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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정상에서
1971.05.05 (수), 한국 중앙수련원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수고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어려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수고로운 길을 가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미물인 동물 이나 그밖의 식물까지도 역시 어려운 자리에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은 복귀섭리의 노정을 볼 때, 그뜻이 가는 길은 수난의 길을 피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수난의 길을 피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벌써 그 길을 가셨을 것이로되. 수난의 길을 피해 가지고는 갈래야 갈 수 없는 길이 복귀의 길인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수고해 오신 하나님
인간이 타락하여 본연의 위치에서 떨어져 내려왔으므로 인간이 그 떨어진 자리에서 피해 갈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피할 수 있는 길이 그냥 그대로 내려가는 길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냥 그대로 내려가서는 복귀의 길을 더듬어 갈 수 없습니다. 복귀의 길을 가려면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떨어지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떨어진 입장에서 다시 올라가기 위해서는 떨어질 때에 눌리어진 모든 여건들을 반대로 밀어 젖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을 두고 볼 때, 나면 나, A면 A라는 그 한 사람이 떨어졌는데 어느 정도까지 떨어졌느냐 하면 깊은 골짜기, 골짜기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 밑에까지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떨어진 개인 위에 가정이 누르고 있고, 그 위에는 종족이 누르고 있으며, 그 위에는 민족이 누르고 있고 또 그 위에는 세계가 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칠판에 그림을 그리심) 이와 같은 입장에 오늘날 타락한 인간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떨어져 내려왔는데 혼자만 떨어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떨어질 때는 혼자 떨어졌지만 역사를 거쳐올수록 천년, 2천년. 6천 년 역사가 지나오면서 그 짐은 점점 가중되어서 커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입장이 어떤 입장이냐 하면 구렁텅이면 구렁텅이, 골짜기면 골짜기의 제일 밑창에 깔려 있는 신세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신세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소생하여 다시 소망의 터전과 소망의 때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냥 그대로의 입장에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는 피해 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현재 떨어져 있는 그 자리에서 자유롭고 어렵지 않은 길을 찾아서 희생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그 길을 원하시고 얼마나 그 길을 가게 하고 싶으시겠습니까? 그렇지만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이 그림에서와 같이 인간은 골짜기 중의 골짜기에서 짓눌리고 있는 신세 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구원하신다고 할 때, 그 하나님의 입장과 우리 인간의 입장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하시기 위해서는, 내가 그대로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길을 터 가지고 내려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인간이 구원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길을 터 가지고 내려오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 한 사람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섭리의 뜻을 펴기 위해서 어떤 길을 걸어오셨느냐? 반대로, 세계를 뚫고 나라를 뚫고, 민족을 거치고 종족과 가정을 거쳐 나의 기준까지 거꾸로 찾아 내려오는 역사를 해 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나의 위치
오늘날 여러분이 뜻의 자리로 부름을 받은 지가 5년이나 10년, 혹은 20년이 되었다 할 때, 여러분이 뜻을 알고 하나님을 따라 나선 그 길은 5년이면 5년, 10년이면 10년, 20년이면 20년 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지만 역사적인 배후를 두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수천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통하여 '나' 한 사람을 다리 놓기 위해 수고해 나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사탄을 제거하고, 이 민족과 국가를 막고 있는 사탄을 제거하고, 여러분의 가정을 중심삼고 가로막고 있는 사탄을 제거해 나왔습니다. 그러한 일이 여러분에게 연결되기까지 우리 인간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난의 길, 고통의 길을 거쳐 나오신 것을 여러분은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라는 한 개체가 뜻 앞에 존재하게 된 사실을 두고 볼때, 하나님이 치르신 수고의 대가와 오늘날 뜻 앞에 서게 된 나 자신의 가치를 비교해 보면 오늘에 선 나의 가치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나 자신이 뜻과 연결된 자리에 서 있더라도 뜻을 안 입장에서 볼때, 나의 가치라는 것은 사망권에 짓눌려 있는 가치요, 수많은 한과 수난길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제일 어려운 자리에서 뜻을 알게 된 자신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뜻을 알았으되 이 자리에 올라서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맨 밑창에 있다가 뜻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뜻을 안 나로서 하나님의 수고 앞에 빚을 진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자체의 가치와 우리 자체의 가치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수고한 것을 비교하여 볼 때, 우리는 그 수고 앞에 도저히 갚을 도리가 없는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거꿀잡이로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판서하심) 이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보면 개인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다 달라요. 사랑의 고빗길마다 그 길이 그냥 그대로 계속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입장이 다르고, 사랑의 상대가 달라질 때마다 탕감의 역사가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나 개인을 중심삼고 볼 때에 나는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는 내가 완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내 개체가 세계적인 싸움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는 제일 먼 거리에 있는 자리입니다. 거리가 제일 멀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사명
지금까지 6천년의 역사는 누구를 찾기 위한 역사냐? 한 개인을 찾기 위한 역사입니다. 개인 가운데서도 누구? 남자 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지금까지 하나님이 수고의 대가를 치러 나온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 남자를 찾아 세웠다 해도 그 한 남자가 하늘 꼭대기에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서 있지만 하나님이 내려오실 때 방해를 받지 않도록 만들어진 자리에 서 있는 한 남자를 찾아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그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위해서는 6천년전 타락한 그날부터 시작하여 탕감의 역사. 복귀의 역사를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6천년의 말(末)에 하나의 남성을 찾아야 되는데, 그남성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주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게 될 때는 세계적인 사탄, 국가적인 사탄. 민족적인 사탄, 종족적인 사탄, 씨족적인 사탄의 여건을 전부 다 청산지은 터전 위에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 한 사람은 세계로 갈 수 있는 탕감의 길을 닦고 온 입장이기 때문에 그분이 돌아가는 데는 사탄이 참소하거나 막을 수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한 연고로 그로 말미암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이 지금까지 수고해 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그 중심사상이 메시아 사상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올 때는 하나님의 협조를 받아서 탕감의 역사와 수고의 경로를 거친 후에 왔지만, 돌아갈 때는 마음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돌아가야 되느냐? 개인으로서 가정을 데리고 돌아가야 합니다. 가정만 데리고 돌아갈 것이 아니라, 종족도 데리고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종족뿐만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메시아의 사명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올 때에도 수고롭게 왔지만 가는 길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협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수고의 책임을 지고 개척하면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타락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타락은 누구 때문에 했느냐? 하나님 때문에 한 것이 아니라 아담 해와가 책임을 못하고 타락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마 6천년의 역사가 저끄러졌기 때문에 그 아담을 대신해서 오시는 주님은 이것을 다시 헤쳐 버리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나가야 할 신부의 책임
