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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1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32
설교 제목: 휴거보다 더 중요한 것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설교를 위한 묵상:
지난 주일에 나는 1992년 휴거파동에 대하여 반성하는 설교를 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세대주의 신학이 있다. 그리고 그 신학은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을 붙든 세계관이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 교회들은 휴거파동과 같은 시한부종말론에 쉽게 영향을 받았다. 이제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지난 주에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이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주에는 휴거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던 그 내용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피고 그 본문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을 소개할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24장에서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과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에 대하여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를 밝히며 바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종말과 말세를 선언하신 목적과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말세의 진정한 의미를 명확하게 할 것이다. 끝으로 이 설교에서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우리가 정말 기다려야 하는 것은 휴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새로운 세상이다. 우리는 그 세상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설교 개요:
1. 지난 주일 설교 복습
2. 사도 바울은 휴거를 말했는가?
3. 휴거 신학이 오해한 본문
4. 말세란 무엇인가?
***
1. 지난 주일 설교 복습
교우 여러분, 한 주간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세상과 인생과 가족과 친구들을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사는 날 동안 주님의 은총 안에서 몸 성히 맘 편히 선한 뜻 펼치며 살기를 기원하며 서로 축복합시다.
지난 주일에 저는 말세와 종말에 대한 오해로 일어난 휴거소동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주일 메시지를 잠시 요약하겠습니다. 1992년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휴거 광풍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 천년왕국을 신봉하는 세대주의 신학이 있습니다. 세대주의 신학은 종말이 다가왔다는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 인식은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천년왕국이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출발했습니다.
세대주의 신학에 따르면, 천년왕국이 오기 전에 주님이 재림하실 것인데 주님의 재림 전에 7년 동안 대환난이 있을 것이고 그 환난이 일어나기 전에 믿는 사람들은 공중으로 끌어올려 주님과 함께 혼인잔치를 벌일 것입니다. 그 7년 동안 땅에서는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세대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전천년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속한 오순절계통의 교회들은 전천년설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단의 신학은 세대주의 신학과 매우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천년왕국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동안 다스린다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결과 탄생한 이론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환상과 판타지로 기록된 하나님의 세계경영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해석할 때는 그 환상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도 성경의 일부분이므로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비교하면서 읽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어쩌면 1992년 휴거파동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선배들로부터 배운 천년왕국이나 세대주의신학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휴거파동을 겪고 나서 교회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반성했고 그 결과 이 모든 일의 시작에 신학적 오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부분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 것이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천년의 통치는 고난을 겪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위로의 메시지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선배들의 가르침에 갇혀 있어서 다른 생각과 해석에 대하여 우려와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번 주간에 제 설교를 들은 어떤 사람이 답글을 남겼습니다:
할렐루야. 목사님 정확한 해석에 감사드립니다. 세대주의 해석들에 너무나 젖어 있어 목사님처럼 말하면 이단이라고 반박하니 답답하였습니다. “휴거가 없다고 하고 천년왕국은 장차 우리가 천국가서 받을 영원한 보상이라는 말씀” 감사합니다. 동의합니다. 저도 그렇게 깨닫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논리가 없이 정죄와 판단만 하니 옳은 소리 하기가 힘듭니다.
이렇게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배운 것에 의문을 가져볼 생각을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은 휴거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2. 사도 바울은 휴거를 말했는가?
휴거에 대한 본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있습니다. 이 본문은 가족이나 친지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비록 사별했지만 다시 만날 것이라는 취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이 본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납니다. 먼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을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주님이 하늘로부터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 우리들도 주님을 맞이하여 주님과 함께 그리고 성도들과 다시 만나 항상 함께할 것입니다. 이것은 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시 만날 때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을 맞이하는 상황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설명이 좀 특별합니다. 그 날에 살아 있는 우리들이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라는 사도 바울은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우리 선배들은 그 동안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주님이 왜 다시 오시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 오른쪽에 계십니다. 죽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을 잔다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그들은 안식하면서 그 날을 기다립니다. 그 날은 우리 주님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시는 날입니다. 만물이 새롭게 되는 날이며,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아 하나님께 칭찬과 벌을 받을 날입니다. 그날에는 모든 것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그렇게 바로잡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이 지난 2천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성경의 정신이 아닌 새로운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헬라인들이 가진 생각으로서 천상에 진짜 세상이 있고 이 세상은 그것에 비하면 불완전하고 오염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그 생각은 이 세상과 물질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영혼들이 거하는 천상의 세상이 바로 신들의 영역으로서 거기가 진정한 낙원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이교적인 사상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성경의 정신과는 맞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셨고 지혜와 명철로 그것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보좌로 삼으시고 땅을 발판으로 삼으십니다. 성경의 정신을 보면 사실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성경의 기자들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시 19:1)고 노래하며, 또한 이 세상에 대하여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1)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며 그것을 새롭게 만드시고 처음부터 이 세상을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모든 것을 고치시고 바로잡으신 후에 인간과 더불어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이 세상에 인간과 더불어 함께 사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롭게 된 세상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한 삶을 누릴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21장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요한계시록 21:5). 하나님은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고 사람을 부르시고 마침내 그 일을 완성하신 후에 사람과 함께 그 새롭게 된 세상에서 영원히 거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이처럼 성경의 정신에 기초하여 이 본문을 이해하면 휴거와 같은 주장은 터무니없다는 것을 금방 이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었던 휴거란 이 세상을 떠나 저 위의 세상에서 살기 위하여 건짐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 바로잡아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과 우리 살아남은 자들에게 물려주시고 그 세상에서 더불어 영원히 함께 사는 복락을 주시려는데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저 위의 세상으로 들림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휴거 사상은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상에서 성경의 정신을 따라 살아갈 기대와 책임의식을 저버리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표현을 생각해 봅시다. 왕이 오시면 마중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왕은 하늘에서 오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당시 왕의 행차와 그 왕을 맞이하는 풍습에 빗대어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영접한 후에 우리는 다시 주님이 오시는 목적지인 이 땅으로 와서 주님과 더불어 세상 만국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미래의 약속이며 그림입니다. 흔히 휴거 본문이라고 말하는 데살로니가 4장을 신학자들은 위와 같이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톰 라이트, 이승구).
