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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문학, 등불과 횃불을 든 지성의 작가
- 이성대의 수필집 <자유인> 발간에 부쳐 -
권대근
문학박사, 비평가
I. 열며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원로 수필가 이성대 교수님께서 40여 편의 수필들을 모아 두 번째 수필집, <자유인>을 상재하셨다. <한 살이 된 어른아이>라는 제1수필집을 낸 지 10년만이다. 교수님께서 처음 정하신 제목은 <낙원에 있는 두 무덤>이었다. 나는 바로 전화를 걸어 제목에 무덤이란 단어가 있어 어둡고, 교수님과 인연을 맺고 있는 다른 분들을 걱정하게 할 소지가 있으므로, 다른 제목을 정해 주시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한 번 생각해 보마” 하시면서, 곧 바로 <자유인>이란 제목을 보내주셨다. ‘자유인’, 얼마나 멋진 제목인가. 교수님은 진정 자유인으로 사셨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인이란 신념의 주체요,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어디에도 묶여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어느 해 연말 세미나 자리에서 정년 퇴임 후 24시간의 자유가 주는 행복은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말로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으로 권력 자체와 여론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교수님께서는 냉철하고도 엄정한 판단으로 비뚤어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정론과 직필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교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라 믿는다. 그래서 이 수필집의 이름이 <자유인>이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다.
교수님께서 권두언에서 말씀한 바대로 이 수필들은 70대 후반부터 80대 초반까지 살아오면서 교수님이 사회의 이런저런 면을 보며 생각하고 느낀 바를 진솔하게 써 모은 것들이다. 나는 교수님의 수필 원고들을 모아 책을 출판하기로 작정하고, 원고를 넘겨받아 읽으면서 하나의 큰 고민을 떠안게 되었다. <자유인>에 실린 글을 읽고,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스승을 감히 제자인 내가 어떻게 <이성대의 수필세계>란 이름으로 그 작품과 인간세계를 논할 수 있겠는가 하는 고민이 컸던 것이다. 왜냐 하면, 첫째로 책의 작품 해설을 원치 않으셨고, 둘째는, 작품의 품격과 수준에 맞게 과연 내가 평가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교수님의 깔끔한 성품상 장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교수님의 몇 안 되는 비평가 제자로서 반드시 어떻게든 비평의 형식을 빌려서라도 교수님의 작품에 코멘트를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무모한 판단을 내린 배경에는 교수님께서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외하고는 출판에 관한 모든 것을 내게 맡긴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히 <이성대의 수필세계>란 이 글의 원래 타이틀을 ‘수필집 발간에 부쳐’로 바꿨다. 그리고 교수님께서 작품 해설을 하시란 말씀을 안 하셔서 평문의 스타일을 부드러운 에세이 형식으로 변형시켰음을 먼저 밝혀 두고자 한다.
II. 펼치며
이성대 교수님과의 인연은 내가 대학 졸업 후 문학의 길에 들고, 부산에서 수필 전문지를 발간하면서 싹이 텄다. 어느 날 우연히 <대구수필>이란 문예지에서 교수님의 수필을 읽고 감동하여, 영남대학교 영문과에서 퇴임하신 후 대구에서 수필 활동을 하고 계시는 교수님께 직접 원고 청탁을 하면서 나는 졸업 후 비로소 교수님을 가까이 모시게 되었다. 직접 사모님과 함께 사무실을 격려차 방문해 주신 교수님께서는 자상하게 내가 하는 문예지 출판에 대해 후원과 성원을 아끼지 않으시고, 훌륭한 일을 한다며, “제자 중에 이런 큰일을 하는 자네가 자랑스럽다”며,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물심 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렇게 해서 교수님께서는 우리 시대 큰 어른으로서 영혼을 적시는 수필을 에세이문예지에 발표하고, 우리 수필의 위상을 한 단계 드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교수님의 후원으로 오늘의 에세이문예사를 이렇게 키워놓을 수 있었다. 