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5장 길고도 처절했던 공산주의와의 투쟁
한국에서 통일교가 초창기에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반공산주의 운동이 일조를 했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종교를 인정치 않기 때문에 문선명은 한국과 일본, 미국, 남미에서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큰 힘을 쏟았다. 또한 소련과 북한을 방문해 공산주의 신봉자들을 만나 자유・민주의 이념을 받아들일 것을 설득하기도 했다.
1. 한국과 미국, 일본에서 전개된 승공운동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반대이다. 민주세계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공산세계는 독재체제다. 공산주의는 종교의 자유를 부정한다. 왜냐하면 세계 정복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종교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5년이 훨씬 지난 1960년대에 들어서도 세계는 여전히 갈등의 도가니였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서냉전은 더욱 격화 되었다.
북한에서 태어났고 한국전쟁 시기에 흥남 감옥에 수감되었던 문선명은 공산주의의 모순과 악마성을 잘 알기에 전 세계적으로 승공운동을 펼쳐나갔다. 우선 1960년대부터 전 국민, 특히 경찰 간부를 대상으로 사상교육을 시작했다.
이후 승공계몽운동은 국내 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오늘날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 국가들이 민주국가로 전환되고, 중국과 베트남이 개방되어 세계가 40~50년 전보다 공산주의에 의한 전쟁 위험이 줄어든 바탕에는 국제승공연합의 목숨을 건 치열한 투쟁이 있었다.
1965년 11월 문선명은 각 도별로 반공계몽단을 만들도록 했다. 그 첫 번째는 강원도였다. 목표는 "공산주의 사상을 학술적으로 비판함으로써 그 사악한 진실을 전 국민에게 인식시키고 철저한 반공사상으로 무장해 반공대열에 참여시킨다"는 것이었다.
향후 전 세계를 변혁 시킨 승공운동의 작은 출발이었다. 이후 각 도에 계몽단이 만들어져 8개가 되자 이들을 하나로 통합해 국제적인 단체로 키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1968년 1월 13일 국제승공연합을 창립했다. 이는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선봉장 역할을 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문선명은 창립취지문을 통해 승공연합이 나아갈 길을 이렇게 밝혔다.
"조국근대화의 거보를 내디딘 우리 대한은 이제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눈앞에 두고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밖으로 자유우방들과 친선을 맺고 우리의 아름다운 역사와 조국의 진면목을 해외에 널리 알려 선양함과 동시에 안으로는 알찬 경제적 발전과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으로 내일의 꿈을 안고 오늘도 부단히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적화통일을 망상한 북괴집단은 오늘 이 시간에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남침의 기회를 노리며 조국의 번영을 유린하는 갖가지 만행을 자행하고 있다.
우리 승공연합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이상의 실현을 위한 새로운 승공 이념을 제시해 이를 전 국민에게 계몽하여 철저한 승공사상으로 무장케 함으로써 조국 통일에 이바지한다.
아울러 자유 아시아의 안보를 위한 아시아인의 단결을 호소함으로써 지구상에서 공산주의를 영원히 축출하고 진정한 평화와 행복, 자유와 이상세계 실현을 위해 국제승공연합을 창립한다."
또 2월에는 승공이론의 교과서와 같은 「새 공산주의 비판」을 발행했다. 통일원리를 기초로 공산주의 사상을 분석,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 이 책은 승공운동의 길잡이가 되었으며 곧 일본어판이 발간돼 일본에서도 선풍을 일으켰다.
4월에는 일본 지부가 창립되었고 5월에는 미국 지부가 세워졌으며 유럽과 남미, 아프리카로 뻗어나가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를 물리치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
우리나라에서 승공연합의 활동은 눈부셨다. 1970년 제1회 아시아 승공대회, 71년 여성승공대회, 1975년 구국세계대회, 1978년 세계승공대회, 1983년 미얀마 아웅산 사건 궐기대회, 1991년 승공무궁화회 창립 등으로 이어졌다. 경기도 구리 수택동 연수원에서 1970년 6월에 시작된 승공연수교육은 1989년까지 87만 명이 교육을 받아 우리나라 승공운동에서 가장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다.
문선명이 승공연합을 세계로 확대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것은 1965년 40개국 순회강연 때였다. 세계 각지를 순회강연하면서 "공산주의를 이대로 놔두면 세계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승공 전문가 47명을 일본으로 보낼 계획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문선명은 좌절하지 않고 일본 지도자들을 만나 "지금부터 우리는 여기 일본에서 반공운동을 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으며 마침내 1968년 4월 1일 일본 지부가 창립됐다.
