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김영운 - 하나님의 부르심 따라 - 1. 신앙배경
1 나의 고향은 황해도 해주이다. 1915년, 1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나는 유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16세에 가정적인 전통을 깨고 감리교회에 입교, 크리스천으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2 내가 크리스천이 될 무렵 이용도 목사의 순회 부흥집회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을 휩쓸고 있었는데, 나는 어린 나이었지만 그의 설교에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리하여 18~21세까지는 예수교회로 옮겼었다.
3 이때 나는 ‘네가 나를 찾은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찾았다’는 계시를 받았다. 나는 이때 무엇보다도 순수성을 생명같이 여기고 있었다. 18세가 되었을 때 스웨덴볼그, 씬다싱에 대한 서적에 심취하기도 했다. 나는 조숙했던 것이 사실이었고, 나름대로 강한 의욕을 갖고 탐구하는 생활을 했다.
4 해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교원 양성소에서 9개월간 교육을 받게 됐는데 그 이후부터 남을 가르치는 교사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 나는 소학교에서 1년 반 동안 시무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사랑주의’를 신조로 학생을 대했기 때문에 주위로부터 호평을 얻게 됐고, 그것을 계기로 숙망이던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됐다.
5 당시 내가 다니게 된 일본 관서 학원대학의 신학부에서는 여학생을 받아주지 않았는데 책임자의 호의로 1937년 가을학기부터 공부를 하게 됐다. 한 학기를 마치고 난 뒤 나의 성적이 학과에서 가장 우수하자 학교에서는 5년간 장학금을 줄 테니 첫 학기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했다. 공식적으로는 1938년에 입학하여 마침내 1943년 봄에 졸업을 하였다. 졸업 후에는 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다가 금강산 내금강에 들어가서 약 1년간 기도생활을 했다.
6 이 장로라는 분의 집에서 집안일을 도와주며 보내던 중 하루는 형사가 조사를 하러 왔었다. 그런데 조사를 하러 왔던 그 형사가 도리어 나에게 호감을 갖고 쌀과 고기를 보내 주었고, 그 후에 그의 소개로 금융조합에 취직까지 하게 되어 얼마간 근무를 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7 해방 후에는 계성여고 영어교사로 1년간 시무하다가 개종 문제로 그 학교를 떠나게 됐다. 이 무렵 영락교회가 창립되어 그 교회에 다니면서 새로 생긴 중앙신학교에 나가 한 학기 동안 강의했다.
8 그러다가 현영학씨의 추천으로 이화대학 사회사업과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고, 1년 후에는 다시 캐나다 선교부의 스칼라쉽으로 캐나다의 토론토대학교에서 또다시 신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 대학교 안에는 신학교만도 4개가 있었는데 나는 그중 회중교 계통인 임마누엘 칼리지를 나왔던 것이다. (1948~51)
9 그 대학을 수료하자 선교부에서는 내가 그냥 한국에 가는 것보다는 이화대학에서 사회사업과 담당 교수를 역임했기 때문에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더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에큐메니컬, 사회사업, 국가 재건, 이 세 가지 연구에 목표를 두고 영국을 중심으로 연구 여행을 하게 됐다. 그리하여 영국에서 40일간, 독일에서 2개월간 체류하면서 유명 대학의 권위 있는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10 우연치 않게 한국에서 떠날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배로만 다니게 됐다. 한국에서 캐나다까지 12일이나 걸렸고, 구라파에서 한국에 오기까지는 화물선을 탔는데 무려 두 달이나 걸렸다.
11 화란에서 떠난 화물선은 여러 곳에서 기착하게 됐는데, 머무르는 곳마다 승객 5명과 함께 여러 유명한 곳을 둘러보게 됐다. 나는 이런 긴 여정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감을 하나도 갖지 않았는데 그것은 배 안에서 강의 준비 등 책과 같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산 항구에 내리자 곧 강의를 할 수 있었다.
12 부산에 도착한 때는 1952년 2월이었는데 당시 전쟁 중이라서 이화여대가 서대신동 천막집으로 옮겨와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첫 강의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의 강의를 듣고 김활란 박사는 물론 모든 학생들이 감동을 받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