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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붙잡아야 할 믿음은 주와 은혜의 말씀입니다. / 2023년 8월 13일 주일 예배
본문 / 사도행전 20:25-38
미국의 야구선수 중에 요기 베라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야구 실력으로도 이름이 있지만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향해 믿음의 경주를 하며 좁은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모릅니다.
정말 정말 공감이 됩니다. 그까짓 야구 게임이야 지면 좀 어떻습니까? 또 얼마나 게임이 많습니까? 그런데 믿음의 경기에서 진다면 이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상상이 됩니까? 상상이 안 될 겁니다. 상상이 안 되니 대충 적당히 자기 마음대로 믿는 겁니다.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 못에 들어가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도저히 그 고통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기온이 35도만 되어도 불볕더위라고 말하고 죽기도 합니다.
지옥에서도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옥에서도 죽을 수 있다면 제 마음은 편할 겁니다. 믿음이 없고 구원을 받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그러나 그 뜨거운 불에 온 몸이 타도 견딜 수 없는 고통만 있지 죽지 않습니다. 정말 이 지옥의 고통을 믿으십니까?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면 너무 너무 괴롭습니다. 우울해집니다. 내가 빨리 죽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뿐입니다.
대학교 이삼학년 때인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야구 경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응원하는 팀이 초반에 3점을 얻었고 그 후로 경기가 공방전 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렇게 9회말 투아웃이 되자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관중들이 얼마 남지도 않았습니다.
해설하는 사람도 그렇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경기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타자가 나와서 적당히 휘두르고 아웃되는 것이 아니라 볼을 커트하며 투수를 괴롭히더니 볼넷으로 나간 겁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빨리 끝내지 왜 저래!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더니 두 번째 타자도 나가고 세 번째 타자까지 나간 겁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된 겁니다. 집으로 돌아가던 관중들은 다시 자리에 앉고 선수들은 긴장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한 방이면 경기가 뒤집히게 된 겁니다. 야구 경기는 9회 말 투아웃부터라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정말 설마 설마 하던 경기가 홈런 한 방으로 끝나버린 겁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아니, 뭐 이런 게 있나? 처음부터 지고 있었으면 열이 받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처음부터 계속 이긴 겁니다. 9회말 투아웃까지 말입니다. 1에서 97까지는 이긴 겁니다. 마지막 3을 남기고 뒤집힌 겁니다.
믿음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육으로 마치는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예수님은 믿음의 경주에는 역전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역전을 시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역전을 당하여 이것보다 안타까운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경주에서 이미 역전을 당한 것은 아닙니까? 이미 오래전에 역전이 되어 패배에 익숙해진 것은 아닙니까? 너무 큰 점수 차로 역전이 되어 낙심하고 포기한 것은 아닙니까?
자신이 지금 누구인지 어떤 길을 가는지 빨리 확인한다면 기회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은혜를 붙들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순종한다면 반드시 역전을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기고 있다면 방심하면 안 됩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지금 서있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은 믿음의 경기를 이기고 있는 사람과 지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기고 있는 사람은 방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지고 있는 사람은 역전의 기회를 포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가 안면도를 떠나면서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했던 말씀입니다. 교회에 부임하여 첫 설교로 어떤 말씀을 전했는지 떠날 때 마지막은 어떤 말씀이었는지 그런 것은 기억에 남습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그때 교회를 떠나면서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이었지 그런 생각이 떠오르니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들에게 어떤 말씀을 전해야할까 고민하던 중에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성도들에게 부탁하는 본문이 생각이 났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을 목회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인데 그곳에서 붙잡혀 로마로 가게 됩니다. 바울도 다 압니다. 이것이 이 사람들과 마지막일 것이라 것을 말입니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하는 본문의 말씀은 고별설교이며 바울의 유언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들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바울은 최고의 목회자가 아닙니까?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개척하여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세운 교회와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가장 신령하고 능력이 있는 목사에게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복음과 진리만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비유를 맞추는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천국에 가는 그 믿음이 무엇인지, 영혼을 구원하는 그 진리가 무엇인지 반대로 지옥으로 가는 믿음이 아닌 믿음이 무엇인지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전한 것입니다.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목사들은 성도들이 두려워 말을 못합니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목사도 있지만 알아도 말하지 못하는 겁니다. 온유함으로 절제하면 믿음이지만 두려워서 지옥으로 가는 자들에게 말도 못하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며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면 그들의 심판에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어떤 고난을 받더라고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을 전해야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떠나는 마당에 좋은 말만 하고 떠나고 싶은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앞으로 잘 될 것이라고 듣기 좋은 말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대언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분과 비유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 싫어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연한 희망을 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 잘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말을 하지 않는 겁니다. 본문 29절과 30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올 것이다. 그 이리들이 양 떼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 중에서도 성도들을 미혹하여 자신을 따르게 하려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목사가 교회를 떠나면서 이런 설교를 하고 가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미워한 것처럼 너희도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고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며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인내하며 고난을 참으며 시험에 들지 않게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들어가기를 원해도 못 들어갈 자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청함을 입은 자들은 많아도 택함을 입은 자들은 적다고 하셨고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이 세상에서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의 영적인 전쟁의 그 실상에 대하여 많이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충격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순례자는 이제 죽음의 강을 건너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거의 다 온 겁니다. 그런데 마귀가 그때까지 거기까지 순례자를 따라와 미혹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와! 아주 징그럽다는 생각이 확 들었습니다. 아주 징글징글하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틀렸다! 저 놈은 이제 안 돼! 마귀가 포기하고 어지간히 적당히 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따라와 미혹하는 것은 이건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죽음의 강 앞에서 두려워하는 순례자에게 마귀는 더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많은 크리스천들을 돌아서게 했다는 것입니다.
