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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三回 宋公伐齊納子昭 楚人伏兵劫盟主
제33회: 송양공이 제나라를 쳐서 공자 소를 제후로 세우고, 초성왕이 복병으로 맹주를 겁탈하다.
話說,高虎乘雍巫統兵出城,遂伏壯士於城樓,使人請豎刁議事。豎刁不疑,昂然而來。高虎置酒樓中相待,三杯之後,高虎開言:「今宋公糾合諸侯,起大兵送太子到此,何以禦之?」豎刁曰:「已有易牙統兵出郊迎敵矣。」虎曰:「眾寡不敵,奈何?老夫欲借重吾子,以救齊難。」豎刁曰:「刁何能為?如老大夫有差遣,惟命是聽!」虎曰:「欲借子之頭,以謝罪於宋耳!」刁愕然遽起。虎顧左右喝曰:「還不下手!」壁間壯士突出,執豎刁斬之。虎遂大開城門,使人傳呼曰:「世子已至城外,願往迎者隨我!」
한편, 고호는 옹무(雍巫)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간 틈에 장사들을 성루에 매복시킨 후에 사람을 시켜 의논할 일이 있다고 수조(竪刁)를 불러오게 했다. 수조가 의심하지 않고 우쭐거리면서 오니, 고호가 성루 위에 술자리를 준비해 놓고 맞이했다. 술잔이 세 번 돈 후에 고호가 입을 열어 말하기를, “오늘날 송공이 제후들을 규합하여 대군을 일으켜 태자를 이곳까지 호송해 왔소. 어떻게 막을 생각이오?” 하니, 수조가 말하기를, “이미 역아(옹무)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서 적군을 막고 있소.” 했다. 고호가 말하기를, “우리 군사의 수가 적어서 많은 적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니 어찌하오. 노부가 그대에게서 귀중한 물건을 빌려 우리 제나라의 어려움을 구하려고 하는데 빌려주겠소?” 하니, 수조가 말하기를, “제가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마는 만약 노대부께서 사람을 보내시면 명하시는 물건을 내드리겠습니다.” 했다. 고호가 말하기를, “그대의 목을 빌려 송양공에게 사죄하려고 하오.” 하니, 수조가 깜짝 놀라 황급히 일어나려고 하자, 고호가 좌우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빨리 손을 쓰지 않고 무엇 하느냐?” 했다. 벽 뒤에 숨어 있던 장사들이 뛰쳐나와 수조를 붙잡아 목을 쳤다. 고호가 즉시 성문을 활짝 열고 사람을 시켜 외치기를, “세자가 이미 성밖에 와 계십니다. 세자를 마중 나가고 싶은 사람들은 나를 따르시오!” 했다.
國人素惡雍巫豎刁之為人,因此不附無虧,見高虎出迎世子,無不攘臂樂從,隨行者何止千人。國懿仲入朝,直叩宮門,求見無虧,奏言:「人心思戴世子,相率奉迎,老臣不能阻當,主公宜速為避難之計。」無虧問:「雍巫豎刁安在?」懿仲曰:「雍巫勝敗未知。豎刁已為國人所殺矣。」無虧大怒曰:「國人殺豎刁,汝安得不知?」顧左右欲執懿仲,懿仲奔出朝門。無虧帶領內侍數十人,乘一小車,憤然仗劍出宮,下令欲發丁壯授甲,親往禦敵。內侍輩東喚西呼,國中無一人肯應,反叫出許多冤家出來。正是:恩德終須報,冤仇撒不開。從前作過事,沒興一齊來。
도성 안의 사람들은 평소에 옹무와 수조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무휴에게 붙지 않고 있다가 고호가 세자를 모시러 성 밖으로 나가자고 하자,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기꺼이 따라나서서 그 수가 천 명도 넘게 되었다. 한편, 국의중은 조정에 들어가 궁궐의 문을 두드려서 무휴에게 뵙기를 청해 아뢰기를, “사람들이 세자 소를 추대하려고 서로 모여서 성 밖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노신이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공께서는 속히 난을 피할 계책을 세우십시오.” 하니, 무휴가 말하기를, “옹무와 수조는 지금 어디에 있소?” 했다. 국의중이 말하기를, “옹무는 송나라 군사와의 싸움에서 승패를 아직 알 수가 없고, 수조는 이미 백성들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했다. 무휴가 대로하여 말하기를, “백성들이 수조를 죽였다면 그대는 어찌 그전에 몰랐소?”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국의중을 잡으려고 하자, 국의중이 도망쳐 조문 밖으로 나왔다. 무휴가 내시 10여 명을 인솔하여 작은 수레 한 대에 타고 화를 내어 검을 잡고 궁 밖으로 나갔다. 무휴가 내시들에게 명령하여 장정들을 모아 무장시킨 후에 친히 가서 적을 막으려고 했다. 내시들이 사방으로 나가서 장정들을 불렀으나 도성 중에는 부름에 응하여 나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오히려 원한을 갖고 있던 많은 사람을 불러내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은혜와 덕을 베풀면 끝내 보답을 받지만. 원한을 사면 보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지난날에 저지른 잘못된 처사로, 재수 없이 한꺼번에 죄값을 치르리라!”라고 할 것이다.
這些冤家,無非是高氏、國氏、管氏、鮑氏、寧氏、陳氏、晏氏、東郭氏、南郭氏、北郭氏、公孫氏、閭邱氏眾官員子姓。當初只為不附無虧,被雍巫豎刁殺害的,其家屬人人含怨,個個銜冤,今日聞宋君送太子入國,雍巫統兵拒戰,論起私心,巴不得雍巫兵敗。又怕宋國兵到,別有一番殺戮之慘,大家懷著鬼胎。及聞高老相國殺了豎刁,往迎太子,無不喜歡,都道:「今日天眼方開!」齊帶器械防身,到東門打探太子來信,恰好撞見無虧乘車而至,仇人相見,分外眼睜,一人為首,眾人相助,各各挺著器械,將無虧圍住。
원한에 맺힌 집은 고(高)씨, 국(國)씨, 관(管)씨, 포(鮑)씨, 영(寧)씨, 진(陳)씨, 안(晏)씨, 동곽(東郭)씨, 남곽(南郭)씨, 북곽(北郭)씨, 공손(公孫)씨, 여구(閭邱)씨 등 여러 관원의 자손들이었다. 당초에 다만 무휴에게 붙지 않았다가 옹무와 수조에게 살해되어 그 가족들이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송양공이 태자를 호송하여 입국하고, 옹무가 군사를 거느리고 항전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마음속으로 옹무가 싸움에 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또 송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 다시 한번 살육전을 벌리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상국 고호가 수조를 죽이고 태자를 맞이하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늘에서야 비로소 하늘이 눈을 떴구나!” 했다. 그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동문에 이르러 태자가 오는지 탐문하고 있던 참에, 마침 무휴가 수레를 타고 오는 것을 보고, 원수가 서로 만나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다가 한 사람이 앞장서고 여러 사람이 도와서 각각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어 무휴를 둘러쌌다.