이 일을 하는 데는 개인을 중심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을 중심 삼고 할 수 있으면 간단하겠지만, 개인이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승리의 터전을 갖고 온 주님 앞에 부름받아 나갈 수 있는 신부와 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신부도 역사적인 승리의 진에 일치해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승리권에 선 신부가 되어야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입장에 선 신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입장의 신부를 마련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신랑과 신부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되어야 됩니다.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떨어질 때에 거꿀잡이가 되었습니다. 사탄이 맨 먼저요, 해와가 그 다음이고, 아담이 그 다음이며 만물이 맨 나중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라가는 데에 있어서도 아담과 해와가 나란히 서서 올라갈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과 해와가 나란히 서서 갈 수 없으면 누가 앞장서야 되느냐? 사탄과 싸워야 할 아담의 입장에 있는 주님이 앞장을 서서 책임을 지고, 그 상대되는 해와는 주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면서 주님이 가시는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따라 나가지 않으면 해방받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신랑과 신부가 횡적 관계, 좌우관계가 아닌 전후관계에 서서 완전히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부는 신랑 되시는 주님을 어떻게 알아야 되느냐? 하나님 아버지 대신으로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는 오빠 대신으로 알아야 되며, 신랑으로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지음받았기 때문에, 장래에 실체를 쓴 하나님, 즉 하나님의 몸이 되어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일체 되는 몸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분은 아버지와 마찬가지의 입장이요, 오빠 중의 오빠의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오빠로 모실 수 있는 인연을 갖춘 후에야 비로소 신랑의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담이 태어날때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고 해와의 오빠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실체로 오신 주님은 신부 앞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신부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것이며, 그 다음에는 오빠로서 누이 동생과 같은 입장에 있는 신부의 갈 길을 인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버이의 사랑과 오빠의 사랑, 두 사랑을 전부 체험한 자리에 선 해와와 더불어 비로소 신랑 신부의 인연을 맺게 되어 있는 것이 본래의 창조원칙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오늘날 이 땅 위의 타락한 인간들이 바라는 신랑 되는 주님이 오면, 그 주님을 중심삼고 나타나야 할 신부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분이 아버지 대신이며 오빠 대신이라는 심정적 인연을 맺은 후에 신랑으로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원칙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입장에 선 해와가 주님을 신랑으로 맞기 위해서는 아버지로 모셔야 되고, 또 오빠로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가지고…. 그분이 아버지이시니 나는 효녀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이요, 그분이 오빠이기 때문에 나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오빠를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가는 길 앞에 반대되는 입장에 설 순 없는 것이 형제의 인연입니다. 아담은 물론이고, 해와도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이 죽을 자리에 가게 되면 해와도 그 길을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사지사판의 길을 갈 때에는 부모도 죽을 자리를 가는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심정을 중심삼고 부모의 심정이나 형제의 심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느끼는 바인 것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과 우리, 혹은 예수님과 우리의 입장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입장인 동시에 아버지와 오빠의 입장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참된 가정은 하나님과 만물의 희망의 중심
오늘날 타락의 후손인 우리에게는 세상의 부모가 있습니다. 또 세상의 오빠도 있으며 세상의 남편도 있습니다. 이러한 타락권내에서 맺어진 부모나 형제, 그리고 부부의 관계라는 것은 타락된 사랑을 근거로 해서 맺어지고 이루어진 가정적 기틀이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이 관계를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타락한 혈통적 부부의 인연과 형제의 인연, 그리고 부자의 인연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밟고 넘어서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말로서뿐만 아니라 심정으로서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입장에 있는.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에 있는 우리라 할진대는, 그 정리를 두고 볼 때 세상의 부자관계의 정리 이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혹은 형제관계를 두고 볼 때, 세상의 형제관계 이상 되는 경지를 찾아 볼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또한 부부의 인연에 있어서도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타락한 인류권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가정의 대표가 부부인데, 이러한 세상의 부부 전체와 오늘날 여러분의 부부를 두고 볼 때, 여러분의 부부는 타락한 사탄세계의 부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자리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계의 부부 전체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부부와 바꿀 수 있느냐 하면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딸과 사탄세계의 인류 전체와 바꿀 수 있겠느냐?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과 이 세상과 바꿀수 있겠느냐?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 사망의 사탄세계의 인류보다도 귀한 아들딸, 사탄세계의 그 어떤 가정보다도 더 귀한 가정을 만들어 놓지 않고는 하나님의 위신과 체면을 갖춘 자리에서 '이는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 혹은 '내가 축복한 가정이다' 하는 말도 할 수 없는 것이요, 그런 위신을 가지고 대할 수도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왜 그러냐? 만일에 그런 자리에 서 있지 못하다면 사탄보다 못한 가정을 가진 하나님의 신세, 사탄보다 못한 형제를 가진 하나님의 입장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가 될 수 없습니다.
창조의 원칙을 두고 보면, 부모는 최고의 영광된 자리에서 자녀를 사랑 해야 되고, 자녀들은 하나님의 축복권내에서 부부를 이루어 이 땅 위의 만유의 중심이 되어 가지고 온 피조물을 축복해 주고 복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중심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게 될때, 이러한 가정이야말로 우주의 중심이요,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망의 중심이요. 만물이 바라는 절대적인 희망의 중심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을 이 땅 위에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이 타락한 세상을 부정하고 이러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가는 것이 복귀노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됩니다.
원래 에덴 동산에서 이루었어야 할 이 뜻을 에덴 동산에서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된 사탄의 소굴권내에서 이루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몇천 배의 시련을 통한 배후의 터전을 닦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서 이루어진 가정은 타락권내에서 이루어진 가정이기 때문에, 그 가정을 에덴에서 타락하지 않고 이룬 것과 같은 기쁨의 가정으로 맞을 수 있는 입장에 서기 전에는 하나님은 기거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가정을 내새우지 않고는 오늘날 사탄 세계를 굴복시키겠다고 나설 수 없는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됩니다.
이 자리가 하나님의 내정적, 심정적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참기 어렵고 얼마나 기가 막힌 자리겠느냐?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축복해 주었다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해 준 가정의 자리가 사탄세계에 둘러싸인 자리요, 사탄세계의 반대를 받고 참소를 받고 침범을 받을 수 있는 자리이므로, 그 가정을 대하여 타락권을 맛보지 못했던 자유의 동산 에덴에서 이루어진 가정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심정을 찾아야 하는 하나님의 고충이 얼마나 크겠느냐? 오늘날 우리들은 이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의 고충을 풀기는커녕 그 반대되는 탕감의 역로를 거쳐 나오고 있는 것이 아버지가 처해 있는 입장인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수난의 정상에 계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가
아버지께서 그 가정을 대할 적마다 기쁘시고 소망이 싹트고 희망이 깃들고 사랑이 움틀 수 있는 그러한 가정이 되고 그러한 아들딸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대할래야 대할 수도 없는 자식들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로서 하나님이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하실 수 있고 골수가 움직일 수 있는 정에 얽혀 뗄래야 뗄수 없는 부자의 정을 지녀야 할 인간이 어찌하여 원수의 입장에 서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자의 인연 속에서 심정을 가지고 대하고 싶어하시는 아버지께서 아들이라고 생각조차 하실 수 없는 비통함을 가져온 것이 타락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타락의 자리에서 나를 돌이키기 위한 길이 복귀의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라고 해도 하늘을 향하여 정면을 바라 보고 갈 수 없는 입장이요, 하늘을 향해 돌아설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하늘을 향해 갈 수 없는 구속된 입장에 있는 인간인 것을 여러 분이 알아야 됩니다.
본래 하나님이 불러 줄 수 있는 인간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타락된 이 자리에 있는 인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기 전의 자리에 있는 인간을 불러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본연의 기준인데, 그 기준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이 사망권내를 뚫고 나가야 되는 하나님의 신세가 얼마나 비참하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창조원칙을 중심삼고 인간과 부자의 인연을 맺고 있기에, 자식을 찾아가는 길 앞에 위신과 체면을 생각할 수 없는 부모의 자리에 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위신은 실추될 대로 실추되고 밟힐 대로 밟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자신은 말할 수 없는 사탄의 수난권내에서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천덕꾸러기와 같은 입장이 되었지만, 그것을 참으시며 잃어버린 자식을 찾아 나오시는 부모의 입장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천신만고하여 자식을 찾아 나오시는 걸음 가운데 잃어버린 자식을 만나기까지의 그 애달픔도 크겠지만….(녹음이 잠시 중단됨)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심정 적인 수난의 길을 지금까지 참아 나오신 것입니다.
