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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의 문신, 복음말씀의 지우개>의 줄거리:
말씀과 복음은 마음에 새겨질 때 우리 인격을 사로잡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왜 그토록 많이 접하여 듣고 읽고 공부까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나를 사로잡기는 커녕 오간데 없이 잊혀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들 마음에 새겨진 문신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신이 힘을 발휘하여 접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마음에서 지워버립니다. 복음 말씀과 마음의 문신. 서로 지우느냐 아니면 지워지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의 문신, 복음말씀의 지우개
(신명기 27:11~26)
11. 모세가 그 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16.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7.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마음의 문신, 복음말씀의 지우개>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의 문신, 복음말씀의 지우개’
마음의 문신이 우리에게서 복음말씀을 지워버린다는 얘깁니다. 복음의 지우개, 말씀의 지우개가 우리 마음의 문신입니다.
가명으로 소개된 기사를 하나 소개합니다. 이 기사의 주인공은 17살 여자아이 수인입니다. 수인이는 초등학교 때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방황을 하게 되면서 중학교 때부터는 비행청소년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결국 자퇴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도 일탈을 일삼다가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려서 호기심에 팔과 어깨 발목 네 곳에 문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여자경찰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준비하는 과정 중에 몸에 문신이 있어서 여경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성형외과에 가서 문신제거에 필요한 비용을 알아보니 수백만 원에 달합니다. 문신이 크고 복잡하면 3,000만 원까지도 들어간다고 합니다. 가정형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모처럼 마음을 잡고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달려가려는데, 그만 철없던 시절에 새겼던 문신 때문에 소망을 포기해야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학교전담 경찰관으로부터 문신을 무료로 제거해 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 기사가 10월인가 11월에 났는데 지금 서울 강남의 유명한 피부과에서 두 번에 걸쳐 문신제거 수술을 받았고, 내년 하반기쯤에는 문신을 모두 지울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수인이는 여경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이제 대학교 경찰행정학과에 진학해서 여경시험을 보기위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회가 생기게 된 것일까요? 경찰청의 여성청소년과와 대한피부과학회가 금년 5월 28일에 “사랑의 지우개”라는 이름의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합니다. 청소년 문신제거 무료시술지원을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철없던 시절에 충동적으로 문신을 새겼던 청소년들이 몸에 문신을 달고 사회에 진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것을 방지하고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거듭나게 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프로젝트입니다. 전국의 피부과와 의원의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사회에 공헌하기를 바라는 의사와 해당 청소년을 연결시켜주고 있었던 것인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경찰청 여성청소년과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피부과 의사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수인이에게 여경이 되고 싶은 마음은 비행청소년으로 지내던 시절의 깨달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여경에 대한 소망이 더욱 더 강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철없을 때 했던 문신이 문제가 됩니다. 벽돌로 살갗을 뭉개버리고 싶을 만큼 마음에 후회가 들고 그 몸의 문신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자기 몸의 문신에 대해 대적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지우개’라는 프로젝트가 생겨서 그야말로 공짜로 해결하게 되었으니 정말로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도 어제 보았던 내용으로 ‘에발 산과 그리심 산으로 올라가서 저주와 축복을 선언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11절의 앞부분과 오늘 본문에서도 에발 산에 올라가서 저주를 하고 그리심 산에 올라가서 축복을 선언하는데, 축복의 선포에 대해서는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모세의 명령을 따라서 실제로 이 일을 진행하는 여호수아 8장에 가보면, 거기에서도 축복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늘 저주가 선포되는데 저주에 대한 행동들이 나옵니다. 15~26절에서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들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고 하는 등의 행동을 안 하면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수인이가 불량청소년으로 지내다가 깨닫고 여경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는 것처럼, 이러한 간절함으로 우리 모두가 다 축복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도 그러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복지를 약속하시고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축복이 가득한 복지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복된 삶을 사는 첫째 원리는 절대로 마음이 축복을 향해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된 삶을 살고 싶다면 야곱처럼 복을 좇거나 이미 있는 복을 세어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게 주어져있는 저주와 싸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고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라고 하신 이야기가 곳곳에 나오지만, 어느 곳에서도 축복의 선포는 따로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축복의 선언은 복지에 들어가서 첫 번째로 행해야 되는 일이지만 저주만 선언이 되고 있는데,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유전적으로 주어지는 원죄의 저주 속에서 태어납니다. 그 저주 속에서 태어난 것을 저주로 깨닫고 저주에 대항을 하면 괜찮은데, 이 저주 속에서 태어난 것이 더욱 더 저주스러운 것은 그 저주 속에 태어난 상태를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안주하려는 강한 경향을 띄게 됩니다. ‘강한 경향을 띤다.’는 것은 저주를 전혀 저주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스럽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복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저주가 있기 때문인데, 복스러운 삶을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동지침은 이미 주어져있는 저주와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재벌의 아들로 태어나도 저주 속에 태어나는 것이고, 스웨덴 국왕이나 일본 천황의 자녀로 태어나도 저주 속에 태어나는 것이고 가난한 집에 태어나도 저주 속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인류 전체는 다 저주 속에서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가난해서 못 먹고 병에 찌든 사람들이 저주 받은 것이 아니라, 건강해서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며 사는 돈 많은 사람도 모두가 다 저주 속에 있습니다. 이렇게 저주스러운 삶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속에 원천적(생래적)으로 들어있는 저주의 요소를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수인이의 이야기를 했듯이 자기 몸의 문신을 좋아하던 시절에서 빠져나와, 여경이 되고 싶은 소망을 이루기 위해 문신에 대적하는 마음이 생긴 것처럼, 우리도 복지를 향해 갈 때 첫 번째로 가져야 할 태도는, 우리 속에 있는 저주의 요소가 눈엣가시처럼 보여야합니다. 그런데 이 저주의 요소를 깨닫지도 못하고 저주 속에 있는데 저주를 모르는 채 복을 좇으니 복지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원죄로 인한 저주와의 싸움이 복지로 나가는 길이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무엇과 싸워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마음의 문신입니다. 원죄의 저주 아래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마음의 문신입니다.
