漂母飯信(표모반신)
‘빨래하는 아낙(漂母/표모)이 한신(韓信)에게 밥(飯)을 먹였다’라는 뜻으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열전(史記列傳) 중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서 유래하였다.
기원전 2세기 중국 초(楚)나라와 한(漢)나라가 자웅(雌雄)을 다투던 시절,
강소성(江蘇省) 회안현(淮安縣)의 회음(淮陰) 사람 한신은 건달처럼
남에게 빌붙어 살았기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회음의 남창(南昌) 정장(亭長, 나루터 관리하는 사람)의 집에서 밥을 얻어 먹었는데
몇 달이 지나자 정장의 아내가 한신을 귀찮게 생각하여 밥을 일찍 지어 먹고는
한신이 오면 밥이 없다고 푸대접하였고 이후 한신은 발길을 끊었다.
어느날 그가 성 아래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빨래하던 아낙 하나가 한신이 굶주린
것을 알고 수십 일 동안 밥을 주었다.
한신이 고마워하며 언젠가는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 하니 그 아낙은 화를 내며
사내대장부가 제힘으로 살아가지도 못하기에 가엾게 여겨 밥을 준 것인데
어찌 보답을 바라겠느냐고 말했다.
훗날 한신은 유방(劉邦)의 한(漢)나라에 가담하여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초왕(楚王) 항우(項羽)를 꺾고 회음후로 봉작되어 고향인 회음을 찾아갔을 때
전에 그에게 밥을 준 빨래하던 아낙에게는 천금(千金)을 주었고 남창의 정장에게는
일백전(一百錢)을 주면서 ‘그대는 소인이다. 남에게 은덕을 베풀다가
중도에서 그만두었기 때문이다’라고 꾸짖는 옹졸함을 보였다.
사가(史家) 사익재 이제현 (국립중앙박물관)
14세기 초 고려의 문신이었던 익재(益齋) 李齊賢(이제현, 1287-1367)은
당시 원(元)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에 가있던 충선왕(忠宣王)의 부름으로 연경에 가서
중국의 많은 문인, 학자들과 교유(交遊)하였고 세번에 걸쳐 중국 내륙을 여행하며 역사적인 장소를 방문하여 많은 시를 지었는데 한신의 일화가 있는 회음에 갔을 때 ‘회음표모분
(淮陰漂母墳, 회음의 빨래하는 아낙의 묘에서)’라는 다음과 같은 연작시(連作詩)를 썼다.
중한 선비가 가난하니 가련히 여겼을 뿐 어찌 한 술의 밥으로 천금을 바럈으랴
돌아와 도리어 남창장을 꾸짖었으니 왕손(王孫)이 반드시 표모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다
아낙은 오히려 영웅을 알아보고 한 번 보자 곤궁함을 은근히 위로했는데 스스로 어금니와 발톱 다 버리고 적국의 신하 되었으니 항왕(項王)의 눈 중동(重瞳)이라도 소용 없었네
여기서 중동(重瞳)은 한눈에 두개의 눈동자로 훌륭한 사람의 상을 의미한다.
이 시에서 이제현은 표모반신의 고사를 상기하며
한신이 표모의 심정도 헤아리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한신이 뛰어난 용병술의 지략가였지만 도리(道理)와 겸양의 미덕이
부족하다고 본 사마천(司馬遷)의 평가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한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가 적국 한나라의 유방에게 가게 해서 결국 자신을
망하게 한 초패왕 항우의 어리석음도 시에 포함하여 고대 중국 역사의 영웅이었던
두 사람의 부족했던 면을 이 시를 통하여 풍자하였다.
익재 이제현은 1323년 고려를 원나라의 속국으로 만들려 한 간신들의 매국 음모를
막아내었고 여러가지 개혁안등을 제시하는 등 고려말 어지러운 내외 정치 외교의
안정을 위해 큰 역할을 하였으며, 학문 연구와 성리학자를 양성하고
훌륭한 저술을 많이 남긴 대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