어떠한 외적인 수난이나 외적인 핍박을 받아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심정에 엇갈린 원한의 행각의 노정을 걸으시면서 그 누구에게도 한할래야 한할 수 없는, 한탄을 하면 도리어 그것이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요건이 되고, 원망을 하면 원망하는 모든 내용이 인간 앞에 복이 되고 인간 앞에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탄이 하나님을 참소할 수 있는 원한의 노정으로 남아지기 때문에, 한의 심정을 품었지만 한의 심정을 표시할 수 없고, 원한의 심정을 품었지만 원한의 심정을 표시할 수 없고, 슬퍼도 슬픔을 표시할 수 없고, 괴로와도 그 괴로움을 표시할 수 없고, 억울해도 그 억울함을 표시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정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왜 그러냐? 그러한 표시를 하면 할수록 사탄이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본래의 창조원칙으로 볼 때 당신은 인간을 대하여 기뻐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슬퍼하는 입장에 서 있으니 당신의 아들을 찾을 수 없으며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또 '당신은 당신의 마음 가운데에서 온갖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해 내고 기뻐하는 심정의 인연을 갖지 않고는 인간을 대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한 본래의 창조원칙이 있기 때문에 당신은 죽은 아들을 보고도 슬퍼할 수 없고, 외로와하는 아들딸을 보고도 외로와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참소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입장에서 복귀의 노정을 개척해 나오시는 하나님의 내정적인 수난의 길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귀역사를 해 오시는 가운데에서 사탄 앞에 수많은 개인을 희생시켜 나오셨습니다. 또한 가정이 희생되었고 민족과 국가가 희생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가 예수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희생되었고, 또 2천년 동안 기독교가 희생되었지만, 이 희생되어진 무리를 붙들고 사탄 앞에 슬픈 표정을 지을 수 없는 하나님이요, 사탄을 대하여 원한의 표정을 지을 수 없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많은 무리가 희생되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자신과 관계없는 듯 무심한 심정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은 그 어떠한 고통과도 비교될 수 없는 최고의 수난의 정상에 처해 계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서서 하나님은 역사과정을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해 산 하나님의 아들
역사는 이렇게 오로지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탕감을 치러 온 것입니다. 즉, 수난을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하나님이 마음대로 지상에 오실 수 없습니다. 마음대로 오실래야 오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 이 땅의 전부를 어둠의 세력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뚫고 나오기 위해서 무한한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한한 싸움을 해야 된다는 거라구요.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피나는 싸움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위에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서, 그 한 사람이 올 수 있는 길을 닦는 데 6천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면 그 배후에서 싸움은 누가 하느냐? 하나님은 직접 싸울 수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사장과 싸우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인하고 종이 싸우게 되어 있는 원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싸워야 되느냐? 천사장끼리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수많은 천사들과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 왔다가 하나님을 믿고 간 영인들을 동원하여서 지상의 개척 노정을 가게 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지상 개척의 노정을 걷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 위에는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 혹은 뜻의 길을 간다고 하고, 혹은 자기의 행복과 자기의 구원과 자기의 소원성취의 뜻을 품고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영계에 가 보면 하나님의 입장과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상치(相馳)되게 산 자신인가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부 내가 하나님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대신 싸워 주시오. 내가 해야 할 싸움까지도 맡아 주시오' 하는 입장에서 구도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을 찾아 나온 사람은 많았으되 '내 싸움은 내가 책임지고 하나님의 싸움도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며 나서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 왔다 간 종교인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 다른 종교인들은 그 종교를 믿어 하늘의 복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자신으로 인해 수고하시는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 대신 수고하여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고자 하는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가 복을 받고, 수고스러운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는 펀안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종교인들이 걸어 나온 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 되는 예수는 하나님이 얼마나 슬픈 분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효도를 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수고를 덜어 드리고자 했지 하나님께 자기의 수고를 덜어 달라고 하는 입장에 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과정에서 비로소 '당신의 수고를 제게 맡기시옵소서, 당신의 싸움을 제가 대신하고, 당신의 심정적 십자가를 제가 대신 지겠나이다. 하나님이여,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게 맡기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당신이 희생할 일이 있으면 내가 대신 희생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아들로 나타난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역사과정에서 이럴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심정을 억제해 나오던 입장에서, 그 아들을 대하여 비로소 '너만이 나의 심정을 알아주는구나' 하면서 통곡의 심정을 폭발할수 있는 입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감사의 통곡이요, 소원 성취의 통곡이요, 상봉의 기쁨을 대신한 통곡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뜻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죽든지 살든지 가겠다 하고, 하나님 앞에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게 될 때, 수난의 길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담판기도를 할 때, '아바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입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창조목적을 볼 때, 사람은 누구든지 수난길을 가게끔 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본성은 고통을 원하지 아니하고, 또한 인간은 누구나 수난길을 즐겁게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창조 본성의 자기 욕구를 제압하고 하나님의 수난을 자기가 맡겠다고 하는 간곡한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이 지구상에는 비로소 행복의 터전이 마련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인연이 이 땅 위에 맺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사상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비록 한 사람의 남자에 불과했지만,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한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한뿐만 아니라 심정까지도 체휼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께 원한이 맺히게 했던 원수를 대하여 싸우는 데는 자기 개인의 상대 입장에 있는 원수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온 천지에 남아 있는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사탄 주권의 무대를 놓고 이것을 책임지겠다 하는 입장에서 나서서 싸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이 그러하기 때문에 아들된 입장에서 원수와 싸우는 데는 세계적인 원수와 싸워서 그 원수를 굴복시키겠다는 결의를 갖고 하나님이 믿을 수 있은 자리에 섰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을 당하는 데는 하나님의 고통을 대신 받고, 책임을 지는 데는 하나님이 지실 책임을 대신 지고, 싸우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계에 남아 있는 사탄을 처치해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이것을 살아서는 못 이루지만 죽어서 이룰 수 있는 가망성이 있다면 죽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며 그 길을 택하고 나선 걸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걸음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 개개인은 예수님의 사상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신부의 자리에 서야 하는 우리는 예수님을 오빠로 모셔야 하고, 아버지로 모셔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신랑으로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세가지의 사랑을 한꺼번에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 오빠의 사랑. 부모의 사랑,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의 남자 아담을 대하던 해와가 이 세 가지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탕감복귀 원칙에 의해 해와는 이 세 가지의 사랑을 복귀해야만 신랑을 대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로 사랑할 수 있는 주님, 오빠로 사랑할 수 있는 주님, 신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타락한 해와의 운명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 신랑을 만나기는 현재 이 시대에서 만나지만, 신랑과 여러분은 역사적인 출발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시집을 가게 되면 신랑의 가문의 도리를 따르고 그 가문의 전통을 본받아야 됩니다. 또 신랑이 행하는 것에 보조를 맞추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심정 생활에 있어서 신랑과 언제나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랑이 슬플 때 신부가 기쁠 수 없으며. 신랑이 외로울 때 신부가 안식하는 자리에 설 수 없으며, 신랑이 비참할때 신부가 행복한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신랑이 비참하면 신부도 당연히 비참한 것이고, 신랑이 행복하면 신부도 당연히 행복한 것입니다. 즉, 운명이 자기 주장으로 말미암아, 자의로 말미암아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랑으로 말미암아 결정되는 자리가 신부의 자리인 것입니다.
