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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참전기 이 길 용
차 례
☐ 월남전 참전 이유
☐ 주월백마 수색중대 제 2소대장으로 보직
☐ 소대장 생활 이모저모
☐ 사단 수색중대 특공소대장으로 임무 수행
☐ 부비추랩을 밟던 날
☐ 락빈촌 전투
☐ 열대우림의 신기한 경험
☐ 소대 총기 난동 사건
☐ 봉로만 계곡 작전
☐ 영헌봉송 장교로 임명되어
☐ 월남에서 귀국
☐ 그 때를 잊을 수 없어
☐ 월남참전 소감
- 월남전 참전 이유 -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거의 누구나 군생활을 통하여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들보다 특별한 경험을 하였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나의 작은 월남전 참전 경험이 지금 군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군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공통의 관심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작은 생각에 소개를 하고자 한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1969년도 12월로 기억되는 입소 전날! 나에게 다가올 군생활과 낯선 환경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진정시키고 기념적인 시간을 갖기 위하여 그 당시에 대한극장에서 70밀리 영화로서는 두 번째로 상영 중인 ‘닥터 지바고’를 보았다. 그러나 그 감동적인 명작이 극히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다 잊어버려서 후일에 다시 보았을 정도다. 아마도 입대의 불안감이 내 머릿속에 너무나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한 후에는 전방사단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제2훈련소 작전처에서 측정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같이 근무하는 심중위가 월남 전출의 명령을 받았지만 결혼문제로 갈 수가 없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심중위에게 내가 대신 가기로 양해를 구하고 조치를 취하였더니 명령이 내려왔다.
이런 내용도 모르시는 우리 어머니께서는 내가 월남에 가게 되었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내가 근무하고 있는 논산까지 내려오시더니 무조건 부대장을 만나서 그 명령을 취소하도록 하겠다고 야단을 하시는 것을 간신히 만류하고 서울로 모시고 왔다.
내가 월남전을 자청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째는 군인으로서 참전의 경력을 갖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과, 둘째로는 그곳에 가면 전투수당을 받을 수 있어서 경제적인 이득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길도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나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인 만큼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한 것이 사실이었다.
월남을 가기 위하여 부산으로 가던 날 !
나를 보내기 위하여 나오시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제 제가 싸움터로 갑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어머니께서 약속을 지킬 일이 있어요. 저하고 헤어질 때에는 울지 마시고 웃음으로 저를 보내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분명히 살아 돌아 올 거예요.” 라고 말씀드렸더니 정말로 헤어질 때에는 내가 버스에 올라가자마자 “잘 가라!” 하시면서 그대로 뒤로 돌아서서 총총걸음으로 가시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평생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월남전에 참가하여서 귀국할 때까지 바로 그 당시 어머니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해야 된다는 것을 몇 번씩 다짐하곤 하였다.
- 주월백마 수색중대 제2소대장으로 보직 -
월남을 가기 위하여 부산 부두에 도착하여 보니 미국무성 소유의 2만 5천 톤급의 웅장한 ‘바레트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8층 높이의 건물이 흔들거리면서 서있는 배의 모습은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7박8일간의 항해! 처음에는 조용한 바닷길을 그 거대한 배를 타고 가니까 거의 흔들림도 없고 육지의 건물에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배가 대만 해협을 지나자 조류의 흐름이 빨라지면서 배가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심할 경우에는 배의 2층에 있는 라운지에서 바로 배 옆의 바다가 보일 정도이니 이 배가 얼마나 요동을 치고 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 거대한 배도 태평양 한가운데 떠있는 종이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 때이다. 이러다가 이 배도 가라앉을 수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배는 미군이 운영하기 때문에 식사는 양식으로 먹게 되었다. 지금은 잘 이해가 안 되겠지만 그 당시의 양식은 최고급 식사로 한국에서는 상류층에서만 즐길 수 있을 시기인데, 이곳에서 하루 세끼를 양식으로 하니까 처음에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식탁에 앉으면 필리핀사람들이 봉사를 해 주고 식탁에는 과일이 항상 풍부하게 놓여 있었으며, 정해진 메뉴에 따라 양식이 풀코스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나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쌀밥과 김치 정도로 끼니를 때운 적이 많이 있었다. 침실로 들어가면 4인 1실로 한국에 있는 호텔급과 비슷한 수준으로 되어 있어서 무척이나 대접을 받으면서 배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월남의 ‘나트랑’이라는 항구에 배가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안케패스’작전에서 한국군의 피해가 많을 때에 내가 그곳에 도착하였으니 무척 긴장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내가 잘 알고 있었던 동기생이 작전 중에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후에는 마음이 무척 울적하였다.
월남 ‘나트랑’항구에서 ‘니노아’까지 차량으로 이동을 하였다. 긴 차량 대열이 끝없이 이동하고 있는데도 월남인들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는 무척 의아 하게 생각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월남인들은 비록 지금은 외국의 군대들이 자기를 도와 줄 수밖에 없는 처지이지만 자존심이 워낙 강하고 민족적인 우월성이 강한 민족이기 때문에 외국 군대들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얄밉기까지 하다. 특히 한국인은 자기들에 비하여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먼저 온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월남에 도착한 나는 주월백마사단 장교보충대에서 잠시 대기를 하였다. 밖으로 샌드백이 쌓여진 막사에서 보직을 받기 위하여 기다리는 시간은 무척 이나 길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얼룩 복에 월남 모자를 착용한 사단수색중대에 소대장으로 근무하는 동기생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원래 피부색이 그런지는 몰라도 얼굴이 새까맣고 눈만 초롱초롱한 모습이 정말 여기가 전쟁터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나에게 수색중대로 오라는 강력한 권유를 하였지만 사실, 나는 조금 더 편한 곳에 배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의 권유를 사양하였다. 하지만 우선 지명권이 있는 사단수색중대에서 나를 수색중대 2소대장으로 발령을 내고 말았다.
- 소대장 생활 이모저모 -
월남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나를 괴롭힌 것은 날씨였다. 고국에서 겨울철을 보내다가 별안간 불볕 더위를 대하니까 한 동안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다. 그러나 고국과는 달리 지열이 없었기 때문에, 그늘에만 들어가면 견딜만해서 그런대로 견딜만하였다. 또한 점심 이후에 2시간 취침이 보장되어 있는 것도 이곳 생활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첫 작전 중에 안 사실이지만 더운 날씨로 인하여 소대원들은 땀을 많이 흘리지만 나는 땀을 별로 흘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이곳에 오래 근무하면 육체도 이곳 기온에 적응하면서 땀구멍이 커져서 그렇다는 것이다.
소대장 부임 후에 숙소를 배정받아서 가보니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 주위에는 나무들이 있어서 대단히 운치가 있어 보였다. 내부를 살펴보았다. 나무침대 위에 모기장이 쳐 있고 책상 한 개가 전부이다. 걸을 때 마다 삐걱거리는 나무판자들은 틈새가 너무 벌어져서 각 종 곤충들이 제 집 드나들듯 한다. 그 곳에서의 첫 날밤은 뜬 눈으로 보냈다. 벽과 천정을 돌아다니는 도마뱀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노려보는 것 같고, 흔하다는 뱀이 언제 이곳으로 들어올지 몰라서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니 잠이 올 리가 만무하다.
며칠을 고생한 후에야 이곳 고참 소대장들과 마찬가지로 편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월남은 덥고, 정글로 이루어져서 작전을 하기가 싶지 않았다. 보통 3-4일간의 식량을 배낭에 넣고 작전에 나간다. 작전이 길어지면 중간에 헬기로 보급품을 보급하여 준다. 워낙 더운 지방이라 물이 제일 많이 필요하다. 한사람이 수통을 8개 내지 9개를 차고 다닌다. 작전지역까지는 헬기로 이동하고 그 후부터는 걸어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한다.
제일 힘든 문제는 식사였다. 그 시절에 고기를 먹지 못하였던 나로서는 전투식량인 레이션(깡통 통조림)이 대부분 고기통조림이기 때문에 이를 먹는데 애를 먹었다. 작전 중에는 내가 먹을 수 있는 몇 가지 통조림과 과자만을 주식으로 견디었으니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전이 없는 날에는 사단주둔지를 경계하기 위하여 사단수색중대의 4개소대가 돌아가면서 매복을 나간다. 가끔은 사단병력이 ‘나트랑’으로 이동시에 경계부대로 차출되어서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런 때에는 일상생활을 하는 이곳 월남인들의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볼 수 있어서 좋다. 여학생들이 흰색의 아오 자이(베트남 전통 옷) 복장으로 논(모자)을 쓰고 학교에 등교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베트남인은 허벅지가 가늘어서 무척 날씬해 보인다. 흰색을 즐겨 입고, 장례문화, 어른을 공경하고 여성들의 억척스런 생활상 등이 우리와 비슷한 것 같다. 물론 계속되는 전쟁으로 남자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여성의 역할이 커졌을 것이다.
- 사단수색중대 특공소대장으로 임무수행 -
사단수색중대 제2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어느 날 사단장님이 우리수색중대를 방문하셨다. 사단장님은 전 수색중대원을 집합시킨 자리에서 적의 정보 파악을 위하여 특공소대의 편성을 역설하면서 평상시에 ‘호네오’ 휴양소를 이용하게 하는 등 특별대우에 관한 말씀도 있었다. 그러나 소대장들은 그 누구도 자청하여서 특공소대장을 맡기를 원하는 자는 없었다. 그런데 병사들의 생각은 소대마다 차이가 있었다. 특히 다른 소대보다 거칠었던 우리소대원들의 분대장이 나를 찾아와서 소대원들의 의견이 우리소대가 특공소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날 밤은 한 잠도 자지 못하였다. 말 그대로 진퇴양란이다. 그러나 내가 싫으면 소대장직을 수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결정은 외길이다. 솔직히 말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특공소대장의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에게 인원 선발권이 있어서 분대장은 모두 중상사로 보직하고 대원은 수색대원이나 보충대에서 가장 유능한 병사들을 선발함으로써 자긍심을 갖고 임무를 수행할 수가 있었다.
