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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땅이 아깝나? 뜻이 아깝나?>의 줄거리 :
세상 것이 아깝습니까? 아니면 세상 것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아깝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 기쁨의 동산인 에덴에서 사는 삶이 갖는 특징은 내가 스스로 하는 좋고 나쁨의 판단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의 삶의 특징은 오로지 내 뜻은 하나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으로 삶의 내용이 충만하다는 사실입니다. 약속의 복지에서 사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지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가장 중요하고 귀합니다. 세상 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세상 것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아깝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의 유일한 밑천입니다.
땅이 아깝나? 뜻이 아깝나?
(민수기 32:1~42)
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2.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와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3.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4.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5.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6.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7.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8. 너희 조상들도 내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냈을 때에 그리 하였었나니
9.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
10. 그 때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11.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본문에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요단 동쪽 땅의 분배를 요청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1~11절을 보면 이러한 요청에 대한 모세의 책망과 경고가 나옵니다. 이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에 더해 므낫세 반 지파는 가족들과 가축 떼는 요단 동편에 머물게 하고, 남자들은 동족들과 함께 요단 서편 땅 정복에 동참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들은 모든 정복이 끝나고 지파별 분배가 이루어진 후에야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겠다고 집요하게 설득하여 결국 모세의 허락을 받아냅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 중심으로 <땅이 아깝나? 뜻이 아깝나?>라는 제목의 하나님의 말씀 증거합니다.
여러분은 세상 것이 아깝습니까? 아니면 세상 것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아깝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잃는 것을 주머니의 현금 백만 원을 잃는 것보다 아깝게 여기며 살고 계십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아깝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복지에서 사는 것입니다. 반면 의식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까워해 본 적이 없다면 복지를 살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의심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돈 1억을 잃어버리게 하셨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이 그 1억을 어떻게 처분하시든지 우리는 돈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아까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휴지통에 버리는 것과 같은 결과가 나올지라도 1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깝고 소중하게 생각해야지 1억이 소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에게 건강은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건강이 더 소중할까요? 건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소중할까요? 지금 내가 건강이 안 좋은 것은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권자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짐까지 주관하시기 때문에, 건강이 안 좋은 상태도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건강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내게 건강을 없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지금 내게 건강이 없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고 건강을 소중히 여긴다면, 건강이 안 좋은 상태로부터 무엇인가를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이어져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소중하게 여겨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계획하신 뜻이 이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당장 내 건강이 좋지 않아 싫다고 여기며 ‘건강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품는다면 범사에 감사는 끊어집니다. 건강하지 않은 상태 다음에 이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은 이어져 나갈 수 없게 됩니다. 반대로 건강하지 못할지라도 그 뜻을 소중하게 여겨서 감사한다면,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이루어져 나갈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다음 단계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다 뿌리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하나님의 뜻을 자꾸 뿌리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들어가서 살게 되는 상황에 대한 말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복지로 바꾸어 살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비느하스에게 나팔을 들고 전쟁에 나가게 하신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복지를 살기 위해서는 내가 처한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존재감과, 하나님의 좋음을 가장 강렬하게 실감할 수 있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내 삶의 현장은 약속의 복지로 바뀌게 됩니다.