內侍喝道:「主公在此,諸人不得無禮!」眾人道:「那裏是我主公!」便將內侍亂砍,無虧抵擋不住,急忙下車逃走,亦被眾人所殺。東門鼎沸,卻得國懿仲來撫慰一番,眾人方纔分散。懿仲將無虧屍首抬至別館殯殮,一面差人飛報高虎。再說,雍巫正屯兵東關,與宋相持,忽然軍中夜亂,傳說:「無虧豎刁俱死,高虎相國率領國人,迎接太子昭為君,吾等不可助逆。」雍巫知軍心已變,心如芒刺,急引心腹數人,連夜逃奔魯國去訖。天明,高虎已到,安撫雍巫所領之眾。直至郊外,迎接世子昭,與宋、衛、曹、邾四國請和。四國退兵。
내시들이 소리치기를, “주군이 여기에 계시니 너희들은 무례하게 굴지 말라.” 하니, 군중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의 주군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하고, 내시들을 어지러이 베어 죽였다. 무휴가 당해내지 못하고 황급히 수레에서 내려 도망치다가 역시 군중에게 살해되었다. 동문이 소란스러웠으나 국의중이 나타나서 그들을 달래자 군중들은 바로 흩어졌다. 국의중은 무휴의 시신을 별관으로 옮겨 염습하고 사람을 시켜 고호에게 알렸다. 한편, 옹무는 성 밖 동쪽 관문에 주둔하여 송나라 군사들과 대치했는데, 갑자기 군중이 소란스러워지며 전하기를, “무휴와 수조는 모두 죽고, 고호 상국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태자 소를 영접하여 군주 자리에 앉히려고 합니다. 우리는 역모를 도울 수가 없다고 합니다.” 했다. 옹무는 군심이 이미 변한 것을 알고, 가슴이 마치 가시에 찔린 듯했다. 그는 급히 심복 몇 사람을 이끌고 밤을 타서 노나라로 도망쳤다. 날이 밝아오자 고호가 도착하여 옹무가 거느렸던 군사들을 안무하고 바로 교외로 가서 세자 소를 영접했다. 송(宋)나라, 위(衛)나라, 조(曹)나라, 주(邾)나라 네 나라와 화친을 청하여 수호를 맺고, 네 나라의 군사들은 물러갔다.
高虎奉世子昭行至臨淄城外,暫停公館,使人報國懿仲整備法駕,同百官出迎。卻說,公子元公子潘聞知其事,約會公子商人,一同出郭奉迎新君。公子商人咈然曰:「我等在國奔喪,昭不與哭泣之位,今乃借宋兵威,以少凌長,強奪齊國,於理不順。聞諸侯之兵已退,我等不如各率家甲,聲言為無虧報仇,逐殺子昭。吾等三人中,憑大臣公議一人為君,也免得受宋國箝制,滅了先公盟主的志氣。」公子元曰:「若然,當奉宮中之令而行,庶為有名。」乃入宮稟知長衛姬。長衛姬泣曰:「汝能為無虧報仇,我死無恨矣!」
고호가 세자 소를 모시고 임치성 밖에 도착하여 잠시 공관에 머물게 하고, 사람을 성안의 국의중에게 보내 어가를 준비하여 백관들과 함께 나와 맞이하게 했다. 한편, 공자 원과 공자 반도 그 사실을 알고, 공자 상인과 의논하여 다 같이 성곽 밖으로 나가 새 군주를 맞이하려고 했다. 그러나 공자 상인이 부루퉁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나라 안에서 상을 치렀지만, 소(昭)는 곡하지도 않았으면서 지금 오히려 송나라 군사의 힘을 빌려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을 능멸하여 제나라를 강탈하려고 하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제후들의 군사가 이미 물러갔다고 하니 우리가 각기 가병들을 동원하여 무휴의 원수를 갚는다고 소리치면서 태자 소를 죽인 후에 우리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대신들의 공의를 빙자하여 군주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송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공께서 이룩하신 맹주의 뜻을 꺼지게 함도 면할 수 있습니다.” 하니, 공자 원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마땅히 중궁의 영을 받들어 행하여야 거의 명분을 세울 수 있다.” 했다. 세 사람은 즉시 궁중으로 들어가 장위희에게 자기들의 뜻을 알렸다. 장위희가 울면서 말하기를, “그대들이 무휴의 원수만 갚아 준다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다.” 했다.
即命糾集無虧舊日一班左右人眾,合著三位公子之黨,同拒世子。豎刁手下亦有心腹,欲為其主報仇,也來相助,分頭據住臨淄城各門。國懿仲畏四家人眾,將府門緊閉,不敢出頭了。高虎謂世子昭曰:「無虧豎刁雖死,餘黨尚存,況有三公子為主,閉門不納。若欲求入,必須交戰,儻戰而不勝,前功盡棄。不如仍走宋國求救為上。」世子昭曰:「但憑國老主張。」高虎乃奉世子昭復奔宋國。宋襄公纔班師及境,見世子昭來到,大驚,問其來意。高虎一一告訴明白。襄公曰:「此寡人班師太早之故也。世子放心,有寡人在,何愁不入臨淄哉?」
장위희가 즉시 명하여 옛날에 무휴가 거느리던 좌우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세 공자의 무리와 합쳐서 세자 소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수조의 수하 심복들도 역시 그 주인의 원수를 갚겠다고 와서 돕기로 했다. 무리들을 서로 나누어 임치성 각 성문을 지키게 했다. 국의중이 네 공자의 가병 수가 많음을 두려워하여 부중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고호가 세자 소에게 말하기를, “무휴와 수조가 비록 죽었으나 그 나머지 무리가 아직도 살아 있고, 더욱이 세 공자가 주동이 되어 성문을 닫고 열어 주지 않으니 만약에 우리가 들어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만약에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앞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니, 차라리 송나라로 돌아가 구원병을 요청하는 편이 상책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세자 소가 말하기를, “다만 노대신의 주장을 따르겠소.” 했다. 고호가 즉시 세자 소를 모시고 다시 송나라를 달려갔다. 송양공은 군사를 돌려 막 송나라 경계에 도착할 즈음에 세자 소가 온 것을 보고 크게 놀라 그 연유를 물으니, 고호가 일일이 명백하게 고했다. 송양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과인이 군사를 너무 빨리 물린 때문이다. 세자는 마음을 놓으시오. 과인이 여기 있으니 어찌 임치성에 입성하지 못할까 근심하겠습니까?” 했다.
