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슨의 패턴, 원형, 누미노제, 내면작업
존슨의 ‘내면작업’을 읽으면서 꿈이해에 관한 중요한 비유와 한참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것은 패턴과 원형에 대한 반복적인 이야기였다. 밀려오는 파도의 한 면인 파랑은 ‘무의식의 에너지’체이다. 그런데 파도라는 반복적인 것은 패턴(타입)이다. 거대한 물줄기 흐름과 같다. 그런데 동에서 서로 흐른다든지 어느 방향으로 가게 한다든지 하는 그러한 흐름은 원형이다. 그 흐름의 아래에 지층/구조가 있어서 그러한 움직임을 만든다.
문제는 패턴은 시간속에 있는 경험이고, 여러 이미지로 나타난다. 원형은 시간과 상관없는 근원적인 것이며 그 이미지 뒤의 신성한 구조(존슨은 이를 신의 모형이라 했다)이라는 점이다. 모든 패턴이 원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원형(archetype)은 ‘arche’가 암시하듯 ‘근원적인 시초’를 가지며, 신성한 것과 연관된 것일 때 원형이 된다고 존슨은 말한다. 원형을 누미노제라는 실존적 의미-내 삶을 두렵고, 매력적이며 떨리게 하는 실존적인 살아있음의 경험-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렇게 내면작업으로서 꿈은 삶의 자양분이 되어 귀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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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을 넘어 삶의 물줄기로
-원형과 누미노제, 그리고 내면작업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건을 겪는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며, 실패하고 다시 시작한다. 뜻밖의 병을 만나기도 하고, 오래 해오던 일을 갑자기 그만두기도 한다. 어떤 날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꿈을 꾼다.
대부분의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떤 사건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습만 바꾸어 다시 찾아온다. 비슷한 관계가 반복되고, 중요한 순간마다 같은 두려움이 올라오며, 오래전에 꾸었던 꿈의 한 장면이 수십 년 뒤에도 되살아난다.
그때 우리는 묻게 된다. 왜 이것은 계속 돌아오는가?
이 질문에서 내면작업이 시작된다.
1. 사건에서 패턴으로
처음에는 사건만 보인다. 누군가 나를 떠났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실패했다.
꿈에서 길을 잃었다. 낯선 집에 혼자 남아 있었다. 사건만 바라보면 질문은 대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머문다.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찾는다. 이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내면작업은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이와 비슷한 일이 내 삶에서 또 있었는가?”
그 순간 하나의 사건 뒤에서 패턴(pattern)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길을 잃는 꿈을 반복해서 꾸는 사람이 실제 삶에서도 중요한 전환기마다 방향을 잃었다고 느꼈을 수 있다. 관계가 가까워질 때마다 물러나는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친밀함과 상실을 비슷한 방식으로 경험해왔을 수도 있다.
패턴을 발견한다는 것은 단순히 “나에게 이런 버릇이 있구나”라고 진단하는 일이 아니다. 흩어져 있던 사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일이다. 어제의 사건과 십 년 전의 사건, 오늘의 감정과 오래된 꿈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사건 하나만 보았을 때는 우연처럼 보였던 것이, 패턴을 보면서 하나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2. 그러나 모든 패턴이 원형은 아니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깊은 질문이 생긴다. 모든 반복이 원형(archetype)은 아니다.
어떤 패턴은 나의 개인적인 역사에서 만들어졌을 수 있다. 가족관계나 문화, 상처와 학습을 통해 형성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때때로 꿈이나 내면작업을 하다 보면 개인사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미지와 만난다.
떠남과 귀환.
죽음과 다시 태어남.
어둠 속으로 내려감.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음.
어머니와 아이.
늙은 현자.
낯선 안내자.
바다와 산, 동굴과 숲.
이런 이미지와 구조는 한 개인의 삶에서만 발견되지 않는다. 시대와 문화를 넘어 신화와 종교, 민담과 예술, 인간의 꿈에서 끊임없이 모습을 달리하며 되풀이된다. 여기서 우리는 원형적 차원을 만나기 시작한다.
패턴이 “내 삶에서 무엇이 반복되는가?”를 묻는다면 원형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내게 반복되는 이 이야기는 나만의 이야기인가?”
내가 겪는 상실이 단지 나의 실패가 아니라 인간이 오래전부터 통과해온 죽음과 재생의 과정일 수도 있다. 내가 경험하는 방향 상실이 단지 결함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를 떠나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는 통과의 과정일 수도 있다. 이때 내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통이 놓여 있는 지평이 넓어진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라고 묻던 사람이 조금씩 다른 질문을 시작한다. “나는 지금 어떤 인간적인 이야기를 통과하고 있는가?” 형이라는 개념이 내면작업에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형은 나의 이야기를 없애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작은 이야기를 더 큰 인간의 이야기 안에 놓아준다.
3. 원형을 너무 빨리 이름 붙이지 않기
그러나 여기에도 위험이 있다. 꿈속에 바다가 나타나면 “바다는 무의식이다”라고 말하고, 노인이 나타나면 “현자 원형이다”라고 말하며, 죽음이 나타나면 “죽음과 재생의 원형이다”라고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순간 살아 있던 꿈이 하나의 개념으로 굳어버릴 수 있다.