본문에는 그렇게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 언급됩니다. 하나님을 강하게 실감하면 복지를 사는 문제는 끝납니다. 실감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실감하는 것 자체를 모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은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증상을 언급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실감하는지 못하는지를 스스로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시간에 부대끼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나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사람들이 내 삶의 현장을 약속의 복지로 바꾸는 일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시체놀이를 하듯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뜻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들에게 마음을 허용할 때 삶을 복지로 바꾸는 일은 방해받습니다. 그리고 나와의 관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는 하나님의 뜻이 존재하고, 나의 말과 행동이 그들에 대해 어느 정도 지분이 담겨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핵심은 결국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실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땅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끊어지면 복지가 아닙니다. 에덴의 특징은 스스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 뜻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있어야 뜻도 세울 수 있는데, 판단하지 않는다면 뜻도 세울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기쁨이라는 뜻의 에덴동산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만으로 사는 것이 기쁨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끊어지는 이유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지 못하고 끊어지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나를 장갑으로 삼는 것을 방해할 수 있으며, 또 시체놀이하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장갑으로 끼실 때 나의 모든 말과 행동에는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과 연관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나온 후에 본문에서 한 가지 질문이 제시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느냐 단절되느냐를 묻기에 앞서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이나 단절은 다분히 기술적이자 기능적 문제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문제의 속을 들여다보면 근본적이고 인격적인 문제가 존재합니다. 본문은 ‘애초에 너희가 하나님의 뜻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느냐?’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뜻 자체가 아깝게 느껴지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내가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삶이 연결되느냐 단절되느냐의 문제에 앞서는 근본적 질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아까워하는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깝게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과 연결되느냐 마느냐의 이야기는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떨 때 아까워하는 마음이 생기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외식을 할 때 음식을 남길 때가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라면 버리기 아까워서 포장을 부탁합니다. 한낱 음식도 아깝게 여기는데, 하나님의 뜻을 아까워해 본 적이 없다면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하나님의 뜻을 아깝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과 연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물론 이 세상 것이 아까워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 것을 잃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뜻 자체를 아까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자문할 수 있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모세와 지휘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요단 동편의 땅을 요구합니다. 1절을 보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으로부터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가축이 심히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가축이 많았던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지파도 똑같이 많은 가축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의 심리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다른 지파보다 가축이라는 소유물에 대해 관심을 보인 것입니다. 이들의 가축은 광야를 지내는 동안 하나님께서 늘어나게 하신 것이고, 전쟁을 통해 얻게 된 것들입니다. 이것은 다른 지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 지파의 인구가 많았음을 염두에 두자면 르우벤 지파나 갓 지파에 비해 가축이 적었을 리가 없습니다. 전쟁의 노획물은 균등하게 분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각 지파의 마음 상태까지 똑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가축이라는 소유물을 특별히 아깝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 가축 떼를 먹이려면 좋은 목초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에 요단 동편의 야셀 땅이나 길르앗 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지역은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훌륭한 목초지이자 비옥한 농토라고 합니다. 1절을 보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가축을 아깝게 여기는 마음으로 땅을 보았고, 요단 서편으로 가지 않고 동편에 남기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치되는 내용입니다. 앞서 본 26장 56절을 보면 “그 다소를 막론하고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나눌지니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지파의 인구를 막론하고 기업을 제비 뽑아 나누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인간의 의도가 조금도 들어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땅이 할당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제비 뽑은 땅에는 비옥한 땅도 있고 척박한 땅도 있습니다. 그 모든 땅의 토양을 지으시고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지파별로 당신의 뜻을 따라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제비 뽑은 것과는 별개로 요단 동편 땅을 요구한 르우벤과 갓 지파 그리고 이에 더해 므낫세 반 지파의 상황을 보면, 이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법칙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제비 뽑은 땅을 의식에서 제쳐버립니다. 눈으로 보고 좋게 여기는 대로 마음이 움직이며 소유 욕구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감히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의견을 내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비 뽑아 땅을 할당하라고 지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기들 보기에 좋은 땅을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모세는 엄청나게 진노하며 가데스 바네아 정탐 사건을 언급합니다. 당시에 단지 열 명의 정탐꾼이 하나님이 약속한 복지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여 출애굽 1세대 전체가 광야에서 파멸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열 명 정도가 아니라 르우벤과 갓 지파에 더해 므낫세 반 지파까지 요단을 건너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역정을 내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이러한 요구가 복지에서 이루어질 삶에 대한 포기 선언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우리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는 것이 본문에 기록된 두 지파 반의 결정이었습니다.
