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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평양 대동강변 옹기시장과 돛배
옹기배의 시작은 언제부터인지 고증되지 않고 마을 입구에 고려옹기라는 표지판이 있을 뿐 마을 원로들도 옹기배의 내력을 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근래에 남아있던 마지막 옹기 돛단배의 형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식 선체를 채용하여 옹기의 적재와 항해에 적합하게 개량된 무동력 돛단배로 1988년까지 남해안을 누비고 다녔다. 흔히 말하는 황포돛단배의 범주에 속하는 토속 해운업에 종사하는 화물선이며 장사배이다.
즉, 옹기배의 표본은 여수와 통영 지방의 쾌속 돛단배인 ‘우닷시’ 라는 일본형 선체를 모델로 옹기적재를 위한 공간을 크게 만든 운반선으로 개조한 것이다. 이는 돛 부분은 전통한선의 규범을 따랐지만 선체는 일본화 하여 수기(삼)나무와 소나무를 병용하였고, 배가 길고 가벼워서 속도도 빨랐다.
* 1933년에 발간된 언더우드박사의 Korean Boats and Ships/P-15:
요즘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배들은 조선과 일본 배들의 선체나 돛/돛대의 좋은 부분을 합쳐서 만들고 돛은 완전히 조선식 돛을 사용한다. 원문: The favorite craft of today attempts to combine the good features of the japanese and Korean hulls and rig this with purely Korean sails.
* 근대 식민지 사업풍경(사진으로 보는 1910년대의 한반도): 원제 ‘임시은사금수산사업사진첩’ 편저자 김 민영교수
1910년경 일본의 식민지 정책 일환으로 일왕 은사금이란 자금으로 일본식 조선(造船)사업을 적극 지원하여 그 과정을 이수하면 일본식 배목수 연장 1벌을 수여하였다. 이런 이유로 한선은 급격히 일본화 되었고 초기에는 돛까지 일본 돛을 채용하였으나 돛의 성능은 활대가 있는 한선의 돛이 월등히 우수하여 선체는 일본화 되었으나 돛은 여전히 한선의 돛으로 1988년 마지막 돛단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옹기배에는 화장(Cook), 웃동무(Deck Hand), 사공(Skipper)으로 이루어진 3명의 선원으로 구성된다. 옹기의 종류는 100개 정도로 나눌 수 있지만 배로 판매하는 옹기는 20여 종류의 크기가 서로 다른 1,000여점의 한굴(한가마)짜리 옹기를 싣고 출항하여 남해안의 각 도시의 항구와 섬의 포구를 다니면서 옹기를 판매했다. 일행비(1항차)의 항해와 판매 기간은 최소 15일에서 최대 3달까지 소요된다. 다른 배와 달리 자급자족의 선상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뱃머리로부터 투석칸(주방), 이물칸/이물장(이물대에서 허리대까지 화물창), 한 장(허리대에서 뒤골방장까지 화물창), 그리고 뒤골에 선원들의 잠자는 공간인 방장(Bunker)으로 구성되어있다.
1950년 이후에는 주로 한굴짜리 배가 만들어졌으며 이를 ‘굵은 배’라고 불렀다. 옹기배는 일반적으로 돛대는 3개, 길이는 약 15-20미터로 10톤 크기였다. 간혹 2굴짜리 배와 그의 1/4인 반굴짜리 배도 있었다. 이후 동력선이 보편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을 이용해서도 자유자제로 돛단배를 조정에 익숙하던 노사공(老沙工)들은 비싼 연료와 번잡한 기계부품들로 인해 마지막까지 무동력 돛단배로 옹기를 운반 판매를 고수하였다. 옹기 돛단배는 좁은 범위에서는 ‘옹기판매 장사배’ 라고 하겠지만 옹기이외에 나락과 장작, 소주 독아지, 어획물, 소금, 그리고 섬지방 곡물들도 운송하였으니 큰 범위에서 토속 해운업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토속 해운업, 옹기배
옹기배의 항로:
칠량 옹기 배의 활동 범위는 제주를 포함한 남해안 전체를 대상으로 주간항해를 원칙으로 하였다. 이는 짧은 거리의 포구를 방문하여도 어디서든지 포구와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옹기를 판매 할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입항 항구의 결정은 돈을 찾아다녔고, 이런 정보는 지나다니는 배나 혹은 현지 주민들로부터 들었다.
예를 들어 고기가 많이 잡히거나 면화 혹은 쌀 공판하는 곳을 찾아 다녔다. 결국 이런 포구에 돈이 돌고 또한 이런 포구를 잘 찾아 판매를 잘하는 것이 옹기배 사공의 덕목이기도 했다.
부산 옹기시장 형성과 항로 (1950-1970년)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산에 피란민들이 몰려 옹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칠량 옹기 배들(해상상인)은 이런 찬스를 놓치지 않았고 이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쉼 없이 항해를 하였다. 당시 부산까지 1항차는 15일이며, 왕복 10일간의 항해를 제외하면 5일 만에 천여 개의 옹기를 모두 판매할 수 있었다.
봉황리-마량-고흥 나려도 (1박)-여수 화양면-여수항(2박)-남해군 사량도 메주목- 판두목 통영(3박)-거제도 두퉁골(신현)(4박)-흐렁바다(낙동강하류)-다대포-자갈치도착(5일 소요)
제주 옹기시장 개척과 항로 (1969-1985년)
제주도 옹기시장의 개척-1969년 이수성 사공이 청산도에서 여서도 가는 길에 풍랑으로 제주도로 표류함. 이때까지는 무동력선이 대양을 건너야 하는 제주길은 두려워 엄두를 내지 않았다. 우연한 표류로 인하여 품질 좋은 칠량옹기는 뜻밖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당시 제주인들은 옹기배가 입항하면 두렁두렁 무더기로 매입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일항비(1항차) 평균 3곱장사를 하였다.
제주항로 개척자: 선주 김선식, 사공 이수성, 웃동무 김원중, 화장 신길남
봉황리-가우도 왼쪽 통과-고마도와 사후도-완도-청산도 도청항(쉬엄마치)-여호섬-제주도(화북, 신촌, 조천, 오조리, 성산포, 구귀포, 산지포, 애월항)에 도달
* 1679년/이증의 남사일록의 제주항로:
강진 남당포-가우도-비래도-복도-사후도-가리포-백일도-사서도-제주 화북
▲ 도부상: 1903년 부산 근교
제주에서 칠량 옹기의 인기는 1985년까지 유지되었지만 플라스틱 용기와 집집마다 수도물 공급과 옹기의 표면에 자연 유약인 잿물이 아닌 반짝거리게 하는 납성분인 광명단 유약사건으로 옹기의 시장은 치명타를 입었고 옹기는 우리 생활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 밖에 항로는 완도, 고흥, 여수, 남해, 삼천포, 통영, 거제도, 마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