- 부비추랩을 밟던 날! -
작전 중에 우리 소대가 부비추랩을 밟은 일을 말하려고 한다. 한 작전에서 우리 소대는 3소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정글이기 때문에 일렬로 부대가 이동 중에 있었다. 부비추랩이란 지뢰의 일종인데 가는 철선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철선이 사람에 의하여 끊어지면 즉시 뇌관에 압력이 가해져서 지뢰가 터지도록 장치해 놓은 것을 말한다. 3소대 인원이 다 지나가도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우리 소대가 지나가는 선두에서 부비추랩이 터진 것이다.
나중에 조사를 하여보니 3소대의 마지막에 이동하는 병사가 밟은 것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 소대 선두에 가고 있던 병사가 그 파편을 얻어맞고 쓰러진 것이다. 자세히 보니 좌측 팔 관절에 파편이 들어 박혔다. 나는 즉시 병원헬기를 요청하여서 후송을 보내고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동 중에 이렇게 가는 철선을 발견하기란 싶지가 않다. 특히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지나가도 괜찮다가 우리 소대원이 다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시 운명도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다른 날에는 2번에 가던 병사가 부비추랩을 밟았는데 7번에서 뒤따라오던 병사가 다치고 말았다. 그 역시 팔에 파편이 박혀서 고국으로 후송을 보내고 말았다.
한번은 도로를 2열종대로 걸어가고 있는데 우리 2소대가 중대의 선두 소대가 되어서 이동하고 있었다. 날씨는 무척이나 덥고 햇볕을 막을만한 나무들도 별로 없는 길을 걷고 있자니까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그런데 저 멀리에 큰 나무가 한 그루 보이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바로 그 밑에서 10분간 휴식을 한 후에 출발하겠다는 생각으로 다가갔는데 앞에서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는 바람에 휴식 명령을 내리면 그곳에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할 수없이 조금 더 행군을 지시하였다. 그보다는 못하지만 전방에 보이는 조그만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 밑에서 휴식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니까 도로를 따라서 2열종대로 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까 말하던 큰 나무 밑에는 우리 소대 뒤를 따라오던 제3소대장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제3소대장 통신병(월남전에서는 통신병이 전령의 임무를 겸하였음)이 소대장이 잠시라도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먼저 그 자리에 가서 자기의 배낭을 풀려는 순간에 부비추랩이 폭발하면서 그대로 즉사하였던 것이다. 아찔한 순간이다. 만약에 내가 그곳에 머물렀다면 나던가 아니면 우리소대원이 죽었을 것인데 말이다.
더욱이 죽은 소대원은 춘천 출신으로 유품 중에 월남 돈이 있었고 그 돈에다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나는 살아서 귀국 하겠다”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였다는 것인지...... 전쟁이란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목숨을 잃고 병신이 되기도 한다. 중대의 한 전우가 전사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숙연해지고 바로 자신이 저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당분간은 무척이나 신경이 날카롭다. 말하자면 사기가 무척 떨어진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전장에서 전우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울적하게 만든다.
- ‘락빈촌’ 전투 -
주월 백마사단사령부는 월남의 ‘니노아’ 시에 위치하고 있고 바로 사단 사령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락빈촌’이란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단정보처에서 “지금 락빈촌에 베트콩 5명이 출현하였으니 사단 수색중대는 급히 출동하여서 적을 사살하라”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 명령을 받은 중대장은 우리 특공소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중대장으로부터 출동 명령을 받은 나는 즉시 2개 분대를 무장시켜서 대기 중이던 장갑차에 올라타고 출동하였다. 하늘에는 정찰기가 ‘락빈촌’ 마을을 빙빙 돌면서 적들의 이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니까 적들이 이미 눈치를 채고 대나무 숲에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 대나무 숲은 약100 m × 200m 크기로 형성되어 있으며, 그 주위는 평지인데 띄엄띄엄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사방을 포위하고 적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이윽고 중대장이 병력을 이끌고 도착하여서 그 대나무 숲을 철통같이 포위한 후에 우리 특공소대에게 공격을 명하였다.
소대는 횡대전투대형과 낮은 포복 자세로 대나무 밭을 향하여 공격을 하기 시작하였고, 나는 대열 중앙에 위치하여 소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대나무 숲은 잔가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진입하기가 무척 힘든 곳이다. 매우 조심스럽게 얼마동안을 낮은 포복 자세로 들어가고 있는데 별안간 우측에서 “펑”하는 폭발음이 들리더니만 연이어서 사격소리가 들리는 거다. 우리 소대가 몇 분간에 걸쳐서 적들과 교전을 벌이던 중, 2차례에 걸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국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듣고는 속으로 ‘아! 우리가 당했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조금 후에 전 소대원들에게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적들도 전혀 미동을 하지 않고 정적이 감돌았다. 우선 후퇴를 명하였다. 왜냐하면 이미 적들은 우리 아군에 의하여 포위가 된 상태이고 지금은 부상당한 우리 병사들을 치료해 주거나 후송시키는 일이 우선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우측에서 공격하였던 진하사와 임병장이 부상을 당한 것이다. 나중에 상황을 알아보니까. 임병장이 공격을 하다가 적과 마주쳤는데 먼저 팔에 관통상을 입고 즉시 응사를 하여서 그 적병을 사살한 후에 비명소리를 냈고 그 소리를 들은 진하사가 임병장보다 먼저 가다가 되돌아서 임병장에게 “어딜 다쳤어?”라고 말하는 순간 적병이 진하사 엉덩이를 향하여 방망이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폭발되었고 진하사의 엉덩이는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일단, 부상자를 안전한 곳까지 데리고 나온 후에 병원헬기를 요청하였다. 특히 진하사는 소대장인 나를 보는 순간 “소대장님! 저 괜찮겠지요?”라고 말하였다. 나는 진하사의 엉덩이를 살펴보고는 “아니- ” 라고 말하려는 순간에 소대의 위생병이 나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즉시 눈치를 채고 “그래, 그 정도는 문제가 안 된다. 후송하여서 치료하면 괜찮아 질 거야” 라고 말은 하였으나 곧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심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소대원이 다친 것이 무척이나 괴로웠다. 우리 소대원들이 부상 당한지 15분 만에 미군이 운영하는 병원헬기가 도착하여서 즉시 후송을 보내고 다시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나는 중대장에게 건의하여서 우선 장갑차로 대나무 숲에 진입로를 낸 다음 공격을 하기로 하였다. 장갑차 2대가 종횡무진으로 길을 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전우들이 부상당한 것을 본 소대원들이 적개심으로 흥분된 상태라 무조건 진입을 하여서 적들을 소탕하겠다며 빨리 진입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다간 또 부상자가 나올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는 소대원들에게 냉정해 질 것을 요구하고 소대장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재삼 강조한 후에 공격 요령을 정확하게 설명하였다.
나는 공격전에 적이 숨어 있을만한 곳에 수류탄을 투척시키고 공격을 명하였다. 이미 적개심으로 가득 찬 소대원들은 민첩한 행동으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서로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적들이 은거할 만한 곳을 수색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적 2명만을 사살하고 나머지 3명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고 말았다. 나중에 그 지역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우리 소대원들의 훈련을 강화시켜야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즉 개인 당 2발씩 휴대한 수류탄을 투척한 결과를 확인하니 불발탄(터지지 않은 수류탄)도 있었지만, 안전핀을 풀지 않고 그대로 던진 수류탄도 있었다.
수류탄은 위험하기 때문에 2중으로 안전장치가 되어있고 고무줄로 손잡이를 한 번 더 묶었는데도 상황이 긴박하다 보니 안전핀을 뽑지 않고 수류탄을 그대로 던졌기 때문에 폭발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나는 작전 후 전 소대원을 집합시켜서 우리의 잘못을 말해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교육훈련을 강화하였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깨우친 점은 무엇보다도 실전과 같은 훈련을 열심히 하여야지만 그에 비례하여서 병사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철칙을 재확인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실전과 같은 훈련을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고국에 살아서 귀국하기 위하여서는 훈련시간을 더 늘렸던 것이다. 작전을 마친 후 적들의 시체를 장갑차에 싣고 락빈촌(적들을 도와주는 마을로 적성마을이라고 함)을 한 바퀴 돌면서 위력시위를 한 후에 적들의 시체이지만 격식을 갖추어서 매장을 해 주었다. 우리 소대는 그 공로로 천병인 어병장은 화랑무공훈장, 나는 인헌무공훈장을 받았다. 물론 나의 강력한 추천으로 첨병이 나보다 격이 높은 훈장을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다친 전우들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무척 미안한 생각뿐이다. 내가 좀 더 훌륭한 지휘를 하였으면 그들도 다치지 않고 적들을 잡았을 텐데......
