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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일 부활 후 넷째 주일 메시지
제목: 우리가 바라는 새 소망
로마서 8:19~25
설교 목적
어린이주일을 맞아 희망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람은 평생 무언가를 바라며 살다가 신앙에 입문하면 하나님을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는 신앙이 더 성숙하면 하나님의 바람을 자신의 바람으로 가지게 된다. 그렇게 된 사람을 예언자라고 하며,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을 성숙한 상속자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설교를 통해서 재난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신앙의 의미를 다시금 조명해 볼 것이다. 그 결과 성경이 들려주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무엇인지를 좀 더 명확하게 그려보고 싶다. 모든 세대는 성경을 통해서 이렇게 미래를 바라보았다. 우리 교회의 이름인 새소망은 성경이 들려주는 바로 그 소망일 것이다.
특별히 나는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이 소개하는 새 소망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그 소망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언약과 경륜에 바탕을 둔 것이다. 성경이 약속하는 새 소망을 분명하게 그리고 바라보면서 우리는 판데믹이라는 이 재난의 시기를 극복할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 개요
1. 인생, 그 끝없는 바람
2. 신앙, 하나님을 향한 바람
3. 새 소망, 하나님의 바람을 바라봄
4. 후손에게 들려주는 새 소망
1. 인생, 그 끝없는 바람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의 기쁨이며 희망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낳고 기뻐하면서 아이를 위해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 이름에는 이 아이가 어떻게 자라나서 어떤 인생을 살았으면 좋을까 하는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어린이는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으면서 자라나며 동시에 부모의 기대와 바람을 은연 중에 받으면서 자라납니다.
아이는 청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며 결혼하여 부모가 되고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됩니다. 아이는 맛난 것을 좋아하고 청소년은 친구를 좋아합니다. 청년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고 나눌 배우자를 갈망하고, 결혼한 후에는 자녀와 집과 차가 더 크고 많아져서 행복한 일상을 살기를 바랍니다. 장년이 되면 자신이 하는 일에서 업적을 내서 인정받기를 더욱 바랍니다. 그리고 노년이 되면 자손들의 삶이 형통하기를 빌며 지나간 과거를 추억하며 평안한 임종을 바랍니다. 이렇게 인생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라고 또 바라는 바람의 연속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늘의 나는 과거 어느 때에 그렇게 바라던 모습입니다. 전에 그렇게 갖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이제는 일상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따금 ‘전에 그랬었지’ 하면서 과거에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것을 지금 누리는 것에 대해서 한편으로 신기해하면서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지금 새로운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또는 ‘저런 일을 내가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우리의 바람은 희망(希望)이며 소망(所望)입니다. 영어로 비전(vision)이라고 할 때 역시 바라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도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살아 있는 한 사람은 바라는 존재입니다. 바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 그것은 죽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특별한 바람이 있습니다.
2. 신앙, 하나님을 향한 바람
사람에게 있는 특별한 바람은 신앙(信仰)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몇 구절 보면 사람들의 기도와 노래에는 하나님을 바라는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시편 130: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편 62:5
시편 130편에서 성도는 여호와를 기다리며 주님의 말씀 곧 응답을 바라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 기도에서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라고 시작합니다. 시편 62편에서 성도는 자신을 죽이려고 사방에서 에워싸는 원수들의 공격과 저주의 말 앞에서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겠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곤란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유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기도하는 성도들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도 가운데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하나님을 바라며 그 말씀 곧 응답을 기다리는 것인데, 그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기억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알수록 더 크고 확실하게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시며 열방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은 열국의 왕들을 세우기도 하시며 폐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시며 그들 가운데 집을 짓고 함께 거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자기의 영광을 열방에 비추게 하시고 열방과 만물의 감사와 찬양을 모아 하나님께 올려드릴 제사장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야곱을 부르셨으며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려고 그 대리인을 지으시고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따로 만드시고, 성막과 성전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을 통해서 이 세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이며 여호와의 물 댄 동산처럼 생명이 가득한 곳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연약하여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나라의 종살이를 할 때에도 그 백성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며, 세계를 위한 크고 놀라운 계획을 성실하게 이루십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자기 백성에게 임마누엘로 찾아오셨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나라를 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을 이루어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며 만민이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찢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지성소의 문을 열어 주셨고 전에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을 자기 피로 씻어 깨끗하게 하시고 마침내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배웁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우리들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을 택하셔서 죽으신 이유가 있음을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 유월절은 본래 애굽에서 파라오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이 자유와 해방을 얻고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세워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마치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를 통해서 그 백성이 구원을 받고 파라오의 모든 압제가 끊어진 것처럼 우리를 얽어 매던 모든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창세기 시작의 말씀처럼 기록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 14). 에덴동산에 거니시던 하나님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 개의 표적을 보이시면서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셨습니다. 그 첫번째 표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며, 그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이 마치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과정으로 소개하는 것 같습니다. 결혼을 통해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요한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는 생수이자, 생명의 떡이며, 빛이며, 길이며, 선한 목자시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심으로 처음 창조 이야기처럼 창조의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안식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을 얻는 유월절이며 출애굽이며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온 세상의 통치자가 바뀌었고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심을 입은 사람들이 일어났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자신들이며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부활 후 첫날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시고 숨을 불어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새로운 인간, 새로운 아담,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서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세상의 주관자들처럼 재력이나 권력이나 강압을 통해 하지 않고 먼저 섬기고 베푸는 십자가의 정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허물과 약함을 대신 담당함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소임을 깨달은 공동체는 세속적인 바람과 욕심을 버리고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는 모델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을 새롭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하는 가운데 주님이 다시 돌아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충만하게 세우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날에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통일되며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가득할 것이라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소망은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소망, 곧 새 소망이었습니다.