신부를 두고 보면, 신부는 신랑을 잘 맞이하느냐, 못 맞이하느냐에 따라서 그 출세가 좌우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여자라 하더라도 한번 신랑을 잘못 맞이하게 되면 그 훌륭한 빛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신부의 운명은 남편의 운명과 같은 입장에 서기 때문에 신부가 제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남편의 운명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신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앞에 신랑으로 찾아올 수 있는 분은 어떤 분이냐? 아버지의 입장에서 찾아오시는 분이요, 오빠의 입장에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나와는 완전한 형제의 정으로 결합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그와 나는 남매지간이요, 그는 우리 오빠다 하는,세상에서 자기를 낳은 아버지가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고, 세상의 혈육. 혹은 오빠가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는, 오빠나 아버지를 부정하면 부정했지 그를 부정할 수 없는 그런 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탄과 싸워 승리해야 장성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
심정세계 신랑의 인연을 갖추지 않고는 하나님의 심정적 기준을 복귀할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알게 될 때, 얼핏 보면 신랑 같고 얼핏 보면 오빠 같고, 얼핏 보게 되면 아버지 같은 이 삼단계의, 세 가지의. 삼분야의 사랑을 체휼하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그래야 되느냐? 자기를 중심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그 자체로 그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신랑이 가진 목적관이 뚜렷해야 됩니다. 그는 신랑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의 수고는 곧 내 수고이며 그의 운명은 곧 나의 운명이라고 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통일된 운명권내에서 아버지로서 오빠로서 신랑으로서의 세 가지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만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은 권내에 서게 되는 것이요, 그 이상의 자리에서부터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가 가졌던 심정적 출발의 인연을 복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참부모라든가 참자녀라든가 참부부라는 말이 역사과정에 왔다 갔던 그 누구의 말보다도 인류 앞에 있어서 복음 중의 복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오늘날 참부모가 나타날 때까지를 생각해 보라구요. (이하 계속 판서를 하시며 설명하심)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떨어져 가지고 이 자리에 왔으니 여기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는 부모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타락권을 두고 볼 때, 장성권내로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장성권내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사탄권과 싸워 장성적인 입장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 장성적인 입장이 뭐냐 하면 천사장급 입장입니다. 이 천사장급의 입장에서 승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천사장급에서 승리할 수 있는 권을 만들려면 이 자리에 서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걸 전부 다 점령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왼쪽에 사탄편 천사장권이 있으면 여기에 하늘편 천사장권을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계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마음대로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는 터전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원칙에 의해서 신랑 신부가 되면 이곳까지는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중심은 못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림주가 오셔서 복귀역사를 하실 수 있는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지상에 오기 위해서는 영계를 통합해 가지고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못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영계의 승리권을 갖추어야만 지상에 오는 것입니다..
영계의 승리권을 갖춘 다음 지상에 오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영계와 같이 절대적으로 하나가 되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심은 조석변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왔다갔다하면서 아침에 변하고 저녁에도 변합니다. 그렇게 변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사탄권이 침범하기 때문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처참한 싸움을 해서 사탄권을 점령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거기에 대한 방비책을 마련해 가지고야 비로소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가면 갈수록 가중된 수난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라
오늘날의 통일교인 여러분들을 두고 보더라도, 이 뜻의 길이 갈수록 좋아지면 모르겠는데 가면 갈수록 점점점 가중된 수난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다가는 못 가겠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맨 처음에 출발할 때보다 쉽게 되어 있느냐 하면 쉽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개인복귀가 얼마나 힘들었느냐? 6천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정 복귀가 얼마나 어렵겠느냐?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가정을 복귀할 수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종교를 중심삼고 볼 때, 결혼을 인정하지 않고 독신생활을 하라고 강조한 것은 타락 전의 천사장 기준과 타락 전의 아담 기준을 복귀하기 위한 것으로, 이것은 하나의 타락 전 아담을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기에 상대가 허락되면 허락된 그 상대는 어때야 되느냐? 절대적이어야 됩니다. 왔다갔다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죽어도 내 낭군 이요, 살아도 내 낭군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 밤이나 낮이나, 청춘 시대에서부터 노년시대까지, 거기에 다른 남자나 다른 여자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아담은 해와뿐이고, 해와는 아담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가정이 이렇게 하나되었다고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종족을 복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개인복귀보다도 힘든 것이 가정복귀입니다. 가정이 하나되어야 하는데 가정을 하나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가정이 두 세계를 모시는 가정이다 할 때는 절반을 갈라야 합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니예요? 가정을 중심삼고 왼쪽은 잘라 버려야 합니다. 종족을 중심삼고는 왼쪽이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왼쪽이 없어야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꾸 점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교인들이 사상적으로 퇴폐되어 제일 위험한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60년대에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싸울 때에는 죽어도 가야 되겠다고 하고, 밥을 굶고 혹은 욕을 먹고, 핍박을 받아도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더니 축복을 해주니까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폐단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자리를 잡으려 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자리를 잡았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나님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자리를 잡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는 거예요. 자리 잡으면 망한다는 거라구요. 자리 잡게 돼 있어요, 안 돼 있어요?
그래서 개인복귀보다 가정복귀가 더 힘든 것이라는 거예요.
아내와 남편 둘이서 세상에서 이별하는 이상의 설움을 붙들고, 뜻의 한을 붙들고 눈물짓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부부가 못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떨어져야 될 때 흘리는 눈물 이상으로 뜻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그때에 서글픔을 느끼는 이상으로 하나님의 한을 풀어드리겠다고 결의를 할 수 있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너와 나는 이 뜻을 위해 태어났고, 이 뜻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짓지 않고는 살래야 살 수 없고,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하는 부부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편안히 살겠다구요? 여러분이 편안히 살면, 종족은 누가 복귀하고, 민족은 누가 복귀하며, 국가는 누가 복귀하고, 세계는 누가 복귀하겠습니까? 누가 해야 되겠어요? '하나님이 해야 하겠지요' 할지 모르지만,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을 통해서 해야 하는 복귀섭리이므로, 인간이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책임져야 되느냐? 아담이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담이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천추의 한을 내 일신이 짊어지는 일이 있고, 하늘땅의 한을 내가 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책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가 해야 되느냐? 아담이 해야 됩니다. 아담의 입장에 선 부부요, 축복가정이 아니냐 ! 그런데 자리를 잡아서 되겠느냐는 거예요. 자식을 낳게 되면 피난보따리 대신 업고 다녀야 할 자식인 것을 생각해야됩니다.