이렇게 지휘관 한 사람의 능력에 따라 병사들의 생사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권한을 행사하기 전에 그들이 맡은 중대한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된다는 것을 월남전을 통하여 깊이 깨달았다. 아마도 국가를 경영하는 대통령이하 전 공무원들도 개인의 권리와 개인 이익에 영합하지 않고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생각하고 그들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다면 국가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리라 생각한다. 또한 내가 전투를 하면서 느낀 점은 나도 전투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전쟁은 겁이 나고 두려운 것이라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막상 작전을 나가는 전날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만다. 그리고 헬기를 타고 작전지역으로 갈 때에는 그 긴장이 최고점에 이른다. 그렇지만 막상 헬기에서 뛰어내려서 작전지역에 도착하면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고 정상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운명을 믿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작전 중에 동료가 죽거나 부상을 당하면 그 부대의 사기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다들 말이 없으며 시무룩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인하여 다들 말이 없고 시무룩하며 전투에 두려움을 느낀다. 또한 이러한 분위기는 한 동안 계속되기 때문에 지휘관은 체육활동, 오락, 연예인 초청 등을 통하여 분위기를 바꾸려고 한다.
- 열대우림에서의 신기한 경험 -
월남전에서 보통 작전을 할 때에는 중대급 이상 부대가 합동으로 작전을 하는데 우리는 적의 동태를 알기 위하여 적을 생포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특공소대이기 때문에 몰래 적진으로 침투하여서 작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잘못하다가는 적에게 포위되어서 전멸 당할 위험성도 있었기 때문에 모두 초긴장을 하면서 작전에 임하였다. 심지어는 이동 중에 소대장이 잘못하여 조그만 소리만 내어도 소대원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물론 이 작전 기간 중에는 적과 만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나는 너무나 색다른 광경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전투하고 있는 월남은 열대 우림 지역이기 때문에 밀림으로 이루어져서 이동하기가 무척 어렵다. 산길을 따라서 이동하면 편리하겠지만 이전에도 말했듯이 부비추랩의 위험성 때문에 이용하기가 힘들다. 밀림도(칼)를 이용하여 길을 만들어 행군하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하루 종일 이동하여도 2Km를 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날도 밀림을 뚫고 전진하는데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는 약 7m폭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강의 깊이를 재어보니 물이 내 가슴 높이 정도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대를 강을 따라 내려가도록 지시를 하였다. 물론 물속에서는 움직이는 것이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적과 마주치면 치명적인 손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충분한 경계를 하면서 이동을 하였다. 그런데 맨 앞에서 가던 첨병이 나에게 무엇을 가리키면서 사색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나도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동물원에서는 볼 수 있는 큰 비단구렁이가 물속에서 머리를 바짝 세우고는 우리일행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적진이라 총소리도 낼 수도 없고...... 순간 망설이다가 나는 그대로 통과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사실, 나는 뱀을 제일 무서워한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에 우리 집 논두렁에서 물뱀한테서 혼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논두렁을 달려가다가 앞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달리는 힘 때문에 멈출 수가 없어서 건너뛰었더니 또 뱀이 있는 것이 아닌가? 눈 딱 감고 뛰어 넘었더니 또 한 마리가 있었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서 어떻게 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이고 집에 와서는 거의 기절할 뻔하였다. 그 이후로는 뱀 꿈을 자주 꾸었고, 그럴 때마다 자지러지면서 깨었다. 그러니 내가 그 비단구렁이를 보았을 때에는 오죽하랴!
하지만 소대장이란 막중한 임무를 망각할 수가 없었던 나는 그 비단 구렁이를 총으로 겨누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면서 소대원 40여명이 다 통과할 때까지 그 비단구렁이를 감시할 수밖에 없었다.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물속에 잠긴 다리는 마치 비단구렁이가 내 몸을 감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하여튼 무사히 소대원이 다 지나가고 나도 그 비단 구렁이를 멀리한 채 신속히 이동을 하였다. 역시 비단구렁이도 대단하였다. 나와 소대원이 다 지나갈 때까지 미동도 없이 눈싸움을 하였으니 말이다.
비단구렁이로부터 해방이 된 후에 제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전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몰라도 별안간에 수백 마리의 원숭이 떼가 나타나서 우리들을 신기롭게 쳐다보면서 우리와 같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 이동이 우리 부대와 동일한 것이었다. 전후좌우의 경계병이 다 있는 것이다. 정말로 신기하다. 영화나 TV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을 직접 바라보고 있으니까 감정이 벅차오른다. 내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잠시 소대원들에게 휴식을 주면서 그들의 행동을 예의 관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나중에 그들의 행동을 말해주면서 “저런 동물들도 생존하기 위하여서 저런 대형을 유지하면서 철저히 경계를 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란 사람들이 더욱이 전쟁을 하는 군인이 경계를 소홀히 하면서 전쟁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는 요지로 소대원들에게 현지 교육을 시켰다.
밀림 안은 사실상 햇빛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덥지는 않다. 밀림 안을 행군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일들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혼주’라는 지방은 습지이기 때문에 밀림에 ‘말거머리’가 많다. 그곳을 지날 때에는 목 부분과 군화가 끝나는 부분을 단단히 매고 가야한다. ‘말거머리’들이 나뭇가지에 있다가 우리 사람들과 같이 피를 가진 동물이 지나갈 때에는 그대로 떨어져서 몸에 붙는다. 그 후에는 살로 파고 들어가서 피를 빨아먹은 후에는 떨어져 나와서 다시 나무 가지로 올라가 있는 다고 한다. 한참 행군하다보면 정강이가 간질간질하여서 살펴보게 되는데 이미 ‘말거머리’들이 반쯤 살갗으로 파고 들어가서 피를 먹고 있다. 그러면 손으로 그 놈들을 빼내어서 팽개쳐버려야 한다.
그곳에 특이한 것은 산 거북이가 많다. 산에서 거북이를 보면 무척이나 신기하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해안지대에서 볼 수 있는 악어만한 도마뱀이다. 청기와가 햇빛에 반사되어 나오는 강한 색상의 도마뱀이 순식간에 모래 밑으로 숨어버리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중생대로 간 느낌을 받는다. 또한 월남에는 독사(靑蛇}가 많다. 한국에서는 매우 드물고 귀한 뱀이기 때문에 병사들이 양주병에 청사를 넣은 뱀술을 담아서 귀국 할 때에 가져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별로 돈도 들지 않고 귀한 선물을 준비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이 있는 뱀을 잡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적지 않은 병사들이 뱀에 물려서 후송을 갔었는데 뱀을 잡으려다 손을 물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참으로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천혜의 땅인 것만은 분명한데 이렇게 동족끼리 싸우는 것은 우리와 비슷하니 그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나중에 이곳이 평온하면은 민간인으로 다시 이곳을 찾아와서 자연을 재음미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월남이 통일이 되어서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갈 수 있게 되었다.
- 소대원의 총기난동 사건 -
한번은 저녁 식사 후에 소대장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소대원이 급히 달려와서는 소대원 중 김상병이 중대장숙소 앞에서 소총을 난사하면서 중대장 나오라고 고함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초긴장 속에서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미 김상병은 술에 만취되어서 이성을 잃고 행동하고 있었다. 소대원들은 김상병이 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접근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무언가 결심을 해야만 되었다. 중대장은 즉시 사단에 보고하여 생포를 하라고 지시하는 상황 하에서 나는 중대장에게 일차적으로 내가 설득하여 볼 테니 시간을 달라고 하였고 일단 설득 후에는 김상병을 중대자체의 징계위원회에서 처리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중대장이 승낙을 하였다.
나는 긴장은 되었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김상병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하였다. 김상병은 계속하여서 “소대장님께 원한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십시오, 만약에 계속하여 이쪽으로 오시면 발포하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나는 김상병에게 계속하여서 말을 걸었다.
김상병이 중대장에게 원한을 품게 된 것은 작전 중에 사용하는 전투식량을 적게 분배하였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 문제에 관하여서는 나도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불만을 이런 식으로 한다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되니 소총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하자고 설득을 하면서 서서히 김상병이 있는 곳으로 몇 발짝을 움직여 보았더니 즉시 사격자세를 취한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나의 행동을 주시하는 상황 하에서 나 역시 물러서기가 어려운 상황으로 바뀌었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고 침착하게 행동을 하면서 “네가 소대장한테 원한이 없다고 하였으니 소대장은 너에게 떳떳하게 갈 것이다. 너의 총에 맞아도 별수가 없지 않는가?” 라고 말하면서 다가갔다. 김상병도 멈칫거리면서 발사를 하지는 못하였고 내가 근처까지 다가가니까 즉시 무릎을 꿇으면서 “소대장님!” 하면서 울부짖는다. 나도 김상병을 껴안고 같이 울었다. 물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징계를 받았지만 정상을 참작하여서 약한 벌칙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 이후로는 소대원들이 소대장에 대한 믿음이 강하여서 나는 귀국할 때까지 정말로 멋있는 소대장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인간적인 정과 믿음으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맺는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헤쳐 나갈 수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을 통하여서 체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가 그들에게 아무리 혹독한 훈련으로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였지만 그 속에 소대장인 나도 포함하여 훈련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불만이 없었다. 예를 든다면 장대비가 내리는 밤에 매복훈련에 임할 때에는 소대장인 나도 그들과 같이 그 비를 맞으면서 훈련을 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그 당시의 일을 거울삼아서 나는 그 이후에도 봉급을 제외한 어떠한 돈을 탐내거나, 사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군 생활을 깨끗하게 마무리 할 수가 있었다.
- 봉로만 계곡 작전 -
우리 사단수색중대는 봉로만 계곡이라는 맹호부대와의 접경 지역에서 다른 부대와 협동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우리 소대는 최전방 들판에서 매복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뒤에는 높고 밀림으로 이루어진 산이 있었고 앞으로는 허리까지 올라오는 갈대숲으로 이루어진 넓은 벌판으로 이루어지고 그 너머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평화스러운 시기에는 이곳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부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이 간다.
