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무엇을 찾고 있나요?
오세요, 그러면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8,39]
요한복음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의 첫 제자를 세우시는 과정은 공관복음과는 차이가 있다.
먼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고백을 한다.
이 말을 듣고 요한의 제자 두 명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그 두명 가운데 한 명은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다(요 1:40).
그리고 그는 베드로도 데리고 가며,
예수님은 " 그대는 요한의 아들 시몬입니다. 그,대는 게바라 불릴 겁니다(요 1:42)."
안드레와 베드로.
그들의 생업은 어부였으나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이들이었다.
로마 제국의 압제와 하수인들로 인해 피폐해진 조국,
오래 전부터 지켜오던 신앙적인 자존심마져 땅에 떨어진 조국,
새로운 혁명 같은 사건이 있어야만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안드레는 요단강에서 회개를 선포하며,
로마제국의 꼭둑각시 헤로데의 불의함을 꾸짖는 광야의 소리,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예수가 요단강으로 와서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고, 스승의 선언도 들었다.
이제 스승을 떠나 새롭게 등장한 그분을 따를 때가 되었다.
간절히 찾고 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 예수님은 몸을 돌려 그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은 무엇을 찾고 있나요?"
무지개였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압박이 없는 조국, 로마의 꼭둑각시들이 군림하지 않는 조국......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세요, 그러면 보게 될 것입니다."하신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을 볼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진리'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일 것이다.
그들이 찾고 있던 무지개가 아니라, 진리를.
오늘 날에도 수많은 이들이 무지개를 찾고자 주님께 나온다.
하지만, 주님은 무지개를 보여주시지 않는다.
진리를 보여주실 뿐이다.
무지개를 버리고 진리를 선택하는 자는 많지 않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길은 '좁은 길이요, 좁은 문'이다.
자신이 찾고자했던 것, 추구하던 것들이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거듭남이요, 제자됨이다.
예수를 따르면 '진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진리'는 오늘도 무엇이라 말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보려면, 무지개를 품고 있어야 한다.
그 열정이 진리를 보게 할 것이다.
당신의 무지개는 무엇인가?
그냥, 사라져버려도 좋을 것 혹은 허망한 것인가?
그것은 무지개가 아니다.
최소한, 처음으로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의 무지개 정도는 되어야 무지개다.
첫댓글 저도 제자들의 무지개를 품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