여기서 우리는 휴거신학이 성경 전체의 정신을 오해한 것이며 사도 바울의 표현을 오해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휴거사상에 경도되면 성경을 어떻게 오해하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3. 휴거신학이 오해한 본문
휴거신학에 물든 생각으로 성경을 읽으면 그 본문이 말하는 바를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래의 성경본문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24:39~4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예루살렘 성전이 철저하게 무너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걱정이 되었는지 그 때가 언제인지 물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봅시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태복음 24:3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날을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것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기 때문이며 그 날이 세상 끝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들에게 최고로 중요한 성전이 무너진다면 그것은 세상이 끝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깊이 물든 사람들은 이 본문이 이 세상의 끝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날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1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오랫동안 애쓰다가 마침내 성문을 부수고 들어온 군인들에게는 자비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에도 미련을 두지 말고 신속하게 달아나야 합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공격해 오는 군인들은 들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포로로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둡니다. 아마 칼로 죽여서 버려두었거나 치명상을 입은 노인이라서 버려두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군인들은 가정 집을 급습하였는데 마침 저녁을 준비하려고 두 여인이 맷돌을 돌리고 있습니다. 젊은 여인은 딸이고 늙은 여인은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군인들은 젊은 여인을 데려가고 늙은 여인의 울부짖음을 뿌리치거나 아니면 칼로 베어버리고 버려둘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날 충분히 예상되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휴거사상에 물든 사람은 이 본문을 천사들이 두 사람 중에 신실한 사람 하나를 데려가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을 버려둘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렇게 휴거신학은 마태복음 24장을 왜곡합니다. 그 외에도 무화과나무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이스라엘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제멋대로 갖다 붙입니다. 1992년 휴거 파동이 일어나던 시절에 많은 교회들이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 비유를 이스라엘의 독립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틀렸다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새 순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안다는 매우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심상치 않음을 볼 때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말세나 종말은 무엇입니까?
4. 말세란 무엇인가?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말세나 세상의 끝에 대하여 말하는 본문을 만납니다. 예언자들도 마지막 날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행하실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날에 대하여 예언자들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요엘의 예언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이 모든 육체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줄 것인데 그 날에는 아이들은 예언을 말하고 청년들은 환상을 보며, 아비들은 꿈을 꿀 것입니다. 그리고 남녀노소 할 것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열어주실 것이라고 예언자 요엘은 예언했습니다.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은 세상 끝날이 될 것이라고 제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인자가 다시 올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이 세대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16:28
예수님은 산헤드린 법정에서 자신을 재판하는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마태복음 26:64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듣기에 매우 이상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만국을 통치하실 분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이 바로 그와 같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바로 그런 분입니다. 다니엘서 7장을 보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 세상을 다스리던 짐승들이 패배하고 나면 새로운 통치자가 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 7:23~1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니엘의 예언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또한 산헤드린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다니엘의 예언을 인용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자신이 곧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 그들은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이 받으셨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나 세상 끝날에 대하여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모든 본문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신 것을 세상 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재물을 모으며 자기 배만 불리는 것을 보고 말세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고 사도들은 책망했습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9:26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야고보서 5:3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곧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모든 불의와 불법을 바로잡으실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로운 사람들은 그 말세가 지금이며, 주님이 속히 이 모든 일을 바로잡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하는 사람들이라면 불의하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은 곧 심판을 받을 것임을 확신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로마서 16:20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점쟁이가 말하는 그런 예언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를 믿고 충성되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악한 세력이 날뛰는 것을 볼 때 그들의 불의와 불법에 가담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그들의 심판이 가까이 왔음을 확신할 때 선포하는 메시지입니다. 신실한 백성들이 말세를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속히 바로잡아 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세를 말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그 뜻이 이 땅에서 자신의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바라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수고와 헌신을 받으시고 결실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면 주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되는 세상을 완성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이 맡은 본분에 최선을 다하면서 주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이 휴거신학과 바른 종말신앙의 차이점입니다. 휴거신학은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저 세상으로 들림받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환난을 당하지 않고 들림받느냐 아니면 환난을 통과하느냐를 가지고 다툽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우리를 통하여 어떤 일을 이루기를 원하시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가올 환난을 피하고 구원받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볼 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자기들의 앞길에 환난이 기다린다고 성령께서 알려 주셔도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제물처럼 드려져서 교회가 세워지고 후대가 유익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선택이라고 확신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길이며, 사도들의 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개신교회는 휴거신학이라는 착각과 환상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세상에 대한 꿈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입니다. 휴거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