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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잃은 것들
김경선
대부분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없다고 한다. 청년 실업률 "한국 8.5%", 취업준비자만 해도 이미 55만을 넘어섰다. 그들은 벼랑에 서서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끝없이 추락한다. 그들의 꿈은 취업이라는 견고한 현실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요즘 젊은 층에선 결혼 적령기가 점점 늦어지고 아예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신혼부부들이 신혼여행지에서 이혼 도장을 찍고, 수십 년을 함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나누며 살아왔던 노부부가 황혼 이혼을 하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된다는 물질 만능 시대, 물질 앞에 사회의 통념은 붕괴되어 가고 있다.
순리가 역리가 되어버린 시대. 우리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틈을 타 중심은 흔들리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룰과 균형을 이루는 구심점이 있다. 그것이 인위적으로 형성되었든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든 어떠한 구심점을 토대로 살아간다. 사회와 가정에도 구심점이 있다. 그러나 상식보다는 비상식이 더 잘 통하는 시대에서 혼란을 야기하는 것들은 어느 특정 대상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1:29:300 ‘아히만의 법칙’을 예로 들고자 한다. 아히만은 1920년대의 보험회사 직원이었다. 그는 5000건 이상의 교통사고 산재 데이터를 조사해 보았는데 1:29:300의 법칙이 적용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300건의 교통 법규의 위반 뒤엔 29번의 아찔한 순간이 있었고 1번의 교통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당시 ‘아히만의 법칙’은 크게 주목 받지 못했지만 미국 뉴욕시장 루돌프에 의해 ‘아히만 법칙’이 이슈화되기 시작한다. 그 당시 뉴욕은 굉장히 많은 범죄가 난무했고 특히나 지하철역은 무법천지나 다름이 없었다. 뉴욕시장 루돌프가 시장에 당선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낙서금지, 쓰레기 불법투기금지, 무단횡단금지, 지하철 천장부터 바닥까지 낙서나 껌을 떼어내고 질서를 바로 잡는 일이었다. 낙서를 지우고 경범죄를 엄격히 다루고 적용했을 때 뉴욕의 범죄율 70%까지 감소했다. 또 다른 예로 ‘유리창의 법칙’이 있다. 자동차 한 대는 본네트만 열어둔 채 골목에 세워두었고 또 한 대의 자동차는 유리창을 깬 후 골목길에 방치를 해 두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본네트만 열어둔 차는 그대로 있었지만 유리창을 깬 차는 모든 부품이 없어졌다고 한다. 위 두 가지 예를 보더라도 쉽게 교통법규를 어기는 마음은 아찔한 순간이 오고 결국 사고로 이어지듯이 우리가 쉽게 이 정도쯤이야 하며 상식을 벗어나기 시작하면 결국 중심까지 허물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집 근처 골목에도 쓰레기 분리수거를 깨끗하게 정리해서 버리는 장소는 늘 깨끗하고,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버려진 장소는 불법으로 버려진 쓰레기들로 인해 쓰레기장을 방불케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본네트만 열어 놓은 자동차는 금방이라도 주인이 올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지만 유리창이 깨진 자동차는 곧 폐차가 되거나 방치된 차로 오인을 해 자동차 부품까지 모조리 절도해 가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마음들이 결국 ‘아히만의 법칙’과 ‘유리창의 법칙’처럼 수많은 부조리를 낳고 사회적 폐단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詩란 무엇인가? 결국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고 내면 깊숙한 심리를 시적언어로 승화시키는 게 아닌가. 모든 것들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작은 것을 허용하면 결국 모든 것을 내어주게 된다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쓴다’ 라기보다는 세상을 쓰고 사람을 쓰고 중심을 쓰는 게 아닌가. 그런데 현시점에서 과연 나, 또는 시인들의 몫을 다 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굳이 말이 필요 없이도 서로의 마음을 읽어주고 배려해주던 때가 있었다. 그때야 말로 시인이 득의하고 존경 받던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란 자리가 그저 말없이 뚝심 있게 자리만 지켜줘도 한 가정의 무게중심이 되어 주던 시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구심점은 혼란과 실종 시대에 이른 것이다. 이번 시편들은 사회적 중심이탈과 현실성 이탈이라는데 중점을 두고 시작한 시 편들이다. 책임공방을 떠나 사회 구조와 기류에 떠밀려 유발되는 혼란스러움이 불안한 자아와 강박관념, 최소한의 행복추구권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과 어둠 가운데 던져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함에 대해 표현하고자 했지만 늘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시민적 시적 대상이나 사회 전반의 혼란을 야기하는 시적 대상을 포괄적 공통점인 중심이탈과도 무관하다 할 수 없다.