꿈에서 거대한 바다 앞에 서 있었다고 하자. 그것을 ‘무의식의 상징’이라고 해석하는 것보다 때로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 바다 앞에서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 도망치고 싶었는가. 그런데도 눈을 뗄 수 없었는가. 두려웠지만 이상하게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는가. 바로 여기에서 누미노제(numinous)라는 말이 중요해진다.
4. 두렵고 떨리면서도 매혹되는 것
루돌프 오토는 성스러움의 독특한 경험을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라고 표현했다. 신비롭고, 두렵고 떨리게 하면서, 동시에 매혹하는 것.
tremendum은 나를 물러서게 한다. 너무 크다. 압도적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fascinans는 이상하게 나를 다시 끌어당긴다. 알고 싶다. 다가가고 싶다. 두려운데 떠날 수가 없다. 융에게 이러한 누미노제적 성격은 원형적 경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어떤 꿈은 해석하기도 전에 우리를 붙잡는다. 몇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꿈의 내용은 몇 장면뿐인데 그 이미지가 이상할 만큼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때 중요한 것은 그 이미지를 빨리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멈추어 서는 것이다.
“왜 이것은 아직도 나를 붙들고 있는가?”
누미노제는 꿈의 의미를 알려주는 정답표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내가 함부로 축소해서는 안 되는 무엇인가가 살아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5. 사건에서 삶의 물줄기로
그러므로 내면작업에는 하나의 움직임이 있다.
사건 → 패턴 → 원형 → 누미노제 → 관계 → 응답
먼저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묻는다.
이것은 내 삶에서 어떻게 반복되어 왔는가?
그다음에는 더 넓게 묻는다.
이 반복 속에는 나 개인을 넘어서는 어떤 인간적인 이야기가 흐르고 있는가?
그러나 거기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 이미지 가운데 지금도 나를 두렵게 하고, 매혹하고,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침내 질문은 삶으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나는 이것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여기에서 꿈은 해석해야 할 암호문이 아니라 관계를 맺어야 할 내면의 사건이 된다.
6. 물줄기는 나를 대신해서 살아주지 않는다
강을 생각해본다. 수면에는 수많은 사건이 일어난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돌에 부딪히며 물결이 생긴다. 그 아래에는 물이 반복해서 흐르는 길이 있다. 이것을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왜 물이 이 방향으로 흐르는지를 결정하는 오래된 지형이 있다. 이것을 원형적 구조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그 거대한 흐름 앞에서 이상한 경험을 한다.
“이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나보다 먼저 있었고 나보다 훨씬 큰 무엇이 내 작은 삶을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두렵지만 이상하게도 그 흐름에 가까이 가고 싶어진다. 이것이 누미노제적 순간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물줄기를 발견했다고 해서 물줄기가 나를 대신해서 살아주는 것은 아니다.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 내면작업의 종착지가 아닌 이유이다.
7. 해석에서 참여로
“이것은 죽음과 재생의 원형이다.”
그렇게 알아차렸다면 이제 질문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죽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놓아주어야 하는가?
무엇이 태어나려고 하는가?
꿈에서 계속 문 앞에 서 있다면 “문은 전환의 상징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 삶에서 지금 열어야 할 문은 무엇인가?
꿈에서 누군가가 계속 나를 부르고 있다면 그 인물이 어떤 원형인지 알아내는 것보다 먼저 물을 수도 있다.
나는 무엇을 오래도록 듣지 않고 있었는가?
이것이 내면작업이 해석에서 참여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로버트 존슨이 꿈 작업을 단순한 해석으로 끝내지 않고 적극적 명상과 의례, 실제 삶에서의 행동으로 이어가려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의식의 이미지는 구경하라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의식과 관계 맺기 위해 찾아온다. 그 관계 속에서 삶은 조금씩 방향을 바꾼다.
8. “이 꿈은 무엇을 뜻하는가?”에서 “나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로
그러므로 깊은 꿈작업의 마지막 질문은 어쩌면 이것이 아닐 수 있다.
“이 꿈의 뜻은 무엇인가?”
그 질문보다 더 살아 있는 질문이 있다.
“이 꿈과 함께 살아간다면 나는 무엇이 되어가는가?”
사건을 이해하는 것에서 패턴을 발견하고, 패턴 아래에서 원형적인 인간의 이야기를 만나며, 그 가운데 설명할 수 없는 경외와 매혹을 경험한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내 관계로, 몸으로, 일로, 선택으로 돌아온다. 그때 내면작업은 더 이상 ‘내 안을 들여다보는 작업’만이 아니다.
삶이 나를 통해 무엇이 되려고 하는지를 들으며, 거기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작업이 된다. 우리는 삶의 물줄기를 만들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이 어디로 흐르는지 조금씩 들을 수는 있다. 그 흐름에 저항하고 있는 곳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내가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그 흐름에 한 발을 담글 수도 있다. 그때 꿈은 미래를 예언하는 답안지가 아니다.
꿈은 묻는다.
“지금 당신의 삶 깊은 곳에서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가?”
그리고 내면작업은 다시 묻는다.
“당신은 그 움직임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