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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안식과 쉼은 하얗게 하나님 만나기>의 줄거리 :
안식일의 근본 취지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만남에 그 근본 취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하고 만나는 일에 결정적으로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 세상살이를 위한 일들이 하나님과 만남을 방해한다는 것일까요? 세상 모든 일은 마음에 얼룩과 흔적과 자국을 남겨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얀 마음이 아니면 절대로 만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연관성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안식과 쉼은 하얗게 하나님 만나기
(출애굽기 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오늘은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진정한 안식이고 참된 쉼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이 더러움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반복하여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근본적인 취지는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얀 마음 상태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진정한 안식의 목적입니다. 이러한 만남 자체가 참 안식이며 쉼입니다. 하얀 마음이란 더러운 자국과 흔적과 얼룩이 없는 마음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가 되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얼룩이 없는 하얀 마음이라야 실제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즉, 하얀 마음이 되어야 하므로 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지 단순히 일하지 말고 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실제로 일을 하지 않는다고 쉬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 설 명절이 길었습니다. 그런데 2~3일쯤 쉬고 나면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육체가 일 때문에 힘들었더라도 하루 푹 쉬고 나면 피곤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안식은 이러한 육체의 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1절을 보면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 일곱째 날 첫 번째 안식일에서 안식이 유래했음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의 특이한 점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있어서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한편 여섯째 날 마지막에 만들어진 아담에게 있어서 안식일이란 의식이 깨어서 처음으로 맞이한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시고 안식일에 쉬셨지만, 인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첫째 날을 안식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아담이 안식일에 한 일은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난 것입니다. 이 만남이 중요한 이유는 아담이 하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인격체로 지음 받은 아담이 처음으로 의식이 깨어나서 첫 번째로 마주한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아담은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를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마음에는 어떤 대상이나 일에 대한 의식이나 기억이 없습니다. 마음이 하얀 백지 같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첫 번째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안식일의 내용이 하얀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아담은 첫 번째 만남을 통해 안식하고 쉬게 됩니다.
아담은 마음에 어떤 대상으로 인한 흔적이나 자국이나 얼룩이 없는 하얀 상태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로 만났습니다. 아담은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다른 대상을 통해 자기 있음의 근거를 확보해야 합니다. 타자의 존재감을 가져야 내가 있다는 든든한 토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든든한 토대가 평강입니다. 또 아담은 마음이 비어있게 지음 받았기 때문에 채워서 만족을 얻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구조를 가진 아담이 하얀 마음 상태에서 하나님을 마주합니다. 그러자 존재감의 기능과 채움을 위한 바람, 소원, 희망, 열망의 흡입력의 기능이 하나님 한 분께 집중합니다. 이것이 아담의 마음에서 첫 번째 안식일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안식일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의 안식일에 아담을 만나셨듯이 모든 사람과도 만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난 상태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고, 하나님을 흡입하여 마음을 채우려는 바람이 작동하는 중에 하나님과 한 덩어리가 됩니다. 하나님과 내가 우리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에덴에서는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규정은 있었어도 안식일에 대한 규정은 따로 없었습니다. 안식일은 분명히 있었으나 일주일마다 한 번씩 안식일을 지키라는 규정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담의 마음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짓고 에덴을 관리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도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라는 규정을 주시지 않았던 이유는 안식이 하나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고 하나님을 흡입하는 것이 안식이자 쉼입니다. 아담은 언제나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었기에 매 순간을 안식하는 상태에서 일했습니다. 그렇기에 따로 안식일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 첫머리에서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오 주여, 내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는 편할 길이 없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안식이자 쉼입니다. 아담은 첫 번째 대상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선악과를 따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판단을 따라서만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깨어지지 않고 안식과 쉼이 유지되는 중에 일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가정이나 직장에서 생활하기에 앞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우리로 똘똘 뭉쳐 한 덩어리가 되고, 그 만남이 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삶의 활동들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직장에서 일을 해도 안식 중에 일할 수 있고, 가정에서 식사를 준비할 때도 안식 중에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따로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타락 이전의 하얀 마음 없이는 안식일의 취지가 지켜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취지는 아담이 첫 번째 안식일에 하나님을 만났듯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만남을 위해서는 하얀 마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이나 일에 관심을 가질 때 마음은 그것들에 의해 얼룩집니다. 그 대상의 흔적과 여운이 자국으로 남은 상태에서 마음은 더러워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죄인 된 상태에서 일할 때 그것이 마음의 얼룩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아 스스로 판단하지 않을 때는 죄가 없었습니다. 