即時命大將公孫固增添車馬。(先前有衛、曹、邾三國同事,止用二百乘,今日獨自出車,加至四百乘。)公子蕩為先鋒,華御事為合後,親將中軍,護送世子,重離宋境,再入齊郊。時有高虎前驅,把關將吏,望見是高相國,即時開門延入,直逼臨淄下寨。宋襄公見國門緊閉,吩咐三軍准備攻城器具。城內公子商人謂公子元公子潘曰:「宋若攻城,必然驚動百姓。我等率四家之眾,乘其安息未定,合力攻之。幸而勝固善,不幸而敗,權且各圖避難,再作區處。強如死守於此,萬一諸侯之師畢集,如之奈何?」元潘以為然。
송양공은 즉시 대장 공손고(公孫固)에게 명하여 전차와 말을 더하게 했다. (지난번에는 위나라, 조나라, 주(邾)나라 삼국이 함께 하여 송나라는 다만 전차 2백 대를 썼지만, 이번에는 송나라 단독으로 출병하기 때문에 4백 대를 채우려고 했다. 공자 탕(公子蕩)을 선봉으로 삼고, 화어사(華御事)는 후군을 맡게 하고, 송양공은 친히 중군을 거느리고 세자 소를 제나라로 호송하기 위하여 다시 송나라 경계를 벗어나 제나라의 교외에 도착했다. 그때 고호가 앞으로 달려 나가 관문 앞에 이르자 관을 지키는 제나라의 장수와 관리들은 고상국을 멀리서 보고 곧바로 관문을 열고 고호와 송나라 군사를 맞아들여서 임치성 밑에 진영을 세웠다. 송양공은 성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보고, 임치성을 공격할 기구를 준비하게 했다. 성안에 있던 공자 상인이 공자 원과 공자 반에게 말하기를, “송나라 군사가 성을 공격하면 틀림없이 백성들이 동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네 집안의 가병을 거느리고 송나라 군사들이 아직 숨을 돌리지 못한 틈에 힘을 합쳐 공격하여 다행히 이기게 되면 좋은 일이고, 불행히 패하게 되면 각기 당분간 난을 피해 있다가 그때의 형편에 따라 다시 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을 지키다가 만일 다른 제후들까지 밀려오면 어찌하겠오?” 하니. 공자 원과 공자 반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
乃於是日,夜開城門,各引軍出來劫宋寨,不知虛實,單劫了先鋒公子蕩的前營。蕩措手不及,棄寨而奔。中軍大將公孫固,聞前寨有失,急引大軍來救。後軍華御事,同齊國老大夫高虎,亦各率部下接應。兩下混戰,直至天明。四家黨羽雖眾,各為其主,人心不齊,怎當得宋國大兵。當下混戰了一夜,四家人眾,被宋兵殺得七零八落。公子元恐世子昭入國,不免於禍,乘亂引心腹數人,逃奔衛國避難去訖。公子潘公子商人收拾敗兵入城。宋兵緊隨其後,不能閉門,崔夭為世子昭御車,長驅直入。
그날 밤에 즉시 성문을 열고 각기 군사들을 이끌고 송나라 영채를 습격했다. 그러나 송나라 군사의 허실을 알지 못한 공자의 가병들은 단지 송나라 선봉을 맡은 공자 탕의 앞 영채를 공격했다. 공자 탕은 손을 쓸 수가 없어 영채를 버리고 달아났다. 중군대장 공손고는 앞 영채를 잃었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대군을 이끌고 구원하러 갔다. 후군의 화어사도 제나라 노대부 고호와 함께 각각 부하들을 거느리고 접응했다. 송나라와 제나라 양쪽 군사들이 날이 새도록 혼전을 벌였다. 네 공자의 가병 수가 비록 많았으나 각기 그 주인을 위해서 싸우기 때문에 일사불란한 지휘가 없어 어찌 송나라 대군을 당해낼 수 있으리오. 그날 밤 벌어진 혼전에서 네 집안 가병들은 송나라 군사들에게 십중 칠팔이 꺾여 버렸다. 공자 원은 세자 소가 입국하면 그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혼란을 틈타 심복 몇 명을 이끌고 위나라로 달아났다. 공자 반과 공자 상인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송나라 군사가 그 뒤를 바싹 추격한 때문에 성문을 닫지 못했고, 최요(崔夭)가 세자 소를 태운 어차를 몰아 한달음에 성안으로 들어갔다.
上卿國懿仲聞四家兵散,世子已進城,乃聚集百官,同高虎擁立世子昭即位。即以本年為元年,是為孝公。孝公嗣位,論功行賞,進崔夭為大夫。大出金帛,厚犒宋軍。襄公留齊境五日,方纔回宋。時魯僖公起大兵來救無虧,聞孝公已立,中道而返,自此魯齊有隙。不在話下。再說,公子潘與公子商人計議,將出兵拒敵之事,都推在公子元身上。國高二國老,明知四家同謀,欲孝公釋怨修好,單治首亂雍巫、豎刁二人之罪,盡誅其黨,餘人俱赦不問。
상경 국의중은 네 공자의 가병들이 흩어지고 세자가 이미 성안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백관들을 모이게 하여 고호와 같이 세자 소를 옹립하여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앉혔다. 세자 소는 그 해를 즉위 원년으로 하니, 이가 제효공(齊孝公)이다. 효공은 제나라 군주 자리를 잇고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내려 최요(崔夭)를 대부로 삼았다. 황금과 비단을 크게 내어 송나라 군사를 위로하고 잔치를 벌여 배불리 먹였다. 송양공이 제나라에서 5일을 머문 후에 송나라로 돌아갔다. 그때 노희공도 무휴를 구하기 위하여 대군을 일으켰다가 효공이 이미 즉위했다는 소문을 듣고 중도에서 돌아갔다. 이때부터 노나라와 제나라가 틈이 생기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편 공자 반과 공자 상인은 서로 의논하여 가병을 이끌고 효공에게 대항한 것은 모두 위나라로 도망친 공자 원 때문이라고 책임을 미루었다. 고호와 국의중 두 대신은 네 명의 공자들이 공모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동기간에 원한을 풀고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제효공의 뜻을 받아들여, 변란을 일으킨 죄는 단지 옹무와 수조 두 사람에게만 묻기로 했다. 옹무와 수조의 일당들을 모두 잡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용서했다.
是秋八月,葬桓公於牛首堈之上,連起三大墳。以晏蛾兒附葬於旁,另起一小墳。又為無虧公子元之故,將長衛姬少衛姬兩宮內侍宮人,悉令從葬,死者數百人。後至晉永嘉末年,天下大亂,有村人發桓公塚,塚前有水銀池,寒氣觸鼻,人不敢入,經數日,其氣漸消。乃牽猛犬入塚中,得金蠶數十斛,珠襦玉匣,繒綵軍器,不可勝數,塚中骸骨狼藉,皆殉葬之人也。足知孝公當日葬父之厚矣。亦何益哉!髯仙有詩云:「疑塚三堆峻似山,金蠶玉匣出人間。從來厚蓄多遭發,薄葬須知不是慳。」
그해 제효공 원년(기원전 642년) 8월에 우수(牛首)의 땅 언덕 위에 제환공을 장사지내고 이어서 3개의 무덤을 만들었다. 안아아는 그 옆에 따로 작은 무덤을 만들었다. 또한 무휴와 공자 원으로 인하여 변란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모친인 장위희와 소위희를 모시던 내시와 궁녀들을 모두 잡아다 환공의 분묘 안에 산채로 순장시켰는데 그 수효가 수백 명에 달했다. 그후 서진(西晉)의 영가(永嘉) 말년에 천하대란이 일어났을 때 농부가 환공의 무덤을 도굴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간 농부는 그 안에서 수은으로 채워진 연못이 있어 거기에서 나오는 한기가 코를 자극하여 감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난 후, 한기가 점점 사라져서 사나운 개를 끌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누에 모양의 금붙이 수십 말과 진주가 달린 팔이 짧은 저고리와 옥으로 만든 상자와 오색비단 그리고 각종 무기를 발굴했는데 그 수가 하도 많아 셀 수가 없었다. 무덤 안에 해골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 순장된 사람들이었다. 제효공이 그 당시에 부친 제환공의 장례를 얼마나 후하게 장사지냈는지를 족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무슨 소용이 있었으랴.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가짜 무덤 세 개가 마치 산처럼 높았으나, 무덤 안의 금잠과 옥갑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자고로 많은 물건을 묻으면 도굴을 당하기 마련이니, 간소한 장례는 물건을 아끼기 때문만은 아니다.” 했다.