이때의 상황은 가데스 바네아 때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의 강대함에 좌절하고 복지 진입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복지 진입을 포기합니다. 사정은 달랐지만 복지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은 동일합니다. 복지는 곧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는 약속의 땅입니다. 이러한 복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요청했기에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여 분노하며 질책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가 이 땅에서 이룰 것이다.’라고 약속하신 뜻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지는 땅을 우리가 원치 않는다면 어떨까요?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아까워하지 않음입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이러한 모세의 질책을 들으면서도 집요하게 달라붙습니다. ‘당신이 화를 내는 이유가 복지 진입이라면 알겠습니다. 우리의 가족과 가축들은 요단 동편에 남겨두고, 남자들은 요단강을 건너가서 이스라엘 형제들의 정복 전쟁에 끝까지 참여하겠습니다.’라고 설득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설득을 이어갔고 모세는 마지못해 이들의 요구를 허락합니다. 물론 모세의 허락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허락 속에는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무슨 일을 했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뜻으로 정하신 복지 경계 바깥에 머물기를 자초했습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동산 바깥에서 살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따져 볼 것은 요단 동편의 목초지가 좋은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 아닌 이들의 마음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약속의 복지는 요단 서편이었으나 이들은 요단 동편에 머무르기를 자초합니다. 이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들은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따라가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발견되는 태도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이 복지로 바뀌지 못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실감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내려와 나를 장갑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의 손이 내 지정의언행의 다섯 가지 요소를 장갑으로 끼시고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복지가 이루어지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나를 장갑처럼 끼시는 것은 기계적인 일이 아닌 인격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소중한 줄 아는 사람을 장갑으로 끼십니다.
예를 들어 돈 10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까워해야 할 것은 10억일까요? 아니면 10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아까워해야만 그 10억을 쓰는 동안에 복지를 살 수 있습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까워 해야 할 것은 건강이 아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까워야 건강으로 살고 있는 동안 복지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건강을 나쁘게 하실 수도 있고, 좋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적당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다만 어떻게 하시든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대상은 건강 그 자체가 아닌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금 주어진 상황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의한 것이고,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는 이유는 상황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소중하고 좋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할 때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은 계속해서 이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지가 이어져 나가는 모습입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제비를 뽑을 때는 사람의 의도가 포함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만으로 땅은 할당됩니다. 각양각색의 토지가 하나님의 정확한 계산에 의해서 각 지파별로 분배될 예정입니다. 그렇게 알고 있기에 다른 땅을 달라는 생각은 감히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도 요단 동편의 목초지를 보며 가축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다 지파의 어떤 집안에서 부인이 남편에게 ‘여보, 이 요단 동편 땅이 참 좋네요. 여기가 약속의 땅은 아니지만 살만하지 않겠어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이 사람아, 지금 우리 눈에 좋은 게 문제야? 분명히 하나님이 제비뽑기로 땅을 분배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잖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할당되는 땅을 정해놓으시고 계신다는 뜻 아니겠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뜻이 있는데 그 뜻 말고 다른 땅을 얻겠다는 거야. 어떻게 그런 망발을 하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대화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요단 동편에 남기를 요구한 자들은 다른 생각을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요단 동편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남편이 가만히 듣다 보니 그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야기 해 봅니다. 어느덧 지파 전체에 ‘요단 동편도 좋긴 좋지. 그냥 여기에 살아볼까?’라는 생각이 퍼집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의 문제는 제비뽑기로 할당하시리라는 사실을 마음에서 제쳐버린 것에 있습니다. 이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요단 서편에 우리를 위해서 특정한 지역을 할당하시려고 계획하시지요. 그런데 잠깐 제 말씀 좀 들어보세요.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요단 동편이 목초지로서 너무 좋습니다. 이렇게 좋은 목초지와 비옥한 땅을 놔두고 어디로 가라는 말씀입니까? 요단 서편에 가서 제비뽑기를 한들 이보다 더 좋은 땅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계획하신 땅은 접어두시고, 우리에게는 이 땅을 주세요.’라고 말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삶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는 태도입니다. 우리의 오감으로 접하는 세상일 중에 좋고 아깝게 여겨지는 일들을 따라갑니다. 그러면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와 똑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 갖고 계신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좋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은 좀 접어두시고 제 요청을 들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내 눈으로 보기에 좋고, 내 귀에 듣기에 좋고, 내 코로 냄새 맡기에 좋고, 내 입으로 맛보기에 좋고, 내 손으로 만지기에 좋습니다. 내 감각에 포착되는 대로 좋음을 느끼는 대로 움직이면 요단 동편에 남기를 요구한 지파들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요구한 적은 없어도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접어두십시오. 그리고 내가 지금 좋다고 하는 것을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종교인으로서 살면서 드렸던 기도와 간구는 본문에 기록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의 요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일과 대상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으로 보기에 좋은 대로 스스로 판단하며, 하나님 뜻에 없는 요단 동편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하나님의 뜻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이렇게 살면서 기쁨의 에덴동산과 복지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입니다. 여기서 젖과 꿀이란 단순히 땅이 기름진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기쁨의 핵심 바탕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장갑 삼으시고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은 기계적이고 기능적인 일이 아닙니다. 내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좋아해야 합니다.
