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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이 중간에 쇠퇴하여 외난(外難)이 갑자기 이르렀는데, 이때에 종척(宗戚)인 경(卿)이 있어 우리 선조[宣廟]를 도와 마침내 중흥(中興)의 업(業)을 이루었다. 하늘이 정충(精忠)을 도와 대수(大壽)를 내려 이제 87세인데 정력이 쇠퇴하지 않아서 묘당(廟堂)에 앉아 치도(治道)를 논할 만하나, 오히려 성만(盛滿)을 경계하여 금양(衿陽, 금천(衿川)) 오리(梧里)에 물러가 산 지 여러 해가 되었다. 하루는 윤영(尹鍈)을 불러 알리기를, “내 나이가 이미 많거니와, 내 사업은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 없으나, 자손들이 서로 알지 못하는 자에게 부탁하면 사실이 없는 것을 과장하여 보고 듣는 바를 그르칠 것이니, 내 뜻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평소에 서로 친하게 지낸 자는 이 숙평(李叔平, 이준(李埈))이 있을 뿐이니 묘비에 적는 글을 부탁하면 내가 섭섭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윤영이 상공(相公)의 명을 가지고 왔는데 그 뜻이 정녕하였으나, 내가 말하기를, “상공이 서거한 뒤에는 반드시 말할 자가 있을 것이니, 모(某)가 미칠 바가 아니다.” 하고 사양하였는데, 한사코 청하는 것이 더욱 부지런하였다. 그래서 옛사람이 자기가 죽은 뒤의 일에 대하여 신중히 여겨서 스스로 그 명(銘)을 지은 자가 있고 이것을 친구에게 청한 자도 있으니 상공이 오늘 부탁한 것이 어찌 이 뜻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하여 삼가 가장(家狀)에 따르고 평소의 이목(耳目)에 익숙한 덕행(德行)을 참고하여 대략 적어서 뒷날 말의 참뜻을 아는 군자(君子)를 기다린다.
공의 고조(高祖) 이치는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의 열한째 아들이며 습작(襲爵)하여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다. 증조(曾祖) 이정은(李貞恩)은 수천군(秀泉君)에 봉해졌으며 문학이 아담한 것으로 남 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에게 존중되었다. 할아버지 이표(李彪)는 청기군(靑杞君)에 봉해졌다. 아버지 이억재(李億載)는 함천군(咸川君)에 봉해졌는데 귀공자의 습성을 털어 버리고 오로지 경서(經書)ㆍ사서(史書)에 정진하여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음률(音律)에 정통하였다. 일찍이 사기(沙器)에 물을 담고 떨기진 나뭇가지를 가지고 쳐서 높낮이를 조절하는데 그 소리가 맑고 밝게 나서 공중으로 퍼지니, 듣는 자가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함천군이 먼저 장가든 우씨(禹氏)에게서는 후사가 없고, 뒤에 장가든 동래 정씨(東來鄭氏)는 감찰(監察) 정치(鄭錙)의 딸인데, 정미년(丁未年, 1547년 명종 2년) 10월 어느 날에 어느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기가 남들보다 뛰어나서 글을 읽어도 한 번 보면 바로 외웠다. 스스로 옷을 입고 다닐 만큼 자라서는 늘 바깥채에서 기거하였는데, 서모(庶母)가 정성으로 종을 시켜 번갈아 모시게 하였으나 끝내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명성이 대단하였으며,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23세에 급제하였다. 평소에 교유(交游)를 좋아하지 않아서 문을 닫고 홀로 앉아 먼지가 방에 가득하여 보이는 것이 없을 듯하였는데, 하루는 유 서애(柳西厓, 유성룡(柳成龍))가 들러 보고서 크게 감탄하고 기특히 여겼다.
벼슬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서 비롯하여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ㆍ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을 거쳐 성균관(成均館)에서 전적(典籍)ㆍ직강(直講)ㆍ사성(司成)을 지냈으며, 호조(戶曹)ㆍ공조(工曹)ㆍ예조(禮曹)에서 좌랑(佐郞)ㆍ정랑(正郞)이 되고, 사간원(司諫院)에서 정언(正言)ㆍ헌납(獻納)ㆍ사간(司諫)이 되었으며, 사헌부(司憲府)에서 지평(持平)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가 되고, 옥당(玉堂)에서 교리(校理)ㆍ부응교(副應敎)가 되었으며, 전계(轉階)하여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ㆍ호조 참의(戶曹參議)가 되고 안주 목사(安州牧使)가 되었으며, 초자(超資)하여 형조 참판(刑曹參判)ㆍ대사헌(大司憲)ㆍ호조 판서(戶曹判書)ㆍ예조 판서(禮曹判書)ㆍ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이것이 벼슬을 지낸 차례이다.