이때 아담은 먼저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고 그 만남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유지하는 방법은 무슨 일이든지 ‘이건 잘 됐으면 좋겠다, 저건 없어졌으면 좋겠다.’라고 하면서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음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만남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타락하기 전의 아담은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상태에서는 스스로 판단하기에 하나님과의 만남을 유지하며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대한 바람을 갖게 됩니다. 쉽게 말해 ‘이렇게 되면 좋겠다, 이루어지면 좋겠다, 가지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람은 곧 내가 하는 일에서 좋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이로부터 크든 작든, 중요하든 사소하든 일에 손대는 동안에는 좋음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래 좋음이란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속성입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유일한 좋음입니다. 본래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세상 기준에서 잘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좋음을 바라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하나님을 직면함입니다. 이는 곧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아담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난 상태입니다. 아담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다른 대상이 끼어있으면 안 됩니다. 다른 것이 있으면 마음에 얼룩과 흔적을 남겨서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더러워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얀 마음 상태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을 많이 가져도 마음에 얼룩과 더러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문제는 죄의 체질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에서 좋음을 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음을 원하는 일이나 대상은 다른 신이 됩니다. 신격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에게 좋음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인데, 죄의 체질 때문에 일이 잘되기를 바라며 그것으로부터 좋음을 바랍니다. 그 일과 연관해서 다른 신을 둡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은 그 다른 신으로 인해 얼룩지고 더러워집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타락하여 죄에 찌든 상태에서는 하는 일에서 좋음을 기대하기 때문이고, 일과 연관하여 다른 신을 두고 실시간으로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일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은 여전히 일에 대한 생각을 할 때 좋음을 바랍니다. 안식일에는 ‘하면 좋겠다, 하고 싶다.’라는 바람을 전부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수정해야 합니다. 인간인 이상 좋음에 대한 바람은 항상 있습니다. 그러한 바람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을 좋음으로 바라느냐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좋음에 대한 바람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수정하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부로서 요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때 음식이 맛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집니다. 이러한 바람을 갖는 이유는 음식이 맛있으면 좋음이 발생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음식의 맛이 다른 신이 되어서 마음에 얼룩을 남기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의 마음가짐이란 음식에 향하는 마음의 바람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식을 하면서 맛있게 되기를 바라지 않기는 어려우니까 아예 음식을 전날 준비해 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혹은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오늘 상품이 많이 팔려서 이익이 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안식일에는 아예 장사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관심의 대상들에게도 해당하는 일입니다. 안식일의 취지에서 생각하자면 ‘자녀가 잘 되면 좋겠다.’라는 바람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취지를 모른다면 바리새인이나 유대인처럼 형식적으로만 안식일을 지키게 됩니다. 무조건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을 능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이 세상 것들을 향하여 ‘가지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갖고 있었고, 이것은 결국 다른 신을 섬김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마음에 얼룩과 흔적과 자국이 남겨지고 더러움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에 맞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을 지키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란 태어난 사람 중에서 예수님만이 안식을 이루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한순간도 하나님 아버지와 마음의 연합 상태가 깨져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아담의 의식이 깨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대상이 하나님이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입고 계셨어도 하얀 마음을 유지하시며 언제나 아버지와 만나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안식 속에 있는 상태에서 일을 하셨기에 형식상의 안식일 규정에 얽매이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의 죄의 체질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밀착이 안 된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일을 할 때는 ‘이렇게 되면 좋겠다, 저렇게 되면 좋겠다.’라고 하며 좋음을 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안식일만이라도 일을 하지 말고, 좋음을 바라는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 일을 계속하는 한 자국과 얼룩이 더해지기에 하얀 마음은 유지할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 일이 잘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이미 그 일에서 좋음을 기대하고 그것을 다른 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우리가 가져야 할 유일한 좋음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세상일에서 좋음을 바라는 동안에 마음에는 얼룩과 자국으로 더러움이 쌓여갑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일 규정은 죄인을 대상으로 합니다. 마음에 자국과 얼룩을 남기고 더러움을 쌓아가는 일을 중지해야만 하얀 마음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만남에서 틈새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안식 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바라신 일이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안식 속에서 하나님과 한 덩어리가 되고 삶의 자리에서 그 만남을 유지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안식과 쉼이 유지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쉼 속에서 일하고, 안식 속에서 일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신 본래의 모습입니다.
