 낚아채곤 창문을 올렸다. 알바생들은 흔히 저런 부류의 고객들을 ‘노 룩 리시버’라 불렀다. 말 그대로 시선을 주지 않고 표를 받아가는 사람들. 눈도 마주치지 않는 그들에겐 한 마디 인사도 사치였다. 지하로 출근하고 지하로 퇴근하는 나에게는 당연한 처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껏 마신 먼지 탓인지 코 끝이 시큰했다.
나는 반지하방에 살았다. 아침에도 빛이 몇 갈래 들어오지 않아서 커텐을 쳐 놓으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할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반에서 어중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나는 마땅한 꿈을 찾지 못한 나는 그대로 너무나 큰 광장에 내던져졌다. 광장의 한 쪽 구석에서는 돈을 뺏고 있었다. 또 다른 한 쪽에서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무리가 벤치에 둘러 앉아 다음 미팅의 장소를 모색하고 있었다. 사회로 나올 때 부모들이 손에 하나씩 쥐여주는 흔한 숟가락 조차 없었다. 광장을 이리저리 서성이다 나를 향해 뛰어오는 조폭들을 피해 지하주차장으로 도망쳤다. 악어의 입 속으로 제 발로 걸어들어온 나는 악어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 였다.
환기가 잘 되지 않는 반지하에 살면서부터 얻은 비염은 하루종일 나를 괴롭혔다. 그나마 지상에서 숨 쉬는 시간에도 미세먼지를 마셨다. 일주일에 두 번 내다버리는 일반쓰레기는 늘 휴지로 가득 차 있었다. 가끔씩 이런데다가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는 양심없는 사람이 있다며 주인아저씨가 봉투를 풀어 헤쳤을 때도 그 안에 든 것은 꽉꽉 압축되어 들어있는 휴지 뿐이었다. 내가 담은 휴지 뭉텅이들을 보자 숨이 턱 막혔다.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봉투를 묶었다. 나는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휴지가 필요했다. 악어의 뱃속이 감당할 수 없이 꽉차자 눈알이 빨갛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코를 한 번 크게 들이키고 외쳤다. 알어가 소화시킬 시간이 필요해요, 더 자리가 없어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화를 클락션으로 대신했고 곧 뱃속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인파를 견디다 못하고 아래층에서 안내를 서던 아저씨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똑바로 못해!’소리가 클락션과 하모니를 이뤘다. 이윽고 아저씨는 입구에 ‘영업종료’라고 붙은 고깔을 일렬로 세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안으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나는 흘러내리는 콧물을 닦고 싶었지만 근처 어디에도 휴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내 눈 앞에 창문이 열린 작은 마티즈 한 대가 보였다. 차주가 깜빡했는지 창문이 끝까지 열려 있었고 조수석의 한 가운데에는 오백원짜리 일회용 크리넥스 티슈가 놓여있었다. 나는 치즈를 앞에 둔 생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안내 중 화장실을 가는 건 금지되어 있었고 거리도 꽤나 멀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팔만 뻩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휴지가 놓여있었다. 결심을 하고 차 앞으로 다가가 차 안에 손을 들이밀었을 때, 나는 카트를 밀고 나오던 한 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곧 ‘대형마트 알바생 김 모씨가 차량 안에서 휴지를 훔치려다 걸려, 황당한 사건’이라는 기사들이 포털사이트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맞서 대형마트들은 하나 둘씩 ‘잠재적 위험 요소’를 없앤다는 말과 함께 마트에서 안내를 하던 알바생들을 모조리 해고했다. 그리고 악어의 입 안으로 사람을 밀어넣는 존재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센서가 달린 최첨단 악어가 사람들의 이름표를 스스로 인식하고 알아서 입을 벌렸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한 표정으로 입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존재감 없이 방황하던 나에게 자리를 제공하던 악어는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는 카메라의 플래시와 함께 다시 광장에 버려졌다. 번쩍거리는 불빛에게 내 존재를 드러내긴 싫었다. 나는 다시 악어의 입 속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최첨단 악어가 나를 보곤 입을 크게 벌렸다. 나는 그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9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2
한국삼육고등학교 3학년 황보영
광장
봄이었으나 죽어가는 것들이 한창이었다. 내려앉은 간판, 무너진 돌담과 더이상 집이 아니게 된 벽돌 조각들. 간신히 피어난 개나리꽃 몇 송이의 향기가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계절이다. 부러진 십자가를 짊어진 낡은 교회에서는 우울한 찬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약 없는 희망에 매일을 거는 사람들만이 이 폐허에 남아 내일을 기다린다. 나는 어깨에 걸친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다. 20년 만에 찾아온 고향은 잿빛이 되어 있었다.