왜냐하면 집터나 야자수 그리고 파인애플 나무 등이 아직도 건재하고 농사를 짓는데 천혜의 땅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곳 벌판에서 원형매복을 세우고 적을 경계하고 있던 중 외곽에 근무하고 있는 경계병으로부터 전방 500m 지점에 적 4명이 출현하였다는 긴급보고를 받았다.
나는 소대원들에게 초긴장을 하고 적의 동태를 계속하여 파악하라는 지시를 한 후에 정예요원 12명을 선발하여서 적이 이동하는 방향을 앞질러서 우리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적이 올 것이라는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적들은 우리가 이쪽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는지 계속하여서 우리 쪽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우리와 거리가 약 350m 정도까지 되었을 때에 적의 행동이 수상해 지기 시작하였다. 이쪽을 계속하여 관찰을 하던 적들이 반대방향으로 도망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즉시 추격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여따이렝’이란 월남말로 정지명령을 내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죽을힘을 다하여 도망가기 때문에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거다. 나는 M79발사기 사수에게 사격을 명령하였다. 그 소리가 워낙 크기 때문에 적들은 박격포 탄이 날아오는 줄 알고 갈지(之)자로 도망가는 바람에 우리와 거리가 조금은 좁혀졌다. 이때를 이용하여 사격명령을 내렸다. 15명이 M16소총으로 사격을 하는 소리는 대단하였다. 그들은 더욱 더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서 도망친다. 그러던 중에 한 명이 우리 실탄에 맞고 쓰러졌다. 도망가던 또 다른 한 명이 그를 부축하고 도망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에 나는 그곳을 향하여 집중사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쓰러지지도 않고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결과는 4명의 적들 중 한 명만 사살하였다. 15명이 집중사격을 한 결과 1명만 사살하였다는 것은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다.
움직이는 표적을 사격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아무리 고도의 훈련을 받아도 쉽지가 않다. 영화에서는 백발백중이다. 흔히 서부활극에서는 말을 탄 카우보이가 수십 명을 상대로 권총사격을 하면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사람들이 쓰러진다. 심한 영화는 권총 당(리벌바형) 기껏해야 6발정도 사격할 수 있는데 그 이상의 사람들이 죽는다. 영화이니까 그것이 가능하지 실제로 전투를 한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백마사단에서 최고의 정예 부대라고 자랑하던 우리소대가 이 정도의 실력이라는 것을 솔직히 시인하고 평소에 훈련을 더 알차게 해야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대원들에게도 그날의 교훈을 되새겨 주었다. 또한 전쟁의 냉혹함을 경험해야 했다.
동료를 구하기 위하여 필사적인 사람을 사살해야만 하는 것이 전쟁의 아픔이다. 사실은 나는 그 당시 죽은 사람의 얼굴이 꿈속에서 자주 등장하여서 한동안 애를 먹었다.
- 영현 봉송장교로 임명되어 -
인헌무공 훈장을 받고 나서 마음이 조금은 풀려서 그런지 말라리아 병에 걸리고 말았다. 열이 40도를 웃돌고 있는 상황 하에서 얼음찜질로 체온을 내리려고 하니 그 고통이란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현 봉송장교 (월남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화장 처리 후 유골과 유품들을 비행기로 모시고 와서 동작동에 있는 국립묘지에 안장시키는 일을 담당한 장교)로 임명되어서 며칠 후면 고국을 방문할 수 있는 시기에 말라리아 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나는 고국에 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들떠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웬만한 병은 극복할 수가 있었을 것인데 병세가 좋아지는 기색이 없다. 나는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체온이 내려갈 때까지 얼음찜질을 계속하였다. 물론 내가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것을 알면 고국 방문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끙끙 앓으면서도 소대장 숙소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출발 전날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휑한 얼굴로 출국준비를 마친 후에는 영현 32구를 모시고 미국이 제공하는 비행기를 타고 오산 미군 기지에 도착하였다. 다시 버스 편으로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와서 영현을 관리소에 인계를 하였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서울에 도착하니까 언제 말라리아에 걸렸느냐는 듯 말짱한 것이다. 참으로 내가 생각하여도 신기하다. 그 병은 일종의 풍토병인지 우리나라의 기후에는 맞지 아니한 모양이다. 하긴 우리나라가 겨울철이었기 때문에 말라리아 병원균이 자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당시의 영현 봉송장교 및 하사관들은 모두 전투에 공이 있는 군인들로 편성되었기에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육본에서 제공한 차량 편으로 우리를 시청 근처에 있는 한 호텔로 안내하여서 짐을 풀게 한 후에는 우리를 음식점으로 안내하고 만찬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국에 왔다는 기쁨 때문에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다 동일하였다. 그렇게 훌륭한 만찬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후에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떠나라는 말도 한 귀로 흘리면서 집으로 직행하였다.
그리고 15일간의 휴가를 만끽하였던 것이다. 전투 중에 이렇게 고국에 휴가를 왔다는 자체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돌아갈 때에도 오산에서 미군 비행기를 타고 월남의 수도인 사이곤(지금은 호치민 시로 바뀌었음)에 도착 후에는 군 수송기 편으로 니노아에 도착하였다.
- 월남에서 귀국 -
1973년 초기에는 주월 한국군이 본국으로 철수를 하기 위하여 바쁘게 움직이는 시기다. 또한 적과 대치하다가 철수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어서 모든 장병들이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는 시기지만 나는 다행스럽게도 철수시기 전 달에 정상적인 귀국을 할 수가 있었다. 소대장직을 인계하고 나트랑에서 귀국선에 올라서 화물장교로 바쁘게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우리소대가 봉로만 계곡에서 작전 중에 소대장이 부상당하였다는 비보를 받고 충격을 받았다. 후임 소대장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이후에 나는 중대장과 작전장교 등을 경험하면서 군 생활을 계속하다가 소령으로 예편을 하였다.
- 그 때를 잊을 수 없어서 -
20대 중반의 한 창 나이를 월남 정글에서 보낸 나는 인생의 무게를 더할수록 그 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긴 차량행렬, 헬기편대에 탑승하여 적진으로 들어가는 모습, 시원한 야자수 나무 그늘, 교전시의 공포, 그리운 전우들의 얼굴 등이 날이 갈수록 아련한 추억들이 점점 잊혀져 간다. 가끔 회상에 보려면 대뇌 깊은 곳에 숨겨진 추억 파편들을 어렵게 조합하는 노력이 필요할 정도다. 그러던 중에 우연한 기회가 되어서 전우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먼저 장교 출신들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가 있었다. 중대장과 소대장들이 만났다. 그 시간도 나에게는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와 같이 정글을 누비던 소대원을 만나고 싶었다. 특히 나를 헌신적으로 보필한 무전병 및 전령의 소식과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하여서 후송을 보낸 후에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였던 진하사와 임병장 등 그 당시의 소대원들을 많이 만나보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진하사와 연락이 되었다. 진하사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달리 고생은 하였지만 직업을 갖고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나는 그 소식울 듣는 순간 어깨에 짊어진 마음의 짐 한보따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후에 그 당시 첨병, 전령, 무전병을 포함한 10여명의 전우들이 연락이 되어서 서울에서 첫 모임을 가졌을 때에는 서로 부등켜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저 멀리 지방에서도 몇 시간의 모임을 위하여 올라온 그들이 무척 고마웠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20여명이 정기적으로 만남을 유지하면서 만날 때 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그 누구도 지루하다는 사람은 없다.
칠순을 넘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짧은 그 시절의 만남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귀국의 그 날을 위하여 전입 첫 날부터 귀국하는 날까지 하루하루를 세면서 그야말로 10년 같은 1년을 보낸 전우들이 그 시절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 월남참전 소감 -
월남전에 참전한지 이미 45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다. 나는 조그만 전투를 경험하면서 전쟁의 비참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군인들은 대부분 피 끓는 20대의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많은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우군의 전상자를 본 군인들은 격분 속에 전쟁을 치루지 않을 수 없으며, 양측의 젊은 군인들의 이런 행위들이 확대되면서 말 그대로 피바람으로 얼룩지게 됨은 전쟁의 역사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전쟁을 통하여 우리도 경험한 일이지만 한 마을을 낮에는 월남군이, 밤에는 베트콩이 통제하고, 형은 월남군에 복무하고, 동생은 베트콩으로 활약하는 등 월남전에서도 우리와 비슷하게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란 비참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항상 전쟁의 위협과 참화에 휩쓸려왔다. 물론 몽고의 침략처럼 우리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적이 워낙 강하여서 진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방비를 튼튼히 하지 않고 정쟁(정치싸움)이나 부패 그리고 사치에만 열중하다가 패망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국도 비슷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우리자신과 후손들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비하는 것이 긴요한 일이라고 본다. 전쟁을 막기 위하여서는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어서 적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해결방법이 없다.
즉 강한 군사력과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적보다 우위에 있어야만 적이 침입할 생각을 못한다는 말이다. 스위스나 이스라엘 같이 조그만 나라가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조 병자호란을 당하고 청에 끌려가서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 3명의 충신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의 충성심은 우리가 본받아 마땅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청의 침략을 예견하고 미리 방비하지 못한 죄는 그들도 예외일 수가 없을 것이다.
조용히 침입자를 예의 주시하다가 공격하는 풍산개는 무서워하지만 꽁지를 말고 침입자를 짖어대는 개를 두려워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보다는 자신을 지킬 능력을 키워야 한다. 강한 이웃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는 그들보다도 더 많은 피와 땀을 흘릴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상기하면서 나의 참전기를 마친다.