젊었을 때에 기품이 자못 호방하였다. 집이 낙산(駱山) 아래에 있었는데 번번이 거문고를 가지고 산에 올라 스스로 타고 노래하였으며 옛사람의 악부(樂府)까지도 소리를 길게 끌며 소리 높혀 읊으면 다 곡조에 맞았다. 때로는 삼각산(三角山)의 백운대(白雲臺)와 개성(開城)의 성거산(聖居山)과 영동(嶺東)의 풍악(楓岳, 금강산(金剛山))과 영변(寧邊)의 묘향산(妙香山) 등 기승(奇勝)이며 유명한 곳에는 모두 얽매임 없이 홀로 가서 즐겼다.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 겨울에 성절사 질정관(聖節使質正官)에 충차(充差)되었는데 행낭에 물건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일행이 그 청렴함에 감복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574년 선조 7년) 겨울 조정에서 병정을 장부에 등록할 때에 공이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로서 이 사무를 아울러 맡게 되어 (목장이 있는) 섬에 들어가 여러 날 동안 말을 점검하는데 서로 아는 수령(守令)은 흔히 예쁜 계집을 꾸며서 보내어 즐겁게 하려 하였으나 공이 다 물리쳤다. 황해도 도사로 부임한 뒤에 감사(監司)가 잇달아 네 사람이나 갈려서 문부(文簿)가 수북히 쌓였는데 공이 잘 재결하여 넉넉히 남은 힘이 있었다. 사상(使相, 관찰사(觀察使)ㆍ절도사(節度使) 등 2품 이상의 사신)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결단하기 어려운 소장(訴狀)을 죄다 맡겼는데, 무릇 여탈(予奪)이 있었으나 재소(再訴)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공(李公)이 조정에 돌아가서 크게 칭찬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576년 선조 9년) 봄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는데, 묘당(廟堂)에서 정목(政目, 관직의 임면(任免)에 관한 기록)을 보고 말하기를, “영특한 재능이 있으면서도 이제야 비로소 현직(顯職)에 통하였으니 마음을 고요하게 지키는 사람일 것이다.” 하였다. 무인년(戊寅年, 1578년 선조 11년)에 옥당에 들어갔는데, 경서를 강독(講讀)할 때에 음운(音韻)이 맑고 화창하며 미묘한 말의 깊은 뜻을 나타내어 밝히는 것이 많았으므로 임금이 번번이 마음을 기울여서 들었다.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 겨울에 응교(應敎)를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었으며, 중국 사신 황홍헌(黃洪憲)ㆍ왕경민(王敬民)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왔을 때에 공이 연위사(延慰使)로서 안주(安州)에 갔다. 중국 사신이 인재를 감별하는 식견이 있었는데 역관(譯官)을 불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단정하고 품격이 있으니 소년 재상(宰相)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조정의 관원들이 분당(分黨)하여 서로 배척하거나 원조하다가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화(禍)가 비로소 일어났는데, 이때 공과 박근원(朴謹元) 등 제공(諸公)이 승지(承旨)로 있었다. 박공(朴公)은 성질이 자못 격렬한데 늘 영상(領相) 박순(朴淳)이 하는 짓을 언짢아하고 시의(時議)에 찬동하는 유생(儒生)의 상소는 다 물리쳐 버렸다. 이때 상소하여 승정원이 임금의 총명을 가린다고 논하여 임금을 격노하게 한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승정원의 계사(啓辭) 때문에 전교(傳敎)하기를, “이 계사는 누가 지은 것인가?” 하였다. 동료가 사실대로 대답하려 하였으나, 공이 안 된다고 고집하고 또 아뢰기를, “동료에게 죄를 돌아가게 하여 나머지만 모면할 생각을 하는 것은 신들이 차마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두세 번 전교하여도 끝내 대답하지 않으니, 임금이 모두 내쳤다. 이때부터 수년 동안 임야(林野)에 물러가 살면서 경전과 사서로 스스로 즐겼다.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 동안에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안주(安州)는 서로(西路)의 문호(門戶)인데 여러 번 적합하지 않은 수령의 행정을 겪어서 잔폐(殘弊)가 지나치게 심하므로 반드시 매우 명망이 있는 사람을 가려서 차출하여 보내야 한다.” 하였으나, 차출된 두어 사람이 다 계략을 써서 회피하였다. 정해년(丁亥年, 1587년 선조 20년) 봄에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안주는 버린 땅이 되었으나 잔폐한 것을 구제할 수 있다면 오직 이아무개에게 맡길 만하니, 기폐(起廢, 파직된 사람을 기용(起用)함)하여 보내소서.” 하여 윤허를 받았다. 공이 이튿날 홀로 떠나서 그곳에 이르러 굶어 죽은 주검이 들판에 가득한 것을 보고 감영(監營)으로 달려가서, 각 고을에서 1만여 섬의 곡물을 나누어다가 굶주린 백성을 먹이고 파종(播種)하게 하기를 청하고, 또 조선(漕船)을 물가 고을에 미리 보내었다가 밤낮으로 날라 가니, 경내(境內)에 버려지거나 야윈 자가 없어졌고, 정사를 보살핀 지 겨우 두어 달 만에 폐정(廢政)이 다 좋아지고 온 고을 안이 조금도 근심이 없었다. 공은 성신(誠信)으로 교화하는 것을 먼저 힘쓸 일로 삼았으므로 간사한 자가 사라지고 해악이 없어져서 백성이 다 안정하였으니, 세상에서 고도(古道)는 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어찌 또한 믿겠는가? 