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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八 章 四十日 復歸코저한 攝理路程의 根本意義
人間世界에 해와로 因하여 墮落이 始作하여지니 그때부터 人間世界에는 非原理存在에 屬하여 나오는 反面에 하나님은 原理的 復歸코저 態勢를 取하여 지게 되었다. 하나님을 中心하고 原理的으로 直系의 血代는 至今까지 攝理의 한 所望으로 남어지고 그 直系的 血系는 非原理的으로 始作한바는 事實이다. 이런 根本 뜻은 다시금 찾어 根本血系를 始作하는 것이 하나님의 創造本意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墮落된 人間일망정 抛棄하지 못하고 原理的 復歸原則을 바라보면서 至今까지 繼續되는 歷史를 본바는 論한바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의 子女 中 가인 아벨의 대한 祭物받는 根本 뜻도 알줄안다. 가인은 사탄의 初血系 表示者요 아벨은 아담의 나종적으로 해와 對한 表示的 者이매 根本 하나님이 찾을 수 있는 者임으로 하나님은 다시금 찾고저 할 때에 첫 生産者보담 다음 者 아벨을 사랑적으로 對한 原因은 알바이다. 聖經에도 하나님이 아벨 祭物받게되는 理由는 未知으로 나타나 써있다. 그것은 그 時代的으로 먼츰 알수 없는 原理復歸코저하는 歷史的 뜻의 成事를 볼바가 되지 못함으로 至今까지 未知로 되었다.
아담 해와 中心하고 찾고저 하나님은 하지 못한바도 非原理 存在가 먼츰 한 主人格 相對로서 있기에 한 主人 相對로 原理로된 創造的 原理가 있기에 아담 해와로 因한 復歸 못하고 가인과 아벨로서 二性分立을 보아 順從과 不順從을 作定케 하는 表示物이 卽 아담 두 아들의 祭物인바다. 왜 가인 祭物 안받는 바는 사탄적 生産血系의 結實存在 였으므로 가인 祭物 보담 아벨의 祭物을 받음이었다. 아벨이러 誠心 다하였다는 바는 聖經에도 없는 바이다.
이 根本的 原理가 이런 原理로 되어있는 原理라는 바를 알게 될 때에 根本 墮落에 對한 내 發表가 정론임을 알바다. 가인도 아벨 對한 反擊이 없었으면은 다시금 기쁜 復歸로 될바이었으나 하날의 뜻 아지 못하고 하날 對하는 反擊의 始作이 있으니 하날 뜻 破壞를 始作하게하는 基源點을 始作한바이다. 만일 가인이 아벨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품으로 찾어드렸으면은 사탄 所有物이란 分立을 防止하였을 것이다. 그런 立場에 서 있는 가인 한 自體의 行動이야 人間의 第一 슬픔의 始作의 基点을 짓게 되었다.
그로 因하여 아벨 죽이니 하나님은 아벨 代身 셋을 주워서 攝理를 다시금 세우고저 하였다. 셋을 주어서 歷史를 經過하는 途中에 셋 子孫 亦是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가인 子孫이 좋아하는 사탄便 짝으로 全人類는 사탄 所有란 非原理 世界를 造成한 셈이다. 그러니 이를 淸算하고 뜻의 사람 擇함이 노아이었다. 노아는 그 時代的으로 하나님의 所望의 存在이면서 그 時代世界人類보담 貴한 所望存在이었다.
노아를 中心하고 하나님은 뜻의 人間을 造成하고저 하니 全世界에 全部를 分立하는 하날便족으로 分別시키고저 하는 것이 目的이니 사탄 所有物 不順者 合하여 全滅케 하는 바이었다. 그 目的은 不順者 所有物을 世界上에서 追放하고저 함이 始作이였으니 根本的으로 하나님은 自己의 所有物만 世界上에 始作보고저 함에서 對策 取함이 노아 審判이다. 이 審判은 무슨 意味냐 하면은 創造하였든 根本原理的 立場을 復歸하고저 함에서 始作이라는 바는 事實이다. 먼츰 사탄 侵入받은 아담 해와로 因한 萬物은 사탄 血로 因하여 하나님과 떠난 것이므로 全部를 淸算한바이다.