아이, 비키라니까요. 동료 인부가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길을 가로막고 있던 사내를 뿌리쳤다. 쉰 세는 족히 넘어보이는 사내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나는 동료에게 그쯤 하라고 일렀지만 동료의 눈빛은 더 사나워져 있었다. 자꾸 가만히 있으면 이 사람들이 우리를 만만한 줄로 안다고. 나도 뭐, 삽질이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우리도 먹고 살려고 하는 건데. 동료의 역정에 서성이던 사내는 이내 길을 되돌아갔고, 그가 떠난 자리에는 ‘재개발 절대 반대’라고 적힌 피켓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밤이 되어, 나는 인부들이 머무르는 작은 컨테이너 박스에서 나와 골목을 걸었다. 그늘에 몸을 숨긴 옛 건물들이 내 양 옆으로 스쳐 지나간다. 구멍게가, DVD룸, 중고 책방, 그네와 시소가 전부인 놀이터……. 좁은 골목을 지나 큰길로 접어들수록 하나씩 늘어가는 빛바랜 추억들. 하지만 그것들은 뜬소문 같아서 내가 자세히 기억하려 할수록 더 흐릿해져 갔다. 주병의 낡은 건물들이 모두 나를 보며 술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깨진 창문에 내 모습이 비치는 것 조차 두려워, 걸음을 더욱 재촉한다. 고향을 무너뜨리러 온 내가, 곧 무너질 것들의 입장에선 가증스럽게 보일 것이 뻔했으므로.
정신없이 걷다보니 나는 어느새 커다란 광장에 다다르러 있었다. 조경을 위해 설치한 거라곤 벤치와 작은 분수대 하나가 전부였지만, 이곳에서 마을 체육대회를 한 적이 있다. 늘 학교에서 겉돌던 나는 그 때 만큼은 혼자가 아닐 수 있었다. 나는 광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분수대로 걸어가 물이 고여 있었을 곳을 내려다 보았다. 둥글게 패인 석조 분수대의 바닥 위로 10원, 100원 짜리 동전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 사이에는 작은 쪽지들도 끼워져 있었는데, 펴 보니 ‘우리 마을을 지켜 주세요’ 라는 문구나 마을의 풍경을 스케치한 그림들이 새ㅕ져 있었다. 나는 쪽지들을 펴 하나하나 살펴보다, 이내 손을 뻗어 가득 쌓여 있는 동전들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짤랑거리며 흘러내리는 동전 소리. 나는 어쩐지 광장에 모였던 이들의 온기를 직접 만지고,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무너진 광장 곳곳에 몸을 기대고 있는 피켓이나 현수막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백 원 짜리 동전을 하나 꺼내 분수대 안으로 떨어뜨렸다. 무너져가는 것들에게 희망을. 이 광장이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도록. 나는 수많은 달들이 빛나듯 반짝이는 동전들을 보며 그렇게 빌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9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3
군산여자고등학교 3학년 엄정은
추억팔이
“쌉니다, 싸요! 다들 한번씩 와서 구경들 해보세요!”
내가 사는 이곳의 사람들은 달력의 숫자가 파랗게 빛나는 날마다 한 데 모여 서로 무언가를 사고팔았다. 그게 무엇이든, 얼마나 오래되었든, 사람들은 제가 가진 필요없는 것들을 가지고 나와 이곳 광장에서 팔았고, 또 누군가는 그런 물건을 필요로 하고 헐값에 구입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흔히 벼룩시장이라고 불렀다. 왜 벼룩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으니ㅏ, 나는 그 시장에 꽤 자주 나가는 편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토요일마다 나는 이 광장에 나왔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었다. 저편에서 보이는 푸른 바다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알싸한 비린내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 사람들이 모이지 않은 이 광장은 내가 알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나는 사람들이 잘 모이는 분수대 쪽으로 걸어갔다. 분수대에서는 비린내가 없는 맑고 투명한 물만 뿜어져 나왔다. 따라서 나는 이 분수대를 좋아했다. 분수대 옆에 있는 벤치에 앉은 나는 곧 들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팔기 위해 챙겨온 헌 물건들과 가벼운 지갑이 들어있었다. 한 이십 분 정도 지났을까, 텅 비어있던 광장은 순식간에 비슷한 이유로 찾아온 사람들로 가득찼다. 나는 그때만을 기다린 하이에나처럼 빠르게 소리쳤다.
“파도중학교 고복 팔아요! 단돈 만 오천원에!”
그 소리를 들은 초등학생들이 곁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언니, 다 합해서 만 오천이에요? 나 살래요!”
“야, 내가 먼저 왔거든? 다 비켜!”
“누나, 남자 교복은 없죠?”