정적(政績)이 으뜸이기 때문에 특별히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었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는데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의 역옥(逆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동인(東人)이 화를 당한 옥사)에 원통한 일이 많았던 것을 논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4월에 왜적이 쳐들어와서 임금이 평안도로 갈 때에 공을 본도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았는데, 공은 7도(道)가 와해된 지금 본도의 수십 고을만이 병화를 안 당한 깨끗한 땅이니 반드시 이 도를 개척하여 중흥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때 기무(機務)가 매우 많고 인심이 흔들릴 때인데, 공이 체찰사(體察使) 유공(柳公, 유성룡(柳成龍)을 가리킴)과 마음을 같이하고 일을 함께 하여 문부(文簿)가 무더기로 쌓이더라도 공이 이리저리 잘 버티고 괴어서 다급할 때에 처치하는 것이 다 그때그때 적당하였다. 겨울에 중국 군사가 평양성(平壤城)을 회복하고 이듬해 9월에 임금이 환도(還都)할 때에 공에게 명하여 본도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였고 여러 번 품계가 올라 숭정 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다.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제수되고 선무 공신(宣武功臣)의 호를 받고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조정에 돌아와 사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고 영남(嶺南)에 독부(督府)를 개설하였다. 이때 중국 군사가 변경(邊境)까지 가까이 갔는데, 공이 식량 공급을 잘 조정하여 군량이 모자라게 하지 않았다. 또 적을 제압하는 요령은 성을 지키는 것 말고는 딴 방책이 없다고 생각하여 곧 각처의 산성(山城)을 수선하였다. 이때 군률(軍律)이 해이하여 문란해지고 제도(諸道)의 곤수(閫帥)가 법을 어기는 일이 많으므로 다 잡아다가 매를 때렸는데, 사납고 무지한 자일지라도 다 그 엄명한 데에 복종하고 원망하는 뜻이 없었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에 영남에서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때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중국 군사를 거느리고 직산(稷山)에 주둔한 적을 쫓아가 토벌하였으므로, 임금이 중국 조정에 칭찬하여 아뢰려 하였다. 이때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라는 자가 경리를 중상하느라 힘을 남기지 않으므로, 임금이 문장력과 언변이 있고 응변을 잘하는 상신(相臣)을 가려서 보내려 하였는데, 당시의 의논이 영상(領相)이 가야 할 것이라 하였다. 공이 임금에게 청하기를, “영상은 90세 된 늙은 어머니가 있을 뿐더러 나라가 어지러운 이때에 사신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 유성룡은 외방에 있으니, 신이 노고가 심하더라도 대신 가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에 앞서 중국사람 사세용(史世用)이라는 자가 일본에 있으면서 그 들은 바에 따라 아뢰기를, “왜놈이 조선에 길을 빌려 중국을 침범하려 합니다.” 하였는데, 중국 사람들이 서로 전파하여 우리나라가 왜한테 편드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때에 공이 떠나서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렀는데 뜻밖에 정응태 일행이 왕래하는 것을 만났다. 정응태가 공이 가면 반드시 경리를 칭찬하여 아뢰리라는 것을 알고 크게 섭섭히 여겨 어두워진 뒤에 두세 장관(將官)을 보내어 요동(遼東) 경계까지 공을 쫓아가서 매우 급하게 돌아가기를 재촉하였다. 공이 중국말을 알아듣고 또 말하기를, “우리들은 국왕의 명을 받들고 중국 조정에 들어가는데, 이제 중도에서 멈추게 하면 임금의 명을 막는 것이다. 너희들이 힘으로 일행을 묶어서 거꾸로 실어 갈 수는 있겠으나, 우리들이 국왕에게 변명할 말이 있을 터인데, 어찌 너희가 그럴 수 있겠는가?” 하니, 장관이 강제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돌아갔다. 정응태가 중국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곧바로 아뢰기를, “신이 조선에 가니 길가에 떨어진 작은 책 하나가 있었는데 다 조선이 왜를 섬기는 절목(節目)이었습니다. 이번 왜구(倭寇)는 수상(首相) 이원익과 그 국왕이 길을 빌려 주어 인도한 것이니, 이원익을 하옥하고 엄히 캐어물으면 그 정상이 절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말이 갖가지로 기교(奇巧)하였다. 공이 드디어 부사(副使) 허잠(許箴)과 서장관(書狀官) 조정립(趙正立)과 함께 날마다 육부(六部)와 과도관 도어사(科道官都御史)의 아문(衙門)에 말하여 해명하고 또 통정사(通政司)에 정문(呈文)하고는 머리로 바닥을 두들겨 피를 흘리고 각로(閣老)가 나오는 것을 기다려 호소하니, 각로가 온화한 말로 이르기를,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위에 전달하여 아뢸 것이오.” 하였다.
