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회상충돌(會商衝突)
광무원년 9월에 노공사 위패가 갈려 가고 그 대신에 소페에르가 왔다. 반 위협으로 군대 교련과 재정처리를 다 주관하여 전국 권리를 온통 차지하려는 기세가 있다. 대신들은 저희가 만들어 놓은 일이라 노공사 말이면 황제말보다 더 두려워한다. 이에 대하여 맹열히 반대하는 이가 독립협회이다.
노국세력을 구축하기 위하여 민중 활동이 일어났다. 노국 해군 근거지로 마산을 조차하려든 비밀계획이 민의로 인하여 정지되고 조금 전에 용암포 문제와 부령 경흥문제도 다시 일어나지 못함은 다 민의로 되었다. 이로 인하여 노국은 극동경영에 방침을 고쳐 조선보다 만주에 더 주력하려고 정하고 청국으로부터 위해 위와 여순을 조차하여 얻고 만주에 힘을 쓰게 됨으로 자연 조선의 간섭이 적어졌다.
독립협회의 운동은 노국문제뿐 아니라 내정개혁에 착수하여 정부대관들을 불러 개혁을 권고하고 일변 궐문 앞에 복합(伏閤)하여 정신들의 파면을 아뢰이니 반대파에서 말을 만들어 윤치호 대통령이 되려고 음모가 있다고 밀고하여 윤치호 회장은 사면하고 자리를 피하였으나 회는 그냥 계속하여 광무 2년 2월 28일에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고 회로부터 정부에 개혁조건을 들어 다 승인을 받았으나 다 공문뿐이고 실행이 없었다.
11월 5일에 회에서 적극적으로 개혁하려고 방침을 세웠더니 방해자 측에서 불괴를 꾀한다고 투서가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상재(李商在) 방한덕(方漢德) 남궁억(南宮檍) 이하 주요인물을 17인 검거하고 회의 문부를 압수하고 회를 해산하라는 칙령이 내리였다.
회원들이 듣고 심히 격앙하여 당일로 경무청 앞에 만민공동회를 열고 고명근이 회장이 되어 당국을 탄핵하며 잡힌 사람들이 다시 재판으로 넘어감에 도 회장은 재판소 앞에 옮겨 풍우를 무릅쓰고 연일연야 회를 계속하며 독립협회 무고자 조병식 이하의 처벌과 헌의 6조 실시와 협회 복구를 보아야 물러가겠다 하며 연방 상소를 올리었다.
15일에는 다시 인화문(仁化門) 앞으로 모여 소장을 드리니 반대자들이 보부상들을 모아 가지고 회를 습격하여 서로 충돌이 되어 집회를 금하였으니 이것이 망국의 시초이다. 각처에 충돌이 계속되어 그 이튿날은 남대문 밖 아현에서 충돌되어 양방에 다수 사상자가 나고 민중은 격앙하여 보부 장본인 이기동(李起東) 길영수(吉泳洙) 등과 기타 요로 대관의 집을 부수고 시민들은 상점 문을 닫고 경성이 암흑천지가 되었다.
조정에서 협회원 이백 명을 부르고 각국 공사를 청하고 황제 궐문 앞에 나아와 군민일치로 유신을 꾀한다 유고하니 협회에서 치죄하여 달려든 사람 8인 중 5인을 정죄하고 청구한 조려를 실행하기로 공약하고 독립협회는 회복하고 보부상은 해산하였으니 이것이 회상충돌이다. 그러나 그 후에 회에 대하여 탄압이 심하고 요인들은 다 벼슬하고 회가 다시 모이지 못하였고 그때 가장 주목 중에 있던 중요 인물은 다 외국으로 도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