노아를 擇하심은 全部를 다시금 찾어세우는 모양으로 노아의 方舟에 모든 生物을 노아에게 준바이다. 이것은 第二 創造理想 始作이 目的이었다. 이 노아가 하나님의 뜻 成事하여야 할 義務的 立場이란 바는 말할바 없는 바이었다. 그런 노아도 人間 第二 祖上으로 繼代를 잡고저 하는 基盤工作은 어찌되었나하면은 함의 行動으로 사탄이 하나님 앞에 自己의 血系的 證據格으로 서니 하나님 앞에 自己의 血族이 있음을 세워서 다시금 侵入하여 取케 되니 함이 가나안의 父로 되는 바이다. 그것은 아버지 裸體로 因한 行動으로 始作함이다. 이것이 至今 본다면 좋은 行動 같은데 왜 하나님이 第一 미워하는 行動이 되며 하나님과 怨讐된다는 行動인가는 두말할바 없이 해와의 墮落 根本을 表徵한 事實인 根本과 合하는 血緣的 關係로 表示하였기에 사탄 侵入을 또다시 가나안 父格으로 함을 通하여 始作본바가 根本이었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이 審判한 目的은 第二次的으로는 根本始作을 보아 出發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있어서 찾고저 하는 全目的을 잃어버린 反對目的이 結果된 셈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審判은 하였으나 審判하기 前과 같은 始作點을 본 것으로 되니 하나님은 根本目的의 要求를 다시금 찾어야 하게 되었다. 卽 審判할적에 하나님은 四十晝夜를 두고 審判하였다. 이 四十日은 하나님의 뜻 成事의 始作잡은 基本을 作定하는 期間임은 사실이다. 이 四十日에 對한 目的은 사탄 全部를 追放하는 것이 目的이다.
이 사탄 追放目的은 함으로 因하여 다시금 侵入基臺를 잡고 하나님의 根本 뜻을 未成事로 始作을 본셈이다. 하나님의 四十日 審判은 無效果로 되어지었다. 四十日을 뜻맞게 찾으면은 根本目的 成事를 볼바이었는데 四十日을 未成事한양으로 나아가니 四十日의 目的의 全部가 잃어버린 目的으로 始作을 본바이다. 하나님께 있어서 四十日을 잃어버린것과 같은 것이 되었으니 다시금 뜻 세우는 길에는 四十日이라는 根本目的成事가 最高目的이면서 이것 찾어 세우여야만 뜻 成事란 目的完成이니 이 四十日을 中心하고 사탄 分立을 作定키 위한바이다.
이 四十日을 사탄 對하여 찾어 세우여야하는 한 分岐點으로 남어지게 되었다. 그런고로 四十日을 中心하고 攝理의 始作은 언제나 問題로 나타나고 있다. 노아의 四十日 期間이 卽 審判의 全目的이니 四十日 끝났을때의 行事로 하나님이 創造하든 完成을 標準한때와 한가지로 出發코저 하시었다. 노아는 四十日 지난 後에는 鴉를 내보냄이었다. 이것은 創造 받은 世界에 사탄이 먼츰 始作하였든 바를 다시금 찾어 成事할 表示의 象徵이었다. 卽 鴉를 내보내였으나 돌아들어오지 않았다. 창세기 八章 七節에 보면 鴉는 世上의 水이 마르기까지 往來하는지라하시었다. 먼츰 내보낸 鴉는 왜 노아한테 돌아 드러오지 못하고 이 모양으로 行하는가 하면은 먼츰 사탄이 이와같이 되어서 行한다 하는 表示로서 鴉를 내보내심이었다. 사탄이 물로 審判받은 水上을 다니면서 쉬일곳 찾고 있다는 한 表示로됨이 鴉 내보내심의 象徵이었다.
다음에는 鴿를 내보내였으나 鴿은 地面의 水로 因하여 발부치지 못하고 다시금 노아 方舟로 도라오니 노아가 手를 내미려 受入하고(창8/8/12) 七日을 기다려서 鴿을 내놓으니 夕時에 鴿가 橄欖樹葉을 口에 물고 드러오난지라. 그 後 또 七日을 지내서 鴿을 놓아주니 다시금 도라오지 않았다. 이는 鴿로 因하여 三次나 보내서만이 비로소 完全히 地上을 찾어서 繁殖할수 있는 船없이 直接 살수 있다는 한 表示로 되어있다. 이 表示도 무엇이냐하면 墮落時부터 眞理全部에 대한 復歸의 한 表示로 되어있다.
첫 번 鴿은 第一次 아담의 始作을 보려고 하였으나 鴿 水로 因하여 돌아온것과 같이 그 靈이 하나님 앞에 도라온바와 한가지고 卽 노아가 손을 내미려 鴿을 받아들이심과 같이 아담 靈을 받아드리심이었다. 鴿을 方舟로 받아드린것과 같이 그 方舟는 하늘 全部의 表示였다. 卽 三層天 表示로 된바이었다. 方舟도 上, 中, 下로 된바도 하날 三層天 表示로서 基因한바다.
