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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잉여 선민>의 줄거리:
잉여(剩餘)란 쓰고 난 후 남은 것입니다. 긍정적으로는 여유로움과 충만함을, 부정적으로는 불필요함과 쓸모없음을 뜻하지요. 택함 받은 선민은 긍정과 부정 양측면 모두에서 잉여적 가능성을 갖고 삽니다. 이 땅에서의 삶 전체가 하나의 여유로움과 충만함의 표현일 수도 있고, 전혀 불필요함과 쓸모없음으로 가득찰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으로 듣는 하나님 음성의 데시벨이 선민에게서 긍정의 잉여와 부정의 잉여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제시 됩니다.
잉여(剩餘) 선민
(열왕기상 20:1~21)
1. 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명이 그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그 곳을 치며
2. 사자들을 성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보내 이르기를 벤하닷이 그에게 이르되
3.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
4. 이스라엘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
5. 사신들이 다시 와서 이르되 벤하닷이 이르노라 내가 이미 네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너는 네 은금과 아내들과 자녀들을 내게 넘기라 하였거니와
6. 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하들을 네게 보내리니 그들이 네 집과 네 신하들의 집을 수색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들의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 한지라
7. 이에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이 악을 도모하고 있는 줄을 자세히 알라 그가 내 아내들과 내 자녀들과 내 은금을 빼앗으려고 사람을 내게 보냈으나 내가 거절하지 못하였노라
8. 모든 장로와 백성들이 다 왕께 아뢰되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마옵소서 한지라
9. 그러므로 왕이 벤하닷의 사신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왕께 말하기를 왕이 처음에 보내 종에게 구하신 것은 내가 다 그대로 하려니와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나이다 하라 하니 사자들이 돌아가서 보고하니라
오늘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잉여(剩餘) 선민>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잉여(剩餘) 선민’
잉여와 관계된 유명한 대사가 있다고 합니다. “말죽거리 잔혹사”라는 영화인데 학교에서 문제 학생으로 분류된 학생들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가 문제 학생인 아들에게 하는 대사가 유명합니다. ‘잉여인간이여~ 잉여인간, 알아? 인간 떨거지 되는 거야!’라는 말입니다.
이 영화 대사에 따르면 잉여 인간은 학생의 신분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무능하게 학창시절을 다 보내고 나면 정식으로 사회의 일원도 되지 못하고 도태되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떨거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떨거지’란 세상이 정해 놓은 성공의 경계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 사람을 말하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잉여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그리고 ‘잉여 남’이나 ‘잉여 여’라는 말도 있는데 아직 애인이 없는 남녀 청년들을 일컫는 말이고, ‘잉여청춘’은 직업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잉여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사용 될 때도 있습니다. ‘잉여자본’이라는 말은 이윤을 많이 내서 모든 비용과 지출을 제하고도 남아도는 부분을 뜻합니다.
또한 경제학 용어로 ‘잉여노동’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노동자가 자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노동을 하는데 자기가 얻는 것 이상의 노동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생계유지를 위한 불필요한 노동을 뜻합니다. 이렇듯 잉여라는 말은 충만한 것의 나머지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부분의 부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사실과 맥락을 두고 말하자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계를 위해 하는 노동에 대해서 어떻게 보실까요?
창3:19절의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대로 타락 이후에 생긴 것이 생계를 위한 노동입니다.
마6:31절과 33절에서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십자가복음과 잉여라는 말을 연관 지으면서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수 있고 선민의 정체성을 눈앞에서 뚜렷하게 가져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생계를 위한 노동 자체가 불필요한 잉여노동이기 때문입니다.
선민에게 생기는 잉여성에는 긍정과 부정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적용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우선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주고 있는 특이한 본문입니다. 언뜻 보면 구약성경을 접하는 형태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부정적 측면의 잉여선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것을 더 뚜렷하게 구분 짓기 위해서 긍정적 측면의 잉여선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믿음과 구원에 있어서 선민은 어떤 면에서 잉여의 사람들일까요?