요동에 돌아왔을 때에 본국의 대간(臺諫)이 유공(柳公)이 연행(燕行)을 스스로 주청하지 않은 것을 논하고 기회를 타서 모함한다는 말을 듣고 공이 매우 분노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들어가 뵈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이 경사(京師)에 가서 힘써 변명하느라 노고가 많았다.” 하였다. 공이 사례(謝禮)하고 나서 아뢰기를, “유성룡은 청렴한 절개를 스스로 지키고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 실로 당대에서 첫째가는 사람이고 그가 곧 스스로 주청하여 가지 않은 까닭도 성명(聖明)이 아시는 바인데, 이제 아무개들의 참소(譖訴)를 현부(賢否)의 준거로 삼아 마침내 당대의 선류(善類)를 다 유당(柳黨)이라고 소외하여 사림(士林)의 화가 여기서 비롯하였으니, 신은 실로 나라 일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으며 신의 외로운 자취도 어찌 홀로 조정에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차자(箚子)로 아뢰기를, “조정이 존중되지 않고 임금의 권위가 서지 않아서 이영국(李榮國)ㆍ채겸진(蔡謙進) 등이 감히 사론(邪論)으로 천청(天聽)을 어지럽혀서 시비가 분명하지 않고 거조(擧措)가 그릇되게 만듭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현사(賢邪)가 분별되지 않아서 조정이 안정(安靖)하지 못합니다.” 하고, 홍여순(洪汝諄)ㆍ임국로(任國老)의 이름을 낱낱이 들어 말하기를, “이런 사람들을 쓰면 반드시 국가에 화를 끼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연중1)(筵中)에서 시사(時事)를 극론하고 성명(聖明)이 그 시비를 밝히고 사랑과 미움으로 기쁨과 노여움을 삼지 말기를 청하고, 또 현상(賢相)을 위임하여 뭇 경박한 자를 진압하기를 청하고 신처럼 어리석은 자는 쓰여서는 안 된다 하여 반복하여 아뢰어 벼슬에서 물러가겠다고 청하여 마지않으니, 임금이 달래어 이르기를, “경은 종척(宗戚)인 대신인데 나를 버리고 초(楚)나라로 갈 것인가? 제(齊)나라로 갈 것인가?” 하였다. 공의 말은 더욱 격렬하고 간절해졌으나, 임금의 하교(下敎)는 더욱 유순해졌으니, 대개 공의 충직이 지성에서 나온다는 것을 본디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물러가 동호(東湖)에 살았는데, 좌규(左揆, 좌의정)의 임명을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년) 가을에 병이 위중하였는데, 임금이 매우 근심하여 문병하러 보낸 사람이 잇달았고, 또 점치는 자를 침소 안으로 불러 그 수명이 길 것인지 짧을 것인지를 묻고, 강가는 몹시 춥다 하여 어실(御室)의 전렴(氈簾, 모직 방장)을 걷어서 하사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선조[宣廟]의 상을 당하였다. 선조가 일찍이 건원릉(健元陵, 태조의 능) 곁에 장지(葬地)를 잡아 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술관(術官)이 장지가 조상의 분묘에 가까운 것을 불길하다 하였으나, 공이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힘써 말하기를, “명나라의 여러 능(陵)은 다 한 산에 잡았는데 이는 옛적의 족분묘(族墳墓)의 뜻이고 부장(祔葬)은 점치지 않는다는 말에도 어그러지지 않습니다.” 하였다. 두세 번 논계(論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공은 술가(術家)의 설(說)에 동요되지 않고서 일찍이 말하기를, “살아서 집을 같이하고 죽어서 무덤을 같이하는 것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비추어 보아도 어찌 아름다운 뜻이 아니겠는가? 이 뒤로 백세(百世)의 먼 후손까지도 다 한 언덕에 장사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 즉위년) 봄에 영상(領相)에 제수되었는데 말하기를, “경기 백성은 스스로 각사(各司)에 공물(貢物)을 바치는데 교활한 서리(胥吏)가 마음대로 받아들이거나 물리치므로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으니, 백성이 각각 선혜청(宣惠廳)에 쌀을 바치게 하고 각사의 주인2)(主人)이 그 쌀을 받아서 사서 바치도록 하라.” 하였다. 이는 곧 송(宋)나라의 면역법(免役法)인데 백성이 편리하게 여겼다. 공이 또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모후(母后)를 섬기는 데에는 반드시 공경해야 하고 동기를 접대하는 데에는 반드시 화목해야 합니다.” 