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운영위원장을 기꺼이 맡으셔서 인쇄 출판을 도와주셨고, 해마다 열리는 한국에세이작가연대 세미나에 오셔서 영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명강연을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부산까지 내려오셔서 에세이문예사 편집 직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내 제자를 도와주느라 고생 많이 한다며 우리 편집진에게 회식을 열어주시는 등, 교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이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는 이런 멋지고 훌륭한 교수님이 계셔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놈이라고 자부하며, 나도 차후 제자들에게 이성대 교수님 같은 이렇게 멋진 스승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런 나에겐 하늘 같고 태산 같은 스승님이 책을 출판하는 데, 좀 더 멋진 책을 내어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권두언이 너무 짧으니 길게 써달라고 부탁도 드리고, 대표작 한 편 정도 는 영문 번역을 해서 싣고, 작품 해설도 내가 쓰겠으니 책 뒤에 실으시라고 건의 드렸으나, 교수님께서는 어떤 건의도 허락지 않으셨다. 교수님은 원래 보여주기 식의 치장과 분식 그리고 화장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이렇게 교수님은 고매한 인품과 세련된 지성을 그대로 삶 속에서 실천하고 계셨던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사회의 한 복판에 서서 사회의 흐름을 파악하고, 문제를 작품 속에 담아내려고 늘상 노력하셨다. 좋은 수필은 관조의 눈으로 발견한 것을 인식의 체로 걸러낸 산문으로 쓴 시라고 여기시고, 한 알의 보리나 밀에서 우주의 진리를 알 수 있는 수필에 매력을 느끼고 수필 속에 영혼을 담아내려 하셨다. 항상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주제 지향성으로 삼아 인간 탐구라는 큰 틀 속에서 물질문명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등불이 되는 수필 창작에 천착해 오셨다. 삶의 근본에 대한 탁월한 사유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강한 저항의 몸짓을 변치 않는 인생의 궁극적 진리와 좌표로 연결시키기도 했다. 산야에 피어있는 들국화나 맑은 가을 하늘 배경의 청초한 코스모스처럼 서정성으로 무장된 고운 수필보다는, 글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세상의 보이지 않는 면을 발견하고자 하는 지성이 번득이는 빛나는 수필이 많다. 사회의 등불이 되지 못하고,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지 못하는 수필은 일반 수필은 될 수 있어도 사실상 훌륭한 수필은 결코 될 수 없다는 차원에서 교수님의 수필은 시공을 초월해 독자들의 가슴을 울려줄 것으로 기대된다.
작가의 사회적 책무는 그릇된 현실타파를 외치고, 진실하고 정의로운 삶을 호소하는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지식인으로서 작가라는 공인으로서 수필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세태에 대한 간접적인 저항을 표시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횡포에 대해 소극적이나마 저항하려 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한 그대로 교수님은 피로써 수필을 써셨다. 그리고 불완전한 사회에 대한 긍정적이면서도 따뜻한 시각을 유지하는 일에도 결코 소홀함이 없었다. 우연찮게 영남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시절에 가르침을 받은 필자를 만나 그 인연으로 수필 전문지 에세이문예의 운영위원장을 맡으시고, 에세이문예지에 오랫동안 주옥 같은 수필을 연재해 왔다. 권두언과 연재수필 코너에 발표한 글들이 세월의 흐름 속에 한 권의 책이 될 만큼 쌓였다. 작가는 글로써 지켜야 할 진실이 있다. 교수님께서는 이런 차원에서 소수자의 길을 택했다고 본다. 언제나 정의 편에 서고, 약자의 편에 서고, 서민의 편에 서고, 지배집단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모든 권력에는 항상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오염된 권력을 겨냥하고 부패한 정권을 정조준하는 글을 읽으면 가슴이 서늘해져 옴을 느낀다. 문학인에게는 이런 지배층의 오류를 감시 감독해야 하고, 그늘진 곳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회적인 책무가 있다. 교수님께서는 문학의 멋과 맛을 살리기 위해 직설적인 비판이나 비난 대신 풍자와 기지로 그리고 해박한 지식과 세련된 지성으로 수필에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아 삶의 바른 길을 제시해왔다.
