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무 구덩이(2025.2.12)
이웃집서 건 네 준 씨앗으로 심은 무를 11월 말에 뽑았다. 황토 묻은 연초록색의 ‘만선무’ 하나를 골라 부엌칼로 껍질을 벗기고 한 입 깨물었다. 단물이 혀끝에 와닿으며 그향이 잊고 있었던 어릴때의 추억을 소환해 왔다. 무가 간식거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지만, 문득 몽당 놋쇠 숟가락으로 무를 긁어 드시던 할머님이 생각났다. 그 할머님 연세의 친구 어머님이 치매도 아닌데 요 며칠 전 요양병원에 가셨다는 씁쓸한 이야기가 들렸다. 형제들이 모두 모시지 못할 사연이 있나 보다.
찬 바람이 창호지 문 틈새로 스며드는 겨울이 오면, 수입 과일도 냉장고도 없던 할머님 때는 월동 무가 겨울철의 먹거리였다. 거둔 무를 집 뒤 켠 마사토 둔덕에다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이엉으로 엮은 삼태기 모양의 덮개를 위쪽에 덮고 아래쪽과 옆에는 볏짚을 푹신하게 깔았다. 무가 흙에 닿으면 얼어서 썩거나 바람이 들어가 먹을 수 없 기 때문이다. 구덩이는 자주 파지 않고 제삿날이나 무밥을 해 먹는 날 파곤 했다. 한겨울을 넘긴 무는 달아서 그냥 먹어도 일품이었다.
손자들이 입을 궁금해하면 할머님은 금방 파놓은 무 더미에서 윗동이 파르스름한 놈을 골라, 흙을 턴 후 씻고는 시린 손을 호호 불며 큰 방으로 가져오셨다. 우루루 손자들이 몰려들면 준비해 둔 도마 위에 무를 놓고 부엌칼로 길게 반을 자르셨다. 누룽지 숟가락으로 위에서 아래로 쓱쓱 긁어 드셨다. 사방으로 단물이 튀면 제비 새끼 모냥 모두 입을 다시며 할머님만 쳐다보고 있었다. 환기 안 되는 온돌방은 무 생채 냄새가 구석구석 퍼지면, 벽에 걸린 옷과 목욕 못 해 냄새나는 우리를 방바닥의 온기가 훈제를 시켰다. 이가 없으신 할머님이 겨울철에 야채 드시는 유일한 방법인데, 말짱한 우리는 할머님처럼 무 한 번 긁어 먹어보고 싶었다. 입맛 다시는 손자들에게 반쪽 남은 무를 깎아서 나이순대로 나눠 주셨다. 빼빼로나 초크릿 상품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배운 사람일수록 자연이나 고향으로부터 멀어지고, 젊을수록 살기 위해서라며 부모 곁을 떠나는 세상이다. 할머님은 물질적으로 좀 부족하고 지금보다 비위생적인 환경이지만, 자연과 가족들에게 싸여 외롭지 않은 삶을 사셨다. 배추벌레 잡으며 새순이 자라나는 생명의 경외심을 보신 것은, 백 가지 황산화 식품보다 더 좋은 약을 드시는 것과 같았다. 집에서는 동네 제사나 잔치 날에 콧물 훔치던 손수건에 싸 오는 시루떡을 기다리는 손자들이 있었고, 언제나 어른을 극진히 모시는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조상의 지혜가 담긴 옛 무 구덩이는 저온 창고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겨울에 무심코 옛날 무 구덩이를 지나는데, 우수수 댓잎 부딪히는 소리가 무들의 아우성처럼 들렸다. 동물보다 못한 청각 때문에 그들의 절박한 소리 듣는 기회를 깝살려 버린 나는 후회하며 섰다. 인생에 '다시'라는 기회가 온다면 무들과 ‘카톡방’ 하나 개설하여 그들의 하소연은 꼭 들을 것 같다. 그때 무 구덩이는 무가 얼지도 않고, 썩지도 않으면서 겨울을 넘기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식품으로 마감을 재촉하는 열악한 장소로 보였다. 마사토 사이로 파고드는 한기를 지푸라기 한 겹으로 막고, 칠흑의 막장에서 상·하·앞·뒤가 뒤엉킨 채 부여안고 지냈으리라! 따닥따닥 붙어 움직일 틈은커녕, 햇볕도 숨도 못쉬고, 나갈 수조차 없는 나락에서 무엇을 하며 보냈을까. 면벽 승(僧)이 '번뇌'를 수도사가 '욕망'을 잊기위한 기도처럼 하거나, 자기 깜냥도 모르는 자랑, 버림받고 하소연을 쏟아내는 무도 많았을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부모님께 불효한 일, 부부간에 받았던 상처, 자식 걱정, 헤어진 인연 이야기들을 참회하듯 하였을 것이다. 절망감과 땅속 추위에 밑동이 더 하얘지면서까지 말이다. 동사(凍死)의 공포 속에서 밤마다 숨죽이며 울고 또 울던 모습을 나는 번연히 알고 있었다.