話分兩頭。卻說,宋襄公自敗了齊兵,納世子昭為君,自以為不世奇功,便想號召諸侯,代齊桓公為盟主。又恐大國難致,先約滕、曹、邾、鄫小國,為盟於曹國之南。曹邾二君到後,滕子嬰齊方至。宋襄不許嬰齊與盟,拘之一室。鄫君懼宋之威,亦來赴會,已踰期二日矣。宋襄公問於群臣曰:「寡人甫倡盟好,鄫小國,輒敢怠慢,後期二日,不重懲之,何以立威!」大夫公子蕩進曰:「向者齊桓公南征北討,獨未服東夷之眾。君欲威中國,必先服東夷。欲服東夷,必用鄫子。」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송양공은 제나라의 네 공자가 이끌던 군사들을 물리치고 공자 소를 제나라 군주 자리에 앉힌 뒤 스스로 불세출의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득 제후들을 소집하여 제환공을 대신하여 맹주가 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큰 나라는 부르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우선 등(滕)나라, 조(曹)나라, 주(邾)나라, 증(鄫)나라 등의 소국을 조(曹)나라의 남쪽 땅으로 불러 회맹을 행하려고 했다. 조나라와 주나라의 두 군주가 당도하고, 얼마 후에 등나라의 군주 영제(嬰齊)가 도착했으나 송양공은 영제가 회맹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방에 가두었다. 증나라 군주는 송나라의 위세에 겁을 먹고 회맹에 참여하려고 왔으나, 그 역시 약속한 날짜보다 이틀이나 늦었다. 송양공이 신하들에게 묻기를, “과인이 이제 바야흐로 회맹을 창도하려는데, 증나라 같은 소국이 감히 이렇듯 태만하여 기일을 이틀이나 어겼으니, 죄를 엄하게 묻지 않는다면 어떻게 위엄을 세우겠는가?” 하니,대부 공자 탕이 나와서 말하기를, “옛날에 제환공이 남쪽의 초나라와 북쪽의 산융을 정벌할 때도 유독 동쪽 오랑캐만은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주군께서 위엄을 중원에 세우시려면 먼저 동쪽 오랑캐를 복종시켜야만 합니다. 또한 동쪽 오랑캐를 복종시키려면 반드시 증나라 군주를 이용해야 합니다.” 했다.
襄公曰:「用之何如?」公子蕩曰:「睢水之次,有神能致風雨。東夷皆立社祠之,四時不缺。君誠用鄫子為犧牲,以祭睢神,不惟神將降福,使東夷聞之,皆謂君能生殺諸侯,誰不聳懼來服?然後藉東夷之力,以征諸侯,伯業成矣。」上卿公子目夷諫曰:「不可,不可!古者小事不用大牲,重物命也,況於人乎?夫祭祀,以為人祈福也。殺人以祈人福,神必不饗。且國有常祀,宗伯所掌。睢水河神,不過妖鬼耳!夷俗所祀,君亦祀之,未見君之勝於夷也。而誰肯服之?齊桓公主盟四十年,存亡繼絕,歲有德施於天下。今君纔一舉盟會,而遂戮諸侯以媚妖神,臣見諸侯之懼而叛我,未見其服也。」
송양공이 말하기를, “어떻게 이용한단 말인가?” 하니, 공자 탕이 말하기를, “수수(睢水)의 강물 속에는 비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수신(水神)이 있는데 동쪽 오랑캐들은 모두 사당을 지어 사철 거르지 않고 제사를 지냅니다. 주군께서 참으로 증나라 군주를 희생으로 삼아 수수(睢水)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면, 장차 수수의 신은 복을 내릴 뿐만 아니라 동쪽 오랑캐들의 귀에 들어가게 하여, 모두가 주군께서 제후들을 죽이고 살린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감히 겁을 먹고 달려와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다음에 동쪽 오랑캐들의 힘을 빌려 제후들을 정벌한다면 패업을 이룰 것입니다.” 했다. 상경인 공자 목이가 간하기를,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옛말에 적은 일에 큰 제물을 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무릇 제사란 사람을 위하여 복을 비는 것인데 사람을 죽여서 복을 빈다면 신은 반드시 흠향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나라에서 항상 지내는 제사는 종손이 관장합니다. 수수의 수신은 단지 요괴에 불과합니다. 동쪽 오랑캐의 풍속에 제사하는 잡신에게 주군께서 제사한다면 주군께서 오랑캐보다 낫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에게 복종하겠습니까? 제환공이 회맹을 주재하기를 40년 동안 할 수 있었던 것은 망한 나라는 세워 주고 후사가 끊어진 나라는 잇게 했으며, 해마다 덕을 천하에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군께서 겨우 한번 회맹을 주재하시면서 제후를 죽여 요괴에 아첨한다면, 신의 생각으로는 제후들은 두려워서 배반할 것이고 결코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公子蕩曰:「子魚之言謬矣!君之圖伯與齊異。齊桓公制國二十餘年,然後主盟,君能待乎?夫緩則用德,急則用威,遲速之序,不可不察也。不同夷,夷將疑我;不懼諸侯,諸侯將玩我。內玩而外疑,何以成伯?昔武王斬紂頭,懸之太白旗,以得天下。此諸侯之行於天子者也,而何有於小國之君?君必用之。」襄公本心急於欲得諸侯,遂不聽目夷之言,使邾文公執鄫子殺而烹之,以祭睢水之神。遣人召東夷君長,俱來睢水會祀。東夷素不習宋公之政,莫有至者。滕子嬰齊大驚,使人以重賂求釋,乃解嬰齊之囚。曹大夫僖負羈謂曹共公襄曰:「宋躁而虐,事必無成,不如歸也。」共公辭歸,遂不具地主之禮。
공자 탕이 말하기를, “자어(目夷의 字)의 말은 틀렸습니다. 주군께서 도모하시는 패업(覇業)은 제나라와 다릅니다. 제환공은 2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후에 회맹을 주재했습니다. 주군께서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무릇 천천히 하려면 덕을 쓰고, 급하게 하려면 위엄을 써야 합니다. 천천히 해야 할 일과 급히 할 일의 순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랑캐 풍속을 함께하지 않으면 오랑캐가 우리를 의심할 것이고, 제후들을 두렵게 하지 않으면 제후들은 우리를 우습게 볼 것입니다. 안에서는 우습게 보고 밖에서는 의심하는데 어떻게 패업을 이루겠습니까? 옛날에 주나라 무왕이 주왕(紂王)의 목을 베어 태백기(太白旗)에 걸어서 천하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제후의 신분으로써 천자를 죽이고 천하를 얻었는데 어찌 소국의 군주를 제사에 쓰지 못하겠습니까? 주군께서 반드시 써야 합니다.” 했다. 송양공은 원래 제후들의 마음을 얻는데 급해서, 마침내 목이의 말을 듣지 않고 주(邾)나라 문공을 시켜 증(鄫)나라 군주를 잡아서 삶아 죽였다. 수수(睢水)의 신에게 제사 지내려고 사람을 시켜 동이(東夷)의 군장들을 불러 모두 수수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에 참석하라고 했다. 그러나 원래 동이의 군장들은 송양공의 정치에 익숙하지 않아서 아무도 오지 않았다. 등(滕)나라 군주 영제(嬰齊)가 크게 놀라서 사람을 시켜 많은 재물로 석방을 구하니, 송양공은 곧 영제를 풀어주었다. 조(曹)나라 대부 희부기(僖負羈)가 조공공(曹共公) 양(襄)에게 말하기를, “송공이 조급하여 사람을 학살했으니 틀림없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귀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했다. 조공공은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마침내 (회맹이 열리는) 땅 주인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
襄公怒,使人責之曰:「古者國君相見,有脯資餼牢,以修賓主之好。寡君逗留於君之境上,非一日矣。三軍之眾,尚未知主人之所屬。願君圖之!」僖負羈對曰:「夫授館致餼,朝聘之常禮也。今君以公事涉於南鄙,寡人亟於奔命,未及他圖。今君責以主人之禮,寡君愧甚,惟君恕之!」曹共公遂歸。襄公大怒,傳令移兵伐曹。公子目夷又諫曰:「昔齊桓公會盟之跡,遍於列國,厚往薄來,不責其施,不誅其不及,所以寬人之力,而恤人之情也。曹之缺禮,於君無損,何必用兵?」襄公不聽,使公子蕩將兵車三百乘,伐曹圍其城。僖負羈隨方設備,與公子蕩相持三月,蕩不能取勝。
양공이 노하여 사람을 보내 꾸짖기를, “옛날에는 군주들이 서로 만날 때는 말린 고기와 곡식과 희생물을 가지고 손님과 주인이 우호를 나누었는데, 우리 군주께서 귀국의 경내에 머문 지 하루가 아닌데 삼군의 사람들이 아직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군주께서는 주인의 도리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희부기가 대답하기를, “무릇 공관을 제공하고 희생을 준비하는 일은 국가 간에 군주들을 초빙했을 때 행하는 예입니다. 지금 송양공께서 천하의 일을 위해 남쪽 변경에 오셨는데 우리 주군께서는 급히 가서 명을 받느라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지금 송양공께서 주인의 예를 갖추지 못했다고 책망하시니 우리 주군께서는 심히 부끄러워하십니다. 바라옵건대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했다. 조공공은 마침내 돌아가 버렸다. 양공이 대로하여 군사들을 움직여 조나라를 정벌하라고 했다. 공자 목이가 다시 간하기를, “옛날에 제환공이 회맹하던 자취를 살펴보면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많이 가지고 가서 적게 가지고 왔으며 대접이 박해도 책망하지 않았고, 또한 기일을 어겼다고 죽이지도 않았음은 바로 넓은 아량과 남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나라가 비록 무례하지만, 주공께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꼭 군사를 쓰려고 하십니까?” 했다. 송양공이 공자 목이의 말을 듣지 않고, 공자 탕에게 전차 300대를 주어 조나라를 쳐서 도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희부기가 미리 방어할 준비를 해두고 공자 탕과 3개월을 대치하니, 공장 탕은 이기지 못했다.
