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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란 마음을 찾는 종교요, 마음을 보는 종교요
마음을 아는 종교요, 마음을 깨닫는 종교요
마음을 잘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108배를 아무 생각 없이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굴신운동이지요. 나는 먼저 동서남북과 중방을 향해서 절을 합니다. 극락은 우리 인생이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영원의 세계가 아닙니까. 그런데 극락에 갔다 하더라도 깨치지 못하면 무엇 합니까. 그래서 나는 절하는 대상 뒤에 ‘극락왕생’에 이어 ‘견성성불’ 하고 외는데 ‘극락에 가서 견성 성불하여지이다’ 하고 축원하는 것이지요.”
혜인은 고명인이 앞에 앉아 있는데도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듯 절하는 대상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동서남북과 중방의 불국정토에 계시는 부처님 즉, 동방만월세계 약사유리광여래불, 서방 극락세계 아미타불, 남방환희세계 보승여래불, 북방무우세계 부동존불, 중방화장세계 비로자나불에게 먼저 하고, 그 다음은 자신을 향해 자성진불(自性眞佛)에게 하고, 그 다음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도락산의 대불과 백만불전 부처님에게 하고, 그 다음은 제주도의 약천사 불보살님과 오백나한에게 하고, 그 다음은 문수, 보현, 지장 등등 시방법계의 모든 보살들에게 하고, 그 다음은 역대조사, 우리나라 국사, 선승, 고승에게 하고, 그 다음은 우리나라 성산(聖山)들의 산신들에게 하고, 그 다음은 팔만사천의 조왕님에게 하고, 그 다음은 조상님, 부모님에게 하고, 그 다음은 세상의 모든 비구와 비구니에게 하고, 그 다음은 문도문중 사형사제에게 하고, 그 다음은 유주 무주(有主 無主) 영가, 고혼, 지옥 망자에게 하고, 그 다음은 해와 달과 별, 공기와 물과 불과 비, 곡식과 뿌리와 꽃에게 하고, 그 다음은 이로움을 주는 우주의 모든 유무정물에게 하고, 그 다음은 해로움을 주는 우주의 모든 유무정물의 이름을 부르며 절을 한다는 것이었다. 혜인이 절하는 대상을 일일이 얘기하는 동안 고명인은 이따금 마음속으로 후렴을 따라 부르는 노래처럼 극락왕생 견성성불을 중얼거렸다.
혜인에게 절을 받는 대상들은 시방법계와 동서고금에다 거래원친(去來遠親)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들었는데, 고명인은 그 대상들이 어떻게 108배 안에 다 수용되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1배를 하는 동안 절을 받는 대상들은 전광석화처럼 찰나에 지나가는지도 모를 일이었고, 삼매에 빠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 같았다. 마침내 혜인은 절하는 대상을 다 얘기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런 108배가 예전에 내가 해인사 장경각에서 했던 1백만 배보다도 낫다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정말 1백만 배를 하셨다는 것입니까.”
혜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내 나이 스무 살 때입니다.”
혜인이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참선하다가 상기병이 난 스무 살 때였다. 일타가 파계사 성전암에 있는 성철을 찾아가 혜인이 상기병이 나 고생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성철은 하루 1천배씩을 해보라고 권했고, 혜인은 즉시 실천에 옮겼다. 절을 한 지 1백일 만에 상기병이 나았다. 그리고 혜인은 일타의 당부대로 군대에 가서 늘 관세음보살을 불렀는데, 그 덕분에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도피안사로 가 편안히 살게 되었다. 혜인은 이를 부처님 가피로 여기고 날마다 5천배씩을 20일 동안 했고, 자심감이 들어 십만 배를 했다. 혜인은 십만 배를 회향하고 나서 일타에게 “군대에서 제대하면 백만 배를 하겠습니다” 하고 약속했다.
