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인술을 베푸신 전주 “회산” 병원 황 외과 선생님을 아시나요.
글/黎明/김진호
전주 다가동에 가정집을 개조한 회산 병원이란 명칭으로 1942년에 개원을 하여 50여 년 동안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푸신 황외과 의사 선생님이 계셨다. 1966,7,80년대 그 시대 전주사람이라면 화산변원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회산 병원을 개원하기 전에는 도립병원에서 맹장수술과 치루염은 국내에서 최고의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그 당시는 해방 후 동족상잔의 6,25 동란으로 국토는 산산조각 쑥밭으로 국민이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다. 회산 병원은 문을 열자 환자들이 몰려들었고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저렴한 수가를 받기 시작하면서 영세민과 농촌 주민들이 의사 선생님 치료를 받기 위에 새벽부터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며 치료를 받았다.
지금은 맹장 수술은 의술이 발달되어 배탈 정도지만 당시만 해도 맹장으로 죽는 사람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는 국민 모두가 가난하여 돈이 없어 병원은 엄두도 못하였고 영아 어린아이 사망률이 많았고 오죽하면 그 당시는 5살 이상 먹어야 호적에 올리는 풍속이 있었다.
황외과 선생님은 의술이 좋아 서울 큰 병원에서 초청하였지만 사양했고 또한 큰 병원을 개원했다면 큰돈도 벌고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황외과 선생님은 진료비를 낮추기 위해 수술 때 마취는 손수 민간 마취를 개발하여 마취를 했고 고가약품은 원외처방을 원칙으로 했으며 붕대도 직접 소독해 재사용을 했다. 정직. 성실. 검소를 생활신조로 해 살아온 선생님은 의술이 좋아 돈 있는 사람들이 번듯한 병원 건물 짓자고 했지만 마다하고 개업 당시 건물인 병실 8개에 양철지붕 한옥을 그대로 고집하며 오로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진료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황원장 선생님은 개업 후 50년 여 년 동안 매일 새벽에 일어나 집 안팎을 청소하고 입원실 마룻바닥까지 손수 걸레질을 했으며 심지어 연탄까지도 직접 갈았다. 60년 70년 당시 가난한 전주 시민 그리고 인근 가난한 농촌 사람들이 황외과 선생님 치료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수술을 받고도 돈이 없는 환자에게는 "다음에 갖고 오라"며 퇴원을 시키기 일쑤였으며 이들 대부분의 퇴원환자들은 닭. 곶감. 밤 등 농산물을 들고 찾아와 치료비 대신 답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필자 나는 당시 나는 7살 때 다리에 큰 화상을 입어 황외과 선생님의 치료를 받았지만 부모가 돈이 없어 치료비를 내지 못해 돌려보냈고 해마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면 꼭 곡식 등 농산물을 드렸지만 받지 않으려 하여 아버님은 새벽녘에 병원 문 열기 전에 문 앞에 농산물을 갔다 놓았는데 물건을 받지 않으려 하자 치료받던 농촌사람들이 손수 지은 농산물을 새벽에 병원 문 앞에는 물건이 쌓였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전주시 다가동에 현재 보건소 근방으로 기억하는데 그곳을 지날 때마다 황외과 선생님의 고마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50여년 동안 평생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인술을 베푸시다가 노년으로 더 이상 의술을 베풀수 없어 노년에 서울의 아드님댁으로 가셨고 2009년에 작고하셨다는 후문이다. 지금은 선생님이 저세상 사람으로 계시겠지만 60년 70년대 전주 사람 들은 회산 병원 황외과 선생님치료를 받지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며 인술을 베푸신 선생님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황외과 선생님 아드님도 부친의 대를 이어 고려 의과대학교 외과 교수로 재직한바 있다.
평생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인술을 베푸신 선생님 저 세상에서 편안히 영면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치료해주신 선생님께 그 고마움을 전합니다.
다가동 회산 병원 자리를 지나다 이 글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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