다음 鴿는 二次 아담, 예수를 表示함인데 예수는 아담 靈이 보내심을 받아 땅을 찾어 繁殖 生이 地를 찾고저 하였으나 橄欖樹葉만 물고 왔다 하는바는 예수와서 뜻 成事할려고 하였으나 땅이 아직 받을 수 있는 땅이 못됨으로 찾을 수 있는 約束을 세워서 基臺成事한 表示로 된바며 三次 鴿는 完全히 뜻 成事 始作을 完成하신다는 한 表示的 內容을 보여주심이다.
故로 眞理復歸에는 蘇生부터 長生으로 完成으로 한 目的達成한다는 萬宇宙 創造原理를 標準하였기에 이렇게 表示된바이다. 하나님이 七日間隔둔 바는 첫 번도 完成할려고 한 것이 延長되니 卽 七日 理想延長되니 이런 間隔을 두어 役事함이다. 第一次는 한 期間을 두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뜻을 第一次 鴿的으로 成事코저 하였으나 땅을 死之圈에 잠기었기에 도라왔고 第二次 成事할려고 하였으나 땅이 받지 못하여서 도라오고 第三次 만에는 아무리 하여도 成事한다는 한 限界를 表示함이다. 그런고로 成事치 못한바는 하나님이 未成事케 한바가 아니고 땅들이 받들지 못함으로 延長된다는 한 表示로서 第一次 第二次 第三次로 延長된다는 바를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아담 墮落으로 因하여 鴿가 도라온바와 한가지로 第二次 아담 完成者로 오신 예수는 땅이 받지 못하여 約束만 成事하고 도라오고 完成 第三 아담 와서 完成된다는 뜻이므로 鴿 三次는 도라오지 않음은 뜻 完成할바를 보여주심이다. 이리하여 노아는 鴿 도라오지 않음으로 自身의 몸이 地上에서 生活할수 있는것과 한가지로 하나님도 三次 아담 再臨主로 因하여 地上에서 創造理想生活을 始作하여 直系的 世界를 造成할바를 表示되는바가 目的으로 되었다.
그런 目的이 根本인데 노아 아들 함으로 因하여 다시금 目的破壞를 始作하는 非原理存在를 誘引하니 하나님은 根本四十日 審判目的은 不成事로 되어지게 되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다시금 하나님의 攝理하는 血系代에 사탄 侵入 不成事로 되어지게 되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다시금 하나님의 攝理하는 血系代에 사탄 侵入의 踪蹟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하여 四百年 延長을 보는바다.
그 根本 뜻은 四十日을 中心하고 사탄 對立의 成事를 始作하였으니 基本 四十數가 基因을 갖이게 되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四十日數를 基本復歸하여 다시금 成事할려고 하니 四十日 갖이고는 아니되고 四十年 가지고서도 안되겠으니 四百年으로 延長시켜서 四百年 後에야 根本的으로 第二 人間祖上의 成事할 信 基本成事인 노아의 信完成基臺를 아브라함 擇함으로 始作하였다. 이 信을 세우심은 아담의 不信으로 因한바므로 다시금 基臺를 찾어세우여야 사탄 代할 수 있는 基本이니 信祖上 아브라함은 노아의 根本뜻 信繼承完成者로 擇한 바이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이 信祖上되는 根本意義가 있는바다. 왜 아브라함을 擇하였나 하면은 노아 家庭으로 擇함에서 失手하였으니 아브라함 한 自體로서 始作코저함이 目的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信의 基本을 세울 수 있는대까지는 어떤 經路롤 밟았는가 하면은 아브라함이 凶年을 當하여서 아브라함은 애급으로 내려가난지라. 그 當時에 아브라함의 妻 사라는 아름다우매 念慮하여서 男妹로 된다는 約束과 同時에 애급에 감이었다.
이 사라는 아브라함의 妻로 妹의 立場에 서게 됨도 아담 해와 立場인 原理的 事實을 찾어 세우고저 함에서다. 그것은 애급은 사탄 代身國인데 그 國王 바로는 아브라함의 妻를 自己가 取하여 妻로 하고저 하였으나 하나님이 바로 對하여 아브라함에게로 찾어주니 바로는 아브라함에게 所有物을 주어서 돌리심은 하나님으로 因한 緣故이었다. 이와같이 아브라함이 뜻 成事하는 路中에 第一問題는 애급가서 妻를 所有한바와같이 하나님은 根本 한 해와가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빼앗으려 한바를 다시 찾는다는 한 表示를 보여 그 後 가나안에 돌아와서 始作한바와 같이 怨讐의 謀略中에서 하나님은 해와를 찾어서 復歸 땅에서부터 뜻 成事함의 基臺를 造成한바와 같이 하나님도 하신다는 根本뜻이 있음이었다.