성철에게도 백만 배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성철은 “생각은 잘했다만 하다가 중단하려면 시작하지 말라, 마음 단단히 먹고 하라. 절하다 죽은 놈 없고 설령 죽어도 지옥은 안 간다. 죽을 각오로 하고 백만 배를 채워라”고 격려했다. 마침내 군복무를 마친 혜인은 해인사 장경각으로 가 절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양말을 벗다가 문드러진 발가락 위에 염주 같은 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절하다 박힌 굳은살이었습니다. 두 무릎에는 더 크게 밤톨처럼 딱딱하고 반질반질한 굳은살이 생겨나 있었습니다. 송곳으로 찔러도 아프지 않았는데, 어느 날인가는 절을 하다가 굳은살의 통증 때문에 앞으로 고꾸라지기도 했습니다. 쓰러져 만져보니 딱딱해진 각질의 껍데기 속에서 찔꺽찔꺽한 피고름이 터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성철스님은 말없이 지켜보셨고, 우리 일타스님은 보시고 나서 피고름을 닦아주셨습니다. 그래도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절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제일 곤란한 것은 코피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절을 하려면 엎드려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코피가 줄줄 흘러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장경각 옆문에 기대어 고개를 젖히고 한참 있다가 코피가 멎으면 또 시작하곤 했습니다. 이와 같이 3천배를 하기를 한두 달 하다 보니 힘이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4천배로 올려 하는데, 처음 며칠간은 힘들었으나 또 얼마간 계속하니까 할 만했습니다. ‘힘들면 기도가 아니지. 힘이 들어야 기도지’ 이런 생각으로 5천배로 올렸습니다. 5천배로 올리고 나니 하루가 빡빡하게 되어 다른 시간은 낼 수가 없었습니다. 5천배를 마치고 대중방으로 돌아가서 몸을 씻고 나면 공양시간에 겨우 참석할 수 있었으니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었고, 다른 것을 쳐다볼 새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혜인은 음력 3월 24일 1백만 배의 절을 무사히 회향했다. 1백만 번이란 숫자를 채운 것이었다. 성철의 격려대로 단 1배도 중단하지 않고 1백만 배를 채웠던 것이다. 그때가 혜인의 나이 갓 서른을 넘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혜인은 이야기를 하다 목이 말랐던지 음료수를 꺼내왔다. 간식거리도 가져와 고명인에게 권했다. 그러나 고명인은 그것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목젖을 타고 뜨거운 무엇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1백만 번의 절을 하고도 어떻게 몸이 성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피고름이 터져 나오는데 무릎을 1백만 번이나 법당 마룻바닥에 부딪칠 수 있다는 말인가. 1백만 번이란 작은 물방울이 바위라도 뚫을 수 있는 숫자가 아닌가.’
그런데 혜인은 고명인이 1백만 번이란 숫자에 놀란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음을 알고, 그 숫자의 의미는 덧없는 것이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백만 번의 숫자에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나는 1백만 번의 절을 했기 때문에 진짜 1배의 절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만 번의 절보다 정성을 담은 단 한 번의 절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스님, 백만 배를 하고 나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반야심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얻는 바가 없으므로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며 그런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얻을 바가 없는데도 최고의 진리의 문으로 들어간다는 얘깁니다. 무엇이든 얻을 바가 있다고 하면 잘못된 거예요. 부처님도 모양으로나 음성으로 나를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든 모습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그때 참모습을 본다 이겁니다. 백천 강물에 어린 달이 진짜인 줄 알 때는 허공의 달이 가짜인 줄 알 것이고, 허공의 달이 진짜인 줄 알 때는 강물에 비친 달이 가짜인 것을 알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실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 실상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도 얻은 것이 있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만.”
고명인이 간청을 하자 혜인이 마지못해 말했다.
“억지로 말을 하자면...”
혜인은 쑥스러운 듯 머뭇거리며 얘기를 꺼냈다.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장경각으로 찾아온 신도들이 법문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말이 줄줄 나오는지, 말문이 툭 트이는 변재(辯才)를 얻은 것이에요. 사실 저는 말을 아주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혜인은 제주도에서 28살 때 첫 법문을 한 기억을 떠올렸다. 양진사를 지어 낙성식을 하는데 신도들이 많이 모이고 있었으므로 내심 걱정이 들었다. 사람만 모이면 말을 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얘기를 하다가도 막히면 멀리서 가까이서 온 신도들을 향해 원근각처(遠近各處)를 들먹이기만 했다. 법문이 끝나고 비구니스님이 ‘스님은 원근각처를 몇 번이나 말했는지 아느냐, 여덟 번도 더 했다’고 창피를 주었다. 이후 혜인은 사람이 모인 자리는 절대로 나서지 않고 말도 안 했다. 사람 앞에만 서면 마구 떨리고 알았던 부처님 말씀도 잊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1백만 배를 회향하고 난 뒤에는 그런 조바심과 두려움이 사라져버렸다. 장경각에서 기도했던 스님이 법문을 잘한다고 전국으로 소문이 난 것이었다. 실제로 혜인은 1백만 배를 회향하고 난 뒤부터 한 달에 20회 이상 초청을 받아 법문하는 법사로 나섰고, 부르는 곳도 전국 사찰뿐만 아니라 육해공군의 법당에서부터 교도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또 하나 더 얻은 것이 있다면 절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숫자를 채우려고 팔랑개비 모양으로 하는 절은 절에 놀아나는 것이지 참된 절이 아니라는 겁니다.”