교수님의 사회 수필 사십여 편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그림자 형상으로 투영되어져 나온다. 공자가 ‘지미’를 통해 중용의 실천을 강조했듯이 교수님께서도 ‘시중’과 ‘능구’ 정신으로 공통감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사회 지도층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설파했다. 대부분 수필에는 특권을 향유하는 것에 상응하는 도덕적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사회지도층의 책무', 즉 부나 권력 또는 명예를 갖고 있는 지도층의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이성대 교수님의 수필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표제작인 <자유인>뿐만 아니라 <60억짜리 아파트>, <이카라스의 추락>, <어느 재벌 총수>, <인간물욕의 말로>,<꼭대기의 명암>, <하나의 진풍경>, <세계 최고의 부자> 등 많은 작품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강조하는 단어는 자주 등장한다. 초기 로마시대의 왕과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것이고, 이러한 정신은 교수님이 줄곧 삶에서 견지하고 있는 철학적 입장이다. 사회 지도층 인사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검소한 삶을 살고 과소비를 하지 않으며, 부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지 않고, 물질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겨야한다. 교수님은 <자유인>에서, “자유인을 세속적인 여러 탐욕이나 집착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본다면, 그를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자유나 해탈은 외부의 어떤 절대자가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고, 인간 자신이 자기의 내면에서 혼자의 힘으로 획득해야 하는 하나의 정신 상태이다. 사람이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그의 내면 세계에서 탐욕의 찌꺼기들을 깨끗이 제거한다는 뜻이며, 그렇게 되면 그의 영혼은 그지없이 맑아진다. 이런 맑은 영혼을 가질 때만이 그는 욕망의 모든 집착에서 해방되어, 그야말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지도층에게는 높은 도덕성과 함께 남다른 의무가 지워진다. 이처럼 지도자가 특권을 양보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솔선수범하면서 부를 사회에 환원할 때 존경받을 수 있다는 것이 교수님 수필이 내세우는 핵심 가치이다. 교수님은 이를 언행일치로 보여주셨다는 데서 나 개인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스승이셨다.
그러고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사회지도층의 행동철학이 되었다. 물론 세상이 변하면서 사회지도층의 의미도 달라져 왔고 그들의 책무도 달라졌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명실상부한 귀족의 존재가 사라진 지금 노블레스의 자리는 권력을 가진 정치가나 재력을 소유한 자본가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이나 왕족의 책무가 아니라 '가진 사람'들의 책무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지도층 스스로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내세우기 쉽지 않다. 언명과 실천이 함께 가야 하기 때문이다. <엘리트 의식>이란 수필에서 교수님은 “사람이 좋은 두뇌를 타고나서 좋은 교육을 받아 엘리트의식을 가지고 사회의 상류층에서 활동하는 것은 바람직스러운 일이지마는, 이것이 지나쳐 극심한 나르시시즘에 빠지면, 인간 세상의 평범한 순리조차 재대로 읽지 못해 비극적인 종말을 마지 하는 경우가 있는 법”이라 하시며, 자기 교만의 이기심을 경계해야 함을 내비쳤다.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는 지식인은 ‘필연적으로 불우한 의식을 가진 자’로 규정한다. 지배계급은 지식인을 지배수단을 연구하는 단순한 기능인, 다시 말해 불편하더라도 없으면 안 되는 필요악으로 여기고, 반면 피지배계층은 지식인을 지배계층의 앞잡이로 볼 따름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교수님은 “극심한 자기 도취자는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뿐이지, 바깥세계나 남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명예 지상주의를 경계했다. 엘리트라면, 공자의 말씀처럼, 명예란 공기처럼 허망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지금은 따뜻한 자본주의 4.0시대다. 승자독식의 카지노 경제, 피도 눈물도 없는 샤일록 경제 사회는 더 이상 발을 붙일 수가 없는 시대다. 이런 시대적 요구와 요청에 부응하는 글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적 발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대 교수님은 지성인은 깨어 있어야 함을 작품을 통해서 설파했다. 가장 대표적인 직필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수필이다. 수만 명의 강성 지지자들의 슬픔이 아직 가시지 않을 때, 교수님께서는 지도자의 정직성을 강조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강조했다. 우리 전통 지식인은 선비다. 