그 後 아브라함이 애급서 가지고 온 所有를 基本으로 하여서 뜻 基本을 삼아서 하나님의 뜻이 成事할 基本을 잡았다. 이것은 萬物全部를 取하여 뜻 基臺를 한다는 뜻이었다. 그 다음은 롯이 잡아간 원수를 對하여 勝利한 後에야 아브라함은 뜻 成事의 始作이 決定받게 되는바다. 이것은 擇한 者 全部를 復歸한다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은 사탄 所有의 貴한 者와 같은 데라의 子을 빼앗아 내였음으로 사탄은 아브라함이 뜻하는 하나님 對하여서 아브라함의 무엇이나가 不順된 무엇이 所有만되면 所有코져하여 아브라함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그때 마침 아브라함과 하나님과는 重大 約束 成立을 始作케 되니 사탄에게 있어서 큰 問題가 될 터를 始作함으로 이때 하나님 對하여 사탄은 對立하여 서게 되었다.
萬一 아브라함이 全的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祭物을 드렸으면은 아브라함부터 基本基臺를 잡아 四百年 歷史的 延長生活인 애급 生活은 없고 直接 하나님 責任分擔 使命으로 볼바이었다. 이 目的은 무슨 目的이냐하면 아브라함만 完全히 뜻 成事하면은 사탄 對한 根本追放을 始作하여 四十日에 對한 그의 審判하였든 基本目的은 完成되어서 出發을 볼바이었다. 아브라함이 失手하고나니 四十日에 對한 뜻은 아직 完成的 基臺를 잡지 못하고 그의 延長的 四百年이 蕩減時代므로 始作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 四百年이란 年代는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 延長보아 사탄이 侵入본대니 이 四百年代 蕩減하여야만이 노아的 時代立場에 立脚함으로 아브라함에게 四百年 延長을 보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子孫에 남어지는 바는 四十數가 남어있는 樣으로 되니 四十數가 萬事를 解決하는 뜻 成事의 完成點으로 남어지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 섰든 아브라함은 뜻의 未成事로 因하여 子孫이 四百年 苦役生活을 봄이 크나큰 禍根으로 되는 期間이다.
아브라함의 失手를 淸算하여서 사탄 侵入防止코저하니 祭物表示는 되었든 實體者로 因하여서 祭物代身찾아 세우고저하니 이삭을 모리아山의 祭物로서 獻祭를 命令하심이었다. 이뜻을 아브라함이 三日期間을 두고 獻祭함에 合意 봄으로 하나님이 攝理하는 路程에 사탄을 防止하였으나 사탄 亦是 이삭에 對하여 先有 所有物 될수 있는 祭物所有로 因하여 미련을 가지고 對하게 되니 이삭 子息中二性品的 表示的 子息으로 分立하여서 하나님은 뜻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야곱이 母親과 合하여 에서의 基業을 빼앗아 넘기는 뜻이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腹中에서부터 서로 싸우므로 리브가는 하나님께 아뢰니 여호와 하나님이 言하여 曰 二國이 네 腹中에 있음이여 二民族이 爾腹中으로부터 分하리라. 此民族이 被民族보다 强함이며 大者가 小者를 섬기리라. 하시었다.(창25/23-24) 이것을 보아도 아브라함이 失手한 根本을 다시금 하나님은 뜻하시어서 分立케하는 야곱은 다음번임으로 하나님의 뜻 中에서 사탄이 뜻하였든 所有物 全部를 빼앗음을 表示하기에 이와같은 對立을 보게한 바이다. 이것이 卽 後日의 예수의 한 役事의 本되는 事實들로 되는것도 알줄안다. 이와같이 하는 바는 사탄이 아브라함 子息에게 미련 남기지 않게하기 爲한 目的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뜻 成事를 볼려고 하든 것이 이삭으로 通하여서 비로서 成事하게되니 아브라함을 對하였든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으로서 야곱까지와서 첫아브라함 對한 하나님 뜻 成事를 보니 여기에 하나님은 三人을 相對하여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延長을 본바의 根本原理를 가지게 되는 바이다. 그러니 이 三人의 하나님으로 因한 名詞가 지금까지 좋은 名詞로 된듯하고 現 信仰者는 알고 있지만 크나큰 誤解로 아러야 한다.
그런 歷史的 하나님便的으로 原理를 中心하고 있다는 바를 確實히 아러야 한다. 이런 原理로 全部는 사탄 侵入防止키 爲한 目的인 同時에 根本 墮落始作의 復歸를 爲하여라는 바를 아러야 한다.