혜인은 절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얘기를 계속했다. 진짜 절을 하려면 마음과 정성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나를 낮추면서 상대의 행복을 빌면서 하는 것이 절입니다. 우리 육체 중에서 값으로 따져 가장 가치 있고 중요한 부문이 머리입니다. 머리는 보물창고지요. 이 머리의 상단이 이마입니다. 이 소중한 이마를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땅바닥에 대는 것이 절입니다. 절의 자세도 이렇게 하라고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과 보살을 바로 볼 줄 아는 마음이 싹터야 바른 자세가 나옵니다. 보살은 자비의 상징이고 덕화의 상징입니다. 우리들에게 이익을 주고 도움을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보살인 것입니다. 문수와 보현만 보살이 아니고 지금 여기 놓인 책상도 보살이고, 물을 끓이는 전기주전자도 보살이고, 눈을 즐겁게 해주는 텔레비전도 보살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고마움을 주고 도움을 주는 것이 보살이니 참회하는 사람은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참회의 근본이고, 참회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본 사람만이 진짜 절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제야 고명인은 자신이 지금 왜 광덕사에 와 있는지를 자각했다. 혜인의 일정 때문에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으므로 급히 듣고 싶었던 일타스님의 얘기를 꺼냈다.
“송광사에서 일타스님을 방장스님으로 추대하려 했는데, 스님께서 거절하셨다는 얘기를 정혜사에서 하시다가 말았습니다. 다시 들을 수 없겠습니까.”
“동산 큰스님, 전강 큰스님, 경봉 큰스님, 이런 고승들이 건당까지랄 것은 없지만 우리 스님을 좋아해서 곁에 두고 싶어 했어요. 특히 구산스님께서 당신의 상좌인 현호스님을 통해서 후계자로 택하려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나와 현호스님이 심부름을 맡아 진행이 많이 됐는데 스님께서 나는 어른감이 못 된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어요. 우리 스님이 얼마나 양심적이냐면 나는 도인이 아니라며 단 한 번도 주장자법문을 하지 않았어요. 어른인 척하거나 도인 흉내를 내지 않은 것입니다. 요즈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종정이나 방장에 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양심과 진실을 떠난 수도자는 생명을 잃는 겁니다.”
혜인은 해인사 선방 시절을 회상하면서 눈시울 붉혔다. 하루는 일타가 곰팡이 슨 장삼을 입고 있어서 ‘스님, 어디에 두셨다가 이렇게 곰팡이가 잔뜩 묻은 옷을 입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수좌들이 수각에 버리고 간 옷인데 장마에 썩고 있어서 내가 주워 빨아 입은 옷이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우리 스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속옷도 당신은 언제나 낡아 기운 것을 입으셨고, 새 것은 모두 상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분입니다.”
이윽고 고명인이 혜인에게 절을 하고 일어나자, 혜인이 숙제를 내주는 교사처럼 게송을 읊조렸다.
원각산에 한 그루 나무가 살아 있는데
하늘과 땅 나누어지기 전에 이미 꽃이 피었네
색은 푸르지도 않고 희지도 않고 또한 검지도 아니한데
봄이나 가을바람에도 영향을 받지 않네.
오고 감이 없고 또한 머무른 바도 없건만
한 물건도 없는 속에 무진장의 보배가 들었나니.
圓覺山中生一樹
開花天地未分前
非靑非白亦非黑
不在春風不在秋
無去無來亦無住
無一物中無盡藏
“고 선생, 우리 일타스님을 정말 알고 싶다면 이 게송의 진의를 깨닫는 게 어떻겠습니까. 원각산에 한 그루 산 나무가 있는데, 천지가 나누어지기 전에 이미 꽃이 피어 있는 경지입니다. 빛깔은 푸르지도 않고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습니다. 봄이나 가을바람에도 그대로일 뿐입니다. 오고 감이 없고 또한 머무른 바도 없건만 한 물건도 없는 속에 무진장의 보배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아시면 일타스님을 친견한 것이나 진배없을 터입니다.”
고명인이 어리둥절해 하자 혜인이 껄껄 웃으며 다시 말했다.
“원각산의 산의 나무는 우리 마음입니다. 불교란 마음을 찾는 종교요, 마음을 보는 종교요, 마음을 아는 종교요, 마음을 깨닫는 종교요, 마음을 잘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이제 좀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도 고명인은 오리무중에 빠져든 느낌이었다. 무언가 얻으려고 혜인을 만나러 왔는데 오히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나무속에는 일체 한 물건도 없는데, 그 속에는 무진장의 보배가 들어 있다니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온 고명인은 돌샘가로 가서 표주박에 물을 떠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산자락에 눈부시게 피어나 있는 진달래꽃을 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