창세 때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신 것은 먼저 하나님을 만나서 안식하여 평강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남이 유지되고 쉼과 안식을 얻는 가운데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악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여 행동하며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안식일은 빗나감의 방향을 되돌리는 날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는 방향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있는 분이시고 다른 모든 것은 있게 된 것들이기에 있음의 존재감은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만이 좋음이기에 하나님을 향해서만 좋음을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이기 때문에 빗나간 상태에서 일을 하다 보면 마음은 일에서 존재감을 가지고 좋음을 바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이 비록 엿새 동안 더럽고 얼룩진 삶을 살다가도 일곱째 날에는 다 씻어내고 하나님과 만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것조차 할 수 없다면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결국 형식적으로 안식일을 지키게 되었고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성전은 깡그리 무너지고 이스라엘은 멸절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안식일의 취지를 깨닫지 못했기에 망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착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그저 아무 일도 하면 안 되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안식일의 취지는 하나님을 만남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얀 마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전에서 상번제가 드려지던 때에는 어린양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마음에서 삶의 흔적을 지우고 하얀 마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상번제가 드려지던 성전도 없어져서 회당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삶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마주하며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생길 때마다 마음에는 얼룩이 생깁니다. 그러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상번제로 드려지는 어린양을 떠올리며 내가 죽었음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도 상번제의 의미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한 덩어리가 되어서 세상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안식에서 쉬면서 사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안식일을 지키시는 대신 매 순간을 안식으로 살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일(日)이 아닌 시, 분, 초 하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안식을 지키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하나님과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는 제자들조차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인류의 구원조차도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은 하나님과 직면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면 하나님을 직면할 수 없습니다. 안식과 쉼의 상태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자들에게는 안식일은 없습니다. 안식은 안식시, 안식분, 안식초로 지켜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끝난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일주일에 한 번씩만 기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시, 분, 초로 이루어 내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직면함도 시, 분, 초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안식일은 안식시, 안식분, 안식초로 지켜나가게 됩니다.
주일날만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주일이라면 매일 주일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시, 안식분, 안식초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 분, 초 단위로 주일의 의미를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하여 안식시, 안식분, 안식초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안식일에 담긴 근본 취지입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상번제로 이어집니다. 여기에는 세상에서 좋음을 바라는 나의 죽음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일을 하지 않더라도 좋음을 추구함은 지속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라볼 때 ‘우리 아이가 잘 됐으면 좋겠다.’라고 바라고, 자녀가 부모를 바라볼 때 ‘부모님이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라고 바랍니다. 또한 자신에 대해서도 ‘건강하면 좋겠다.’라고 바랍니다. 이러한 바람은 좋음을 기대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일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마음이 만신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에는 자국이 생기고, 얼룩이 생기고, 흔적이 생깁니다. 이렇게 더러워진 마음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진정한 안식과 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시, 분, 초로 기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의 죽음을 생활화할 수 없다면 세상을 향한 좋음을 바라기는 끊임없이 이루어집니다. 자동으로 ‘이렇게 되면 좋겠다, 저렇게 되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생깁니다. 마음에는 계속해서 자국과 얼룩과 흔적이 더러움으로 쌓여가고 하나님과의 만남은 없습니다.
이 세상 일을 바라는 동안 마음에 평안과 쉼과 안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일을 하는 동안에도 안식은 이루어집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바람 자체가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럴 때 아무리 힘든 일을 하더라도 평안이 깨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얻는 것은 절대 평강, 절대 만족, 절대 기쁨입니다. 절대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내 몸이 이 세상에서 어떤 처지에 있든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조건에 대해서도 좌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함을 통해 마음에서 ‘이렇게 되면 좋겠다, 저렇게 되면 좋겠다.’라는 모든 일과 모든 대상과 모든 사람에 대해 갖게 되는 바람이 끊어질 때 절대 평강, 절대 만족, 절대 기쁨이 생겨납니다.
태초에 아담이 의식이 깨었을 때 하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만을 존재로 느끼기에 평강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예수님이 주무실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만난 상태에서 하나님의 좋음만을 찾기에 절대 만족과 절대 기쁨이 깨어지지 않습니다. 애초에 세상 것들에 대해서는 있음도 느끼지 않고 좋음도 바라지 않기에, 하나님으로 누리는 절대 평강, 절대 만족, 절대 기쁨이 깨질 수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 돌이키는 것이 안식일의 취지입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순간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만남을 위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세상에서 일을 하며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빗나감의 죄의 체질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해야 합니다. 이 직면함이 안식일 규정의 근본 취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직면이 이루어지면 내 몸이 이 땅에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누구를 상대하든지 하나님의 존재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갈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는 절대 평강, 절대 만족, 절대 기쁨이 안식의 자리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한다고 안식이 깨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과 쉼이 유지는 동안에 일하는 자들이 교인이고 선민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먼저 쉬게 하시고 그 쉼이 깨지지 않는 상태에서 일하게 하시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이 입어야 함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시, 분, 초로 하나님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안식일이 아닌 안식시, 안식분, 안식초를 지킬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