1960년대에 일본 대학생들은 정치 이슈에 지극히 민간했다. 공산주의 동조자들이 캠퍼스를 지배했으며, 좌파 성향을 띤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감히 공산주의에 반박이라도 할라치면 거센 공격을 받았다.
당시 일본과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도 조약을 맺었다. 이러한 조약들은 일본의 대학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혼란의 배후에는 소련이 있었고 또 조총련에 의해 영향 받은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일본을 소련과 중국에 이어 세 번째 공산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일본의 조선대학교는 북한에 의해 설립된 대학으로 공산화 야욕을 수행하는 베이스캠프와 같았다.
이러한 위험천만한 불길 속에서 문선명은 일본 신도들을 대학가 현장에 보냈다. 이들 중에는 강한 신념과 실천력을 지닌 에리카와 야수에도 포함되었다.
문선명은 그때 공산주의의 불길을 잠재울 하늘의 챔피언이 필요했다. 에리카와는 22살의 처녀였다. 문선명은 그녀에게 "너는 조선대학교 앞에서 생명을 걸고 3년 동안 승공 연설을 해야 한다. 너는 총격을 당할 수도 있고, 트럭에 치일 수도 있다. 네가 가는 곳마다 죽음의 위협을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너는 매일 조선대학교에 가서 연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3년 동안 전단을 나누어주고 캠퍼스 앞에서 연설하며 반공을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는 동안 지옥과 같은 시련을 겪었다. 담뱃불로 지지는 사람도 있었으며, 혹독한 겨울에 양동이에 담긴 차가운 물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 한번은 그녀를 붙잡아 캠퍼스 근처에 흐르는 강에 던지기도 했다. 그런 일이 생길수록 그녀는 더 강해졌고 일본 전역에서 널리 존경받는 승공의 상징이 되었다.
그녀가 고군분투하며 승공 일선에서 일할 때 통일교 신도들 역시 한국과 일본에서 아주 분주했다. 한국과 일본 곳곳의 작은 시골 마을까지 홍보단을 파견했다. 또 일본의 대학 캠퍼스와 거리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했다.
그러자 서서히 일반 대중 뿐만 아니라 정부 관리들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69년 10월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첫 번째 국제승공대회를 열었으며 좌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 순간까지도 일본 공산화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일본 공산당에게 이 사건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승공운동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많은 일본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위대한 성과를 올렸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에서 미군의 패배로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되자 세계, 특히 아시아는 불안에 떨었다. 문선명은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야욕에 쐐기를 박고 조국을 사수하기 위해 구국세계대회를 열었다.
구국세계대회는 우리나라 국민들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승공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준 중요한 행사였다. 1975년 6월 7일 오후 3시 여의도굉장에서 열린 대회에는 61개국 1천여 명의 대표 등 120만 명이 참석해 승공의 염원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문선명은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주제로 "이 대회는 전 세계가 궐기하여 한국의 자유수호를 위한 자유인의 결의를 만천하에 과시하는 세계적 제전입니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적화로 야기된 급박한 조국의 정세 앞에서 안으로는 조국을 사수하려는 5천만 한국 국민을 단결 시키고, 밖으로는 세계인이 가야 할 방향과 지표를 세워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이후에도 승공연합은 그 본연의 사명을 잊지 않고 꾸준히 활동해 137개국에 지부를 세워 공산주의를 물리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일에 신명을 바쳤다.
문선명이 파견한 선교사들은 세계 각국으로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동시에 승공사상을 전파하는데도 앞장섰다. 그들은 유럽과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활동했으며 승공연합 지부는 거의 300개 도시에 이르렀다. 적화되어 가고 있던 남미에서 1980년대부터 카우사(CAUSA) 운동을 벌여 열띤 호응을 받은 것은 세계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공산주의를 이기기 위해서는 당시 올바른 언론이 필요했다. 공산주의의 실체를 정확히 알리고 선의의 평범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빠지기 않기 하기 위한 정론지가 필요했다.
이에 1976년 12월에 미국에서 「뉴스월드」를 창간해 1981년 대통령선거에서 레이건 후보가 당선되는데 큰 역활을 했다. 또 1982년 「워싱턴 타임스」를 창간해 레이건 대통령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레이건 독트린을 구축하는 핵심 역할도 했다.
레이건은 SDI 방위구상을 정책화시켜 소련의 붕괴를 이끌었다. 여기에는 아주 오래전 문선명이 뿌린 씨앗된 승공연합이 큰 힘이 되었다. 이처럼 세계 역사를 변혁시킨 국제승공연합은 1987년 창립한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과 함께 오늘날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