여기에 야곱부터 애급 出發은 야곱이 아브라함의 本 뜻 四百年 蕩減路程 出發이 始作함이다. 왜 이삭부터 안되었는가 하면은 이삭은 아담과 같이 二主人 相對存在였기에 이삭부터 애급 四百年 始作은 못한바는 論한바다. 야곱이 始作하였다는 바는 야곱은 根本 뜻 成事를 잡은 者니 야곱이 애급 出發하는 바의 根本原因이 있음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뜻 成事한 完成存在 못됨으로 애급을 向할수 없었다. 그러기에 이삭 子息에 에서라는 存在는 사탄 相對者라는 서러움이 始作된바이다. 어데 失手없었으면 아브라함 子息에는 에서라는 存在는 없이 根本 뜻 始作이 볼바이었다. 그러기에 이삭 自體로서도 四十을 中心하고 리브가를 取하여 妻를 擇함이었다.(창 23/20) 이리하여서 하나님의 뜻의 始作을 봄이었다.
야곱도 四十를 中心하고 에서의 에서의 基業을 빼앗는 基本役事를 始作할바가 原理로서 짐작하여야 한다. 창세기에 야곱이 四十數는 없으나 짐작키는 에서가 四十세에 햇 族屬의 딸을 妻로 取하여 이삭과 리브가가 근심하더라 하는 것 보면(창26/34) 야곱 年代도 四十세를 中心하고 攝理하여야할 바가 原理로 되어있다. 이런 四十年代를 中心하고 하나님의 뜻을 始作할수 있다는 基本을 잡으심은 基本노아 審判 四十日數 復歸할 基本 數로 因하여서 이와같이 始作한 歷史的 起源으로 因한바다. 야곱이 死後에 그 몸에 防腐劑를 四十日 바르심은 야곱의 몸은 하나님의 뜻 完成者이므로 이 한 存在는 死亡하여서도 四十日 期間과 같은 사탄 對한 四十日 審判을 받아 死亡한 者와 같은 死亡이 아니고 四十日을 完成한 成事者로서 하날 뜻 四十日 期間우에 處하여 死한 者라는 表示로 四十日 防腐劑를 바르게한 뜻이 있음이다.
이리하여 四十日되는 死亡期를 防止한 中心 存在가 된바라는 根本意義로서 四十日을 바르게 한바이다. 四十日은 卽 사탄 追放期間이면서 生命蘇生期間이다. 여기에 至今 야곱까지 延長보아서 애급 出發하게 되어 한 하나님의 基臺를 잡아지게 되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란 延長은 우리는 生覺하면 원통한 期間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이 期間을 두고 하나님은 約束祭物에 失手한 全部를 淸算하여서 사탄 分立을 成事할 때까지는 어느 곳까지나 하면은 야곱의 食口가 밧담, 아람, 라반에게서 얻은 所有를 가지고 가나안 땅에 돌아온 後에 뜻 成事의 始作을 하는바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 이삭부터 야곱이란 三代란것도 하나님이 뜻하는 約束祭物 中에 三祭物 表示로 된바는 蘇生부터 長成으로 長成부터 完成으로라도 眞理段階를 보여주는 바이었으니 아브라함이 뜻 合意에 成事하였으면은 三代 없었든바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의 失手로 因하여 三代後에 完成한바도 全하나님의 뜻을 이 三代 卽 段階로서 찾고저 하는 歷史的 眞理路程 全部로 表示함이 始作하였다. 그는 失手로 因하여 分立보아서 아브라함으롭터 이삭으로 이삭으로부터 야곱으로 하여 뜻 成事할려는 眞理路程에 對한 基本的 表示로 展開를 보게 되었다. 卽 아브라함은 아담 象徵으로이삭은 예수의 한 象徵으로 야곱은 完成象徵으로 됨이었다.
예수는 이삭과 같은 立場임에 人만 믿었으면 주검없이 야곱의 뜻 合할수 있는 것이 目的이었다. 이삭도 주검 免함은 뜻을 세우심으로 免한바와 같이 될바이었다. 그러나 그 뜻 잡지 못하니 未成事 할 수 있는 表示的 一代 復歸 歷史와 모세로 因하여 民族復歸路程 失手로 因하여 十字架까지 關聯을 가진바이다.
그런고로 뜻 完成者는 야곱이었다. 야곱이 뜻 成事하기 爲하여서는 第一 次 가나안을 떠나는 生活이 야곱 앞에 있었다. 卽 長子 基業을 取하고는 야곱은 基業成事할 者로 라반 집을 찾어가게 되었다. 여기에 야곱 앞에 展開된 全部가 後日에 예수가 할 使命的 表示로 되는 바는 한 뜻 基臺成事는 야곱이므로 야곱은 뜻 基臺完成이 있어야겠으니 야곱은 하란 生活의 始作을 보는 바이다. 여기서 가나안 福地까지는 全部가 이스라엘이 나아가야 할 表示的 路程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의 基臺가 되어야 하겠으니 一代에서 하나님의 뜻의 全部를 表示한 歷史로 展開할 意義로 보는 바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三大祭物은 아브라함을 蘇生으로하고 사탄 對하여 長成的 이삭의 始作을 보고 야곱의 始作으로 路程 完成이니 이 歷史的 三大祖上은 人類 對한 하나님의 歷史的 全部를 表示하는 바로 展開를 보여주심이다. 그것은 祭物의 全部는 全人類 對한 하나님의 攝理임으로 失手復歸는 全人類 對한 한 表徵的 事實로 展開를 보아야 되는 바이다.