어제 석회 바른 돌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돌비에 석회를 발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합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940m 바위산에 비바람이 몰아치면 돌비 위에 입혀놓은 석회는 순식간에 지워지고 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지워지는 것을 염려하라’는 의도에서 이런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 석회 바른 돌비가 선민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렇게 되면 안 된다는 뜻에서 한 일이었는데, 결국 역사를 보면 선민의 마음이 석회 바른 돌비처럼 되어서, 하나님 말씀이 마음에서 다 지워지고 복지를 상실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우리가 알 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반복하고 당부하고 부탁하고 강하게 명령을 했으면 새겨질 때도 되었는데 말씀이 마음에서 지워지는 이유는 마음의 문신 때문입니다. 수인이가 여경이 되기를 바라듯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복지의 삶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이 마음의 문신이 귀로 들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서 지워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복음말씀의 지우개인 이 마음의 저주의 문신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 마음의 가장 거룩한 장소에 새겨지는 문신이고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들입니다. 대표적으로 ‘돈’이라는 문신이 마음이 새겨지면 돈에 대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애착과 집착이 생기게 됩니다. 수인이의 몸에 새겨진 문신을 지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돈 문신이 새겨져서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돈 문신이 새겨지면 아무리 내가 하나님을 향해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고, 이 문신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워버리게 됩니다.
조폭들이 온 몸에 용이나 호랑이 문신을 합니다. 그런 문신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긴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겠습니까? 불가능하고 새겨질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 자녀, 외모 등이 문신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쌍꺼풀 수술을 열 번도 넘게 하다가 결국은 자기 눈을 스스로 파괴해서 누구도 손을 못 댈 지경까지 되었다고 하는데, 마음에 외모 문신이 새겨져있기 때문에 그 문신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들 같은 경우에는 대형 목회와 삐까번쩍한 예배당이 마음에서 지워지질 않는데 이게 문신입니다.
결국 이 마음에 세상 가치들을 향한 애착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데,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서 세상에 대한 가치판단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데려다가 그 마음에 돈, 명예, 외모, 인기, 건강 등의 세상가치를 문신으로 새겨 넣은 것입니다. 이것의 가장 큰 폐단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940m 바위산의 돌비에 석회를 바르고 율법을 썼을 때에 비바람에 지워지는 것처럼, 아무리 말씀을 읽고 성경공부를 하고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삶의 현장에 나가자마자 다 지워집니다. 그 이유가 바로 마음의 문신이 지워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자꾸 무엇인가 원하고 부러워하고 선망한다면 마음의 문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해야겠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들어서 다 알겠는데 그러한 의도와는 다르게 자꾸 내 마음은 돈을 좀 더 벌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깔리게 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좀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이 세상에 대한 바람이 자꾸만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내 안에 문신이 있기 때문인데 이게 참 무서운 일입니다.