하고, 여알(女謁)을 물리치고 토목(土木)을 경계하는 등의 일에 언급하였다. 하루는 연중에서 또 광해군의 잘못을 곧바로 지적하였는데, 광해군이 진노(震怒)하여 옷을 털고 들어가 비빈(妃嬪)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모욕당한 것이 지극하다. 너희들은 삼가라. 그러지 않으면 그 손에 죽을 것이다.” 하였다.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 때에 공이 국청(鞫廳)에 말하기를, “모역대죄(謀逆大罪)는 반드시 증거가 완전히 갖추어져야 옥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 하고, 이어서 상공(相公)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들이 일찍이 이 옥사의 원통한 것을 말하였거니와, 이제 그 처음에 말한 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였다. 마침 엄일괴(嚴一魁)ㆍ만애민(萬愛民) 두 차관(差官)이 왕래하여 큰아들 임해군을 버려두고 작은 아들 광해군을 세웠다는 뜻으로 본국에 힐책하였다. 이때 대신과 정인홍(鄭仁弘)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임해군의 머리를 베어 차관에게 보일 것을 임금에게 청하고, 또 공에게 함께 차자를 올리자고 협박하였으나, 공이 오히려 동요하지 않고 홀로 친족을 친근히 하는 인애(仁愛)를 권면하니, 당시에는 이를 역적을 비호하는 것이라 하였다.
광해군이 또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화(禍)가 헤아릴 수 없었다. 이때 어떤 재신(宰臣)이 공에게 의논하기를, “이제 왕자의 일에 죽는다면 뒷날 폐모(廢母)의 논의가 있을 때에 누가 다시 구제할 것입니까?” 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죄가 없는데 왕자를 죽이는 것이 작은 일인가? 자기 뜻을 굽히고 남을 따라 일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다.”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휩쓸려 좇아서 논열(論列)하였으나, 공은 홀로 병을 핑계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상공 심희수(沈喜壽)가 광해군에게 아뢰기를, “이는 큰일이니, 이원익과 의논해야 합니다.” 하니, 광해군이 말하기를, “듣건대, 완평(完平, 이원익)은 병이 있다 하니, 그가 참여하지 않은 것은 추세(趨勢)이다.” 하였는데, 아마 이의가 있을세라 염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광해군이 모후를 폐출(廢黜)하고자 하였는데 정조(鄭造)ㆍ윤인(尹訒)이 먼저 발의(發議)하여 모후를 별궁(別宮)에 두고 대비(大妃)라 부르지 않고 서궁(西宮)이라 불렀다. 공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윤기(倫紀)의 변란은 죽음으로 다투어야 한다.” 하고, 자제를 물리치고서 차자를 지어 스스로 써서 바치기를, “어머니가 자애하지 않더라도 아들은 불효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충직하였다. 시의(時議)는 고문하고자 하였는데, 어느 날 광해군이 명하여 홍천(洪川)에 정배(定配)하게 하였고, 어느 해에 여주(驪州)로 배소(配所)를 옮겼다. 이때 광해군이 은(銀)을 바치게 하고 죄를 사면하라고 명하였는데, 당시 대신들이 상의하여 1백 금(金)을 거두고 사유(赦宥)하려 하였으나, 심상(沈相)이 말하기를, “이는 완평의 뜻에 어그러진다.” 하여,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아! 공이 광해군에게 경계하도록 아뢴 것은 오래지 않아서 그 말이 다 징험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공의 선견에 더욱 감복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봄에 금상(今上, 인조)이 하늘의 명을 받고 맨 먼저 궁정(弓旌)의 부름3)을 받았는데, 광해군 때의 간흉(姦兇)의 죄를 논하게 되면 공은 홀로 간절히 “태도(泰道, 온갖 일이 형통하여 편안하게 하는 방도)는 더러운 것까지도 포용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신광업(辛光業)은 일찍이 공의 죄를 신문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협박당하여 상종한 것이니 다스릴 수 없다.” 하였고, 또 유희분(柳希奮)ㆍ박승종(朴承宗)에 대해서는 “그 재산까지 모두 몰수할 수 없다.” 하였으니, 평번(平反, 죄를 반복하여 심사해서 가볍게 다스림)을 논의하는 것이 흔히 이와 같았다.