그러기에 야곱이 一代 가나안 復歸까지의 全部는 가나안 떠난 이스라엘 百姓이 애급 四百年 生活과 相對되는 基本一代復歸歷史다. 이 야곱의 가나안 復歸路程은 이스라엘 全民族이 가나안 復歸路程의 本되는 路程이다. 이라하야 야곱은 復歸路程에 야곱의 뜻을 成事케 하는 에서가 있었다는 바는 아담 子 가인과는 反對로 야곱 對함의 始作보니 基本 가인과 아벨적 根本뜻을 合意 본셈임으로 根本 아담 두 아들 가인 아벨이 뜻에 屬한 것과 같은 完成을 보니 뜻 成事를 보는 바이다.
야곱은 가나안 땅을 찾아들게 되는 바이었다. 그 때 에서가 야곱을 對하여 反對하여 원수 視 하였다면은 하나님의 뜻 成事에 큰 問題가 될바이었으나 에서가 야곱을 歡迎하며 에서도 後日에 하나님 對하여 順從의 한 間接的 基本을 찾아세우심이었다. 그런고로 에서의 後孫은 가나안 땅에서 怨讐 對立이 안되고 가나안 땅에서 基業地를 所有 繼續한 原因을 세우심의 基臺가 에서가 야곱 대하여 歡迎한 結果로 가저온 바이다. 그러니 야곱 가나안 復歸는 이스라엘 民族이 애급 生活로부터 가나안 福地로 오는 한 本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야곱이 하란 生活路程에서 對하는 라반이란 存在는 사탄의 對象存在로서 야곱의 全部를 貪하여 自己의 慾望充當을 세우려고 하는 者이었다. 라반은 하나님께 屬하지 않고 偶像崇拜者였다.(창 21/19) 이리하여 하란 生活에서 財物을 취하여 가지고 가나안 땅을 向할려고 할 때에 라반이 對하여 야곱이 取할수 있는 自由三日이 있었든 바라.
이 三日間을 中心하고 라반에게서 얻은 全所有를 分立케 하여 所有權으로 세우신바이다. 그리하여 라반은 三日 後에야 길느앗山에 對하였으나 하나님의 許하지 않음으로 自己 뜻을 成事 못하고 自己의 偶像을 가져간 것을 찾다가 라헬이 그 父에게 말하기를 自己는 偶像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駱駄鞍下에 두고는 지금 딸은 脛水가 摘出하야 이러나 歡迎치 못한다 하여서 偶像을 라반이 찾지 못함에 뜻을 보지 못하고 도리혀 야곱한테 攻擊을 본바이었다. 야곱에게는 레아, 라헬 二妻가 있었다.
그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對하고저 하는 뜻 中에는 하나님의 二女性이 있다함을 보여줌이었다. 야곱의 뜻 아닌 라아적 女性과 야곱의 뜻의 中心인 라헬的 女性이 있다는 表示로서 보여줌이었다. 여기에는 根本해와의 잃어버린 것을 찾어야 할 根本的 女性이 있다는 바라는 것의 表示였다. 그것은 라반의 뜻 이룬 레아의 存在와 한가지 表示였다. 이것은 먼츰 잃어버린 全人類 對한 墮落 始作 본 母 해와로 表示한 바이다.
라반이 레아를 주고는 七日 期間을 채운후에 라헬을 妻로 삼게 하시었다. 이 七日 期間(창세기 二十九章 二十八節 참조) 日數는 卽 노아가 鴿을 내보내듯 한 攝理完成的 日數로 되는 바이다. 그리하여 야곱은 뜻 成事하고야 가나안 땅으로 歸還하는 바이었다.
그리하여 라헬 찾는바는 하나님이 後日에 잃버버린 해와를 찾어 根本 뜻 成事할 目的을 表示한바이었다. 그런고로 레아 子과 아헬 子 合하여 뜻 成事를 標準한다는 全世界 人間을 찾어야할 根本目的을 表示한바이었다. 또 여기에 라반이 行한바와 같이 하나님이 사탄 世界의 不信으로 因하면은 이와같이 야곱의 目的이 두 번만에 成事한 것과같이 예순느 이와같은 한 完成을 成事할바의 뜻을 表示한바이었다.