선비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자 하는 말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양산되는 지식인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은 찾기 힘는 게 현실이다. 지배계급에 충성하는 지식인은 많지만 소외받는 계층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할애하려는 지식인은 몹시 보기 어렵다. 자신이 연마한 지식의 깊이에 자만하며 도전에 몸서리치는 지식인은 흔하지만 타인의 지적이나 충고에 귀 기울이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다. 이 땅의 21세기 지식인도 사르트르가 안타깝게 바라본 20세기 서구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감히 제가 보기에 교수님은 글로써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지성인의 모습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그 생각에는 그 어느 누구도 회의하지 못할 정도로 엄정한 도덕적 윤리적 기준이 설정되어 있다.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 철학은 휴대폰을 갖지 않고, 자가용을 타지 않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걷잡을 수 없는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다. 과거와 비교해 오늘의 현대만큼 혼돈과 무질서의 시대도 없었던 것 같다. 도처의 여러 요인들이 이러한 대격변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한 과학과 인간 생활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준 경제적 활동은 자연에의 도전으로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으며 시장경제의 거대한 조직망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화려하게 보이나 그 이면은 빈부의 격차로 소외 계층이 늘어 가고 있다. 사회의 모순된 제도와 위장된 주의와 부패한 정치가 활개치고 왜곡된 정의와 타락한 윤리가 만연하고 있다. 오늘의 교육제도는 개인주의적 사고를 유도시키고 자아에의 의식을 각성시켰으나 윤리적 기준을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개인의 자유는 획일주의에 의하여 말살되고 있다. 한 마디로 현대는 격동과 시련에 직면하고 있으므로 미래가 불투명하여 변천의 방향을 예상할 수 없게 한다. 이성대 수필은 이러한 현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판독할 수 있는 시대적 좌표를 제시한다는 데서 커다란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때 오늘날 문학의 위치와 작가의 임무, 나아가서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단순히 이상의 세계를 그리는 창작에만 몰두하기에는 오늘의 현대 문명은 급격한 가속과 중압감을 느끼게끔 하고 있다. 그러기에 작가는 역사적 바탕을 기반으로 미래를 응시하고 자기 자신과 겨레와 인류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성대 교수님은 작가의 모델이 아닌가 싶다.
바로 작가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무에 부응해야만 한다. 작가는 사회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통찰하며, 또한 격변하는 현대를 곰곰이 반추하고 미래를 응시하고 분석하려는 문명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창작에 임해야 될 것이다. 작가는 우리 시대의 정신적 파수꾼이며 그 시대의 등대로 서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 역할은 오늘에 있어 중차대하다. 작가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기에 수신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성대 수필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작가의 사상과 시대를 꿰뚫는 정신을 탐색할 수 있다. 교수님께서는 역사의 흐름을 좌시하지 않고 거짓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냉철한 지성의 눈을 가졌기에 사람들을 감동토록 할 수 있는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위기의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 주고, 이 험난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소중한 조언을 작품으로 표현해야 한다. 세계가 아무리 속화되고 물화되더라도 훌륭한 문학 작품은 시대의식의 변화를 초월하여 존재의 원형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이끌어 내고 아울러 세계가 아무리 혼탁해진다 해도 현실의 모순을 자각케 하고 모순의 흔적을 쫓아 초월하며 피안의 세계를 사유케 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진실된 역사의식이나 현실 인식의 형상을 표현한 좋은 글이 사람의 마음을 고요의 세계로 인도해 줄 수 있다. 아주 잘 쓴 글, 풍부한 감성과 질 높은 사상이 담겨진 좋은 글을 읽고 나면 기분이 아주 좋다. 이성대 교수님의 글에는 좋은 차를 마시고 있을 때처럼 향기가 묻어나고 높은 예술적 경지에 오른 미술이나 음악 작품처럼 감미롭고 선홍빛 아름다움이 넘친다. 그리고 싱싱한 생명력을 영혼의 혈맥으로 휘돌게 해 삶에 대한 희망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위대함이 내재되어 있다.