3. 새 소망, 하나님의 바람을 바라봄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에게 새 소망이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바람을 바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며 새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의 소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로마서 8:19~20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 자신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우상에게 굴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허무한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상과 관련이 있습니다(시편 97:7). 우상에 빠지면 사람은 썩어짐의 종노릇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인간의 상태를 바르게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인간이 진정으로 바랄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 8:21
그것은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종 노릇 하면 우리는 파라오의 압제 가운데 신전을 건축하는 노동을 하면서 고생하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탐심과 헛된 욕망에 붙들려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수고의 떡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삶을 성경은 썩어짐의 종 노릇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허무한 데 굴복하는 삶입니다. 사람이 더 많이 가지려는 이유는 넉넉하고 풍족하게 되어야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거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는 지금 우리는 과거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피조물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영광의 자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3장 23절을 보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에 있습니까? 에덴동산에 있습니다. 모세가 지은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출 40:34~35). 솔로몬이 지은 하나님의 성전에 영광이 충만했습니다(왕상 8:11, 대하 7:1).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가까이 가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른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 은총을 열방에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하나님 아닌 허무한 것에 굴복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썩어짐의 종 노릇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제는 그 본질적 부르심을 저버리고 돈과 정욕과 이 세상 자랑에 미혹되어 그 속에서 굴복하면서 종살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가리켜 경건하지 않은 삶(the godlessness, 헬. 아쎄베이아 asebeia, 롬 1:18)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말하는 모든 종류의 죄는 바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며 제사장적 부르심을 저버린 사람들의 경건하지 않음으로부터 나온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소망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눈에 좋게만 보이는 것을 소망해야 하겠습니까?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을 좇아간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겪으면서 탄식하는지 소돔과 고모라에 들어간 롯의 가정이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바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겠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22~25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바울은 코로나 판데믹과 같은 재난을 보이 않았을 텐데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허무한데 굴복한 인간이 있는 그 어디나 전쟁과 난리의 소문은 끊임이 없습니다. 전염병과 자연재해, 그리고 경기침체와 실업, 불평등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날마다 우리들의 귀에 들려옵니다. 그 속에서 우리들도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한 것을 소망합니다. 아직 보지 못한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아직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을 따라 성령 안에 거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제 허무한데 굴복하지 않습니다. 파라오의 압제에서 풀려난 이스라엘 백성처럼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에 이르렀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며 세상을 향하여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세상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재림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날이며, 우리의 몸도 속량을 받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 몸은 썩지 않을 것을 입을 것입니다(고전 15:53). 그 때는 우리의 몸이 부활하는 때이며, 그것은 온 세상이 새롭게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날입니다. 그 날을 우리는 고대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에 이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드리는 삶입니다(롬 12:1).
4. 후손에게 들려주는 새 소망
올해도 우리에게는 새로운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자녀가 낳은 자녀는 더욱 귀엽고 신기합니다. 우리들이 부모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자라난 것처럼 우리 자녀들은 우리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자들도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를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겠습니까?
제가 태어난 섬은 남해안에 있는 신지도(薪智島)입니다. 땔감(薪)이 많은 섬이라고 해서 신지도인데 예로부터 임금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이 유배를 온 곳입니다. 이 섬에는 약 40여 명의 사람이 유배를 왔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있습니다. 거기서 태어난 저에게 부모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어린 시절 제 마음에 차곡차곡 쌓였고 어느새 뼈에 아로새겨졌습니다. 그 이야기는 현실 속에서 때로는 한이 되기도 하고 저를 재촉하는 회초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부모님이 제게 들려주신 이야기에는 신지도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고통 가운데 사셨던 분들의 한이 담겨 있습니다.
저의 인생은 제 아버지의 바람대로 되었습니다. 고향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광주로 그리고 마침내 서울로 유학을 왔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기쁨과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바람은 제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 좌절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길은 아버지께서 바라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버지가 되어 보니 저의 자녀들도 제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녀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실 인생에 많은 바람이 그대로 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고통스럽고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 중에는 우리의 바람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허무한 것을 바라면 허무한 것에게 굴복하고 종살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부교역자로 섬기던 어떤 교회의 목사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삼십년 목회를 돌아보니 세 차례 예배당 건축하고 나니 세월이 다 지나가고 말았어요! 마지막에 건축한 예배당도 결국 다른 큰 교회에 넘어가고 말았지 뭐!’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소망하느냐에 따라 인생도 목회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열심히 달음질을 마친 후에 후회와 한숨으로 끝날지, 아니면 후회 없는 삶이었다고 회고할지는 오늘 우리의 바라는 바 소망이 무엇이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내가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바람과 일치합니까? 아니면 아직도 나는 여전히 허무한 것을 바라며 우리 조상들이 한에 사무쳐 들려준 그 이야기를 따라 살고 있습니까?
지금 인류는 큰 재난 가운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판데믹이라는 이 세계를 휩쓴 전염병으로 2년이 못되어 3백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고 얼마나 더 고통 속에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2천년 전에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고통 가운데서 다시금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바람이 무엇인지 배우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이 재난을 잘 견디고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바람이 후손에게 새 소망이 되어 그들의 미래를 건강하게 꿈꿀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우리 함께 그 길로 나아갑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