9회말 투아웃을 잡아놓고 역전을 당한 것입니다. 거의 다 와서 마지막에 마귀에게 당한 것입니다. 얼마나 억울한 겁니까? 처음부터 어지간히 적당히 자기 마음대로 믿으며 넓은 길을 갔거나 아예 믿음의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억울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과 죄와 싸우며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못한 것입니다.
거의 다 갔지만 그만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미혹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입니다. 마귀가 내가 여기에서 돌아서게 한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하는데 얼마나 화가 나는지 말입니다. 또 나도 그렇게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얼마다 두려운지 말입니다. 예수님이 끝가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그 말씀을 왜 하셨겠습니까?
찬송 447장에서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맘을 흔들고 저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으나’ 증언합니다. 믿음으로 죽음의 강을 건너 주님을 만나기까지 내 믿음을 빼앗고 구원에서 떨어지게 하려는 악하고 간교한 원수의 시험은 내 마음 안과 밖에 있는 것입니다. 493장에도 ‘내가 염려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증언하는 겁니다.
본문에서 바울도 성도들에게 시험이 안과 밖에 있다고 선포하는 겁니다. 밖으로는 사나운 이리가 온다는 겁니다. 그 이리가 양들을 아끼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들 마음 안에도 그 간교한 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따르게 하려고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 사람을 미혹하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지금 우크라이나는 사나운 이리인 러시아와 싸우지만 그들 안에 있는 내부의 적인 친 러시아 세력인 첩자와도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쉽지가 않습니다. 사나운 이리와 싸우는 것도 힘든데 내부의 적과도 싸워야 하니 말입니다.
이 음란하고 패역한 세상에서,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이 세상에서 구원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믿음으로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가는 성도의 믿음의 경기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생명의 길을 찾는 이가 적은 좁은 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짜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그 길은 성도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건 정말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중요한 일은 마음을 진정하려해도 긴장이 되어 심장이 요동하고 손이 땀이 납니다. 잠도 안 옵니다. 머리에서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야구에서 아웃 카운트 하나에 승패가 아니라 우승이 달려있으면 이게 얼마나 긴장이 됩니까? 선수들은 물론이고 지켜보는 관중도 숨을 죽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일은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건 영원한 겁니다. 한번 지면 끝장나는 겁니다.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겁니다. 정말 믿음의 경주보다 중요하고 두렵고 떨리는 게 있을까요?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지만 모르니까 대충 자기 마음대로 믿는 겁니다. 적당히 믿고도 얼마든지 천국에 갈 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모르는 겁니다.
말씀을 들어도 들어도 정신을 못 차립니다. 들을 때는 깨닫는 척하지만 돌아서면 다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영적으로 보면 미친 겁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자기 마음대로 믿어도 두렵고 걱정도 없겠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그 말씀은 말 같지도 않은 겁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나보다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자식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나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다! 내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런 말씀은 안중에는 없는 겁니다. 농담처럼 들리는 겁니다. 말씀이 그렇다는 말이지! 넘겨버리는 겁니다.
정말 말씀대로 믿지 않고 내 생각대로 믿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 정도면 되겠지! 나도 믿잖아! 십자가도 믿고 천국과 심판도 믿잖아! 나도 다 안다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차라리 소경이 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정말 십자가를 만났습니까? 마음과 영으로 만나 회개했습니까? 인생과 마음의 주인이 바뀌었습니까? 삶의 방향과 목적과 가치관이 바뀌었습니까? 그래서 십자가에 나를 못을 박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열매가 있습니까? 내가 하고 싶지 않아도, 원치 않아도, 손해를 보고, 모욕과 멸시와 미움을 받아도 자존심과 온갖 육체의 감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나를 낮추어 말씀에 순종합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그 믿음으로 항상 깨어 있어라!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밝히고 있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과 이별하며 마지막으로 전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준비해야 한다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안팎으로 오는 시험에 다 넘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어야 합니까?
32절에서 말씀합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하게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니라.”