우리는 나라가 없고 정착지가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땅 위의 결정적 기반을, 안식의 보금자리를 상속받지 못한 것입니다. 자식에게 피난의 도상에서 젖을 먹여야 하는 서글픔이 곧 하나님의 원통함임을 느끼면서, 자기 자식을 중심삼고 흘리는 눈물과 더불어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 것이 우리 자녀들이 가야 할 효의 길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찾을 때까지 수난받을 것을 각오하라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배치되고 상치(相馳)되었던고 !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들이 복을 받고자 하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지는 못할망정 하나님께 슬픔을 가해 드리는 입장에서 자신들의 슬픔을 피하려 했던 것을 생각할 때, 과거의 개인적인 불효라면 모르겠지만, 가정적으로도 불효하는 입장에 서게 되면 하나님은 어떻게 복귀의 소원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가정적인 불효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안착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종족을 움직여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종족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하나의 문중이 있으면 그 문중의 모든 수고를 우리들이 책임지겠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문중이 강제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굴복하여 우리가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문중을 움직여 내기까지는 얼마나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 마을 사람들같이 적당히, 선한 일이나 하고 죄짓지 않고 그들에게 비판받지 않을 정도의 생활을 하겠다고 한다면 몇십 년, 몇백 년이 걸려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쉴 새 없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 나서도 자랑하기보다는 앞으로 더 할 것이 남아 있기에 자랑하기를 원치 않는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종족복귀의 한을 짊어지고 종족과의 사이에 있는 모든 담을 헐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이 마음 놓고 우리의 종족이요,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 동기와 기원을 마련해 놓아야만 하나님의 구속을 받을 수 있는 종족이 될것이 아니냐? 누구로 말미암아서? 그 부부로 말미암아서. 이러한 종족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으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나님도 그것을 얼마나 바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종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 사탄세상을 전부 다 불심판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종족만으로는 나라를 대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하늘나라를 표방해야 합니다. 인간들이 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한을 품고 나오더라도 나라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못 찾으면 다 도로아미타불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갈 길을 모색할 때, 물론 상대자도 요구했지만, 상대의 요구함과 더불어 국가와 유대교를 어떻게 해결지을 것이냐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일시에 하려고 4천년이라는 기간을 거쳐 나라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시에 무너지고 나라가 반대하고, 교회가 반대하고, 가정이 반대하여 외로운 입장에 섰을때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돌아설 때에 얼마나 슬프셨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래도 소망의 터전으로, 믿을 수 있다고 해서 보냈던 것인데 그 무리들이, 하늘편에 서서 도와야 할 입장에 있는 무리들이 반대했으니 그때에 예수가 느낀 슬픔은 하나님이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 느낀 슬픔 이상의 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대하는 무리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잃어버린 아들딸을 다시 찾기 위해 반대하는 민족과 원수를 찾아가야 할 입장에서 눈물을 흘리시고 수고하신 것을 생각하며 그 자신이 그들을 저주할래야 저주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을 알고, 오히려 복을 빌지 않으면 안 되는 아버지의 심정을 체득할 수 있는 자리에 섰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이 정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통을 세워 교육할 수 있어야
가정이 사는 데 있어서 절대 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왔다갔다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올라가야만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 있어서 가정을 이끌고 올라가기란 더없이 힘이 드는 것을 느낄 겁니다. 개인이 움직일 때는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났지만 가정을 이끌고 올라갈 때에는 이중 삼중의 힘이 드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종족을 끌고 올라가려면 얼마나 더 어렵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족적인 메시아가 되어 종족을 끌고 올라가는 데 있어서 그 수난길이 얼마나 어렵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을 끌고 가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들이 종족을 대표해 가지고 전통을 세워 하나님 앞에 전체적으로 움직여 나갈 수 있게 될 때는 민족이 전통의 가정적 중심인 여러분을 본받아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그들 앞에 ‘천륜 앞에 이렇게 가야 한다. 여기에 반항이란 있을 수 없고 절대 복종해야 한다. 이렇게 가는 것이 전통적 노정이다' 하는 것을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종족을 모아 놓고 민족을 모아 놓아서 뭘 하느냐는 것입니다. 모아 놓음으로써 오히려 한이 되는 것이요, 거기에 원망과 저주가 깃들게 된다면 차라리 안 모아 놓은 것이 나을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가정을 뒤에 두고 이와 같은 놀음을 하는 것은 전통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가냘프고 연약한 아낙네들이, 주체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한 여자들이 일편단심 하나님을 위해 감으로 말미암아, 뜻을 품을 수 있는 사나이들은 오지 말라고 해도 자연적으로 눈물을 흘리며 여자들이 가는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타락할 때, 아담의 뒤를 해와가 눈물을 흘리며 갔고, 해와가 가는 길을 아담도 눈물을 흘리며 감으로써 운명의 길을, 공동의 인연을 거쳐 감으로써 타락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귀 도상에서 눈물을 짓는 여러분의 그 사정을 보고 기뻐하는 남편은 남편이 아닙니다. 부인에게 협조하지 못하면 남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와가 애달프게 눈물을 짓게 되면 남편 되는 아담도 눈물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눈물짓는 자리에 있으면 아들딸도 눈물을 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타락된 아담 해와가 눈물 지었으니 그 후손도 눈물로 살고 눈물과 더불어 신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복귀도상에서도 부모가 눈물 흘리면 그 아들딸도 눈물을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광의 전통은 누구로부터 세워야 되느냐? 해와로부터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해와가 잘못함으로 인하여 4천년 만에 겨우 찾아왔던 신랑 되시는 예수를 쫓게 되었고, 그 원한이 이스라엘 민족을 망하게 했으며, 세계 인류와 기독교인들을 2천년 동안 수난길로 몰아넣어 억울한 피를 흘리게 했던 것이 아니냐,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앞에 놓고 볼 때, 오늘 해와의 입장인 여러분들은 수난의 최고의 정상을 찾아 나서서 끝까지 극복해야 합니다.
신랑으로 오신 주님이 있다면, 그분이 내 앞에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가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6천년 수난길을 닦아서 찾아오셨기 때문에 '그분은 이제 쉬게 하고 우리가 나가서 싸우겠다'고 하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수고로이 찾아온 신랑 앞에 면목 이라도 설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당신도 같이 갑시다. 당신이 앞에 서야 됩니다' 이래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수난은 현재보다 좋은 입장을 개척하려 할 때 따르는 고통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신부의 입장에 있는 여러분, 가정을 가진 여러 분은 어차피 복귀노정을 뚫고 나가야 할 운명에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되고, 남편과 아내가 하나되고, 아들딸과 종족이 하나되고, 종족과 민족이 하나되고, 민족과 국가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입니다.
이러한 기준을 세우고자 해서 금년의 표어로 '통일기반 확보'를 세운 것입니다. 통일기반은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기준까지 벌어져야만 확고히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로소 통일을 할 수 있는 주체적인 기준은 국가를 중심삼고 세울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안 가면 누가 가겠습니까? 통일교회 교인들이 안 가겠다면 누가 가겠느냐 이거예요. 기성교회가 가겠습니까? 이 나라의 사람들이 가겠습니까? 통일교인이 안 가게 되면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식이 문제가 아니라구요.
자식을 열 다섯쯤 낳아 놓으면 열 다섯의 눈물이 부모에게 가해지는 것이요, 떼거리를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그 떼거리가 도리어 원한의 눈물을 가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통일교회 교인이 많아지지 않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60년대보다도 통일교인들이 더 많아지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종족의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눈물을 흘리면서 민족을 찾아갈 때, 그 민족이 찾아가는 우리를 보고 눈물로 감사하게 되면 우리의 승리적 터전이 넓어진 것으로 알라는 것입니다. 반대하고 원수같이 대하던 기성교인들이 여러분의 정성어린 태도에 감화되어 눈물을 흘리면서 맞아 줄수 있는 환경이 되면 천하를 굴복시키는 일이 내 치마폭 안에서 벌어질 것을 생각하라는 거라구요. 남자가 그렇게 되면 내가 세계적인 대표로 천사장을 굴복시킬 수 있는 영광의 기회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대하던 무리들이 환희의 눈물로 맞아줄 수 있는 길을 개척해야만 복귀의 천국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는 그런 전통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 전통을 세우기 위해서 오시는 주님은 얼마나 불쌍하시며, 그를 따르는 무리는 얼마나 불쌍하며, 그들을 인도해야 하는 하나님은 얼마나 불쌍하냐는 것입니다.