시소증후군
그가 중심을 놓쳤다
균형을 잃고 세상을 놓쳤다
뿌리째 뽑혀
팍팍한 모래바람처럼 떠돌다
변두리 놀이터에 껌처럼 눌러 붙어 있다
놀이터를 안방인 듯 꿰차고 앉아 있다
누구도, 등 떠밀지 못한다
이젠 소주병과 낡은 가방 하나가
그의 중심이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돌아갈 수 없는 저녁
홀로 삶의 무게를 저울질하느라 속울음이다.
자신의 언어를 찾지 못하고
독한 소주 냄새로도 영역표시를 할 수 없을 때
그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중심을 지키는 게 상책이라 믿는다.
민원으로 각서를 몇 번이나 썼다는 그,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에
기우뚱 현기증을 호소한다.
바람이 혀를 차고
구름이 늙은 부모를 기억해내는 동안
그가 바닥을 향해 눕는다
자꾸 소주병처럼 기울어진다.
세상의 중심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중얼거린다
중심이 너무 멀어 아득하다고 하다가
이내 눈빛이 흔들린다
끝내 중심이 되지 못하고
새벽마다 공사장 기초공사를 하며
실종된 중심을 현상 수배한다
「시소증후군」은 현 사회에 불어온 폭풍과도 같은 IMF, 그로 인하여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하루아침에 중심이 흔들리고 뿌리째 뽑혀 나간다. 중심 이탈이란 현실적인 것뿐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세계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닥친다고 볼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 또는 별거라는 과정을 과연 누가 쉽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가. 가정의 해체, 한 가정의 한 부모 가정들이 늘어나고 그들의 안간힘은 얼마나 절실한가. 나 역시 개인적으로 비슷한 형편에 놓임으로서 그들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으며 드라마 하나를 시청하더라도 주연보다 조연의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눈과 마음이 쏠리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이다.
레밍 딜레마*
삶은 우리에게 미끼다
내가 죽어야 네가 산다
종족 이례(異例),
멈춘다는 것은 금기지
겁에 질려 헐떡이는 건 더 식상하지
내일 아침은 너무 늦어
더 늦기 전에 일제히 뛰어내려야 해
오래 참을 수 있다는 거짓말은
되려,
숨통을 조이지
비대해진 땅은 뒤뚱뒤뚱
막다른 길로 우릴 유인하지
믿기지 않지만
어젯밤 누군가 나의 등을 밀었어
드디어 해낸 거야
우리는 죽음을 번식 할 수 있는 거야.