是時,鄭文公首先朝楚,約魯、齊、陳、蔡四國之君,與楚成王為盟於齊境。宋襄公聞之大驚。一來恐齊魯兩國之中,或有倡伯者,宋不能與爭,二來又恐公子蕩攻曹失利,挫了銳氣,貽笑於諸侯,乃召蕩歸。曹共公亦恐宋師再至,遣人至宋謝罪。自此宋曹相睦如初。再說宋襄公一心求伯,見小國諸侯,紛紛不服,大國反遠與楚盟,心中憤急,與公子蕩商議。公子蕩進曰:「當今大國,無過齊楚。齊雖伯主之後,然紛爭方定,國勢未張。楚僭王號,乍通中國,諸侯所畏。君誠不惜卑詞厚幣,以求諸侯於楚,楚必許之。借楚力以聚諸侯,復借諸侯以壓楚,此一時權宜之計也。」
그때, 정문공은 먼저 초나라에 조공하고, 노(魯)나라, 제(齊)나라, 진(陳)나라, 채(蔡)나라 4국의 군주들과 제나라의 경계에서 초성왕을 모시고 회맹을 맺을 것을 약속했다. 송양공이 전해 듣고 크게 놀랐다. 하나는 제나라와 노나라 중에서 한 나라라도 혹시 방백으로 추대되면 송나라는 그들과 다툴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자 탕이 혹시 조(曹)나라를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면 예기가 꺾여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을 걱정하여 즉시 공자탕을 불러들였다. 조공공 역시 송나라가 다시 공격해올까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 송나라에 사죄했다. 이후로는 송나라와 조나라는 예전처럼 서로 화목하게 지냈다. 한편 송양공은 오로지 패업을 이루는 데에 마음을 썼으나, 작은 나라의 제후들도 분분히 복종하지 않았으며 큰 나라의 제후들은 도리어 멀리 초나라와 회맹을 맺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음속으로 화도 나고 또한 조바심도 들고 해서 공자 탕과 상의했다. 공자탕이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의 대국으로는 제나라와 초나라보다 큰 나라는 없습니다. 제나라가 비록 맹주를 지냈지만, 분쟁이 이제 막 진정되어 국세가 아직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초나라는 왕호를 참칭한 이래 중원과 통한 지 얼마 안 되어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진실로 겸손한 말과 후한 폐백을 아끼지 마시고 초나라에 보내어 중원의 제후들을 규합하도록 도와 달라고 하면 초나라는 틀림없이 허락할 것입니다. 초나라의 힘을 빌려 제후들을 모이게 한 후에 다시 제후들과 힘을 합쳐 초나라를 제압한다면, 이것은 한때 임시변통을 할 수 있는 계책입니다.” 했다.
公子目夷又諫曰:「楚有諸侯,安肯與我?我求諸侯於楚,楚安肯下我?恐爭端從此開矣!」襄公不以為然。即命公子蕩以厚賂如楚,求見楚成王。成王問其來意,許以明年之春,相會於鹿上之地。公子蕩歸報襄公,襄公曰:「鹿上齊地,不可不聞之齊侯。」復遣公子蕩如齊修聘,述楚王期會之事。齊孝公亦許之。時宋襄公之十一年,乃周襄王之十二年也。次年春正月,宋襄公先至鹿上,築盟壇以待齊楚之君。二月初旬,齊孝公始至。襄公自負有納孝公之功,相見之間,頗有德色。孝公感宋之德,亦頗盡地主之禮。又二十餘日,楚成王方到。
공자 목이가 다시 간하기를, “초나라가 무슨 이유로 우리를 위해서 제후들을 불러 모이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초나라의 힘을 빌려 제후들을 모이게 한다지만 초나라가 무슨 까닭으로 우리를 위해 힘써 주겠습니까? 이 일이 초나라와의 전쟁을 불러들이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했다. 그러나 송양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즉시 공자 탕에게 명하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초나라에 가서 초성왕을 알현하게 했다. 초성왕은 온 뜻을 묻더니 다음 해 봄에 녹상(鹿上)의 땅에서 회맹을 하기로 허락했다. 공자 탕이 돌아와 보고하자 송양공이 말하기를, “녹상(鹿上)은 제나라의 땅이니 제나라 군주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하고, 다시 공자 탕을 제나라에 수호 사절로 보내 초왕과 약속한 회맹의 일을 설명했다. 제효공 역시 허락했다. 그때가 송양공 11년으로 곧 주양왕 12년이었다. 다음 해 봄 정월에 송양공이 먼저 녹상에 이르러 회맹을 할 단을 쌓고 제나라와 초나라의 군주들을 기다렸다. 2월 초순에 제효공이 도착했다. 송양공은 제효공을 제나라의 군주 자리에 앉힌 공이 있음을 자부하여 상견례를 올릴 때 얼굴에 자못 자랑하는 기색이 있었다. 제효공도 역시 송양공의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여 녹상의 땅 주인으로서 예를 다했다. 다시 20여 일이 지나 초성왕이 도착했다.