내가 올려놓은 교복은 순식간에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엄마가 알면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무슨 상관이랴. 나는 두둑해진 지갑을 들고 광장 여기저기를 들쑤셨다.
“안 쓴 문제집이랑 교과서 팔아요!”
“어린애들 옷이랑 신발 보고 가세요!”
“상태 좋은 그릇들 싸게 팔아요!”
오늘만 상인이 되는 사람들은 각자의 물건을 앞에 두고 크게 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물건들은 저 자신들이겐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정확히는 쓸모‘없어진’물건.
처음부터 쓸모없는 물건이었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처음엔 모두에게 소중했고 또 아끼던 물건들. 사람들은 그런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팔기 위해 모였다. 그 추억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 중학교 교복을 벗은 내가 중학생으로서의 추억을 이제 막 중학교에 올라가려는 꼬마들과 공유하듯이. 나는 어느 돗자리 앞에 멈추어섰다. 가방을 파는 언니가 앉아있었다. 나는 손으로 한 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얼마예요, 언니?”
“육천 원에 팔고 있어요. 아직 튼튼해,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 여기에 교과서 왕창 넣고 다녔는데도.”
또한 나도 이곳에서 누군가의 추억을 산다. 나는 언니에게 육천 원어치 지폐를 건넸고 가방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벤치로 돌아왔다. 무엇을 파는지 한눈에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주위의 상인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해풍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이 온전히 닫힌 눈은 바람이 저물고서야 뜰 수 있었다. 허나 이상했다. 들고 있던 육천 원짜리 추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복작복작 모여든 사람들도, 수많은 일일 상인들도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었다. 소란스럽던 광장에 적막함이 일었다. 분수대의 움직임마저 멎은 광장을 채우는 것은 나이든 나무들과 이끼 낀 분수대, 그리고 시야를 자극하는 붉은 현수막이었다. 나는 눈으로 현수막에 적힌 글자를 읽는다. 바다광장 관할도시 이전 결사 반대.
내가 살아온 이곳의 사람들이 서로 무언가를 사고팔았다. 그게 무엇이든, 얼마나 오래되었든, 사람들은 제가 가진 필요없는 것들을 가지고 나와서 팔았다. 가끔은 추억 그 자체마저도 송두리째.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9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4
구례고등학교 3학년 조혜원
서울광장
평소 물건도 잘 잃어버리고 금방 만났던 사람도 잘 못 알아보는 열여섯의 내가, 길을 잃어버렸다. 그것도 사람 많은 서울광장에서 말이다. 가족, 친척들과 유독 멀리 떨어진 우리집은 구례이다. 어렸을때부터 방학이되면 엄마손을 꼭 붙잡고 이모들을 보러 서울에 올라가곤 했는데, 열여섯이 된 그제서야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마 엄마와 내 사이가 이역만리처럼 멀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항상 구례바닥에서 내가 즐겨갔던 곳은 학교 앞 분식집도, 시끄러운 로터리 거리도 아니었다. 내가 자주 갔던 곳은 교회 근처 아무도 오지않는 골목의 비밀아지트거나 내가 이름붙인 ‘하늘공원’이었다. 하늘공원은 나의 비밀아지트에 비해 여러사람들이 들낙거리는 곳이었지만 8시가 넘은 그곳은 조용하고 시원했다. 나는 그곳에서 자주 나무를 먹곤 했다.
이렇게 비밀스러운 장소만 집착하던 내가 처음 서울광장에 입성했을때 쉽사리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들과 종아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발들이 적응이 되질않았다. 반에서도 키가 작은 편이어서 앞자리에만 앉았던 내가 사람들의 큰 키에 기가 눌려서 땅만 보고 걷고있을때였다. 솜사탕의 달큰한 향기와 어린 여자아이의 떼쓰는 소릴 듣다가, 갑자기 옆에서 아이의 엄마가 호통치는 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많은 등이 내 앞에 어른거리고 엄마는 없었다. 엄마는 노란색 옷을 입었는데, 어디에도 그런 색의 옷이 보이질 않았다. 핸드폰 사주면 버릇나빠진다며 이 나이되도록 핸드폰 하나 사주지 않은 엄마가 그날따라 더 원망스러웠다.
평소에도 이런 핸드폰 문제 뿐만 아니라 여러 문제들로 우리집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혹여 우리집이 주택이 아니라 아파트였다면 비단 우리가족들은 주민신고로 이사를 가야 했을 것이다. 가족들중 가장 갈등이 심했던건 나와 엄마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된 것인지는 나도, 엄마도 잘 모를 일이다. 어렸을때는 엄마 닮았단 말을 듣고싶어서 아빠친구가 아빠 닮았다는 소릴 하면 한바탕 울어제끼곤 했는데, 벌써 아주 오래전 이야기인 것 같다.