사지사판에서도,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원한의 궁지에서도 우리가 하나 되어야 사탄세계, 혹은 지옥을 가더라도 그 지옥을 뚫고 다닐 수 있고, 지옥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다 수난의 길을 원하지 않지만, 통일교회 교인들은 수난길을 자청하여 선두에 서서 가지 않으면 복귀의 노정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수난의 정상에 올라가야 되겠다. 종족 가운데서도 종족의 최고 수난길을 내가 책임져야 되겠다고 하는 사상이 있다면 그 사상이 하늘 나라를 빨리 이룰 수 있는 사상인 것입니다. 내가 민족 앞에 있어서의 대표적인 수난길을 가겠다고 하는 사상이 있다면 그 사상이 민족을 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의 정상은 수난의 정상의 행각을 거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럼 수난은 뭐냐? 현재보다도 좋은 입장을 개척하려 할 때 따르는 고통입니다. 현재의 입장을 개척하여 더 좋은 입장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거기에 비례적으로 고통의 대가(代價)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은 죽은 자를 살려주기 위한 길
그렇기 때문에 복귀의 천국을 안에 두고 가는 우리가 복귀의 과정을 거쳐 천국에 이를 때까지는 가는 길이 결코 평탄할 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십년 동안에 갈 것이냐. 이십년 동안에 갈 것이냐를 결정할 때. '이십년이 걸리면 너무 늦다. 십년 만에 가야 되겠다'라고 생각한다면 이십년 동안에 갈 고통의 2배를 당하면 그만큼 단축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후손들이 천년 한을 벗어 놓고 해방의 아들딸로써. 아버지의 영광된 아들딸로서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는 무리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자리는 내 당대에 몇배의 수난의 대가를 치름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수난을 감소시키고 탕감시킬 수 있는 수고의 행로를 가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탕감의 자리, 복귀의 자리는 수난의 정상에 서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통일교회가 어느만큼 올라왔느냐? 민족을 중심삼고 이 일을 해온 통일족속은 과거의 유대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기성교회가 왜 하나님의 은혜권에서 떨어지게 되었느냐? 그것은 통일교회를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탕감권에 참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기성교회가 통일교회보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 기성교회가 민족을 대신할 수 있는 탕감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성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통일교회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 나라는 통일교회가 책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족적 권내에 있으면서 민족적 사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성교회를 밟고 올라서 차 버리고 갈 것이 아니라, 데리고 가야 합니다. 죽은 자를 살려 주기 위한 길이 복귀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넘어서면 기성교회가 우리의 발에 채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기성교회를 차버리고 갈 것이 아니라, 사지에 있는 것을 일깨워서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에게 기성교회를 전도해야 하는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나라 없는 민족이 얼마나 불쌍한지 아느냐
우리가 이러한 자리에 올라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수난의 대가를 치렀는지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낮이나 잃어버린 조국 광복을 위해서, 에덴의 천국을 향해서 가는 집시의 무리입니다. 마을도 없거니와 살 집도 없습니다. 비가 오면 다른 데로 이사를 해야 하고, 혹은 다른 수많은 민족들이 습격을 하면 가진 재산을 모두 버리고 벌거숭이의 몸으로 피난을 해야 하는 신세가 우리의 신세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악착같이….
이스라엘 민족을 보라구요. 2천년 동안 유리 고객하던 그 민족이 이제서야 예루살렘 성전을 붙들고 선조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은 나라를 갖지 못한 민족이 얼마나 불쌍하고 비참한 것인가를 역사 과정에서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의 주권을 갖고 죽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기에 주권을 침해하는 어떤 운세가 있으면 생명을 걸고 내닫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십 배에 가까운 아랍권과 대처해서도 승리의 판도를 넓혀 가지고 세계적인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알았느냐? 나라 없는 민족은 비참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나라 없는 민족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주권자의 중심으로 모셔 가지고 영광의 천국을 만들어 만민이 아버지의 명령 앞에 서서 하늘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는 그날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 통일신도의 사명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나라를 잃어버린 서글픔을 당해 보지 못했을 겁니다. 선생님은 그걸 잘 알고 있어요. 대한민국이 왜정하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선생님도 일제에 대항해 싸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생각을 하면, 민족적인 입장에서 볼 때 나라 없는 민족이 불쌍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 나아 가서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을 중심삼은 주권의 터전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머무르실 수 있는 흔적도 인연도 없는 이 삭막한 동산에 그럴 수 있는 흔적을 제시해야 되고, 인연을 찾아 세워야 하는 것이 복귀 행각의 노정을 짊어진 선생님의 책임이요, 여러분의 책임인 것을 생각할 때, 선생님은 여러분이 불쌍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여러분도 불쌍하지만 선생님도 불쌍한 것입니다. 선생님도 불쌍하지만 더 불쌍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도 신음의 노정을 극복해야 되고, 여러분도 그 후손으로 태어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 길을 안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간 길을 타락한 인류가 갔고, 예수가 간 길을 기독교 신자들이 갔고, 선생님이 가는 길을 여러분이 가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부모가 당하는 그 고통을 같이 당하고, 부모가 처하여 있는 입장에 같이 처하지 않고는 자녀의 자리에 설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싫든 좋든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조를 맞추게 되면 효의 명분을 가질 수 있으되, 보조를 못 맞추게 되면 불효의 명분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요, 불효의 명분을 갖게 되면 오늘날 한국에 있는 삼천만 민족에게 참소받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믿지 않았다면, 차라리 몰랐다면 모르지만, 알면서도 못 간 사람은 앞으로 삼천만 민중의 참소를 받게 되고, 또 그때 당하는 수난은 지금 당하는 수난의 몇백 배, 몇천 배가 될 것으로 생각하라는 거예요. 얼굴을 들래야 들 수 없고 자기를 변명할래야 변명할 수 없는 때가 다가올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죽어도 그런 과오는 남기지 말아야 하겠다고, 이 시대에 자기 손이 끊어지고, 발이 끊어지고, 생명이 위험하더라도 불효의 자리에는 절대 가지 말아야 되겠다고, 부모가 명령하면 명령한 그 방향으로 내가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행하다가 죽겠다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뜻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효자의 이름을 갖고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어도 그렇게 죽는 날에는 보고 싶은 어머니 아버지를 만날 수 있고, 거기에서 서러운 눈물로 붙안고 다짐할 수 있는 인연이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돌아서는 날에는 천년 만년 찾아도 어려운 길의 인연이 다시 남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을 그런 자리에 세워서는 안 되겠기에 무자비하고 매정하게 때려 모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야 되고, 선생님도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지금까지 그런 길을 걸어 나온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면 하늘까지 망한다