믿음은 십자가의 예수님이 ‘나’라고 믿고 그분의 죽음과 연합하여 그분의 부활과 승천을 따라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내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는 이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인데 죽어야만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창세전부터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예수님과 하나님아버지의 교통하심에 우리도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통하심의 특징을 사랑과 기쁨으로 규정하셨습니다. ‘사랑’이란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를 마음 안으로 받아들이시고, 하나님아버지도 아들 예수님을 마음 안으로 받아들이신 상태입니다. 그럴 때에 나타나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해와 달과 산과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먼저 있었고, 그 기쁨을 공유하기 위해서 창조가 일어나고 인간이 지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통하심을 통해 하나님아버지를 받아들이시면,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우리의 마음도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우리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아버지 안에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생긴 기쁨을 우리도 똑같이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세상에서 나의 마음을 뺏어가려고 하는 많은 좋은 것들에 대해 죽음으로서 표현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삭에 대해서조차도 마음이 죽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십자가가 세상에 대해서 죽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해 가게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으로 만족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세상 사람들은 만족과 기쁨을 위하여 돈을 벌려하고 성공도 하려하고 결혼도 하려하고 일류대학에도 들어가려고 하지만, 마음이 하나님으로 만족과 기쁨으로 이미 가득 찬 상태가 되어버리면, 이제 이 땅에서의 삶은 전적으로 잉여의 공간과 잉여의 시간이 되므로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는 세상은 의미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마음을 들여보내므로 예수님이 아버지로 느끼시는 만족과 기쁨을 그대로 받아 누리는 것이 구원이고 실제로 믿음을 통해 일어나는 결과이기 때문에, 이 지구 위에서의 삶은 잉여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생각으로라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잉여의 삶에서 나를 데려가시지 않고 살게 하시는 이유는 이 잉여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삶은 온전히 이웃의 만족과 기쁨을 위함인데 이것이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잉여선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부정적인 모습의 잉여 선민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두 번에 걸친 전쟁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첫 번째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과 아람의 왕 벤하닷은 하나님 앞에서 보자면 도토리 키 재기로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굳이 악함의 경중을 따지자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백성들을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빠뜨렸던 아합이 더 더럽고 악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합과 벤하닷 사이에서 두 차례의 전쟁이 있었는데 군사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두 번 다 아합에게 승리가 돌아갑니다.
이 사실은 선민을 바알숭배에 빠지게 미혹한 아합을 하나님께서 지지하셨거나, 그의 범죄를 용서하셨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는 벤하닷이 치고 들어오기 전에 먼저 가까운 곳에 진을 치고 사신을 보내서 하는 말이 3절에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라고 협박하자 아합은 그렇게 하겠다며 굴종적인 자세를 취하는데 아람의 군사력이 비교가 되지 않게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얻은 사신이 벤하닷에게 돌아가서 ‘아합 왕이 저항할 기세가 없이 왕이 요구하는 것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라고 하자 기세가 등등해진 벤하닷은 다시 사신을 보내서 이번에는 ‘내가 요구한 것을 네 손으로 건네주는 대로 받을 것이 아니라 아예 내 신하들을 너의 궁궐로 들여보내서 네 눈에 좋게 여길만한 모든 것을 깡그리 가져오겠다.’라고 합니다.
이 말대로 된다면 이스라엘은 국가로서의 면모자체가 허물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말처럼 아합으로서도 그렇게까지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아합 왕이 나라의 장로들을 다 부르자 모든 장로와 백성들이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말라’고 하면서 벼랑 끝에 선 그들이 분노하여 필사항전의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이름도 없는 익명의 선지자가 아합을 찾아와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게 됩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어떻게 적군 아람에게 대항해야 할지 모르는 중대사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왕이나 신하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는데, 하나님은 자존심도 없으신지 선지자를 보내셔서 13절에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라고 승리를 전하셨고 20~21절에서 이스라엘은 완전히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성경에서 선민의 전쟁이 곳곳에서 나왔지만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전쟁은 없었습니다. 당사자들은 굴욕을 겪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전혀 찾지 않았는데 나라의 존망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에서는 분노로 사생결단을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아합 왕의 가문 전체는 뒤이어 나올 예후에 의해서 멸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하지도 않았던 선지자를 손수 보내셔서 이러한 승리를 주셨는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림을 한 번 그려보기로 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바알 숭배에 찌들었지만 선민이었습니다. 계4:5절의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라는 말씀처럼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끊임없이 말씀으로 음성을 발하고 계십니다.