공은 만족한 데에서 그치는 분수에 밝았으므로 여러 번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청원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가을에 사궤장4)(賜几杖)하고 내관(內官)과 승지(承旨)를 보내어 본가[本第]에서 잔치를 베풀고 삼공(三公)ㆍ육경(六卿)에게 명하여 다 모이게 하였는데, 나 이준(李埈)은 사인(舍人)으로서 말석(末席)에 참여하였고 학사(學士) 유근(柳根)이 시를 지었고 공사(公私)의 손님 접대는 그 일을 명주에 그렸으니, 그 예수(禮數)의 성대함이 근고(近古)에 없었던 것이다. 장릉(章陵,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이 서거하였을 때에 훈공(勳功)이 있는 재상이 추숭(追崇)하자는 논의에 앞장선 일이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제례(制禮)가 지엄(至嚴)하니, 나를 낳은 자의 사은(私恩) 때문에 종통(宗統)의 대의(大義)를 폐기할 수 없다.” 하였다.
공이 만년에 다리에 병이 나서 걷기가 어려웠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향에 물러가 있었으나 때때로 병을 견디고 입조(入朝)하고, 늙었다 하여 스스로 안일하지 않았다.
공은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는 그 효성을 다하고 상중에 있을 때에는 그 슬픔을 다하였으며 제사하는 예(禮)는 늙어서도 정성이 줄지 않았고 우애에 돈독하였다. 일찍이 현감공(縣監公)과 함께 거처하였는데 형제가 날마다 한결같이 화목하였고 현감공이 별세하여서는 묘갈(墓碣)을 세우고 그 서문(序文)과 명문(銘文)을 다 스스로 새겼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그 분수에 안정하지 못하므로 분수에 어그러지는 것을 꾀한다. 이 장애를 뛰어넘어야 온갖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 하였다. 벼슬이 1품에 이르렀으나, 봉록(俸祿)이 들어온 것은 곤궁한 친족에게 흩어 주어서 단표(簞瓢, 대그릇과 표주박.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담는 그릇)가 비는 때도 있었다. 사는 집이 좁아서 무릎을 들일 수 없어도 태연히 살았는데 금상(今上) 때에 여러 번 적몰(籍沒)한 역적의 집을 하사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임금이 유사(有司)에 명하여 오리동(梧里洞)에 집을 짓게 하였으나 또한 사양하였고, 두 번 명하기에 이르러서야 다만 두어 칸 집을 얽어서 살았으니, 안에 터득한 것이 크므로 외물(外物)에는 절로 경시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 겨울에 임금이 흰 명주 이불과 요 각각 하나를 하사하고 이르기를, “청렴하고 검소한 것은 경(卿)의 소리5)(素履)이니 이제 이것으로 표창한다.” 하였다. 선조[宣廟]때에 청백리(淸白吏)를 뽑았는데 공과 서애(西厓)가 다 뽑혀 적히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벼슬살이할 때에 조금 삼가기는 하였지만 곤궁에 처하였을 적에 증여하는 물건은 사양한 것이 없었는데도 청렴하다 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수령을) 지낸 곳에는 생사(生祠)가 있고 청덕비(淸德碑)가 있었으나 다 사람을 시켜 어두운 밤을 틈타서 헐게 하였으니, 자기 청렴을 남이 아는 것을 꺼린 옛사람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은 금도(襟度)가 정명(精明)하고 표리(表裡)가 순일(純一)하며 평소에 사기(辭氣)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낯빛으로 웃으며 말하는 것이 사랑스러웠으나, 일에 임하면 독립하여 산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어 일을 처리하면 순전히 ≪시경(詩經)≫ㆍ≪서경(書經)≫을 인용하고 고사(古事)를 참고하여 절로 이치에 맞았으므로, 어떤 재신(宰臣)이 남에게 말하기를, “누가 금세에는 성인(聖人)이 없다 하던가? 완평은 참으로 성인이다.” 하였다. 이때는 일이 많았는데 묘당에 큰 논의가 있으면 반드시 공이 한 마디 말하기를 기다려서 결정하였으므로,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일마다 행수6)(行首)의 재처(裁處)를 따른다.” 하였고, 신흠(申欽)공도 그렇게 말하였으며, 공도 오성을 언급하면서 반드시 말하기를, “위인(偉人)이다.” 하였고, 일찍이 말하기를, “정치는 반드시 만물에 미쳐야 하고 지론(持論)은 되도록 후(厚)해야 한다.” 하였다.