노후에 취미활동도 같이하고 이야기 벗으로 만나는 어른들의 공동체인 실버타운, 요양병원, 요양원, 어르신 유치원, 노인대학 등 다양한 요양 시설이 생겼다. 모시는 가족들에게 생활 리듬을 보장해주는 유익한 시설이다. 하지만 가짜 뉴스 같은 뜬금없는 소문들이 떠돌아 친구를 더 걱정하게 하고 있다. 보조금을 더 받기 위해 입원자의 건강보다 영리 추구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부터, 면회 때 산해진미를 싸가도 배변 통제를 이유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말도 들렸다. 호텔식 요양원에 가겠다며 몇억 원을 준비한다는 지인도 있고, 치매와 평생 요양보호사를 데릴 수 있는 보험 가입은 더 늘고 있다. 아무리 급 높은 시설에 가도 가족과 같이 사는 삶보다 행복할까. 가족관계의 변화와 재산승계 방식의 다양화에 맞춘다며 ‘1/n 분활 상속법’이 제정된 후, 장손이 부모를 정성스럽게 모시는 고유의 미풍은 사라졌다. 시대에 따르는 것이 풍속이라지만 나라가 나서고 문중이 자랑스럽다며 효자비·열녀문 세워주던 전통이 더 그리워지는 이유다. 요양 원병의 어른들은 평생의 지위, 자식의 유무, 성별과 빈부와 관계없이 모두 가보고 싶고, 먹고 싶고, 보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하니, 퇴원도 졸업도 없는 그곳이 무 구덩이처럼 보이는 것은 왠 일일까. 빈손으로 와서 맨몸으로 가려는데도 이렇게 걸림돌이 많은건지.
세상 사람은 삶의 나이를 백 세로 목표하고 있지만, 부모와 함께 지내겠다는 자식은 손꼽을 정도로 적다. 예약도 안 되고 대기표도 없는 ‘하늘의 부름’을 피할 수 없는 고종명(考終命)이 되면 ‘마지막을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하지 않는 사람 어디 있겠느냐. 요양원보다 자식 품에 안겨 임종했던 선조들이 오히려 부러워지고, 나 또한 그랬으면 하고 바라지만 확신은 없다. 나이 먹으면 어린이가 된다고 하였든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에 무서워서가 이니라, 애처럼 자꾸 누구에겐가 누구에게라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비울 수 없다. 남겨주는 것보다 요구할 사항이 많은 나는, 시집가는 막내딸에게 “제발 무 구덩이 같은 곳에 보내지 말고, 할아버지·할머님처럼 시골집에서 마치게 해달라”는 유언 아닌 유언을 해놓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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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밥, 무설기떡의 향미가 떠오르네요. 성격이나 지능은 타고나지만, 음식의 취향만큼은 학습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어린시절 어머니가 만들어줬던 무밥, 무국의 향미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컴컴한 무구덩이 속에서 지내며 무가 나눴을 그 많은 이야기... 깝살린다는 말은 처음 접했어요. 삶의 마지막 모습까지 이어지는 이야기 재미있게 읽었어요~
순우님 ᆢ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ᆢ 아직 논리적 비약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ㆍ고맙습니다 ᆢ사랑합니다 ㆍㄴ
알레고리(allegory) 기법을 시도해봤습니다 ᆢ 무 구덩이의 무와ᆢ요양병원에 갖힌 우리 부모들의 모습을 현대판 무구덩이로 암시하는 은유법으로요ᆢ사용한 글입니다.ᆢ 많이 부족함에 ᆢ죄송스럽습니다.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