이 길 용
차 례
☐ 월남전 참전 이유
☐ 주월백마 수색중대 제 2소대장으로 보직
☐ 소대장 생활 이모저모
☐ 사단 수색중대 특공소대장으로 임무 수행
☐ 부비추랩을 밟던 날
☐ 락빈촌 전투
☐ 열대우림의 신기한 경험
☐ 소대 총기 난동 사건
☐ 봉로만 계곡 작전
☐ 영헌봉송 장교로 임명되어
☐ 월남에서 귀국
☐ 그 때를 잊을 수 없어
☐ 월남참전 소감
- 월남전 참전 이유 -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거의 누구나 군생활을 통하여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들보다 특별한 경험을 하였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나의 작은 월남전 참전 경험이 지금 군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군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공통의 관심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작은 생각에 소개를 하고자 한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1969년도 12월로 기억되는 입소 전날! 나에게 다가올 군생활과 낯선 환경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진정시키고 기념적인 시간을 갖기 위하여 그 당시에 대한극장에서 70밀리 영화로서는 두 번째로 상영 중인 ‘닥터 지바고’를 보았다. 그러나 그 감동적인 명작이 극히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다 잊어버려서 후일에 다시 보았을 정도다. 아마도 입대의 불안감이 내 머릿속에 너무나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한 후에는 전방사단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제2훈련소 작전처에서 측정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같이 근무하는 심중위가 월남 전출의 명령을 받았지만 결혼문제로 갈 수가 없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심중위에게 내가 대신 가기로 양해를 구하고 조치를 취하였더니 명령이 내려왔다.
이런 내용도 모르시는 우리 어머니께서는 내가 월남에 가게 되었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내가 근무하고 있는 논산까지 내려오시더니 무조건 부대장을 만나서 그 명령을 취소하도록 하겠다고 야단을 하시는 것을 간신히 만류하고 서울로 모시고 왔다.
내가 월남전을 자청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째는 군인으로서 참전의 경력을 갖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과, 둘째로는 그곳에 가면 전투수당을 받을 수 있어서 경제적인 이득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길도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나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인 만큼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한 것이 사실이었다.
월남을 가기 위하여 부산으로 가던 날 !
나를 보내기 위하여 나오시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제 제가 싸움터로 갑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어머니께서 약속을 지킬 일이 있어요. 저하고 헤어질 때에는 울지 마시고 웃음으로 저를 보내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분명히 살아 돌아 올 거예요.” 라고 말씀드렸더니 정말로 헤어질 때에는 내가 버스에 올라가자마자 “잘 가라!” 하시면서 그대로 뒤로 돌아서서 총총걸음으로 가시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평생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월남전에 참가하여서 귀국할 때까지 바로 그 당시 어머니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해야 된다는 것을 몇 번씩 다짐하곤 하였다.
- 주월백마 수색중대 제2소대장으로 보직 -
월남을 가기 위하여 부산 부두에 도착하여 보니 미국무성 소유의 2만 5천 톤급의 웅장한 ‘바레트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8층 높이의 건물이 흔들거리면서 서있는 배의 모습은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7박8일간의 항해! 처음에는 조용한 바닷길을 그 거대한 배를 타고 가니까 거의 흔들림도 없고 육지의 건물에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배가 대만 해협을 지나자 조류의 흐름이 빨라지면서 배가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심할 경우에는 배의 2층에 있는 라운지에서 바로 배 옆의 바다가 보일 정도이니 이 배가 얼마나 요동을 치고 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 거대한 배도 태평양 한가운데 떠있는 종이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 때이다. 이러다가 이 배도 가라앉을 수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배는 미군이 운영하기 때문에 식사는 양식으로 먹게 되었다. 지금은 잘 이해가 안 되겠지만 그 당시의 양식은 최고급 식사로 한국에서는 상류층에서만 즐길 수 있을 시기인데, 이곳에서 하루 세끼를 양식으로 하니까 처음에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식탁에 앉으면 필리핀사람들이 봉사를 해 주고 식탁에는 과일이 항상 풍부하게 놓여 있었으며, 정해진 메뉴에 따라 양식이 풀코스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나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쌀밥과 김치 정도로 끼니를 때운 적이 많이 있었다. 침실로 들어가면 4인 1실로 한국에 있는 호텔급과 비슷한 수준으로 되어 있어서 무척이나 대접을 받으면서 배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월남의 ‘나트랑’이라는 항구에 배가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안케패스’작전에서 한국군의 피해가 많을 때에 내가 그곳에 도착하였으니 무척 긴장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내가 잘 알고 있었던 동기생이 작전 중에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후에는 마음이 무척 울적하였다.
월남 ‘나트랑’항구에서 ‘니노아’까지 차량으로 이동을 하였다. 긴 차량 대열이 끝없이 이동하고 있는데도 월남인들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는 무척 의아 하게 생각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월남인들은 비록 지금은 외국의 군대들이 자기를 도와 줄 수밖에 없는 처지이지만 자존심이 워낙 강하고 민족적인 우월성이 강한 민족이기 때문에 외국 군대들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얄밉기까지 하다. 특히 한국인은 자기들에 비하여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먼저 온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월남에 도착한 나는 주월백마사단 장교보충대에서 잠시 대기를 하였다. 밖으로 샌드백이 쌓여진 막사에서 보직을 받기 위하여 기다리는 시간은 무척 이나 길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얼룩 복에 월남 모자를 착용한 사단수색중대에 소대장으로 근무하는 동기생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원래 피부색이 그런지는 몰라도 얼굴이 새까맣고 눈만 초롱초롱한 모습이 정말 여기가 전쟁터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나에게 수색중대로 오라는 강력한 권유를 하였지만 사실, 나는 조금 더 편한 곳에 배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의 권유를 사양하였다. 하지만 우선 지명권이 있는 사단수색중대에서 나를 수색중대 2소대장으로 발령을 내고 말았다.
- 소대장 생활 이모저모 -
월남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나를 괴롭힌 것은 날씨였다. 고국에서 겨울철을 보내다가 별안간 불볕 더위를 대하니까 한 동안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다. 그러나 고국과는 달리 지열이 없었기 때문에, 그늘에만 들어가면 견딜만해서 그런대로 견딜만하였다. 또한 점심 이후에 2시간 취침이 보장되어 있는 것도 이곳 생활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첫 작전 중에 안 사실이지만 더운 날씨로 인하여 소대원들은 땀을 많이 흘리지만 나는 땀을 별로 흘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이곳에 오래 근무하면 육체도 이곳 기온에 적응하면서 땀구멍이 커져서 그렇다는 것이다.
소대장 부임 후에 숙소를 배정받아서 가보니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 주위에는 나무들이 있어서 대단히 운치가 있어 보였다. 내부를 살펴보았다. 나무침대 위에 모기장이 쳐 있고 책상 한 개가 전부이다. 걸을 때 마다 삐걱거리는 나무판자들은 틈새가 너무 벌어져서 각 종 곤충들이 제 집 드나들듯 한다. 그 곳에서의 첫 날밤은 뜬 눈으로 보냈다. 벽과 천정을 돌아다니는 도마뱀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노려보는 것 같고, 흔하다는 뱀이 언제 이곳으로 들어올지 몰라서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니 잠이 올 리가 만무하다.
며칠을 고생한 후에야 이곳 고참 소대장들과 마찬가지로 편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월남은 덥고, 정글로 이루어져서 작전을 하기가 싶지 않았다. 보통 3-4일간의 식량을 배낭에 넣고 작전에 나간다. 작전이 길어지면 중간에 헬기로 보급품을 보급하여 준다. 워낙 더운 지방이라 물이 제일 많이 필요하다. 한사람이 수통을 8개 내지 9개를 차고 다닌다. 작전지역까지는 헬기로 이동하고 그 후부터는 걸어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한다.
제일 힘든 문제는 식사였다. 그 시절에 고기를 먹지 못하였던 나로서는 전투식량인 레이션(깡통 통조림)이 대부분 고기통조림이기 때문에 이를 먹는데 애를 먹었다. 작전 중에는 내가 먹을 수 있는 몇 가지 통조림과 과자만을 주식으로 견디었으니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전이 없는 날에는 사단주둔지를 경계하기 위하여 사단수색중대의 4개소대가 돌아가면서 매복을 나간다. 가끔은 사단병력이 ‘나트랑’으로 이동시에 경계부대로 차출되어서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런 때에는 일상생활을 하는 이곳 월남인들의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볼 수 있어서 좋다. 여학생들이 흰색의 아오 자이(베트남 전통 옷) 복장으로 논(모자)을 쓰고 학교에 등교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베트남인은 허벅지가 가늘어서 무척 날씬해 보인다. 흰색을 즐겨 입고, 장례문화, 어른을 공경하고 여성들의 억척스런 생활상 등이 우리와 비슷한 것 같다. 물론 계속되는 전쟁으로 남자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여성의 역할이 커졌을 것이다.
- 사단수색중대 특공소대장으로 임무수행 -
사단수색중대 제2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어느 날 사단장님이 우리수색중대를 방문하셨다. 사단장님은 전 수색중대원을 집합시킨 자리에서 적의 정보 파악을 위하여 특공소대의 편성을 역설하면서 평상시에 ‘호네오’ 휴양소를 이용하게 하는 등 특별대우에 관한 말씀도 있었다. 그러나 소대장들은 그 누구도 자청하여서 특공소대장을 맡기를 원하는 자는 없었다. 그런데 병사들의 생각은 소대마다 차이가 있었다. 특히 다른 소대보다 거칠었던 우리소대원들의 분대장이 나를 찾아와서 소대원들의 의견이 우리소대가 특공소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날 밤은 한 잠도 자지 못하였다. 말 그대로 진퇴양란이다. 그러나 내가 싫으면 소대장직을 수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결정은 외길이다. 솔직히 말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특공소대장의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에게 인원 선발권이 있어서 분대장은 모두 중상사로 보직하고 대원은 수색대원이나 보충대에서 가장 유능한 병사들을 선발함으로써 자긍심을 갖고 임무를 수행할 수가 있었다.