글을 지으면 조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지만 체재는 갖추어서 보기에는 간단하고 담박한 듯하나 의미가 심장하였다. 임금에게 고하는 사연에 이르러서는 지극한 정성이 간절하여 반드시 임금을 감동시켰으므로 상소나 차자가 한 번 나오기만 하면 일시에 전파하여 외었으나, 공은 문장의 화려한 것을 자기 일로 삼은 적이 없으므로 지은 글을 짓는 대로 곧 버려서 집에 감춘 사고(私稿)가 없었다. 그러나 공의 영구히 전할 것은 본디 절로 있으니, 또한 어찌 글에서 기대하겠는가?
내가 영남에서 비로소 공을 알았는데 한 마디 칭찬을 들었고, 사인(舍人)이 되어서는 자주 춘풍(春風)의 자리를 모셨다. 공이 일찍이 세상 사람들이 명예를 꾀하는 것에 언급하게 되었는데 웃으며 말하기를, “사람에게 명예는 뜬구름과 같을 뿐더러 사람이 명예에 대한 욕심을 타파하지 못하면 마침내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더구나 부형을 사랑하는 자제가 혹 문필로 이름난 사람을 구하여 사실이 없는 일을 찬양한다면 남을 속일 수는 있겠으나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제까지도 그 말이 귀에 남아 있는데, 이제 이 부탁에 대하여 어찌 감히 그 뜻을 본받지 않고 조금이라도 말을 과장하겠는가?
공의 휘(諱)는 원익(元翼)이고, 자(字)는 공려(公勵)이다. 벼슬을 지낸 차례는 공이 손수 적은 것이 있거니와, 평소에 지향(志向)하고 실천한 대개는 그 자제가 적은 것에 의거하여 썼으나, 내가 견문(見聞)이 적으니 어찌 고명(高明)한 것을 형용할 만하겠는가?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년) 정월 29일에 서거하니, 88세를 누렸고 4월 6일에 어느 산의 어느 향(向)인 언덕에 장사하였다.
아내인 학생 정추(鄭樞)의 딸은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고 먼저 서거하였는데 공과 같은 언덕에 장사하였다. 1남 1녀가 있는데, 아들 이의전(李義傳)은 벼슬이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이르고 10여 고을을 맡았는데 다 청백(淸白)으로 저명하였으며, 딸은 군수(郡守) 이정직(李廷稷)에게 시집갔다. 이의전은 3남 3녀가 있는데, 맏아들 이수약(李守約)은 현감(縣監)이고, 다음 이수기(李守記)는 주부(主簿)이고, 다음은 이수강(李守綱)이며, 맏딸은 사인(士人) 허목(許穆)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이정직은 2남이 있는데, 이적(李
)은 정자(正字)이고, 이적(李積)은 진사(進士)였으나 일찍 죽었다. 측실(側室)에서 2남 7녀가 있는데, 아들은 이효전(李孝傳)ㆍ이제전(李悌傳)이고, 딸은 첨사(僉使) 김여현(金汝鉉)ㆍ윤계(尹誡)ㆍ송흥축(宋興築)ㆍ이시행(李時行)ㆍ이교(李喬)ㆍ윤영(尹鍈)에게 각각 시집갔다.
공의 장사 때에 공의 조카 이인전(李仁傳)이 나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숙부의 갈명(碣銘)을 이제 새겨야 할 것인데 졸(卒)ㆍ장(葬)ㆍ시(諡)가 적히지 않았으므로 감히 청한다.” 하기에, 내가 그 글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상국(相國)의 행적은 내가 일찍이 치명(治命)을 받아서 지은 것이 있으나, 그 말이 조금이라도 찬양에 관계되는 것은 실로 상공(相公)이 좋아하지 않으므로 본디 미진한 것이 있었다.” 하였다. 이제 그 원본을 살펴보니 약간의 말은 지나치게 간단하고 담박하므로 이제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데, 공의 평소의 뜻은 아니겠으나 말하지 않으면 기사(記事)의 체재에 어그러지므로, 인정으로 차마 할 수 없고 의리상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마지못하여 대략 서술한다.