—「레밍 딜레마」전문
사내에게 불하된 땅은 한 평도 없었다. 세금 고지서도 갈 곳을 잃었는지 우편함을 떠나 사방에 뒹굴고 있다. 후미진 골목 전봇대는 필사적으로 제 땅을 지키고 있다. 구부정한 사내는 24시 편의점을 식탁으로 빌려 쓰곤 한다. 누가 볼세라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마지막꼬리를 자르고 사라진 고시텔 모두가 귀향을 서두르던 어스름한 저녁, 사내의 마지막 끈은 사내의 숨통을 조여 왔다. 더러는 과거로 돌아갔고 어지럼증을 앓는 사내는 빛을 거부한다. 캄캄한 미래의 밝기를 조절하는 동안 불어터진 컵라면은 편의점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절대 백수가 아니라던 사내, 몇 달 째 방세가 밀렸는지 고시텔 구석에서 밀려났다. 벼랑 끝에서 누군가 등 떠밀었다. 어떤 이는 펄럭이다 떨어졌다고 하고 더러는 두 발을 디딜 수 없어 미끄러졌다고 한다. 더는, 웃음을 번식할 수 없어 등 돌렸다. 누구도 그를 미끼로 물지 않았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컵라면처럼 그는 버려졌다
그의 눈물은 드디어 번식을 시작했다
묻고 싶다. 과연 누가 지금의 청년 실업을 비탈길로 몰아왔는가를, 누군가 등을 밀고 누군가의 손아귀에 의해 막다른 길로 유인이 된다. 삶은 어쩌면 미끼에 지나지 않고 고통과 숨통을 조이는 전초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청년들에게 설 자리란 없다. 대학졸업 후 고시텔에 머물면서 취업을 준비하던 한 청년이 스스로를 절벽으로 밀어버렸다. 학자금 대출이 목을 조여오고 생계를 이어야하는 외줄타기를 하다가 결국 실족하고야 마는 것이다. 현시대는 중심을 잃은 지 오래다. 따라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끈임 없이 벼랑으로 등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기울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 본연의 기본 생존권마저 보장되지 않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하겠지만 분명히 문제는 있는데 책임질 대상은 없다는 것이다. 우린 모두 슬픈 시대에 살고 있다.
쌓고 허물고 또 무너뜨리는
바람의 건축일지
그의 건축물들은 수시로 하자보수에 들어간다
바람이 불자
밤새 쌓았던 건물이 흔적조차 없다
오아시스와 신기루도
삽시간에 무너지고
생각의 문턱은 닳고 닳는다
아내의 허리를 휘감고
문턱을 넘나드는 모래바람
신기루를 한 입에 털어 넣고
퉁퉁 불어난 사채로 속이 더부룩하다
결혼 20년 동안 그는,
수시로 신기루만을 수집했다
제3금융사 창구 사이로
들락거리며 아슬아슬 묘기를 부려보지만
사채업자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벼랑 끝에 핀 꽃 한 송이에 목숨을 걸어보기도 했다
가족의 웃음은 담보 잡힌 지 오래다
잔고 부족으로 연채 된 행복,
20년 동안 오아시스가 되어주던 아내
오랜 목마름으로 이파리마저 시들시들하다
기초공사가 허술한 건축가
끊임없이 수집 중이던 신기루를 밑 빠진 독에 붓는다
손가락 사이로
사채 장부에 높은 숫자를 이자로 찍어내는 그는,
부실한 바람의 건축일지를 수정, 또 수정해본다
—「바람의 건축일지」전문
처음부터 중심을 잃으려는 사람도 잃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마음으로 시작을 했느냐가 문제가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들이 욕망이란 이름으로 중심을 잃는다는 것이다. 3D업종을 대부분 기피하고 결국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성실하게 일 하는 사람은 바보인 세상이 되어버렸다. 허황된 생각에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가는 동안 그 가족들은 그 분량만큼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산다. 간혹 인기 연예인들이나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중심을 잃고 도박에 빠져 수년간 쌓아왔던 자신의 명성과 위치를 잃어버리고 삶을 망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접하곤 한다. 물질 만능시대에 그들의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정신적 빈곤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내가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없다
나는 살았고 또 죽었다
나는 나일뿐
내게 천적이란 없다
죽거나 살았거나 할 뿐이다
스무 살 되던 해
여읜 목젖 사이로 울음이 새어나갔다
세상 물정 모르고 다리 하나를 내 주고
