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젊은 양치기가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다
밀라래빠 전기에 보면 ‘룩찌래빠’ 라는 분이 있습니다. ‘룩’은 양이라는 말입니다. 두 명의 양치기가 있었는데 한 명은 나이가 많았고 한 명은 젊은 양치기였습니다. 두 명의 양치기가 양을 산에 올려다 놓고 밀라래빠가 계신 동굴에 놀러 갔습니다. 두 분이 가보니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밀라레빠 혼자 계셨습니다.
그래서 양치기가 밀라래빠에게
‘밀라래빠, 당신의 친구는 누구예요?’ 하고 물으니
‘나는 보리심이라는 친구가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치기가
‘보리심이 어디 있는데요?’ 라고 물으니 밀라래빠는
‘8식에 있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8식의 집은 어디예요?’ 라고 양치기가 물으니 밀라래빠는
‘몸이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다시 양치기가
‘8식이 보리심이 그 안에 있는 거예요?’ 라고 물으니
‘그렇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노양치기가 별로 들을 것도 없다고 돌아가자고 하니 젊은 양치기가
‘아니예요, 좀 들어 봅시다’ 하면서 질문하고 듣기를 반복했습니다.
밀라래빠께서도 젊은 양치기에게 ‘너는 오늘 가서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고 내일 나에게 와서 이야기를 해보아라’ 하고 양치기를 보냈습니다.
젊은 양치기는 밤새도록 마음을 살폈습니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다가 와서 하는 말이
‘밀라래빠, 마음을 잡으려고 하니까 잡히지도 않고 가만히 두려고 하니까 가만히 있지 않고, 참 어렵습니다. 잡히지도 않는 것이 머물지도 않는 것이 마음을 찾는 것이 참 어렵네요. 죽을 때는 몸을 헌신짝 처럼 버리고 갈 것인데 그야말로 똥 닦은 돌처럼 (티벳에서는 들판에서 뒷일을 보는데 옛날에는 종이가 없어서 풀도 별로 없고 하니까 돌로 뒤를 닦았습니다. 뒤를 닦은 돌은 당연히 버려지는 것처럼) 버리고 갈 그 마음이 도대체 잡히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고 어렵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양치기가 밀라래빠께 와서
‘잡으니 잡히지 않고, 두니 머물지도 않고, 그리고 죽을 때는 우리 몸을 그야말로 똥돌 같이 버리고 갈 그 마음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그것이 바로 인무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네가 지금 본 그것이 인무아다. 자 이제 너는 네 자신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주위에 있는 일체 만법이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네가 이 세상의 실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니 네가 법무아를 알고 싶다면 내 옆에 12년을 있거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룩찌래빠, 양치기래빠가 12년 간 밀라래빠 곁에서 밀라레빠를 시봉했습니다. 그는 좋은 수행자가 되었으며 밀라래빠의 핵심적인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보고 찾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큰 성취자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주 강한 뿔, 아주 세고 딱딱한 뿔이나 돌을 선정력으로 굽게 할 수는 있을지라도 마음을 다스리기는 매우 어렵다’ 라고 하셨습니다.
밀라래빠의 전기에 그렇게도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저 들판에 있는 고릴라나 호랑이는 내 마음으로 오게 만들 수 있지만, 내가 가려고 하는 내 마음을 오게 하는 것이 더 어렵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다스리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렵다고해서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완전하게 다스릴 수 있는데 그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무엇에 달려있습니까?
여러분 각자의 노력과 고행 난행에 따라 마음을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분이 좋을 때는 보살입니다. 무언가가 잘 돌아가고, 자기 뜻대로 되고, 자기 생각대로 되면 기분이 좋아서 보살처럼 됩니다. 자기 마음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고 기분 좋은 어떠한 업의 힘, 업의 마음, 업력의 힘, 업심에 의해서 끌려가는 것입니다.
업심에 좋은 일이 생길 때는 기분이 좋은데,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고 뜻대로 안되고 뭔가 자기 생각대로 안되면 독사가 무언가를 찌를 때처럼 샤사삭 올라와서 바로 딱 선다는 것입니다.(대중 웃음)
그런 마음이 꼭 힘줄 같습니다. 짐승들 몸의 힘줄이 불에 닿으면 그 힘줄이 쫙 오그라들면서 새까맣게 타서 오그라들어 있는데 평상시 우리들 마음이 그렇습니다.
원래 사람이 그렇고 저도 그렇습니다. 뭔가 기분이 안 좋고 몸도 불편하고 힘들 때는 누가 한 마디 하면 마음은 바로 독사처럼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기분이 좋고 몸도 좋고 문제도 없고 그러면 아주 보살이 되어서 ‘차 마셔, 차 마셔, 뭐 줄까? 뭐 줄까? 하면서 옆에 앉아봐’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화를 내거나 또는 좋을 때가 있고 그 두 가지가 아닌 때는 자는 건지, 조는 건지, 수행을 하는 것인지 그렇게 앉아있는 자신을 볼 때가 있습니다.(대중 웃음)
마음을 조복하는가 못하는가에 따라서 수행자로 볼 수 있는가 없는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마음을 조복한 상태, 아집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수행자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는 저울이 됩니다.
수행자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아집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이고,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조복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수행을 하고 공부를 많이 하고 진언을 많이 했다고 하면서도 아집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헛이름 뿐입니다. 결국 수행이라고 하는 것의 핵심은 자신의 마음을 조복받는 것입니다.
아집, 자신의 견해나 욕심 이런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수행입니다.
마음이 ‘시장에 가자’ 하면 일어나서 신발을 신고 시장에 가면 안됩니다. ‘시장에 가자’ 하면 ‘시장을 왜 가야 되나’ 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살펴보고 쓸데없는 일들, 굳이 안해도 되는 일들은 좀 내려놓고 계속 명상을 하고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일상적으로 뛰어다니는 오육식에 자신의 근본 마음이 끌려 다니도록 하지 말고
자신의 근본 마음이 자신의 오육식을 자유자재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수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여법해 보이고 조용해 보이거나 옷을 잘 입고 멋있고 내지는 점잖고 하는 것으로써 수행자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출처] 불교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3) (캄따시링 수행자의 길) | 작성자 khamtashi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