사유의 깊음이 없이, 좁은 견문과 평이한 지식만으로는 좋은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수님의 수필 속에서 인문학적 지식과 교양에 필요한 다양한 지식 자료가 예화와 삽화로 다루어져 있어 수필집 전체가 인문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삶의 경험을 통해 진리의 본질을 관조하고, 인간에 대한 끝없는 고찰과 새로운 지각으로 사상의 폭을 넓혀 가려는 노력이 있어 문학의 옷을 입고 있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인생에서 노력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듯이 문학도 그렇다.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이 내재되고 감명을 주는 내용들로 구성된 글이어서 <자유인>은 한 마디로 좋은 글이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여기 수필들의 문장이 자연스럽고 풍부한 감성이 느껴지는 까닭은 교수님의 정신적 역량과 직결된다. 영문학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의 대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리고 표현이 신선하고 단어 하나하나가 다른 단어와 조화를 이루어 글의 분위기와 어순에 잘 맞는 어휘들을 폭 넓게 선택하고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르기까지 교수님께서는 퇴임 이후에도 독서와 학문 연구의 줄을 놓지 않으셨던 까닭으로 학문적 성과를 창작을 통해 계층간의 이해와 화합을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작품은 곧 인생 그 자체이다. 풍부한 지식과 상상력, 그리고 자기만의 개성 있는 영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기에 작품 소재에 대한 철저한 몰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수필집은 모두 47편의 칼럼 같은, 에세이에 속하는 중수필이 소개되어 있다. 최근에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들이니만큼 접근성이 양호한 글들이 대부분이다. 무엇보다도 이 수필집의 장점은 이성대 교수님의 해박한 지식과 다방면으로 높고 깊은 식견을 쌓고 있어, 특유의 예리한 감성과 지성을 바탕으로 생활 주변에 스며있는 민감한 소재를 풍자와 멋스런 해학으로 승화시켜 놓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회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문학적 형상화 속에 은근히 담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성대 교수님의 예리한 현실감각에는 하나하나에 따사로운 눈빛과 높은 교양이 깔려 있어, 이 수필집은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 빨려들어 가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존 던의 시, ‘벼룩’의 해석을 통해 교수님은 ‘문학작품을 쓰려는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을 볼 때, 언제나 새로운 시각, 상식과 통념을 깨는 “엉뚱한”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신다.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는 이러한 수필관을 소홀히 다루지 않으면서 한국인의 정서에 부합하는 사회문제를 시원스럽게 터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대 교수님이 수집하는 수필적 소재는 교육 현장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 주변 등 전방위적으로 폭넓게 산재해 있다. 특히 작품마다 강한 비판의 메시지와 철학이 담겨 있어 눈맛이 독특하다. 철학은 고상한 철학자들의 사상에만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잘 것 없는 미물의 몸짓에도, 이름 없는 잡초에도 짓궂게 던지는 농담 한 마디에도 예리한 철학이 담겨 있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쌈박한 칼날 글이 바른 세상을 만든다는 지론으로 독자들의 뇌리에 ’하고 싶은 말‘을 가장 쉽게 전달하는 방법이 뭘까 연구하다가 이런 철학적이고 지성적인 글을 구상했던 것이리라.
이성대 교수님의 사회수필은 무엇보다도 푹 찌르는 맛이 있고, 톡 쏘는 맛이 있다. 정보적 가치가 있고, 지적 욕구도 충족시켜 준다. 많은 사람에게 읽혀져야 할 요건을 갖고 있는 점도 크나큰 장점이다. 이성대 교수님의 수필은 위에서 말한 대로 사회수필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뜨겁게 하는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준다. 그의 책에 나타나 있는 메시지는 현실에 대한 강한 직시와 적발의 모습을 띠고 있다. 특히 다양한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너무 많아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받아 내리라 확신한다. 이 책의 출간 효과는 설득이나 감동을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 책을 읽은 수필가나 고급독자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도 포함된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자신의 짧은 지식에 자괴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이성대 교수님은 글을 통해서 부조리한 시정을 파헤치되 자신의 철학을 독자들에게 주입시키려하지 않는다. 설득하려 들거나 강요하지도 않는다. 지성적 에세이에 문학적 향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은 역시, 연암박지원문학상과 한국에세이 문학대상에 빛나는 작가적 역량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어떤 수필가에게서 이처럼 치열한 작가정신을 찾을 수 있었던가. <낙원에 있는 두 무덤>란 작품은 해학이 극치를 이룰 뿐만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따가운 비판이 칼날과도 같이 번쩍임을 볼 수 있다. 영문학 교수답게 영문학에 대한 작가의 높은 식견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넘어 감동의 고지로 올라서게 한다.