그리하여 야곱과 合하여서 父 하반을 對하여선 妻 라헬의 態度와 같이 하여야만이 後日에 하나님의 뜻이 完成 본다는 한 表示로 되었다. 라헬이 萬一 偶像을 父한테 보였으면은 야곱과 全部는 큰 未成事를 가저오는 問題로 되는 바이니 라헬의 한 勝利를 가저온 中心은 脛水로 因하여서 偶像을 없게 한가바와 같이 後日 하나님 뜻 路程에 이와같은 女子의 脛水로서 사탄 全部를 勝利하는 基臺가 始作한다하는 內容을 表示한바이다. 이것은 라헬의 態度와 같이 第二次 해와로 因하여 사탄을 屈服시켜 뜻 完成한다는 한 勝利的 表示이었다.
이 야곱의 一代의 展開가 예수의 路程으로 始作된다는 것도 한 表示로 된바이다. 이 야곱의 全目的 成事는 애급 路程上에 다시금 始作의 本으로 나타나서 하나님도 사탄 對하게 하는 根本이 있는 바이다. 그러니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全하나님의 表示的 存在들로 나타났다. 아브라함은 아담 失手한 것을 이삭으로 復歸와 같은 예수 祭物表示로 不信하니 十字架로 始作하고 야곱과 같은 再臨主格 成事로 完成되는 한 表示로 된 者들이기에 하나님 對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對像者의 뜻의 攝理를 표시한 存在들이므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延長된 後日의 全部를 表示한 基本들이니 信이 基本되는바가 成立되니 信의 祖上이라는 基本意義가 있는 바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뜻 路程은 舊約歷史에 全部 表示하여 맞추고저 함이 根本으로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은 야곱 成事부터 할바가 모세부터 始作한바다. 모세는 야곱의 根本目的 完成하여야 할 表示的 路程으로서 後日 예수의 第二 責任路程을 表示로 하면서 하나님의 直接 責任 基臺 잡는 路程의 始作을 보는 바다. 그러므로 모세 亦是 야곱 繼承的 成事로서 出發하심이 출애급 路程이다.
모세= 아브라함 + 子孫 = 祭物찾음 = 하나님 取하여 役事
그리하여 예수의 本되는 路程을 하나님과 合하여 成事하여 놓았다. 그런고로 야곱 나간 것이 모세의 完成의 本으로 모세는 出發하게 되었다. 이 本될수 있는 路程이 完成을 始作하였기에 信의 祖上들로 서게 되었다. 이리하여 예수 앞에도 이와같은 完成目的가고 나아가여야할 表示의 路程으로 모세도 出發을 보는바이다.
이와같이 攝理하는 바의 根本意義는 사탄 對한 四十日 完全 復歸 問題로 基因하는 바이다. 이 모든 어려운 役事始作의 延長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못하였기에다. 그런고로 모세도 애급 바로 宮中에서 자라게 하는 것도 擇한 百姓을 第二次로 노아 以後에 사탄한테 빼앗겼으니 사탄한테 주었다가 다시금 사탄 對하여 反對路程을 세우려니 모세 亦是 四十年時를 바로 宮中에 있다가 四十才가 되매 하나님의 百姓으로 出發케 함도 이 根本 四十數가 始作의 如何가 根本 뜻 成事目的였었기에 모세 亦是 四十才에 애급 對하여 反對하는 바이다.
모세가 四十才를 바로 宮中에서 全部를 잘 보낸 後에(사도행전 七章 二十三節 참조) 하나님은 擇하여 또 四十年間을 두었다가 役事하게 되는 바이다. 모세가 바로 對한 出發時는 八十才이었다.(출애급기 七章 七節 참조) 이와같이 四十數를 두고 役事한 것은 四十日數를 잃어버린것과 같이 되었든 것을 찾어서 蕩減을 定할려니 四十才에 擇하는 攝理를 始作케하여서 八十才에 成事로서 모세를 세워서 役事시킨바이다.
이리하여 再出發하는 모세는 勝利路程을 잡고 나아간바는 四十日 復歸의 目的完成이니 四十年後 四十年 하날뜻 準備期間으로 對케 한바이다. 그러니 이 모세 四十年 애급의 바로한테 준바는 全이스라엘 百姓을 바로가 支配하니 基本 四十日을 잃어버린 것으로 因하여 四百年이란 年數로 보았으니 모세는 이 四十日을 사탄으로부터 하날 四十으로 찾아 세우여야겠으니 애급 四十을 주었다가 하날 四十으로 蕩減하여 하날의 基本 四十日數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잡고 나서는 樣이니 애급 出發이라는 始作을 보는 바이다.
그러니 이스라엘 百姓은 四十日을 全體的 完成을 하여야 하는 바는 이스라엘 全部가 四十日 完成 하여야만이 노아 審判 根本 目的達成한 하날 百姓으로 보는 바겠으니 卽 根本 하나님이 創造本意인 말삼을 復歸하겠으니 모세는 이스라엘 民族을 中心하여 놓고 根本 뜻 成事의 基本言 成事의 約束을 받게 되는 바이다.