宋齊二君接見之間,以爵為序。楚雖僭王號,實是子爵。宋公為首,齊侯次之,楚子又次之。這是宋襄公定的位次。至期,共登鹿上之壇,襄公毅然以主盟自居,先執牛耳,並不謙讓。楚成王心中不悅,勉強受歃。襄公拱手言曰:「茲父忝先代之後,作賓王家,不自揣德薄力微,竊欲修舉盟會之政。恐人心不肅,欲借重二君之餘威,以合諸侯於敝邑之盂地,以秋八月為期。若君不棄,倡率諸侯,徼惠於盟,寡人願世敦兄弟之好。自殷先王以下,咸拜君之賜,豈獨寡人乎?」齊孝公拱手以讓楚成王,成王亦拱手以讓孝公,二君互相推讓,良久不決。
송나라와 제나라 두 나라의 군주가 초성왕과 만나 작위에 따라 순서를 정했다. 초나라가 비록 왕호를 참칭하고 있지만 실은 그의 작위는 자작(子爵)이었기 때문에 공작인 송양공이 맨 앞에 서고, 후작인 제효공이 다음에 섰으며, 자작인 초왕이 그 다음에 섰다. 그것은 송양공이 정한 자리 순서였다. 회맹할 날짜가 되자 함께 녹상의 단에 올라가니, 송양공이 당당히 나서서 회맹을 주재하고 자기가 먼저 소머리의 귀를 잡으면서 전혀 겸양의 뜻을 보이지 않았다. 초성왕이 마음속으로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억지로 희생의 피를 입술에 발랐다. 송양공이 두 손을 맞잡고 말하기를, “자보(송양공의 이름)가 황공하게도 선대 이후에 주나라 왕실로부터 손님으로서 예우(禮遇)를 받아 스스로 덕이 얕고 힘이 없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크게 맹회를 열어 천하에 이바지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엄숙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두 군주의 무거운 위세를 빌려 제후들을 금년 가을 8월에 우리나라의 우(盂)땅에서 불러 회맹을 모임을 가질까 합니다. 만약에 군주들께서 이 제안을 버리지 않으신다면, 앞장서서 제후들을 인솔하여 회맹에 참여하신다면 과인은 원컨대 대대로 형제와 같은 돈독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겠습니다. 은(殷)나라 선왕 이래 주나라 무왕의 은혜를 입은 것은 어찌 과인 혼자만이겠습니까?” 했다. (송양공의 제안에) 제효공이 손을 맞잡고 초성왕에게 (언질을) 양보하니, 초성왕도 또한 손을 맞잡고 제효공에게 양보했다. 두 군주가 서로 밀며 양보하니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襄公曰:「二君若不棄寡人,請同署之。」乃出徵會之牘,不送齊侯,卻先送楚成王求署。孝公心中亦懷怏怏。楚成王舉目觀覽,牘中敘合諸侯修會盟之意,效齊桓公衣裳之會,不以兵車。牘尾宋公先已署名。楚成王暗暗含笑,謂襄公曰:「諸侯君自能致,何必寡人?」襄公曰:「鄭許久在君之宇下,而陳蔡近者復受盟於齊,非乞君之靈,懼有異同。寡人是以借重於上國。」楚成王曰:「然則齊君當署,次及寡人可也。」孝公曰:「寡人於宋,猶宇下也,所難致者,上國之威令耳。」楚王笑而署名,以筆授孝公。
송양공이 말하기를, “두 분 군주들께서 만약 저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청컨대 함께 서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하고, 송양공이 대회의 취지를 쓴목간을 가져오게 하여 제효공 앞엔 내놓지 않고 먼저 초성왕에게 서명하기를 청했다. 제효공은 마음속으로 역시 불쾌하게 생각했다. 초성왕이 눈을 들어 양공이 건네준 목간을 살펴보니, 목간에는 제후들이 회맹을 맺는 뜻을 서술하고, 제환공의 의상지회(衣裳之會)를 본받아 무기와 전차는 버리고 참석해 달라고 했다. 목간 끝에 송양공이 먼저 서명을 했다. 초성왕이 마음속으로 비웃으며 송양공에게 말하기를, “군주께서 직접 제후들을 불러 참석시키면 될 일인데 하필이면 과인에게 서명하라고 하십니까?” 하니, 송양공이 말하기를, “정나라와 허나라는 군주의 휘하에 있은 지 오래고,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는 요즘에 이르러 다시 제나라와 동맹을 맺었으니 두 분 군주에게 청하지 않고는 제후들이 회맹에 오지 않을까 걱정되어 이렇게 상국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했다. 초성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제효공께서 마땅히 서명을 하고, 다음에 과인이 하겠습니다.” 했다. 제효공이 말하기를, “과인도 송나라 휘하에 있어 상국의 위령을 어려워합니다.” 했다. 초성왕이 웃으면서 서명하고, 붓을 효공에게 주었다.
孝公曰:「有楚不必有齊。寡人流離萬死之餘,幸社稷不隕,得從末歃為榮,何足重輕,而褻此簡牘為耶?」堅不肯署。論齊孝公心事,卻是怪宋襄公先送楚王求署,識透他重楚輕齊,所以不署。宋襄公自負有恩於齊,卻認孝公是衷腸之語,遂收牘而藏之。三君於鹿上又敘數日,丁寧而別。髯仙有詩嘆曰:「諸侯原自屬中華,何用紛紛乞楚家?錯認同根成一樹,誰知各自有丫叉?」楚成王既歸,述其事於令尹子文。子文曰:「宋君狂甚!吾王何以徵會許之?」楚王笑曰:「寡人欲主中華之政久矣,恨不得其便耳。今宋公倡衣裳之會,寡人因之以合諸侯,不亦可乎?」
제효공이 말하기를, “초나라가 서명을 했으니 제나라는 서명을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과인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아서 사직을 보존했습니다. 오늘날 회맹에 참가한 것만도 영광인데, 어찌 제나라가 무겁게 되었다고 만족하여 이 목간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하고, 굳이 서명하지 않았다. 효공의 심사를 말하자면, 송양공이 초성왕에게 먼저 목간을 내밀어 서명을 청한 행위는, 양공이 초나라는 중하게 여기고 제나라는 가볍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목간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양공은 자기가 제나라에 은혜를 베풀었다고 자부하여 효공이 진심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목간을 거두어 보관했다. 세 나라의 군주가 녹상(鹿上)의 땅에서 다시 며칠을 지낸 후에 헤어졌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한탄하기를, “제후들은 원래 중국에 속한 나라이거늘, 어찌하여 달려가 초나라에 머리를 숙였는가? 오해한 초나라가 같은 뿌리의 한 나무라고 생각하여, 후에 편을 나누어 싸우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했다. 초성왕이 귀국하여 영윤 자문(子文)에게 상세하게 설명하니, 자문이 말하기를, “송양공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회맹 문서에 서명하셨습니까?” 하니, 초성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과인은 중원의 정치를 주관하고자 한 지 오래이나 아직 그 방편을 얻지 못한 것이 한이었습니다. 지금 송양공이 의상지회(依裳之會)를 열려고 하니, 과인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제후들을 규합할 수 있으니 이것 또한 바라던 바가 아니겠습니까?” 했다.