- 부비추랩을 밟던 날! -
작전 중에 우리 소대가 부비추랩을 밟은 일을 말하려고 한다. 한 작전에서 우리 소대는 3소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정글이기 때문에 일렬로 부대가 이동 중에 있었다. 부비추랩이란 지뢰의 일종인데 가는 철선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철선이 사람에 의하여 끊어지면 즉시 뇌관에 압력이 가해져서 지뢰가 터지도록 장치해 놓은 것을 말한다. 3소대 인원이 다 지나가도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우리 소대가 지나가는 선두에서 부비추랩이 터진 것이다.
나중에 조사를 하여보니 3소대의 마지막에 이동하는 병사가 밟은 것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 소대 선두에 가고 있던 병사가 그 파편을 얻어맞고 쓰러진 것이다. 자세히 보니 좌측 팔 관절에 파편이 들어 박혔다. 나는 즉시 병원헬기를 요청하여서 후송을 보내고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동 중에 이렇게 가는 철선을 발견하기란 싶지가 않다. 특히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지나가도 괜찮다가 우리 소대원이 다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시 운명도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다른 날에는 2번에 가던 병사가 부비추랩을 밟았는데 7번에서 뒤따라오던 병사가 다치고 말았다. 그 역시 팔에 파편이 박혀서 고국으로 후송을 보내고 말았다.
한번은 도로를 2열종대로 걸어가고 있는데 우리 2소대가 중대의 선두 소대가 되어서 이동하고 있었다. 날씨는 무척이나 덥고 햇볕을 막을만한 나무들도 별로 없는 길을 걷고 있자니까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그런데 저 멀리에 큰 나무가 한 그루 보이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바로 그 밑에서 10분간 휴식을 한 후에 출발하겠다는 생각으로 다가갔는데 앞에서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는 바람에 휴식 명령을 내리면 그곳에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할 수없이 조금 더 행군을 지시하였다. 그보다는 못하지만 전방에 보이는 조그만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 밑에서 휴식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니까 도로를 따라서 2열종대로 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까 말하던 큰 나무 밑에는 우리 소대 뒤를 따라오던 제3소대장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제3소대장 통신병(월남전에서는 통신병이 전령의 임무를 겸하였음)이 소대장이 잠시라도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먼저 그 자리에 가서 자기의 배낭을 풀려는 순간에 부비추랩이 폭발하면서 그대로 즉사하였던 것이다. 아찔한 순간이다. 만약에 내가 그곳에 머물렀다면 나던가 아니면 우리소대원이 죽었을 것인데 말이다.
더욱이 죽은 소대원은 춘천 출신으로 유품 중에 월남 돈이 있었고 그 돈에다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나는 살아서 귀국 하겠다”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였다는 것인지...... 전쟁이란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목숨을 잃고 병신이 되기도 한다. 중대의 한 전우가 전사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숙연해지고 바로 자신이 저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당분간은 무척이나 신경이 날카롭다. 말하자면 사기가 무척 떨어진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전장에서 전우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울적하게 만든다.
- ‘락빈촌’ 전투 -
주월 백마사단사령부는 월남의 ‘니노아’ 시에 위치하고 있고 바로 사단 사령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락빈촌’이란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단정보처에서 “지금 락빈촌에 베트콩 5명이 출현하였으니 사단 수색중대는 급히 출동하여서 적을 사살하라”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 명령을 받은 중대장은 우리 특공소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중대장으로부터 출동 명령을 받은 나는 즉시 2개 분대를 무장시켜서 대기 중이던 장갑차에 올라타고 출동하였다. 하늘에는 정찰기가 ‘락빈촌’ 마을을 빙빙 돌면서 적들의 이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니까 적들이 이미 눈치를 채고 대나무 숲에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 대나무 숲은 약100 m × 200m 크기로 형성되어 있으며, 그 주위는 평지인데 띄엄띄엄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사방을 포위하고 적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이윽고 중대장이 병력을 이끌고 도착하여서 그 대나무 숲을 철통같이 포위한 후에 우리 특공소대에게 공격을 명하였다.
소대는 횡대전투대형과 낮은 포복 자세로 대나무 밭을 향하여 공격을 하기 시작하였고, 나는 대열 중앙에 위치하여 소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대나무 숲은 잔가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진입하기가 무척 힘든 곳이다. 매우 조심스럽게 얼마동안을 낮은 포복 자세로 들어가고 있는데 별안간 우측에서 “펑”하는 폭발음이 들리더니만 연이어서 사격소리가 들리는 거다. 우리 소대가 몇 분간에 걸쳐서 적들과 교전을 벌이던 중, 2차례에 걸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국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듣고는 속으로 ‘아! 우리가 당했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조금 후에 전 소대원들에게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적들도 전혀 미동을 하지 않고 정적이 감돌았다. 우선 후퇴를 명하였다. 왜냐하면 이미 적들은 우리 아군에 의하여 포위가 된 상태이고 지금은 부상당한 우리 병사들을 치료해 주거나 후송시키는 일이 우선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우측에서 공격하였던 진하사와 임병장이 부상을 당한 것이다. 나중에 상황을 알아보니까. 임병장이 공격을 하다가 적과 마주쳤는데 먼저 팔에 관통상을 입고 즉시 응사를 하여서 그 적병을 사살한 후에 비명소리를 냈고 그 소리를 들은 진하사가 임병장보다 먼저 가다가 되돌아서 임병장에게 “어딜 다쳤어?”라고 말하는 순간 적병이 진하사 엉덩이를 향하여 방망이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폭발되었고 진하사의 엉덩이는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일단, 부상자를 안전한 곳까지 데리고 나온 후에 병원헬기를 요청하였다. 특히 진하사는 소대장인 나를 보는 순간 “소대장님! 저 괜찮겠지요?”라고 말하였다. 나는 진하사의 엉덩이를 살펴보고는 “아니- ” 라고 말하려는 순간에 소대의 위생병이 나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즉시 눈치를 채고 “그래, 그 정도는 문제가 안 된다. 후송하여서 치료하면 괜찮아 질 거야” 라고 말은 하였으나 곧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심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소대원이 다친 것이 무척이나 괴로웠다. 우리 소대원들이 부상 당한지 15분 만에 미군이 운영하는 병원헬기가 도착하여서 즉시 후송을 보내고 다시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나는 중대장에게 건의하여서 우선 장갑차로 대나무 숲에 진입로를 낸 다음 공격을 하기로 하였다. 장갑차 2대가 종횡무진으로 길을 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전우들이 부상당한 것을 본 소대원들이 적개심으로 흥분된 상태라 무조건 진입을 하여서 적들을 소탕하겠다며 빨리 진입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다간 또 부상자가 나올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는 소대원들에게 냉정해 질 것을 요구하고 소대장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재삼 강조한 후에 공격 요령을 정확하게 설명하였다.
나는 공격전에 적이 숨어 있을만한 곳에 수류탄을 투척시키고 공격을 명하였다. 이미 적개심으로 가득 찬 소대원들은 민첩한 행동으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서로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적들이 은거할 만한 곳을 수색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적 2명만을 사살하고 나머지 3명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고 말았다. 나중에 그 지역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우리 소대원들의 훈련을 강화시켜야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즉 개인 당 2발씩 휴대한 수류탄을 투척한 결과를 확인하니 불발탄(터지지 않은 수류탄)도 있었지만, 안전핀을 풀지 않고 그대로 던진 수류탄도 있었다.
수류탄은 위험하기 때문에 2중으로 안전장치가 되어있고 고무줄로 손잡이를 한 번 더 묶었는데도 상황이 긴박하다 보니 안전핀을 뽑지 않고 수류탄을 그대로 던졌기 때문에 폭발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나는 작전 후 전 소대원을 집합시켜서 우리의 잘못을 말해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교육훈련을 강화하였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깨우친 점은 무엇보다도 실전과 같은 훈련을 열심히 하여야지만 그에 비례하여서 병사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철칙을 재확인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실전과 같은 훈련을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고국에 살아서 귀국하기 위하여서는 훈련시간을 더 늘렸던 것이다. 작전을 마친 후 적들의 시체를 장갑차에 싣고 락빈촌(적들을 도와주는 마을로 적성마을이라고 함)을 한 바퀴 돌면서 위력시위를 한 후에 적들의 시체이지만 격식을 갖추어서 매장을 해 주었다. 우리 소대는 그 공로로 천병인 어병장은 화랑무공훈장, 나는 인헌무공훈장을 받았다. 물론 나의 강력한 추천으로 첨병이 나보다 격이 높은 훈장을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다친 전우들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무척 미안한 생각뿐이다. 내가 좀 더 훌륭한 지휘를 하였으면 그들도 다치지 않고 적들을 잡았을 텐데......