복귀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어느 한날 편한 날이 없는 것입니다. 하루의 아침을 맞이할 때는 근심으로 맞고, 저녁을 지내고 잠을 이루게 될 때는 오늘의 하루를 감사드림과 더불어 내일의 계속되는 싸움에서의 승리를 다짐하여야 하는 연속적인 수난의 정상길을 피해 가지고는 복귀의 노정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번에 선거 때를 중심삼고 자기의 고향에 돌아가 가지고 남편 혹은 자식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또 자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타락하던 아담 해와를 두고 하나님이 생각하셨던 것과 같은 마음이 사무쳐야 됩니다. 아내를 찾지 못하여 낙망한 가운데 고독한 자리에서 잠을 자는 남편의 신세를 보고 신부로서, 천년 만년 위로의 눈물로 품어 줄 수 있는 어머니 입장을 대신할 수 있어야 되고 누나의 입장을 대신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다음에 신부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이 삼대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남편을 어머니의 입장에서, 누나의 입장에서, 붙안고 목을 놓고 한없이 울며 천년 만년 남편을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엇갈려야 하는 것이 신부의 사명을 짊어진 여러분이 가져야 할 심정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또 아들딸을 보게 될 때, 자기의 아들딸이 불행의 아들딸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부모의 품에서 쫓겨나는 아들딸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이여,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고 억울해 하던 당신의 심정을 잘 알고 있사오니 이 아이들은 결코 아담 해와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게 하소서. 이 아이들이 하늘 앞에 탕감하지 못해 용서를 빌어야할 자리에 있거든, 그 자식의 책임까지도 제가 대신 질 수 있게 하여 주소서' 하고 눈물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웃음이 깃들 수 없습니다. 탕감이라는 원한의 교차로가 한 번만이 아니고, 종족의 교차로, 민족의 교차로, 국가의 교차로, 세계의 교차로가 얽매여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그 안타깝고 동정스러운 마음으로 주고받는 사랑의 정리로 말미 암아 인간 세계의 그 어떤 부모보다도 어머니보다도 더 강할 수 있는 사랑의 심정이 심어질 수 있기에, 하나님은 이 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여러분의 남편이 가는 길을 보호해 줄 것이고, 여러분의 아들딸이 가는 길을 보호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야속하고 애석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것은 더 큰 하나님의 민족의 한을 개척해야 하고, 국가의 한을 개척해야 할 복귀의 노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임을 못하면 다 망하는 것입니다. 너와 나만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족이 망하는 것이요, 우리 교파가 망하는 것이요, 하늘이 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여러분은 현재 가정을 대표하여 첨단에 선 아낙네들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담벽도 뚫을 수 있고, 원수의 보루도 뚫고 남을 수 있는 강한 마음을 가지고 극복해 내고, 천년의 수고가 있거든 천년 이상 남아질 수 있는 결의를 하고, 만년의 수고가 있거든 만년 이상 남아질 수 있는 결의를 하고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 현재 여러분이 처한 자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자신들은 태어났기에, 수난을 위해 태어났기에, 가는 것도 수난을 위해 가야 되고, 죽는 것도 수난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그 수난은 보통 수난이 아닙니다. 수난길의 선두에 서서 가야 되는데, 가다가 죽더라도 종족적 권내에서 죽어서는 안 되고, 민족적 권내에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붙들고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 백성의 이름을 갖고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이것이 통일식구들이 가야 할 최대의 소망이요, 최대의 판결을 하는 사지에서 생명을 걸고 쓰러져야 할 최후의 입장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못 가면 자기 아들딸을 붙들고 뼈에 사무치고 뼛골에서 우러나는 심정으로 '내 아들아 너만은 가야 한다. 내 딸아 너만은 가야 한다. 나라를 찾을 때까지는 가야 돼'라고 눈물어린 유언을 남기고 가야 할 것이 통일가의 전통적 사명인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은 수난의 정상을 달리는 길
여자인 여러분, 이제 결심할 때가 왔습니다. 아낙네 되는 여러분들, 이제 최후의 단결을 할 때가 온 것입니다. 민족의 한이 우리의 앞 길을 막고 있고 세계의 한이 우리의 앞 길을 막고 있는 차제(此際)에, 만일에 남편이 여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남편을 버려야 할 것이고, 자식이 동조하지 않으면 자식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하늘 오빠를 모시고, 하늘의 소망된 신랑의 뜻을 품고 가는 것이 낫겠다고 하면서 가야 되는 것이 여러분의 입장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저께 선생님이 지구장들한테 무엇을 포고했느냐? 통일교회의 지역장이나 지구장 중에서 이 뜻 길이 어려워 못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타인의 입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든지 자유로이 행동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못 가겠다고 불평하고, 못 가겠다고 탄식하고, 다른 사람마저 못 가게 브레이크를 거는 사람은 오히려 없는 것이 낫다고 보는 것이 뜻이 가야 할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앞으로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를 것입니다. 뜻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후퇴하는 남편이 있으면 여러분은 그 사나이의 뒤를 따라 가는 아낙네가 될 것이냐, 그 사나이를 하늘편으로 이끄는 아낙네가 될것이냐 하는 문제가 여러분에게 걸려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랑의 인연을 맺은 남편이 아내가 가는 하늘의 길을 부정하고 나서게 될 때, 그 남편을 원수와 같이 생각하고 손에 칼을 들고 복수하겠다는 심정을 갖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 여러분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복귀의 노정은 수난의 정상을 달리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 앞에 소망을 두고서 다른 무엇을 소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찾기 전에는 여러분 앞에 가중되는 비참한 수난길밖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선생님이 책임지고 있는 복귀의 운명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결의를 하지 않고는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여러분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과 여러분은 어차피 갈라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결심을 하는 데에 있어서 하늘이 감동할 수 있는 자리에서 결심을 하고, 그 결심에 하늘이 같이하게 될 때에 우리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위에 철옹성같이 둘러싼 원수의 화살이 우리를 겨누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지내온 선생님의 생애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 이상 비참한 자리를 걸어왔고, 여러분 이상 십자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여러분 이상 비참한 노정을 홀로 책임지고, 비틀비틀하며 비탈길을 걸어온 선생님입니다. 벼랑길을 걸어왔습니다. 원수가 선생님을 차 굴려 버릴 수도 있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가졌겠지만, 차버리지 못했습니다. 원수가 차 버리면 하나님이 위에서 붙들고, 또 다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선생님이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누구를 믿을 게 아닙니다. 선생님이 다른 누구를 믿지 않고 하늘을 믿어 왔듯이, 하늘이 가야 할 길을 믿어야 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상의 누구를 사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계에 없는 사랑의 길을 찾아가려니 세계에 없는 수난의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이 아니겠습니까?
수난의 정상에서 물러설 것이냐 뛰어 넘을 것이냐
이제 여기서 여러분들은 각자가 다시 결의해야 되겠습니다. 과거를 냉철히 비판하고 현재의 입장을 직시하면서 내일의 소망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 것이냐 하는 것을 여러분 자신이 결심해야 되겠습니다. 다른 누구를 믿을 때가 아닙니다.
단 하나 여러분 앞에 선생님이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은 뜻 앞에서 떨어질 길, 돌아설 수 있는 길이 있지만 선생님은 못 돌아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차라리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선생님을 따라가다가 돌아서게 되면, 도리어 선생님이 가는 길 앞에 동냥도 못 주면서 쪽박까지 깨어 버리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연을 맺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인연을 맺고 나오다가 돌아서게 될 때는 사탄이 참소하게 될 것이고, 민족이 참소할 조건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비참한 운명을 여러분 앞에 남기고 싶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의 후손들이 참소할 조건을 남기지 않으려니 현재의 입장은 무정하고 매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무정한 가운데서도 그 누구보다도 심정적으로, 여러분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하늘의 사랑을 가지고 여러분의 뒤를 지켜 주고 하늘의 복의 인연을 줄달아 주기 위해 수고하고 있는 스승이 있고, 부모가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러분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는 부모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고, 형제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고독단신이었지만 여러분은 형제가 있고, 부모가 있고 친구도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그러한 입장에서도 갈 길을 가지 못하고 돌아서게 된다면 그 부모 앞에, 친구 앞에, 형제 앞에 참소받는 그 길을 어떻게 넘어설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지옥에 가는 것이 낫지…. 영광의 천국이 그런 사람 앞에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그 영광의 천국은 그에게 오히려 괴로움의 자극제가 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그런 비참한 사람이 되지 않고, 당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이 살아봤자 몇백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살아봤자 오륙십 년밖에 더 살 수 없는 여생을 뜻 앞에 묶어 바쳐 빨리 죽을 수 있는 길을 향하여 돌진하는 길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가야겠습니다. 그렇게 가는 길 앞에서는 수난길이 빨리 해결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다시 결의를 해야 할 시점에 놓였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수난의 정상에서 물러설 것이냐, 아니면 수난의 정상에서 더 가중된 수난의 정상으로 뛰어넘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가야 되는지를 여러분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을 넘어 국가까지 가야 됩니다. 이 길은 죽든지 살든지 가야 할 길입니다. 안 가면 망하는 거라구요.