누군가 뒤통수를 치던 날
팔 한쪽이 나를 버렸다
믿었던 칼날에 의해 가차 없이
남아 있던 한 쪽 다리가 베어져나갔다
차례차례 사라지고 없어졌다
서른 살이 되면서 어둠은 더욱 깊었다
문 밖에서 사자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다
앉은뱅이가 되었다
나는 오래 굶주렸고 이가 빠지기 시작했다
내 영혼의 중앙선을 침범한 위태로운 스키드마크,
살점 여기저기가 뜯겨져 나갔다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내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면서도
그저 문이 닫혀 있다고 했고
문 밖에 우는 바람이
올가미를 들고 내게 대들었을 때도
그저 사색을 즐겼을 거라고 했다
내 심장에서 자꾸 헛바람이 새기 시작했다
오래전 맞춰 놓았던 수의가 헐렁해져서 헐값에 덤핑 처리되었다
드디어 나는 멸종되고
멀찌감치 떨어져 나의 장례를 지켜보는,
—「도도의 법칙」전문
순수하게 자신의 계획과 생각대로 살아갈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꿈을 꾸고 희망을 가지고 목적을 이루며 사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나는 살았고 또 죽었다 / 나는 나 일뿐 / 내게 천적이란 없다/ 죽거나 살았거나 할 뿐이다’ 사회적 구조와 처해진 상황에 의해 자아는 죽거나 산다. 주어진 배경과 맞닥트린 그 어떤 형편 앞에 자신과는 무관하게 내면의 중심은 흔들린다. 자신이 아닌 자신으로 살아가고 때론 자신을 죽이고 숨죽이며 살기도 한다. 살아오면서 어느 날 문득 무서움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린 날 귀신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무서움을 느끼고 혐오스러운 동물이라든가 여러 두려움의 대상이 나이나 시기에 따라 변화가 되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만큼 인간관계 유지가 어렵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시기 질투 배신을 하고,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 현시대에선 자신의 중심을 온전히 잡고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늘푸른 아파트 1011호
그녀는 날마다
눈썹을 그리고 자존심을 세우듯
늘어진 속눈썹을 마스카라로 고정 시키고
푹 꺼진 눈에 아이라인을 그린다
그녀의 덩굴손은 자주 베란다 난간을 넘보곤 했다
풋내 나는 제 속과 내통하던
그녀는 물기가 차오르기도 전에 말라버렸다
한동안 바닥을 구르며 살았다
때로는 원치 않는 곳까지 굴러가
겉과 속이 다르게 살기도 했다
자신의 속을 알 수가 없어 머리통을 쥐어박기도 했고
몸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세상의 모든 손가락들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씨 없는 수박이라고
빗줄기는 밤새 그녀의 문을 두드리고
눈동자 그득 물안개 짙던 새벽,
베란다 난간을 잡고 있던 덩굴이 풀어졌다
바닥에 흥건하게 꽃이 피었다
그녀가 마지막 피운 꽃이었다
—「수박, 몸을 날리다」전문
작은 성냥갑 같은 아파트가 어느 한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꿈이기도 하고 또 하나의 한숨일 수도 있겠다. 내 집 마련이 평생의 꿈이거나 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간혹 아파트가 죽음을 돕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혼모가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베이비박스(baby box)가 찬반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갓 태어난 아이를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버리거나, 부양능력이 없는 부모가 아이를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하는 등 아기를 향한 반인륜적인 사건이 다수 발생하고, 버려지는 아이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등 정상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는데 베이비박스(baby box)는 이처럼 버려지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박스로, 부득이한 사정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된 부모가 아이를 두고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미국, 독일, 체코, 폴란드, 일본 등 약 20개국에서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베이비박스(baby box)는 불가피한 현실이 아닌가 싶다. 죽음을 택하는 자와 자식을 버리는 자, 과연 그들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쫓기고 있었죠