이렇게 지휘관 한 사람의 능력에 따라 병사들의 생사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권한을 행사하기 전에 그들이 맡은 중대한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된다는 것을 월남전을 통하여 깊이 깨달았다. 아마도 국가를 경영하는 대통령이하 전 공무원들도 개인의 권리와 개인 이익에 영합하지 않고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생각하고 그들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다면 국가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리라 생각한다. 또한 내가 전투를 하면서 느낀 점은 나도 전투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전쟁은 겁이 나고 두려운 것이라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막상 작전을 나가는 전날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만다. 그리고 헬기를 타고 작전지역으로 갈 때에는 그 긴장이 최고점에 이른다. 그렇지만 막상 헬기에서 뛰어내려서 작전지역에 도착하면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고 정상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운명을 믿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작전 중에 동료가 죽거나 부상을 당하면 그 부대의 사기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다들 말이 없으며 시무룩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인하여 다들 말이 없고 시무룩하며 전투에 두려움을 느낀다. 또한 이러한 분위기는 한 동안 계속되기 때문에 지휘관은 체육활동, 오락, 연예인 초청 등을 통하여 분위기를 바꾸려고 한다.
- 열대우림에서의 신기한 경험 -
월남전에서 보통 작전을 할 때에는 중대급 이상 부대가 합동으로 작전을 하는데 우리는 적의 동태를 알기 위하여 적을 생포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특공소대이기 때문에 몰래 적진으로 침투하여서 작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잘못하다가는 적에게 포위되어서 전멸 당할 위험성도 있었기 때문에 모두 초긴장을 하면서 작전에 임하였다. 심지어는 이동 중에 소대장이 잘못하여 조그만 소리만 내어도 소대원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물론 이 작전 기간 중에는 적과 만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나는 너무나 색다른 광경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전투하고 있는 월남은 열대 우림 지역이기 때문에 밀림으로 이루어져서 이동하기가 무척 어렵다. 산길을 따라서 이동하면 편리하겠지만 이전에도 말했듯이 부비추랩의 위험성 때문에 이용하기가 힘들다. 밀림도(칼)를 이용하여 길을 만들어 행군하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하루 종일 이동하여도 2Km를 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날도 밀림을 뚫고 전진하는데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는 약 7m폭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강의 깊이를 재어보니 물이 내 가슴 높이 정도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대를 강을 따라 내려가도록 지시를 하였다. 물론 물속에서는 움직이는 것이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적과 마주치면 치명적인 손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충분한 경계를 하면서 이동을 하였다. 그런데 맨 앞에서 가던 첨병이 나에게 무엇을 가리키면서 사색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나도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동물원에서는 볼 수 있는 큰 비단구렁이가 물속에서 머리를 바짝 세우고는 우리일행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적진이라 총소리도 낼 수도 없고...... 순간 망설이다가 나는 그대로 통과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사실, 나는 뱀을 제일 무서워한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에 우리 집 논두렁에서 물뱀한테서 혼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논두렁을 달려가다가 앞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달리는 힘 때문에 멈출 수가 없어서 건너뛰었더니 또 뱀이 있는 것이 아닌가? 눈 딱 감고 뛰어 넘었더니 또 한 마리가 있었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서 어떻게 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이고 집에 와서는 거의 기절할 뻔하였다. 그 이후로는 뱀 꿈을 자주 꾸었고, 그럴 때마다 자지러지면서 깨었다. 그러니 내가 그 비단구렁이를 보았을 때에는 오죽하랴!
하지만 소대장이란 막중한 임무를 망각할 수가 없었던 나는 그 비단 구렁이를 총으로 겨누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면서 소대원 40여명이 다 통과할 때까지 그 비단구렁이를 감시할 수밖에 없었다.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물속에 잠긴 다리는 마치 비단구렁이가 내 몸을 감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하여튼 무사히 소대원이 다 지나가고 나도 그 비단 구렁이를 멀리한 채 신속히 이동을 하였다. 역시 비단구렁이도 대단하였다. 나와 소대원이 다 지나갈 때까지 미동도 없이 눈싸움을 하였으니 말이다.
비단구렁이로부터 해방이 된 후에 제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전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몰라도 별안간에 수백 마리의 원숭이 떼가 나타나서 우리들을 신기롭게 쳐다보면서 우리와 같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 이동이 우리 부대와 동일한 것이었다. 전후좌우의 경계병이 다 있는 것이다. 정말로 신기하다. 영화나 TV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을 직접 바라보고 있으니까 감정이 벅차오른다. 내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잠시 소대원들에게 휴식을 주면서 그들의 행동을 예의 관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나중에 그들의 행동을 말해주면서 “저런 동물들도 생존하기 위하여서 저런 대형을 유지하면서 철저히 경계를 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란 사람들이 더욱이 전쟁을 하는 군인이 경계를 소홀히 하면서 전쟁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는 요지로 소대원들에게 현지 교육을 시켰다.
밀림 안은 사실상 햇빛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덥지는 않다. 밀림 안을 행군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일들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혼주’라는 지방은 습지이기 때문에 밀림에 ‘말거머리’가 많다. 그곳을 지날 때에는 목 부분과 군화가 끝나는 부분을 단단히 매고 가야한다. ‘말거머리’들이 나뭇가지에 있다가 우리 사람들과 같이 피를 가진 동물이 지나갈 때에는 그대로 떨어져서 몸에 붙는다. 그 후에는 살로 파고 들어가서 피를 빨아먹은 후에는 떨어져 나와서 다시 나무 가지로 올라가 있는 다고 한다. 한참 행군하다보면 정강이가 간질간질하여서 살펴보게 되는데 이미 ‘말거머리’들이 반쯤 살갗으로 파고 들어가서 피를 먹고 있다. 그러면 손으로 그 놈들을 빼내어서 팽개쳐버려야 한다.
그곳에 특이한 것은 산 거북이가 많다. 산에서 거북이를 보면 무척이나 신기하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해안지대에서 볼 수 있는 악어만한 도마뱀이다. 청기와가 햇빛에 반사되어 나오는 강한 색상의 도마뱀이 순식간에 모래 밑으로 숨어버리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중생대로 간 느낌을 받는다. 또한 월남에는 독사(靑蛇}가 많다. 한국에서는 매우 드물고 귀한 뱀이기 때문에 병사들이 양주병에 청사를 넣은 뱀술을 담아서 귀국 할 때에 가져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별로 돈도 들지 않고 귀한 선물을 준비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이 있는 뱀을 잡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적지 않은 병사들이 뱀에 물려서 후송을 갔었는데 뱀을 잡으려다 손을 물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참으로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천혜의 땅인 것만은 분명한데 이렇게 동족끼리 싸우는 것은 우리와 비슷하니 그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나중에 이곳이 평온하면은 민간인으로 다시 이곳을 찾아와서 자연을 재음미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월남이 통일이 되어서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갈 수 있게 되었다.
- 소대원의 총기난동 사건 -
한번은 저녁 식사 후에 소대장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소대원이 급히 달려와서는 소대원 중 김상병이 중대장숙소 앞에서 소총을 난사하면서 중대장 나오라고 고함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초긴장 속에서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미 김상병은 술에 만취되어서 이성을 잃고 행동하고 있었다. 소대원들은 김상병이 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접근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무언가 결심을 해야만 되었다. 중대장은 즉시 사단에 보고하여 생포를 하라고 지시하는 상황 하에서 나는 중대장에게 일차적으로 내가 설득하여 볼 테니 시간을 달라고 하였고 일단 설득 후에는 김상병을 중대자체의 징계위원회에서 처리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중대장이 승낙을 하였다.
나는 긴장은 되었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김상병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하였다. 김상병은 계속하여서 “소대장님께 원한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십시오, 만약에 계속하여 이쪽으로 오시면 발포하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나는 김상병에게 계속하여서 말을 걸었다.
김상병이 중대장에게 원한을 품게 된 것은 작전 중에 사용하는 전투식량을 적게 분배하였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 문제에 관하여서는 나도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불만을 이런 식으로 한다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되니 소총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하자고 설득을 하면서 서서히 김상병이 있는 곳으로 몇 발짝을 움직여 보았더니 즉시 사격자세를 취한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나의 행동을 주시하는 상황 하에서 나 역시 물러서기가 어려운 상황으로 바뀌었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고 침착하게 행동을 하면서 “네가 소대장한테 원한이 없다고 하였으니 소대장은 너에게 떳떳하게 갈 것이다. 너의 총에 맞아도 별수가 없지 않는가?” 라고 말하면서 다가갔다. 김상병도 멈칫거리면서 발사를 하지는 못하였고 내가 근처까지 다가가니까 즉시 무릎을 꿇으면서 “소대장님!” 하면서 울부짖는다. 나도 김상병을 껴안고 같이 울었다. 물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징계를 받았지만 정상을 참작하여서 약한 벌칙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 이후로는 소대원들이 소대장에 대한 믿음이 강하여서 나는 귀국할 때까지 정말로 멋있는 소대장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인간적인 정과 믿음으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맺는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헤쳐 나갈 수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을 통하여서 체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가 그들에게 아무리 혹독한 훈련으로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였지만 그 속에 소대장인 나도 포함하여 훈련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불만이 없었다. 예를 든다면 장대비가 내리는 밤에 매복훈련에 임할 때에는 소대장인 나도 그들과 같이 그 비를 맞으면서 훈련을 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그 당시의 일을 거울삼아서 나는 그 이후에도 봉급을 제외한 어떠한 돈을 탐내거나, 사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군 생활을 깨끗하게 마무리 할 수가 있었다.
- 봉로만 계곡 작전 -
우리 사단수색중대는 봉로만 계곡이라는 맹호부대와의 접경 지역에서 다른 부대와 협동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우리 소대는 최전방 들판에서 매복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뒤에는 높고 밀림으로 이루어진 산이 있었고 앞으로는 허리까지 올라오는 갈대숲으로 이루어진 넓은 벌판으로 이루어지고 그 너머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평화스러운 시기에는 이곳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부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이 간다.