공이 지키는 것이 확고한 것은 천하의 화복(禍福)을 다 들어 말하여도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고, 그 자율(自律)이 엄한 것은 아주 작은 가족의 일로도 그 지조를 이지러뜨리지 않았으며, 거취가 용감한 것으로 말하면 냇둑이 터져서 빠르고 사납게 흐르는 것 같아서 분육7)(賁育)이라도 빼앗을 수 없었다. 이제 행사에 나타난 것으로 공평하게 헤아리니, 이것으로도 공의 평생을 살피기에 충분하다. 아! 현직(顯職)에 있고 중망(重望)이 있는 인사가 매우 성대한 때를 만났더라도 혹 근거 없는 비난을 받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나, 공으로 말하면 벼슬한 60여 년 동안 늘 혁혁한 명성이 뛰어나서 아낙이나 어린아이일지라도 다 그가 어진 재상임을 알고 소문을 듣고서 공경할 마음이 생기니, 이것이 어찌 덕행(德行)이 순수하고 명절(名節)이 완전하여 마침내 원우(元祐)의 완인8)(完人)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아! 또한 성대하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신하의 직분은 오직 정직과 충성이니, 평소의 담소에도 왕사(王事)를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을 자부하였네. 이해(利害)로 요동하면 지조를 잃지 않는 자가 드물지만, 뛰어난 우리 공은 거친 물결을 버티는 기둥이었네. 일찍이 선조(宣祖)를 만나 응대가 민첩하였으나, 은위(恩威)가 험난함을 당하여 관방(關防)이 편안하지 않았네. 안으로는 군무(軍務)를 처리하고 밖으로는 군량(軍糧)을 조달하니, 중흥(中興)의 책임이 공의 몸에 달려 있었네.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당(黨)에 혼탁해지지 않으니, 누가 어질지 않은 자이기에 바른 것을 가리켜 굽다 하는가? 치(畤, 신에게 제사하는 땅)에 노니는 기린을 한 그물로 다 잡으니, 독사가 독을 품고 제 마음대로 하고 말 것이네. 마음을 털어놓고 다 말하여 시초에 화를 구제하였으나, 임금이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니, 신하의 자취가 어찌 편안하겠는가?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니, 큰 인물의 뜻을 누가 말리겠는가? 높은 벼슬과 후한 녹봉은 신하가 마음 끌리는 것이겠으나, 머뭇거리며 떠나지 않고 남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신하가 천하게 여기는 것이네. 광해군 때에 기강이 무너지니, 모후를 폐출하기를 청하여 뭇사람의 의논이 붙좇는데, 만마(萬馬)가 분주한 가운데에 공이 홀로 뛰어났네. 왕후의 권위가 서지 않는데, 누가 그 넘어지는 것을 붙들겠는가? 한 조각의 혈소(血疏)가 산진(山鎭, 국토를 진수(鎭守)하는 명산(名山))처럼 우뚝하니, 임금의 노여움에 곧바로 저촉되어 위노(威怒)가 크게 진동하였네. 고충(孤忠, 돕는 사람이 없는 외로운 충성) 한 울타리에 검산(劍山, 검으로 이루어진 산. 법의 엄준함을 뜻하는 말)이 사방을 에워싸니, 굶주림과 추위에 곤궁하였으나 신(神)이 보호하였네. 성왕(聖王)이 천명(天命)에 응하매 도깨비가 자취를 감추니, 공의 복직이 어찌 늦으랴? 호위하는 군사도 경의를 표하였네. 10년 동안 국도를 떠났다가 좀처럼 오지 않을 좋은 날을 만나니, 어찌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부지런히 임금을 섬기지 않겠는가? 낮 시각이 다하고 밤에 다니는 것은 옛사람이 부끄러워한 것이니, 의리를 귀하게 여겨서 분수를 헤아려 그칠 줄 알았네. 표연히 높이 떠나 저 서교(西郊)로 가니, 도(道)가 다 행해지지 못한 것은 천명이 있기 때문이네. 공의 완전한 덕은 한 가지로 지칭할 수 없으나, 가장 큰 것은 도를 지키는 것이 오직 깨끗하였다는 것이네. 순수하게 바른 것은 백세(百世) 뒤에도 헷갈리지 않겠거니와, 후세에서 참고하고자 하거든 이 비석을 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