귀퉁이마다 점점 깨지고 닳았어요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지요
어둠이 빛을 질러 나에게 미치는 동안
발자국은 허방을 디뎠지요
어둠의 솔기를 따라 면도날 같은 밤,
얼굴은 깨지고 산산조각났어요
상처 나기 전 내 얼굴이 가물가물해요
이사하면서
얼굴을 내다버렸어요
다시는 얼굴 쓸 일이 없을 거라 믿었지요
내가 서있는 바닥은 낯선 행성 같았죠
다리가 울기 시작했어요
바람을 따라가다 보면 길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지나치는 말로 누군가 거들었죠
지칠 땐 바람에게 다리를 걸치기도 했지요
불투명한 얼굴 여럿이 걸림돌이 되었죠
버려진 얼굴은 행방이 묘연했죠
알츠하이머환자처럼 난 얼굴을 기억 못해요
아침을 건너뛰고 저녁을 건너뛰어도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였죠
얼굴은 찾을 수 없었어요
참을 수 없는 건 허기진 게 아니에요
사라진 얼굴에 대한 연민이라고
채근하지 마세요
캄캄한 골목에서 잊혀진 얼굴이 걸어 나오면
담담히 나를 인정해야 할까요?
아시나요?
내가 버린 얼굴에 대하여,
부서진 채로
내가 아닌 나로 모자이크된 얼굴을,
지금껏 나에게 쫓기고 있었죠
—「나는 나를 모자이크 한다」전문
누구든 자신에게 가장 먼저 당당하고 싶고 자존감을 높이길 원할 것이다. 그러나 삶은 녹록치 않아서 대인관계가 원활하지 못하거나 남보다 항상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 콤플렉스로 인해 사회 부적응이 요인이 되어 자아의 혼선이 온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가 점점 자존감을 낮추고 스스로 세상을 향해 문을 닫아거는 경우가 있다. 결국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닌 자신의 책임이 되겠지만 때로는 급격히 냉소적이고 이기적인 사회적 구조가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공문이 일제히 계단을 뛰어 내려와
정리해고를 단행한다는 비밀문서를 순식간에 퍼트린다
줄을 타던 잎들은 누렇게 떠버렸다
눈치 빠른 바람은 은행나무 뒤에 숨었다
결제된 서류가 전단지처럼 뿌려지고
중심을 잡은 몸통은 능청스럽게 몸무게를 재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조정대상에서 제외되는 특권층
매연 때문에 못살겠다고 푸념을 하던 플라타너스는
일순위로 불려나갔다
반짝이옷을 입고 스치는 바람에도
몸을 꼬던 키 큰 미루나무,
달려오는 차를 들이받은 은행나무도 명단에 올랐다
지난 가을 장대를 들고 설치던 김씨도 몸을 사린다
고분고분 물러날 수 없다며 마지막까지 고집부리던
청소부 강씨도 결국 힘이 빠져 깡마른 손을 놓았다
발자국을 붙들던 구두수선집 단풍나무
신호등을 가린다는 죄목으로 결국 뿌리까지 뽑혔다
구청직원이 사다리차에 올라 전기톱으로 하늘을 가른다
웃자란 것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남은 자와 버림받은 자가 갈림길에 들어서고
나뭇가지를 실은 1.5톤 트럭이 떠난다
톱날이 휩쓸고 간 사거리엔 푸른 피비린내가 흥건하다
팔다리가 잘린 그림자는 향방을 몰라 서성이고,
쉬쉬하던 바람이
남은 자들을 불러내며 한숨을 돌린다
—「가지치기」전문
우리는 모두 가지치기의 대상일 수도 있겠다. 내 주변 몇몇 지인들도 구조조정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고 하물며 노점상 또한 단속을 피할 수 없어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든 낙하산은 존재한다. 학연, 지연, 어떤 끈이든 단단한 동아줄이 되는, 어떤 이는 줄서기를 잘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귀띔을 해주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비빌 언덕조차 없는 사람들의 홀로서기는 치열하다 못해 절실하다. 아마도 인정하긴 싫겠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요즘 들어 가장 많이 들어지는 생각이 있는데 세상에는 사실은 있으나 진실은 없고 진실은 있으나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기득권자에게 쏠려있는 사회 구조는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지 않은가 누군가 내게 너무 부정적 시각이라고 반문한다면, 그렇다면 내 생각이 틀렸기를 바라고 싶다.