그 내용은 아람의 벤하닷이 어마어마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지만 승리는 너희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을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벤하닷이 쳐들어왔다는 소리가 우렛소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전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행동과 생각을 하며 대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은금과 아내들과 훌륭한 자녀를 볼모로 내어 주겠다고 굴종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었고, 사신이 두 번째로 왔을 때에도 분노하며 결사항쟁을 다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승리를 주셨지만, 대부분의 우리의 삶은 음성을 들었더라면 전혀 불필요했을 잉여의 생각과 행동을 가지고 삶을 진행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합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신 이유는 아합의 영적 상태가 옳았기 때문에 지지하시고 후원하셨던 것이 아니라 다만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합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전혀 갖지 않아도 될 마음가짐과 하지 않아도 될 생각과 취하지 않아도 될 행동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시면서 성경을 읽는 우리들에게 ‘네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삶의 문제나 조건이나 상황이나 과제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며 대응하는 것들이 혹시 잉여의 생각이나 행동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신다면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잉여의 생각과 행동과 반응으로 채우고 산다면 이것이 아합의 삶입니다. 선민에게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 측면의 잉여인 것인데, 선민의 이름을 달고 있는 떨거지가 되는 것이고 구원의 영역 밖으로 버려지는 쓰레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아합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에 대해 항상 음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일 보겠습니다만 이방나라 아람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섭리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지만, 음성을 발하셔서 듣도록 말씀하고 계시지 않고 그들에게 들려주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선민에게는 하나님께서 가지신 생각을 계속해서 들려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내가 취해야 될 생각과 행동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제 말씀 드린 대로 마음을 땅에 붙이고 있기 때문에 듣질 못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서울 모래내에서 살았는데 연희동 쪽에 남가좌동 수색으로 빠져나가는 기찻길이 있습니다. 그 철길에 못을 올려두면 열차가 지나가면서 납작하게 칼 같이 됩니다. 그런 장난을 할 때에 기차가 오는지 알기 위해서 기차 레일에 귀를 대면 저 멀리 남가좌역이나 수색역 근처에서 오는 기차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좌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 계속해서 말씀을 내려 보내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이 땅에 마음을 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렛소리처럼 들리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의 오는 말씀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이 우렛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이 땅에서 마음을 떼고 보좌로 가까이 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 소리만 우렛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고, 이렇게 세상 소리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 또한 신앙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삶은 잉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소리도 내 마음에 전달이 안 될 정도로 하나님의 음성이 우렛소리로 들리는 주님의 자리로 가까이 가야합니다. 주님 안에서 머물고 있으면서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할 때에,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내어드리게 되고, 그러한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숨겨진 선민을 찾아내시고 이웃을 사랑하는 섭리를 통해 나를 사용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땅에 붙으면 삶 전체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불필요한 것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지난여름에 3주 동안 휴무의 시간을 가졌을 때에 의자를 마련하기 위해서 재미삼아 광명시에 있는 이케아를 가보았습니다. 의자 두 개를 조립하는데 저는 설명서를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순서를 바꿔서 조립하는 바람에 의자를 조립하다가 다시 뜯어야만 했습니다. 부품들이 앞뒤 좌우가 정확해야만 하는데 그것을 바꾸어 조립하기도 했습니다. 설명서를 읽지 않고 했던 모든 행동이 잉여노동이 되었던 것인데 혹시 우리의 삶이 그렇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선민인 한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취해야 되고 우리를 통해서 행동이 나타나야 되고 우리를 통해서 반응이 나타나야 될 모든 것에 대해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이 음성을 따르면 불필요한 잉여의 행동과 생각이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음성을 듣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생각과 행동이 잉여의 쓰레기로 가득 차버리는 것이고 이렇게 힘들고 우울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땅에 붙어서 땅의 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하려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자녀 직업 승진 건강을 통해서 행복하려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임으로서 주님께서 하나님아버지와 누리시는 교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돈이나 건강 혹은 자녀 때문에 걱정이 될지라도, 이 걱정이 유전적 죄의 형질 때문에 일어난 가짜 걱정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라도 믿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끌려갈지라도 생각으로라도 완전한 만족은 예수님에 안에 마음이 머물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우리의 삶은 불필요한 생각과 행동의 쓰레기로 가득 찬 잉여가 아니라, 더 이상 만족과 기쁨을 구할 필요가 없는 잉여의 삶이 되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도구가 되고 나를 만나는 자마다 하나님의 은총에 접하게 되는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잉여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오늘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잉여의 가능성을 그림을 그리듯이 펼쳐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로 우리 마음을 땅에서 떼고 죽게 하시고, 긍정적인 잉여의 선민이 됨으로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계획의 수단이 되게 하시되, 더 이상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잉여의 삶은 중단되는 은총을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