大夫成得臣進曰:「宋公為人好名而無實,輕信而寡謀,若伏甲以劫之,其人可虜也。」楚王曰:「寡人意正如此。」子文曰:「許人以會而復劫之,人謂楚無信矣,何以服諸侯?」得臣曰:「宋喜於主盟,必有傲諸侯之心。諸侯未習宋政,莫之與也。劫之以示威,劫而釋之,又可以示德。諸侯恥宋之無能,不歸楚,將誰歸乎?夫拘小信而喪大功,非策也。」子文奏曰:「子玉之計,非臣所及。」楚王乃使成得臣鬥勃二人為將,各選勇士五百人,操演聽令,預定劫盟之計。不必詳說,下文便見。
대부 성득신(成得臣)이 나와서 말하기를, “송양공의 사람됨이 허명을 쫓고 실익이 없으며 사람을 너무 가볍게 믿고 지혜가 부족합니다. 만약 복병을 숨기고 덮치면 쉽게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하니, 초성왕이 말하기를, “그 말이 과인의 뜻과 같다.” 했다. 자문이 말하기를, “회맹을 하기로 허락해 놓고 다시 습격하면 사람들이 초나라는 신의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어찌 제후들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성득신이 말하기를, “송양공은 회맹을 주재하는 일을 즐겨 하니, 이것은 반드시 제후들을 얕보는 오만한 마음에서입니다. 제후들은 맹주로써 행세하는 송양공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회맹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송양공을 습격하여 초나라의 위엄을 보여주고 나서 석방한다면 또한 초나라의 덕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제후들은 송양공의 무능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니, 초나라에 복종하지 않고 누구를 복종하겠습니까? 무릇 작은 신의에 집착하여 큰 공을 놓치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했다. 자문이 아뢰기를, “자옥(子玉 ; 성득신의 자)의 계책은 훌륭하여 신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했다. 초성왕이 즉시 성득신과 투발(鬪勃) 두 사람을 장수로 삼아 각기 용사 500명씩을 선발하여 훈련을 시켜 미리 회맹을 습격할 계책을 정했다. 자세히 말할 필요도 없이 다음에서 곧 보게 될 것이다.
且說,宋襄公歸自鹿上,欣然有喜色,謂公子目夷曰:「楚已許我諸侯矣。」目夷諫曰:「楚,蠻夷也,其心不測。君得其口,未得其心。臣恐君之見欺也。」襄公曰:「子魚太多心了。寡人以忠信待人,人其忍欺寡人哉?」遂不聽目夷之言,傳檄征會。先遣人於盂地築起壇場,增修公館,務極華麗。倉場中儲積芻糧,以待各國軍馬食費。凡獻享犒勞之儀,一一從厚,無不預備。至秋七月,宋襄公命乘車赴會。目夷又諫曰:「楚強而無義,請以兵車往。」襄公曰:「寡人與諸侯約為『衣裳之會』若用兵車,自我約之,自我墮之,異日無以示信於諸侯矣。」
한편, 송양공은 녹상에서 귀국하여 얼굴에 기쁜 기색을 띠고 공자 목이에게 말하기를, “초나라가 이미 우리를 위해서 제후들을 회맹에 불러 주기로 약속 했습니다.” 하니, 목이가 간하기를, “초나라는 남쪽 오랑캐라 그 마음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주군께서 입으로 허락을 얻었겠지만, 마음은 얻지 못했습니다. 신은 주군께서 속임을 당할까 걱정됩니다.” 했다. 송양공이 말하기를, “자어(子魚 ; 목이의 저)는 너무 소심합니다. 과인이 충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는데 사람들이 차마 나를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목이의 말을 듣지 않고, 격문을 써서 회맹을 연다고 제후들에게 보냈다. 먼저 사람들을 우(盂) 땅에 보내 제단을 쌓고, 공관을 수리하고 증축했는데 극히 화려하게 꾸몄다. 창고에는 식량과 목초를 가득 채워서 각국의 군사와 말이 먹도록 대비했다. 모든 것은 각국의 제후들과 수행원들을 위하여 잔치를 열어 접대하기 위해서였으며, 하나같이 모두 후하게 하여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해 가을 7월이 되자 송양공이 회맹 장소로 가기 위해 수레를 준비하라고 명했다. 목이가 다시 간하기를, “초나라는 세력이 강하고 신의가 없습니다. 청컨대 군사와 전차를 대동하고 가십시오.” 하니, 송양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제후들에게 ‘의상지회’로 약속하고, 만약 군사를 끌고 간다면 내가 스스로 약속하고 내가 스스로 버리는 것이니, 훗날 제후에게 믿음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오.” 했다.
目夷曰:「君以乘車全信,臣請伏兵車百乘於三里之外,以備緩急何如?」襄公曰:「子用兵車,與寡人用之何異?必不可!」臨行之際,襄公又恐目夷在國起兵接應,失了他信義,遂要目夷同往。目夷曰:「臣亦放心不下,也要同去。」於是君臣同至會所。楚、陳、蔡、許、曹、鄭六國之君,如期而至。惟齊孝公心懷怏怏,魯僖公未與楚通,二君不到。襄公使候人迎接六國諸侯,分館安歇,回報:「都用乘車。楚王侍從雖眾,亦是乘車。」襄公曰:「吾知楚不欺吾也!」
목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주군께서는 수레를 타고 가셔서 신의를 지키십시오. 저는 전차 100대를 몰고 회맹의 장소에서 3리 떨어진 곳에 매복하고 있다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송양공이 말하기를, “그대가 군사를 데리고 가는 것이나 내가 직접 데리고 가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절대 불가합니다.” 했다. 출발할 때가 되자 송양공은 다시 목이가 나라 안의 군사를 일으켜 자기의 신의를 잃게 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그를 회맹장에 데려가려고 했다. 목이가 말하기를, “신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동행하고자 합니다.” 했다. 이에 송나라는 군주와 신하가 같이 회맹에 참가하게 되었다. 초(楚)나라, 진(陳)나라, 채(蔡)나라, 허(許)나라, 조(曹)나라, 정(鄭)나라 등의 여섯 나라의 군주가 기일에 맞추어 이르렀다. 다만 제효공은 마음이 풀리지 않았고, 노희공은 아직 초나라와 통호를 하지 않아서 두 군주는 회맹에 참석하지 않았다. 송양공이 접대관을 시켜 여섯 나라의 군주들을 영접하게 하고 공관에 나누어 들게 하여 쉬게 했다. 접대관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여섯 나라의 제후들은 모두가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특히 초왕은 매우 많은 시종을 데리고 왔는데 역시 모두가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했다. 송양공이 말하기를, “초왕이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했다.
太史卜盟日之吉,襄公命傳知各國。先數日,預派定壇上執事人等。是早五鼓,壇之上下,皆設庭燎,照耀如同白日。壇之旁,另有憩息之所,襄公先往以待。陳穆公穀,蔡莊公甲午,鄭文公捷,許僖公業,曹共公襄五位諸侯,陸續而至。伺侯良久,天色將明,楚成王熊惲方到。襄公且循地主之禮,揖讓了一番,分左右兩階登壇。右階賓登,眾諸侯不敢僭楚成王,讓之居首。成得臣鬥勃二將相隨,眾諸侯亦各有從行之臣。不必細說。左階主登,單只宋襄公及公子目夷君臣二人。
태사가 회맹의 의식을 행할 길일을 점치자, 송양공은 각국에 전하여 알렸다. 회맹의 의식을 거행할 날보다 며칠 먼저 송양공이 미리 단상에서 의식을 집행할 사람 등을 정하게 보냈다. 드디어 회맹의 날 새벽 5경(4시경)에 단의 위와 아래에 횃불을 밝혀서 대낮처럼 환하게 했다. 단의 옆에는 별도로 휴식 장소를 마련하여 송양공이 먼저 가서 대기했다. 이어서 진목공(陳穆公) 곡(縠), 채장공(蔡庄公) 갑오(甲午), 정문공(鄭文公) 첩(捷), 허희공(許僖公) 업(業), 조공공(曹共公) 양(襄) 등 다섯 사람의 제후들이 차례로 회맹장에 도착했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날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초성왕 웅운(熊惲)이 비로소 회맹장에 당도했다. 송양공이 회맹이 열리는 땅 주인의 예로써 양손을 맞잡아 한번 읍을 했다. 이어서 제후들은 좌우로 나뉘어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오른쪽 계단으로는 손님인 여러 제후가 올라가는데 감히 초성왕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그에게 앞장서서 올라가도록 양보했다. 성득신과 투발 두 장군이 뒤따라 올라가고, 여러 제후도 역시 데리고 온 신하들과 같이 올라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왼쪽 계단으로는 주인이 올라가는데, 단지 송양공과 공자 목이 두 사람이 올랐다.