왜냐하면 집터나 야자수 그리고 파인애플 나무 등이 아직도 건재하고 농사를 짓는데 천혜의 땅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곳 벌판에서 원형매복을 세우고 적을 경계하고 있던 중 외곽에 근무하고 있는 경계병으로부터 전방 500m 지점에 적 4명이 출현하였다는 긴급보고를 받았다.
나는 소대원들에게 초긴장을 하고 적의 동태를 계속하여 파악하라는 지시를 한 후에 정예요원 12명을 선발하여서 적이 이동하는 방향을 앞질러서 우리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적이 올 것이라는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적들은 우리가 이쪽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는지 계속하여서 우리 쪽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우리와 거리가 약 350m 정도까지 되었을 때에 적의 행동이 수상해 지기 시작하였다. 이쪽을 계속하여 관찰을 하던 적들이 반대방향으로 도망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즉시 추격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여따이렝’이란 월남말로 정지명령을 내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죽을힘을 다하여 도망가기 때문에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거다. 나는 M79발사기 사수에게 사격을 명령하였다. 그 소리가 워낙 크기 때문에 적들은 박격포 탄이 날아오는 줄 알고 갈지(之)자로 도망가는 바람에 우리와 거리가 조금은 좁혀졌다. 이때를 이용하여 사격명령을 내렸다. 15명이 M16소총으로 사격을 하는 소리는 대단하였다. 그들은 더욱 더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서 도망친다. 그러던 중에 한 명이 우리 실탄에 맞고 쓰러졌다. 도망가던 또 다른 한 명이 그를 부축하고 도망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에 나는 그곳을 향하여 집중사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쓰러지지도 않고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결과는 4명의 적들 중 한 명만 사살하였다. 15명이 집중사격을 한 결과 1명만 사살하였다는 것은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다.
움직이는 표적을 사격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아무리 고도의 훈련을 받아도 쉽지가 않다. 영화에서는 백발백중이다. 흔히 서부활극에서는 말을 탄 카우보이가 수십 명을 상대로 권총사격을 하면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사람들이 쓰러진다. 심한 영화는 권총 당(리벌바형) 기껏해야 6발정도 사격할 수 있는데 그 이상의 사람들이 죽는다. 영화이니까 그것이 가능하지 실제로 전투를 한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백마사단에서 최고의 정예 부대라고 자랑하던 우리소대가 이 정도의 실력이라는 것을 솔직히 시인하고 평소에 훈련을 더 알차게 해야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대원들에게도 그날의 교훈을 되새겨 주었다. 또한 전쟁의 냉혹함을 경험해야 했다.
동료를 구하기 위하여 필사적인 사람을 사살해야만 하는 것이 전쟁의 아픔이다. 사실은 나는 그 당시 죽은 사람의 얼굴이 꿈속에서 자주 등장하여서 한동안 애를 먹었다.
- 영현 봉송장교로 임명되어 -
인헌무공 훈장을 받고 나서 마음이 조금은 풀려서 그런지 말라리아 병에 걸리고 말았다. 열이 40도를 웃돌고 있는 상황 하에서 얼음찜질로 체온을 내리려고 하니 그 고통이란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현 봉송장교 (월남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화장 처리 후 유골과 유품들을 비행기로 모시고 와서 동작동에 있는 국립묘지에 안장시키는 일을 담당한 장교)로 임명되어서 며칠 후면 고국을 방문할 수 있는 시기에 말라리아 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나는 고국에 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들떠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웬만한 병은 극복할 수가 있었을 것인데 병세가 좋아지는 기색이 없다. 나는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체온이 내려갈 때까지 얼음찜질을 계속하였다. 물론 내가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것을 알면 고국 방문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끙끙 앓으면서도 소대장 숙소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출발 전날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휑한 얼굴로 출국준비를 마친 후에는 영현 32구를 모시고 미국이 제공하는 비행기를 타고 오산 미군 기지에 도착하였다. 다시 버스 편으로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와서 영현을 관리소에 인계를 하였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서울에 도착하니까 언제 말라리아에 걸렸느냐는 듯 말짱한 것이다. 참으로 내가 생각하여도 신기하다. 그 병은 일종의 풍토병인지 우리나라의 기후에는 맞지 아니한 모양이다. 하긴 우리나라가 겨울철이었기 때문에 말라리아 병원균이 자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당시의 영현 봉송장교 및 하사관들은 모두 전투에 공이 있는 군인들로 편성되었기에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육본에서 제공한 차량 편으로 우리를 시청 근처에 있는 한 호텔로 안내하여서 짐을 풀게 한 후에는 우리를 음식점으로 안내하고 만찬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국에 왔다는 기쁨 때문에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다 동일하였다. 그렇게 훌륭한 만찬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후에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떠나라는 말도 한 귀로 흘리면서 집으로 직행하였다.
그리고 15일간의 휴가를 만끽하였던 것이다. 전투 중에 이렇게 고국에 휴가를 왔다는 자체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돌아갈 때에도 오산에서 미군 비행기를 타고 월남의 수도인 사이곤(지금은 호치민 시로 바뀌었음)에 도착 후에는 군 수송기 편으로 니노아에 도착하였다.
- 월남에서 귀국 -
1973년 초기에는 주월 한국군이 본국으로 철수를 하기 위하여 바쁘게 움직이는 시기다. 또한 적과 대치하다가 철수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어서 모든 장병들이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는 시기지만 나는 다행스럽게도 철수시기 전 달에 정상적인 귀국을 할 수가 있었다. 소대장직을 인계하고 나트랑에서 귀국선에 올라서 화물장교로 바쁘게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우리소대가 봉로만 계곡에서 작전 중에 소대장이 부상당하였다는 비보를 받고 충격을 받았다. 후임 소대장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이후에 나는 중대장과 작전장교 등을 경험하면서 군 생활을 계속하다가 소령으로 예편을 하였다.
- 그 때를 잊을 수 없어서 -
20대 중반의 한 창 나이를 월남 정글에서 보낸 나는 인생의 무게를 더할수록 그 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긴 차량행렬, 헬기편대에 탑승하여 적진으로 들어가는 모습, 시원한 야자수 나무 그늘, 교전시의 공포, 그리운 전우들의 얼굴 등이 날이 갈수록 아련한 추억들이 점점 잊혀져 간다. 가끔 회상에 보려면 대뇌 깊은 곳에 숨겨진 추억 파편들을 어렵게 조합하는 노력이 필요할 정도다. 그러던 중에 우연한 기회가 되어서 전우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먼저 장교 출신들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가 있었다. 중대장과 소대장들이 만났다. 그 시간도 나에게는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와 같이 정글을 누비던 소대원을 만나고 싶었다. 특히 나를 헌신적으로 보필한 무전병 및 전령의 소식과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하여서 후송을 보낸 후에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였던 진하사와 임병장 등 그 당시의 소대원들을 많이 만나보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진하사와 연락이 되었다. 진하사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달리 고생은 하였지만 직업을 갖고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나는 그 소식울 듣는 순간 어깨에 짊어진 마음의 짐 한보따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후에 그 당시 첨병, 전령, 무전병을 포함한 10여명의 전우들이 연락이 되어서 서울에서 첫 모임을 가졌을 때에는 서로 부등켜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저 멀리 지방에서도 몇 시간의 모임을 위하여 올라온 그들이 무척 고마웠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20여명이 정기적으로 만남을 유지하면서 만날 때 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그 누구도 지루하다는 사람은 없다.
칠순을 넘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짧은 그 시절의 만남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귀국의 그 날을 위하여 전입 첫 날부터 귀국하는 날까지 하루하루를 세면서 그야말로 10년 같은 1년을 보낸 전우들이 그 시절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 월남참전 소감 -
월남전에 참전한지 이미 45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다. 나는 조그만 전투를 경험하면서 전쟁의 비참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군인들은 대부분 피 끓는 20대의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많은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우군의 전상자를 본 군인들은 격분 속에 전쟁을 치루지 않을 수 없으며, 양측의 젊은 군인들의 이런 행위들이 확대되면서 말 그대로 피바람으로 얼룩지게 됨은 전쟁의 역사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전쟁을 통하여 우리도 경험한 일이지만 한 마을을 낮에는 월남군이, 밤에는 베트콩이 통제하고, 형은 월남군에 복무하고, 동생은 베트콩으로 활약하는 등 월남전에서도 우리와 비슷하게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란 비참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항상 전쟁의 위협과 참화에 휩쓸려왔다. 물론 몽고의 침략처럼 우리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적이 워낙 강하여서 진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방비를 튼튼히 하지 않고 정쟁(정치싸움)이나 부패 그리고 사치에만 열중하다가 패망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국도 비슷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우리자신과 후손들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비하는 것이 긴요한 일이라고 본다. 전쟁을 막기 위하여서는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어서 적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해결방법이 없다.
즉 강한 군사력과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적보다 우위에 있어야만 적이 침입할 생각을 못한다는 말이다. 스위스나 이스라엘 같이 조그만 나라가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조 병자호란을 당하고 청에 끌려가서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 3명의 충신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의 충성심은 우리가 본받아 마땅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청의 침략을 예견하고 미리 방비하지 못한 죄는 그들도 예외일 수가 없을 것이다.
조용히 침입자를 예의 주시하다가 공격하는 풍산개는 무서워하지만 꽁지를 말고 침입자를 짖어대는 개를 두려워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보다는 자신을 지킬 능력을 키워야 한다. 강한 이웃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는 그들보다도 더 많은 피와 땀을 흘릴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상기하면서 나의 참전기를 마친다.

첫댓글 이기사로 무슨 상을 받았다고 하고, 이무표 얘기로는 인승태가 맹호 기갑 4중대로 잘못 알고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