엄마는 나랑 한바탕 말싸움을 하고나면 항상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나는 내방에서 굳게 문을 잠구고 있지만 집 안에 엄마가 있는지 없는지 쯤은 알 수 있었다. 언제 한번은 컴퓨터를 못쓰게한다는 이유로 삐져서 방안에서 혼자 묵언시위를 하다가 깜빡 잠에 든적이 있다. 잠에서 깨고 방문을 열고 나가봤을때 문앞에 엄마가 두고 간 것으로 보이는 잘익은 감홍시 한그릇이 놓여있었다. 나는 먹을지 먹지 않을지를 고민하다가 아까 싸운 것이 생각나 못본 채 하기로 했었는데, 지금에서야 생각난 사실은 엄마는 감홍시를 정말 좋아한다는 것이다. 서울광장 한가운데 서서 언젠가 엄마가 나를 찾으러 와주지 않을까, 솜사탕 그늘에 벗어나지 못한 채 서있는 나를 뒤에서 꼭 안아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열여섯의 나는 어느샌가 옛날의 나로 돌아가 있었다. 서울광장아는 내게 너무나도 컸다. 심지어 광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엄마의 감홍시처럼, 노란 옷을 입고 넓은 서울광장을 두 바퀴고, 세 바퀴고 돌았을 엄마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엄마를 알아봤고 엄마는 이미 나를 알아보고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서울광장에서 그 일 이후로, 나에게는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 핸드폰도 생겼고 엄마에게 맞아서 생긴 등에 손바닥자국, 하지만 나에게 가장 크게 와닿은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엄마를 새로 보게된 것, 그리고 여태까지 우리 사이에 문제와 다툼이 많았던 것은 그저 엄마에 대한 나의 나비눈이었단 사실이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9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5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윤규호
혐오
너가 나에게 다가온다. 너는 먼지 한 톨 붙어있지 않은 항공사 유니폼을 격식있게 차려입었다. 유니폼의 왼쪽 가슴에 달려있는 금속 재질 명찰이 내 얼굴을 비춘다. 너와는 다르게 내 얼굴은 메말라 있다. 바닥에 척 달라붙은 너의 발은 결코 중심을 잃지 않는다. 내 허름한 신발은 앉아있는데도 파도처럼 흔들린다. 너와 나는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너무나 오랜 시간을 보냈다. 비행기는 우리의 세상과 같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비행기가 익숙하지 않다. 전진하는 비행기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비행기가 후진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는 어떨까.
너가 나를 쳐다본다. 너의 눈은 겉보기엔 밝게 빛나지만, 깊이 들어갈 수록 어두운 바다같다. 너가 본 나의 모습은 어떨까. 난 겉보기에도 어둡고 깊이 들어가도 어두울 것이다. 너와 나 모두 환상의 땅을 꿈꾼다. 그렇지만 우리는 불안하다. 비행기가 언제든지 추락할 수도 있다. 이 긴 비행 끝에 우리가 꿈꾸던 땅이 있기는 할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너는 내게 묻는다. 기내식으로 치킨과 커리입니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난 필요 없다고 답한다. 기내식은 비행기가 우리의 미각을 지배해 우리의 몸 깊숙히 숨겨져 있는 무의식적 불안과 공포를 잊게 만드는, 그러니깐 눈속임에 불과하다. 내 말을 들은 넌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짓는다. 너는 날 혐오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눈을 가지고 있기에 어쩔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다시 불안해진다. 나는 예술을 하고 싶다. 너의 숨겨진 불안을 발설하고도, 너에게 미움받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비행기가 흔들린다. 내 발은 여전히 흔들린다.
너는 짧게 알겠다고 말 하고는 내게서 멀어지려 한다. 난 벌떡 일어나 너를 붙잡는다. 너의 눈 속엔 나를 향한 혐오가 가득하다. 그렇지만 난 계속 말하고 싶다.
불안을 발설하는 것은 너와 나 모두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너의 어깨를 잡은 내 두 손에 힘을 준다.
내 말을 들어달라. 너는 바닥 위에 서있지만 사실은 하늘을 날고 있는 거라고. 그만큼 비행기 안은 애매하고, 혼란스럽고, 쉽게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
너는 지금 불안하다. 비행기의 목적지를, 우리는 모른다. 혐오는 상대를 평면적으로 볼 수 밖에 없어지는, 이해와 과정을 포기하는 것이다. 날 혐오하지 말아달라.
내가 계속 말 할 수 있게 해달라. 비행기가 흔들린다. 너의 눈이 동그래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