卽 四十日 晝夜로 通하여 禁食하여서라도 成事할 目的으로되니 모세는 四十日을 完成할려니 禁食하여 四十日 審判 根本目的 復歸가 目的이니 四十日로 因하여 言에 對한 二石板 받음이다. 이것은 무엇이나 四十日의 完成이 다시금 成事한 基盤되는 아담 해와의 成事를 完成한 本이라는 것이 始作을 보는 바이었다. 그리하여 全百姓은 言과 하나되어야만이 뜻 完成이라는 곳으로 나아갈 바가 根本인데 나아가지 못하게 되매 四十日에 對한 第二次 完成도 다시금 未完成을 본바와 같이 되니 이스라엘 百姓에는 다시금 苦痛수 四十數로 남아지게 되었다.
四十數 未完成은 再創造 復歸 未完成數인데 이스라엘 百姓이 가나안땅을 앞에 놓고 偵探軍이가서 偵探한날 四十日이 最後의 이스라엘 百姓이 全 뜻 成事냐 未成事냐 하는 間隔을 둔 對峠日數가 四十日이었다. 이 四十日을 두고 한 全部를 믿고 나아가면은 根本 四十日은 勝利의 基臺 될 날이 있는데 이 偵探期 四十日을 잘 믿고 넘지못함과 같은 結果로 나타나니 曠野 四十年의 苦難의 始作을 본바이었다. (민수기 十四章 三十節에서 三十四節) 이리하여 四十日 基本은 完成 못하고 四十日 完成으로 바라보는 全百姓 代表者는 다시금 사탄 所有物이 되어 曠野에서 四十年間에 死亡하는바가 始作된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뜻 路程에서 四十日의 勝利的 目的을 보지 못하고 이스라엘 百姓이 찾어 세우여야 하는 重大期間으로서 남어지게 되었다.
四十日 세우는 날이면 사탄 追放의 날이라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四十日이라는 날짜는 이스라엘 百姓앞에 찾아세우여야 하는 날이다. 이것을 蕩減과 동시에 完成할것이 攝理路程의 한뜻으로 되었다. 모세 四十日 目的 未完成하여서 사탄은 如前하게 侵入하여 全目的 파괴로 나아가니 하나님은 다시금 엘리야를 세우심이었다.
엘리야는 사탄 全滅시키기 爲한 代表的 存在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알神 八白餘를 滅하고는 四十晝夜로 호렙山까지 가는 것도 무엇이냐하면 모세 四十日에 對한 勝利點을 完決짓는 한 表示로서 엘리야 호랩산까지 四十日 期間이 있음이었다. 이리하여 엘리야로부터 노아 審判 四十日을 完成하는 同時에 하나님의 基本出發할수 있는 터를 造成하기 위한 總決戰者가 엘리야였다.
그것도 百姓이 不信, 不順, 不侍로 因하여서 사탄을 侵入延長을 보아서 메시야 前까지 當到하겠으니 하나님은 四十數 十眞培數 年數로써 四百年 期間인 四十數 延長으로 因한 메시야 時까지 侵入하여 役事하겠으니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여서 目的成事를 豫告함이었다. 이 엘리야라는 存在는 세례요한으로 始作하여 사탄 全滅目的 完成하여야 할 엘리야的 目的達成 못한 셈이로이니 예수 앞에까지 四十日에 對한 歷史的 蕩減課業이 延長을 본바이다.
그런고로 이것을 蕩減하기 爲한 總決算期가 예수 四十日 禁食期間인 曠野生活이다. 이리하여 勝利함으로 審判目的은 完成할 基臺는 잘있으나 사람이 合하여야만이(누가복음 4/13 참조) 成事란 結果로 因하니 四十日에 對한 未成事를 본바와 한가지로 되었다. 그리하여 十字架로 因하여 사탄 對한 勝利를 目的케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敗한 듯 하나 四十日間을 찾을 수 있다는 目的을 完成할 수 있다는 바는 十字架後로 因하여 예수 앞에 復歸되면서 基本完成의 터를 始作하여서 出發의 榮光을 본바다. 이 成立을 보아서 하나님의 基本 四十日 노아 根本 사탄 追放目的을 成立하여 놓은바가 根本目的으로 하나님의 攝理路程에 四十日 期間이 問題로 되어왔든 바이다. 그런고로 예수는 歷史的 모든 完成者로 뜻 出發 中心存在로 되는 바이다.(51. 10. 26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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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주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감사올림니다.
우리들의 후손에게
책임을 넘기지않는
축복가정이 되자
아주 !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