한 뼘만 뻗어!
그는 늘 말했다
곧 닿을 거라는 그 한 뼘
오래된 한 뼘
간신히 팔을 뻗으면
이봐, 방향이 틀렸잖아
한 뼘이라는
한 뼘에게 속고 속는다
그의 한 뼘과 나의 한 뼘 어쩌면,
평생 닿지 못할 거리인지도 모른다
한 뼘만,
한 뼘만,
간절히 두 팔을 휘저어보지만
아무것도 잡을 수 없다
그리운 것들은 떠나가고
소망하는 것들은 번번이 놓치고 만다
너무 먼 한 뼘
나는 한 뼘 밖에 서 있다
절망보다 한 수 위인 그,
완벽한 사기꾼이다
다가가면 그는
한 뼘 더 물러선다
단작스러운 그의 놀이에 중독된 것처럼
나는 늘 그에게로 치우친다
TV 위에 놓여진 좁은 화분 속에서
시끄러운 잡음과 전자파에 시달리면서도
한 뼘, 한 뼘
팔을 뻗어가던 선인장이 시들시들하다
자꾸 뿌리 쪽으로 몸을 기댄다
사회에서 한 뼘 멀어진 나,
소파에 뒹굴뒹굴 몸을 굴린다
TV는 채널을 찾지 못하고
초점 잃은 눈동자는 정보지 구인란 쪽으로 쏠린다
—「한 뼘」전문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좌절을 맛보지 않았을까. 아니 한번 정도만 좌절을 했다면 오히려 행복한 사람 측에 끼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느 날 문득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게 된다. 보이지 않는 무의식 세계인지 내면에서 솟아나는 무의식의 세계랄지 샘솟듯 늘 하나의 희망을 내 걸고 “그래 다시 해보는 거야!” 손만 뻗으면 곧 닿을듯 하지만 절대 닿지 않는 희망이라는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오뚝이처럼 쓰러지고 지칠 때마다 얼마나 스스로에게 희망이라는 동기부여를 해왔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록치 않은 삶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한다. 생존이라는 절실한 명제 앞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라는 소스, 죽을 때까지 나를 속일게 빤하지만 떨쳐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가장 많이 농락하는 것 또한 희망이 아닌가 싶다.
플러그 하나로 죽고 살지
밤이 오면 접혔던 허리를 펴고
허둥지둥 일어서지
양팔을 벌려 춤을 추지
어차피 불법인생
내 가계의 내력은 바람뿐이지
날마다 비척비척 취한 인생이지
옆집 PC방 구석구석
따닥따닥 자판을 두들기며 바람 잡는 에어백들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겠다는 헛헛한 바람들
세상을 버티는 암기 과목은 없다고
어젠 헛바람 하나 오줌발을 갈겼지
이봐! 허풍선, 긴장 늦추지 마
엇박자로 취한 척 말고
착, 착, 착 스텝을 밟아봐
요즘 유행하는 벨리댄스나 추어 보자고
이봐! 뱃속에 든 건 또 뭐야?