오늘 저주를 가만히 살펴보면 율법613개 조항을 다 이야기할 수 없으니, 오늘은 12번의 저주가 선포되는 가운데 11번의 율법조항이 나오고 마지막에는 “이 모든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정리를 합니다. 저주를 받게 되는 경우에 해당하는 율법 조항을 보면 십계명과 비슷하면서도 부분적으로 다릅니다. 십계명의 1계명, 3계명, 4계명은 언급이 되지 않고 2계명만 언급이 됩니다. 그것도 십계명의 문자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서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 대신에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전제로 하여 저주가 선포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지워졌음을 의미합니다. 더 내려가 보면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나오고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이것은 그냥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제 생각으로는 어차피 613개의 율법을 다 얘기하지 못할 바에는 십계명으로 얘기하면 될 것 같은데 24절에서 “그의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25절에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나오는데 ‘청부살인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 뇌물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20~23절까지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간음 얘기는 하지도 않으시고 굳이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 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형태의 간음 금지에 대한 언급을 하시는데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게 다 뭐냐 하면 앞으로 살아갈 가나안 땅 족속을 쳐부술 것이지만, 그들의 문화와 풍습이 남게 될 것이므로,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다 부셨어도 어떤 식으로든지 그 흔적을 보며 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고, 지금 가나안 땅의 삶의 풍조를 염두에 두고 이 저주를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엡2:1~2절에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라’는 얘긴데 따르는 이유를 분명히 얘기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하는데 ‘허물과 죄 가운데 있었을 때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세상 사람들과 마음의 문신이 같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에 돈 문신을 새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에도 돈 문신이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통째로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게 돼 있습니다. 왜 그렇게 수백, 수천억을 들여서 예배당을 지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세상 풍조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고, 세상풍조를 따라가는 이유는 석회에 말씀을 새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23:27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석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 말씀을 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마는, 회칠한 돌비에 율법을 새긴 것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 말씀이 보이지만,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다 지워진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관점으로 성공이냐 실패냐를 결정하는 기준을 따라서 삐까번쩍한 예배당을 생각하고, 수적인 부흥에 목말라하는 이유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자본주의적 문신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수인이처럼 자기 몸의 문신을 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골3: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하시는데 자꾸 땅의 것을 생각하게 되고 원하게 됩니다. 땅에 있는 것이 가족이든 나라든 성공이든 사업이든 건강이든 어떤 것이든지 간에 자꾸 땅의 것을 생각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옆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문신이 있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쪽으로 마음이 가질 않습니다.
바울이 롬7: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한 것처럼, 수인이가 자기 몸의 문신을 지긋지긋하게 대적하듯이 내 마음의 문신을 대적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마음의 문신이 새겨져 있어서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려고 하지 않고, 자꾸 문신이 새겨진 마음이 문신의 내용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가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기 위해서는 그 문신을 대적하는 마음이 생겨야 하는데 하나님께로 가고 싶어 하질 않습니다.
석회 바른 돌비에 새겨진 율법이 겉으로는 잘 보이는 것 같고, 겉으로는 하나님께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마음엔 마음의 문신이 있어서 안 되고 마음의 문신을 미워해본 적이 없어요. 돈 문신이 새겨져있으면 돈을 원하는 바람을 그대로 타고 하나님께로 가서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하고, 건강하게 해달라고 하고 사업 잘되게 해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행위의 과제로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생각하시고 판단하시는 증거입니다. 이 ‘증거’가 말하는 것은 즉 우리의 돈 문제, 건강 문제, 삶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인데, 마음의 문신 때문에 안 되니 그 문신을 미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꾸 내 마음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그 문신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수인이가 문신을 미워했던 것처럼 미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 복음’이라는 사랑의 지우개가 나타납니다. 십자가 복음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 내 마음에 문신은 지워지지만, 원죄적 기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돈 문신이 지워지면 십자가를 붙드는 동안 돈이 나를 끌고 가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놓치면 다시금 원죄적 기질이 나타나며 세상의 가치를 붙잡게 됩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처럼 내 마음이 세상에 끌려가는 모든 순간에, 죽을 때까지 십자가를 밝히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문신이 지워지기 위해 24시간 마음으로 십자가를 붙잡아서 저주로부터 벗어나고 저주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저주의 결과가 마음의 문신입니다. 문신의 내용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입니다. 내게도 그 증표가 있는 것을 보려면 세상 것을 바라고 선망하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면 저주에 걸려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좇을 생각하지 말고 마음의 문신을 대적해서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한 대적하는 마음이 있는 자라야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있을 것이고, 십자가를 생활화할 때라야 우리 마음이 하나님으로 배불러서 하늘로 올라갈 수 있고, 마음이 하늘에 앉힌바 된 그런 사람이라야 이 땅에서는 모든 문제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돈 문제, 가정 문제, 건강 문제, 인생 문제, 노후 문제 등이 진행되면서 진정한 복지를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복음말씀의 지우개는 우리 마음에 새겨진 문신입니다. 거꾸로 복음이 문신을 지워야 합니다. 마음의 문신에 의해서 복음이 지워지는 게 아니라, 복음이 문신을 지워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문신을 대적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새겨진 돈과 가족 사랑을 대적하고 자녀 사랑과 외모에 대한 사랑 등 이 세상 모든 가치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 가치는 하나님의 뜻대로 불림 받고 보냄 받으면서 쓰일 것이기에 그것들은 우리의 관심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복음말씀과 마음의 문신 사이에서 내게서 복음 말씀이 마음의 문신을 지울 것인가 마음의 문신이 복음 말씀을 지울 것인가에 대한 무서운 결단의 순간들이 매순간 주어질 때에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음의 문신을 지우는 복지의 승리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