창세기 22장 12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게 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결국 독자 이삭보다 하나님을 아깝게 여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윗분이시기에 경외라는 표현을 썼고, 이삭에 대해서는 아깝다는 표현을 썼을 뿐이지 의미는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아까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더 아까워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돈이 아깝고 소중해서 돈이 없는 상황이 싫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는 상황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신 결과입니다. 우리는 보통 나에게서 원인을 찾습니다. 내가 악하고 잘못했기 때문에 돈이 없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내가 투자를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게을렀기 때문에 돈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사기를 당했더라도 내가 당한 일이기에 나에게서 원인을 찾습니다. 그러나 설령 사기를 당했어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기를 당하도록 허락하신 결과입니다. 결국은 나의 악함까지도 고려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주권적으로 상황을 만드신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악해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허락하시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이제는 아까워할 대상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이 좋고 아까워서 돈 없는 상황을 싫어할 것이 아니라, 돈이 아깝지만 돈과 관련하여 나를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아까워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건강이 안 좋아도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요구한 땅을 허락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보고 감사로 수용하면, 그다음에 있어야 될 일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민은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따라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까워 하는 자들입니다. 지금 내가 이루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이 소실되고 땅에 버려지는 것을 아까워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으면 약속의 복지는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우리가 선민이라면 이 세상에서 제일 아까운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의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따라갑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생활화가 필요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하나님 실감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방해받거나 소실되지 않고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내가 십자가를 기억하지 않고 바라보지 않는다면, 눈으로 보기에 좋은 대로 마음이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 뜻과 내 판단이 생겨서 그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말씀을 전하면서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때문에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때문에 네로 황제 때 교인들은 누명을 뒤집어쓰고 박해를 받아서 사자 밥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세상 기준으로는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소중하게 여기실 수 있습니까? 그래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세상 기준으로 좋게 보이는 일들도 있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결실 있는 인생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문제는 이에 대한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먼저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배부른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더 이상 세상을 향해 간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한 내용들이 없어져야만 하나님의 뜻은 마음껏 활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처럼 눈으로 보기에 좋은 일들을 간구합니다. 좋은 목초지와 비옥한 땅을 보고 요구한다면 정작 하나님의 뜻으로 정해진 약속의 땅 복지로부터는 튕겨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뜻이 이루어질 때 반드시 시험에 들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면 타락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 자체와 주권 자체를 좋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반드시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 자체가 좋고 주권 자체가 좋으면 어떤 상황이라도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존재합니다. 장사가 안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좋아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소중하고 좋기에 장사가 안되어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눈으로 보기에 좋은 대로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눈으로 보기에 좋아하는 것을 따름이 문제라면, 눈에 보기에 싫어하는 것을 멀리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좋음에는 결국 싫어함에 대한 반대 상황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이 세상 것들을 좋아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만 좋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까워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하나님께서 자발적이고 주권적으로 할당하기 위해 계획하신 땅이 있습니다. 다만 소중한 것은 땅이 아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뜻을 제쳐버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아까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이 땅의 삶이 진짜 기쁨의 에덴동산의 삶이 되고, 복지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보기에 좋은 모든 것에 대해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고 죽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한순간도 뜻이 버려지지 않으므로, 이 각박하고 험악한 세상에서 에덴을 살고 약속된 복지를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