方纔升階之時,論個賓主,既登盟壇之上,陳牲歃血,要天矢日,列名載書,便要推盟主為尊了。宋襄公指望楚王開口,以目視之。楚王低頭不語。陳蔡諸國,面面相覷,莫敢先發。襄公忍不往了,乃昂然而出曰:「今日之舉,寡人欲修先伯主齊桓公故業,尊王安民,息兵罷戰,與天下同享太平之福,諸君以為何如?」諸侯尚未答應,楚王挺身而前曰:「君言甚善!但不知主盟今屬何人?」襄公曰:「有功論功,無功論爵,更有何言!」楚王曰:「寡人冒爵為王久矣。宋雖上公,難列王前,寡人告罪占先了。」便立在第一個位次。
바야흐로 계단을 다 올라서 제후들은 손님과 주인의 신분을 따져 회맹의 단 위로 올라가 희생을 차려놓고 피를 입술에 바르고 하늘과 해에 맹세했다. 이어서 제후들의 이름을 죽간에 쓴 다음 드디어 맹주를 뽑아 높여야 할 순서가 되었다. 송양공은 초성왕이 입을 열어 자기를 지명하기를 기다리며 쳐다보았지만, 초왕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나라와 채나라 군주들도 얼굴만 서로 쳐다볼 뿐 감히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송양공이 더 참지 못하고 머리를 꼿꼿이 들고는 나아가 말하기를, “금일의 행사는 과인이 죽은 제환공이 이룩한 패업을 이어받아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며, 군사들을 쉬게 하여 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천하의 제후들과 함께 태평성대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여러 군주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하니, 제후들이 미처 답하기 전에 초왕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군주의 말씀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단지 오늘 회맹의 맹주는 누가 되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송양공이 말하기를, “공이 있으면 그 공의 많고 적음에 따라 맹주를 세우고 공이 없으면 작위의 높고 낮음을 따져 세우면 되지 무슨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하니, 초성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작위를 왕으로 한지 매우 오래되었소. 송양공은 작위가 비록 상공에 이르지만 왕의 대열에 낄 수는 없소. 미안하지만 작위가 제일 높은 과인이 맹주가 되기로 하겠소!” 하고, 제후들의 맨 앞줄에 와서 섰다.
目夷扯襄公之袖,欲其權且忍耐,再作區處。襄公把個盟主捏在掌中,臨時變卦,如何不惱。包著一肚子氣,不免疾言遽色,謂楚王曰:「寡人徼福先代,忝為上公,天子亦待以賓客之禮。君言冒爵,乃僭號也。奈何以假王而壓真公乎?」楚王曰:「寡人既是假王,誰教你請寡人來此?」襄公曰:「君之至此,亦是鹿上先有成議,非寡人之謾約也。」成得臣在旁大喝曰:「今日之事,只問眾諸侯,為楚來乎?為宋來乎?」陳蔡各國,平素畏服於楚,齊聲曰:「吾等實奉楚命,不敢不至。」楚王呵呵大笑曰:「宋君更有何說?」
목이가 양공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그에게 잠시 참았다가 다시 대책을 세우자고 했다. 송양공은 맹주의 자리를 손바닥 안에 잡고 있다가 형세가 돌변하여 날아가 버렸다고 생각하니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가슴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자 얼굴색이 변하더니 큰 소리로 초성왕에게 말하기를, “과인이 선대로부터 복을 물려받아 상공의 대열에 끼게 되는 과분한 대접을 받아 왔으며, 주나라 천자도 역시 우리 송나라를 손님의 예를 갖추어 대하고 있습니다. 군주의 작위가 제일 높다고 하나, 그것은 분수에 넘치는 칭호입니다. 어찌 가짜 왕호가 진짜 상공을 누를 수 있습니까?” 하니, 초성왕이 말하기를, “내가 가짜 왕이라면 누가 그대를 시켜 과인을 청하여 이곳까지 오게 했습니까?” 했다. 송양공이 말하기를, “군주가 여기까지 온 것은 또한 지난번 녹상의 회맹에서 논한 바에 따랐을 뿐이지 과인이 마음대로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했다. 성득신이 초왕 곁에 있다가 큰소리로 말하기를, “오늘의 일을 여러 제후에게 한번 물어봅시다. 여러 제후분은 초나라를 위해 오셨습니까? 아니면 송나라를 위해 오셨습니까?” 하니, 평소에 초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등 각 나라 군주는 입을 모아 한목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는 사실 초나라의 명을 받들어 감히 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했다. 초성왕이 껄껄 웃으며 말하기를, “송군께서는 달리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했다.
襄公見不是頭,欲待與他講理,他又不管理之長短,欲作脫身之計,又無片甲相護,正在躊躇。只見成得臣鬥勃卸去禮服,內穿重鎧,腰間各插小紅旗一面,將旗向壇下一招,那跟隨楚王人眾,何止千人,一個個俱脫衣露甲,手執暗器,如蜂攢蟻聚,飛奔上壇。各國諸侯,俱嚇得魂不附體。成得臣先把宋襄公兩袖緊緊捻定,同鬥勃指揮眾甲士,擄掠壇上所陳設玉帛器皿之類。一班執事,亂竄奔逃。宋襄公見公子目夷緊隨在旁,低聲謂曰:「悔不聽子言,以至如此,速歸守國,勿以寡人為念!」目夷料想跟隨無益,乃乘亂逃回。
송양공은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제후들과 사리를 따지려고 해도 그들은 사리의 옳고 그름에 관심이 없었고, 거기에서 몸을 빼어 벗어나려고 해도 그것 또한 보호해 줄 호위병 한 명도 없어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성득신과 투발이 예복을 벗어 던지고 안에 껴입고 있던 갑옷을 드러냈다. 허리에 꽂고 있던 작은 붉은 기를 꺼내어 제단 아래를 향하여 몇 번 흔들어 부르니, 초성왕을 따라왔던 천 명도 넘는 무리가 모두 겉옷을 벗고 갑옷을 드러냈다. 손에는 숨겨 두었던 무기를 들고 벌떼처럼 단 위로 뛰어 올라왔다. 각국의 제후들은 모두가 놀라서 혼비백산했다. 성득신이 먼저 송양공이 움직이지 못하게 두 소매를 단단히 붙들었다. 투발은 여러 무장병을 지휘하여 단상에 진설한 옥과 비단과 그릇 따위를 약탈했다. 송나라의 일반 관리들은 어지러이 달아났다. 송양공은 자기 곁에 바싹 붙어 따라다니는 공자 목이를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기를, “내가 경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이 된 것을 후회합니다. 과인은 염려하지 말고 속히 돌아가서 나라를 지키십시오.” 했다. 목이가 송양공의 곁에 따라다녀 봐야 방법이 없음을 알고 혼란한 틈을 타서 도망쳐 돌아갔다.
不知宋襄公如何脫身,且看下回分解。
송양공이 어떻게 벗어날지 알 수 없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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