바람은 믿을 게 못돼
바람의 원조인 아버지만 봐도
까무러치던 어머니
어제 쌍둥이 자매가 수능바람에 떠밀려
옥상에서 추락했지
에어백인 어머니는 미처 몰랐다는군
우린 좀 더 새로운 바람이 필요해
네가 믿는 에어백은 언제 터질지 몰라
정작 터져야할 때
터지지 않는 게 에어백이지
—「에어백 증후군」전문
가게 맞은편에 PC방 단골 층을 살펴보다가 놀랍게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몇몇 사람들의 속사정을 우연히 알게 된 후로 생각이 많아졌다. 40대가 훌쩍 넘도록 직장을 구하지 못해 늙은 어머니가 폐휴지를 모아 근근이 살아가고 있거나 인력시장을 나가봐도 그냥 돌아오기 일쑤라고 한다. 나름대로 폐휴지를 모아 드리기도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삶은 그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무기력증은 사회 곳곳에 팽배하다. 너나할 것 없이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안간힘을 써보다가 기력이 다하면 추락하고 만다. 딱히 어른들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수능시험에 실패한 학생들마저 생명을 경시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다 누가 이 사회를 이토록 비틀거리게 했는가. 사방 어디서든 터질 수 있는 긴박한 이 시대, 이미 중심은 쏠려 있다.
501호, 넝쿨장미와 사철나무 엉겨 싸우네
반평생 가시에 찔려 성한 곳이 없다는데
여전히 장미는 가시를 세우고
근엄한 소나무 4주간의 조정기간을 주네
맞은 편 401호
아직도 녹슨 칼을 휘두르는 칠순 포플러
이웃집 담 넘어 가지 뻗다가 가지치기 당했네
그 칼도 이가 빠져 버렸네
젊은 등꽃은 서류를 들고 택시에 오르네
친친 아무나 휘감은 남편 덕분에
덩굴 채 들고 가도 좋다는 판결이 났네
그늘 밑 벤치도 그녀 것이네
어젯밤 앳된 아카시아와 놀아나던 밤나무
휘파람에 아카시야 향이 흘러나오네
협의이혼에 도장을 찍은 늙은 너도밤나무
갈 곳이 없네
까칠한 탱자나무 아래
숨을 몰아쉬던 민들레
어느 바람 불던 날
딱 한번 옆에 선 라일락 어깨에 기대었네
그 바람에 양육권을 빼앗겨
아이들을 어디론가 보내야 한다고 울먹이네
서류접수 창구에 늘어선 비 맞은 후줄근한 꽃, 나무들
꽃잎 지고 가지가 부러졌네
법원 마당, 오랜만에 외출한 철없는 어린 철쭉들 깔깔깔 웃네
라라라, 법정은 즐거운 곳
새로운 길이 시작 되는 곳
라라라, 어린 철쭉들 아무것도 모른 체 깔깔깔 웃네
—「라라라, 법원에서」전문
이혼시대가 부제로 붙은 이 작품은 가정이 붕괴되는 사회의 일면이다. TV드라마에서 조차도 막장이 아니면 통하지 않는다. 어쩌다 드라마를 볼 기회가 있을 때 삶에 회의를 느끼곤 한다. 작가들의 자질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기교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시청률에 비례해 작가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인지가 궁금하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프로그램이 난립하고 있지만 누구도 반기를 들거나 이상히 여기지 않는다. 도리어 부추기고 있다. 이 시대는 이미 비정상적인 것들의 주체가 된 것일까? 순리를 역리로 쓰는 시대가 되고 전 세계적으로 이혼율 1위라는 불명예 안고 가정의 해체는 이미 도를 넘어서고 았다. 과연 이 비극적 시대의 중심에 누가 서 있는가. 그것은 ‘나’ ‘우리’가 아닐까 또한 후일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후대에게 물려주려면 스스로의 책임의식을 고취해야만 되지 않을까.
[약력]
* 인천 옹진군 출생
* 2005년 《시인정신》신인상
* 제10회 수주문학 우수상 수상
* 웹월간詩[젊은시인들]편집장 역임
* 《계간 시인정신》편집기획위원
* 시집『미스 물고기』북인
* 메일 : ffpo704@naver.com
* 주소: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2동 1380-4 창그린맨션 401호 (우)426-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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