바울은 내가 여러분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말씀이 여러분을 든든히 세울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부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말씀이 든든히 세울 것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주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성도들을 부탁한 것 즉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맡은 자들은 거룩하게 된다는 겁니다.
바울이 성도들을 말씀에 부탁한 것은 말씀에 맡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내 영혼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복음인 겁니다. 생명을 맡긴 겁니다. 그 생명의 복음과 말씀에 내 영혼을 맡기고 부탁한 겁니다.
여러분에게 아이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잘 맡고 있으면 여러분도 평안할 수 있지만 아이를 잃어버리면 여러분도 죽습니다. 그 아이에게 여러분의 생명이 달려있는 겁니다. 그것은 그 아이에게 여러분을 맡긴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아이를 잃으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이 생명을 잃는 겁니다. 만약 실제로 그렇다면 그 아이를 돌보는 것을 대충할 수 있을까요? 그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을까요?
그 아이가 죽거나 읽어버리면 나도 죽는다면 이건 정말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그 아이를 받들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만지지도 못하게 할 겁니다.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 즉 내 영혼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 말씀을 어린아이 같이 받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볼 때에 대충 볼 수 있습니까? 보기 싫어서 대충 돌보는 사람들이 왜 없겠습니까?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앉고 한 손으로는 핸드폰에 빠진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드라마에 빠진 사람도 있을 겁니다. 아이를 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 마음대로 내 감정대로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대충 적당히 믿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별 것도 아닌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받드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십자가의 좁은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장이나 빈말을 하시지 않습니다. 심판은 성경에서 하신 말씀 그대로 됩니다. 너희가 결단코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지 않으면 즉 순종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그 말씀이 그대로 실행이 되는 겁니다.
말씀에 부탁하였다는 것은 말씀은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내 영혼을 구원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 말씀이 든든히 세운다는 것은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할 때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에 대해서 너무 모릅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그 길이 얼마나 험하고 위험한지 모릅니다. 마귀의 역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는 안 다니지만 영적인 세계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그쪽으로 마음이 끌리는 겁니다. 그런데 남편이 이 아내에게 너무 잘 해줍니다. 밥도 자기가 대 해줍니다. 직장도 다니면서도 그러는 겁니다. 공주처럼 떠받듭니다. 얼마나 사랑이 많고 자상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딱 하나 반대하는 게 있습니다. 교회는 다니지 말라는 겁니다. 신상생활은 절대 반댑니다. 이 아내가 그 남편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나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겁니까? 차라리 다른 것은 다 못해주고 신앙생활은 마음대로 하게 한다면 그것이 그게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사나운 이리는 아주 교활하기 때문에 사랑과 정과 혈육의 가면을 쓰고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틈타는 그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즉 그 타락한 육체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을 박지 않으면 다 넘어가고 마는 겁니다. 자신도 모르게 넘어가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다고 하셨는데 아버지의 말씀을 받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은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세상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공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게 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핍박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가복음 12장에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다.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그 불이 자신의 삶에서 붙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이 나지 않게, 말씀의 불, 십자가의 불, 순종의 불이 붙지 않게 즉 시험과 고난이 없는 넓고 편한 길을 가는 겁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제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삼 년 동안 쉬지 않고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전하고 맡긴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복음을 그리고 바울이 직접 보여준 십자가의 믿음과 삶을 기억하고 그대로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심판을 믿는 것일까요? 천국과 지옥을 믿습니까?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것일까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괴로울 때가 많아요. 마음이 큰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웃지만 속은 우울합니다. 지옥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옥이 있어도 그곳에서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되지도 않는 이런 생각을 자주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날 누가 그 날을 알고 준비하는지 말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깨달아도 그 뿐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겁니다. 달란트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과 믿음을 선물로 받아도 순종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보십시오.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도 시험과 고난과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순종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었던 겁니다.
순종이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할 만한 것을 하는 것이 순종입니까? 그것은 누구나가 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십자가가 없어도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고 사람을 사랑할 때에는 십자가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에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믿음을 든든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여러 번 말하지만 주여 주여 한다고 되는 구원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나를 부인하는 그 은혜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그 십자가의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목사고 장로고 권사고 집사고 다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잘 안되지만 넘어져도 일어나 우리는 십자가의 길만을 가야 합니다. 용서할 수 없을 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고,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고, 예배할 수 없을 때 예배하고, 감사할 수 없을 때 감사하고, 찬양할 수 없을 때 찬양하고, 헌금할 수 없을 때 헌금하고, 나도 부족하여 나눌 수 없을 때 나누고, 나를 낮추어 남을 높이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하고, 나와 내 안에 있는 죄와 세상과 마귀와 싸우며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그 길만을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적당히 믿고 내 마음대로 믿는 그 길의 끝은 지옥일 것입니다. 제 말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복음이라면 반드시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을 붙들고 그대로 순종하여 구원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