이성대 교수님은 항상 산책길 속에서 문학의 제재와 의미를 찾으며, 문학 앞에서는 누구보다 진지하고 순수해지는 분이다. 문학평론가 이윤희로부터 “이성대의 작품 세계는 이러한 일반적인 역할을 뛰어 넘어, 삶의 철학적 기준을 마련한다는 측면에서 문학적 수준을 한층 높이는 데 일조한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언어 표현과 형상화에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수필은 지성 수필이 가져야 할 운치로운 매력의 문장, 톡 쏘는 풍자, 역설의 상큼한 맛, 찍고, 자르고, 깎고 트는 함축의 맛, 많은 여운에 곁들이는 음영 등의 매력적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이성대 교수님의 글이 훌륭한 것은 기본적으로 타고난 문학적 소질에 그 원인이 있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 명상과 사색으로 얻은 언어의 영상으로 글을 쓰면서 지식인의 책무와 중용을 수필을 통해 실천하려 하는 의지 때문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런 여러 요인들로 인하여 그는 영문학을 기반으로 성찰과 해학에 빛나는 칼날 같은 정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자의 세 가지 보물>에 담긴 삶의 지혜는 두고두고 필자가 살아가는 데 지렛대가 되어 줄 것이고, “맹수들은 행동 하나 하나를 지극히 신중하게 하고, 그리고 아무리 힘이 남아돌아도, 그 힘을 함부로 쓰지 않고, 꼭 필요할 때만 쓰고 있다.”는 예리한 관찰을 통해 노자 정신의 실천을 강조한 <맹수들의 지혜> 역시 살아가면서 필자가 붙들어 매어야 할 값진 교훈이었다. 두 작품의 예를 들었지만, 이성대 교수님의 수필은 하나하나가 전부 읽고 나면, 깨달음으로 남을 정도로 설득력과 공감력이 크다. 마음을 움직이고, 독자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고도의 세련된 지적 성찰이 깔린 이 멋진 수필집을 며칠 만에 읽고 단숨에 리뷰를 쓰는 일은 그래서 행복 그 자체였다.
III. 닫으며
이성대 교수님의 「자유인」은 범지구적 소재를 저자의 인품이 감싸 안으면서 고차원의 품위를 지니고 있어, 일반 시중에 나도는 수필집과는 근본적으로 달리 무겁지만 시원시원하게 읽힌다.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울림이 너무 강해 어떤 수필도 자아성찰의 시간을 갖게 해준다. 러. 콕 스테판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의 날카로운 인식이 빛나는 해학은 인생에 돋아나 있는 천태 만상의 부조리를 웃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쓴 글들이 단순한 생활의 반성이나 느낌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하는 인생의 본질, 시대 정신 등을 관통하고 있기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세상의 모순을 깊은 통찰을 통해 바로 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이 글들은 여느 책과도 차별화된다고 하겠다. 쉽게 말해서 인생의 모습과 우리 사회의 다양한 풍경을 지성인의 눈으로 보고 적은 글이라서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정서적 감화까지 맛보게 한다는 데서 다른 수필집과는 나란히 세울 수 없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 수필집의 가치는 더욱 빛나는 것이리라. 이성대 교수님께서 내신 이번 수필집 <자유인>은 오늘날 불투명한 한국 사회 일면과 갈팡질팡하는 인생의 진로를 명쾌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한국 수필을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는 이성대의 수필은 세련된 지성과 인식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철학성과 사회성이 잘 어우러진 이성대 수필은 ‘이것이 수필이다’라는 명제에 답하는 글이라는 데서 한 마디로 읽고 싶은 수필”이라는 점을 다시 부기해 둔다. 삶의 문제에 낚시 바늘을 드리우는 사람들에게 감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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