남편과 자식 대신 민족을 사랑하라
예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한이 맺혔고, 이스라엘에게 한이 맺혔으며, 모든 만물에게 한이 맺혔습니다. 우리의 노정은 이 한을 풀기 위한 탕감노정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 이상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 이상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안 됐지만, 여자들이 고생을 하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고생을 한다고 해도 감옥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법정에 세워져 가지고 십자가를 지는 죽음의 길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수난길에는 감옥이 앞에 기다리고 있었고, 십자가의 죽음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가는 길에도 감옥이 기다리고 있었고, 교역자들이 선생님을 죽이려고 모함했던 죽음길이 앞에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에게는 죽음길이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황공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죽음길을 가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신랑되시는 분들이 대신 십자가의 죽음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받지 못할 아낙네들의 속죄의 삶을 어떻게 살고, 속죄의 인연을 어떻게 풀 것이냐 할 때, 하늘땅을 들추어도풀 길이 없는 죄인 중의 죄인이요, 벌을 받더라도 최고의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껴야 하는 것이 여러분이 처해 있는 아내의 자리가 아니냐 하는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통일교회에서 전도를 하고, 아무리 밤잠을 못 자고 동네에서 전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을 잡아다 죽일 사람은 없지 않느냐? 그 자체가 예수님을 대해서 면목이 없는 것이요, 선생님을 대해서도 면목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천 이백 명이라는 여러분 여자들이 단결하여, 여러분 개체 개체는 무력하지만, 안팎으로 심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3대 사랑의 인연을 갖춘 그런 입장을 중심삼고 나가야 합니다. 남편 대신 민족을 사랑하고, 자식 대신 민족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아까 남편은 아버지요, 오빠요, 남편이라고 말했으니, 민족이 여러분을 바라보고 어머니, 누나라고 높일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에 있는 남자들이 자기들의 아내보다 여러분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인연을 갖추지 않고는 복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남편 이상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의 자식 이상으로 그들을 사랑해서 어머니의 인연을 결정하고, 혹은 누나의 인연을 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기의 아내보다도 여러분을 더 사랑했다는 입장에 서게 되면 여러분은 수난의 길을 벗어날 수 있음과 동시에 여러분을 사랑하는 그들이 하늘 앞에 끌려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선생님을 중심삼고 여러분이, 여러분을 중심삼고 이 나라가 관계를 맺어서 발전해야 하는 노정이기에 여러분은 십자가의 정상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십자가의 제단 위에 올려 놓고 제물 드리는 제사장의 입장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잡아서 제물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만물을 제물삼아서 제사드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해와인 여러분을 제물드려야 합니다. 옛날에는 해와가 제물 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해와는 남편을 따라 나왔지만 탕감복귀를 세계적으로 하는 이때에 있어서는 남편이 해와를 하늘 앞에 제물로 삼아 가지고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고비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 일이 대한민국을 중심 삼고 벌어지는데 역사상에 처음 있는 일이요, 전무후무한 일인 것입니다.
민족을 위한 수난의 정상에서 제물 될 각오로 활동하라
여기에 제물될 여자는 어떠한 여자냐? 남편 있는 여자입니다. 남편 있는 여자들을 잡아다가 제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가정의 남편을 대신해서 빼앗아다가 제물드리는 입장인 것입니다. 세계의 남편들이 반대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는 입장에 있는 세계의 남편들이 있어야만 세계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을 죽을 자리로 내몰아야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더 무자비하고, 더 무정하게 해야 됩니다. 제물에게 사정을 봐 주어서 되겠습니까?
이런 입장을 생각해 보고, 수난의 정상에서 민족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을 가려 가야 하는 한 여인의 신세를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에게 천년 만년 역사적인 인연을 남겨야 할 책임이 내 몸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겟세마네 동산을 가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요히 생명을 저울질하는 입장에서 숨가쁜 걸음으로 연속된 길을 민족이 굴복할 수 있을 때까지 가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권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여러분의 정성어린 눈물과 정성어린 심정으로 해방권이 이루어진다면 비로소 지상에 천국이 개문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해방될 때에는 여러분과 더불어 여러분이 품고 있던 자식과 여러분이 품고 있던 남편과 민족 전체가 부활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죽은 제자가 있었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그를 부활시키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버림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부활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선생님을 붙들고 같이 죽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 여러분이 죽게 되면 부활의 혜택이 주어지고, 여러분의 부활과 더불어 여러분의 남편과 자식도 부활될 수 있고, 더나아가서 민족과 국가가 부활된다는 것을 알고 최후에 남아진 십자가의 길과 최후의 정상에서 수난의 길을 달게 받아들여 최선을 다해서 이 길을 끝까지 넘어갈 것을 부탁하는 바입니다.
수난의 정상을 도피하려는 자는 하늘의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편과 후손에게 참소를 받는 어머니가 되는 이 억울함을 부디 여러분의 일대에 남기지 말고 갖추어진 한 때를 힘있고 보람있게, 그리고 뜻있게 보내 가지고 유종의 미를 거두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수난의 정상에서'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알겠지요?「예」그러면 틀림없이 이 길을 가겠다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내리세요.
기 도
아버님, 여기에 저희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자리에 당신의 인연이 싹트고, 당신의 사정이 넘치고, 당신의 심정이 하늘 높이 솟구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는 연약한 아낙네의 손길 손길을 모아 나라의 한을 중심삼고 외치고 일어서는 자리이오니 아버지여, 기꺼이 받아 주시옵소서. 이들은 여기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민족과 세계의 인연을 거치기를 바라는 아낙네들이오니. 아버지, 기꺼이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은 나라를 그리워하고, 나라를 위해서 불타고, 몸은 나라를 위해서 시들어지고 늙어지겠다고 각오하는 이 딸들을 아버지께서는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
이제 이 딸들이 가는 길을 아버지께서 지켜 주셔야 되겠습니다. 하늘이냐, 세상이냐, 남편 혹은 자식들이냐를 결정지어야 할 길이 이들 앞에 나타나더라도 하늘을 위하여 끝까지 가게 될 때는 남편도 자식도 다시 찾아 지는 것을 저는 알고 있사오니, 이들이 끝까지 하늘의 뜻을 위하고, 하늘의 한을 풀고, 나라의 소원을 성취한 수 있는, 민족의 소망이 되는 여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세계의 보람 있는 소망의 중심이 되는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수난의 정상의 고비에서 저희들은 물러날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수난의 길을 향하여 점프를 하고, 내일의 희망을 위해 죽고 내일의 희망을 위해 살겠다는 각오를 해야겠습니다. 이들의 장래와 현재의 입장을 완전히 당신의 장중에 장악하시어서, 승리의 날까지 남아져, 당신의 영광의 터전 위에 동참할 수 있는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번 기간을 통하여 마음과 몸에 새로운 부활권을 갖추어 민족의 운명을 대신 책임지고 나가는, 기관차의 사명을 하는 당신의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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