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본 문 / 로마서 14장 5∼12절 (로마서 64)
주 제 / 천국백성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소유이다. 그러므로 교우를 함부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작성일 / 2026년 8월 30일. (№ 26-35)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롬 14:5∼12)
Ⅰ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롬 14:5)
오늘은 ‘천국백성의 자유와 한계’에 대한 두 번째 가르침이다.
로마서 14장 5절을 보라.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롬 14:5). 초대교회시대 교회 안에는 ‘어떤 특정한 날’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고, ‘모든 날’을 동등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일에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날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불필요한 논쟁’이라고 말한다. “…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롬 14:5). ‘어떤 특정한 날’을 중히 여기든, ‘모든 날’을 동등하게 여기든, 각자의 생각과 신념에 따라 하면 된다고 한다.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 이 가르침 안에서는 타인의 결정을 비판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날에 대한 규례’에 종속되지 않는다.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정하고, 타인이 자유롭게 정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지 않는다. 타인의 자유를 존중한다.
이 가르침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어떤 공동체든 공동으로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 ‘교회’라면 모여 예배하거나, 모여 기도하거나, 모여 봉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자기 신념’보다는 ‘합의’가 중요하다. 또한 합의가 되었다면 토를 달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우리 영광교회는 지난 7월 19일부터 8월 16일까지 5주 동안 ‘찬양집회 여름방학’을 보냈다. 처음에는 ‘4주 방학’이 제안되었다. 그러자 7월 19일부터 8월 9일까지 4주 방학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1주씩 뒤로 미루어서 7월 26일부터 8월 16일까지 4주 방학을 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조정을 거쳐 7월 19일부터 8월 16일까지 5주 방학으로 합의되었다. 합의 뒤에는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영광교회 성도들은 ‘자기 신념’보다 ‘화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성도들이다.
Ⅱ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6∼9)
로마서 14장은 천국백성의 자유와 한계를 가르치는데, 천국백성이 왜 교우의 지유를 비판하지 말고 존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14장 3절에서는 하나님은 ‘먹는 사람’도 품으셨고, ‘먹지 않는 사람’도 품으셨으니, 다른 교우를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이 품지 말아야 할 사람까지 품으셨다.”고 항의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로마서 14장 4절에서는 하나님은 주인시시고, ‘먹는 사람’도, ‘먹지 않는 사람’도 그 주인의 하인이니 다른 교우를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인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셨다.”고 책망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마서 14장 6∼9절에서도 한 가지 이유를 더 설명한다. 한 마디로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영원한 소유’이니 다른 교유를 비판하는 것은 “예수님은 참 하찮은 것을 소유하셨습니다.”라고 조롱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다른 교우의 자유를 비판하지 말고 존중하라는 가르침이다. 이제 자세히 살펴본다.
로마서 14장 6절을 보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 14:6) ‘특정한 날’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특정한 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에 ‘특정한 날’을 중히 여기는 것이고, ‘특정한 음식’만 먹는 사람도 ‘특정한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에 ‘특정한 음식’만 먹는 것이라고 한다. 반대로 ‘모든 날’을 동등하게 여기는 사람은 ‘모든 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에 ‘모든 날’을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고, ‘모든 음식’을 다 먹는 사람은 ‘모든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에 ‘모든 음식’을 다 먹는 것이라고 한다. 특정한 날을 중히 여기든, 모든 날을 동등하게 여기든 다 같이 ‘감사하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 믿음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감사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소유’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로마서 14장 7절을 보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롬 14:7) 여기서 ‘자기를 위하여’(헤아우토)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자기 스스로의’란 뜻이다. 그러면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자기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믿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스스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번역되었어야 한다. “자기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로 말미암아 죽는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로마서 14장 7절은 ‘성도의 헌신’을 가르치는 본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치는 본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천국백성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까?
로마서 14장 8절을 보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여기서 ‘주를 위하여’(퀴리오)란 말도 문자적으로 ‘주님의’, ‘주님에 의한’이란 뜻이다. 그러면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자기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믿는 우리는 살아도 주님에 의해 살고 죽어도 주님에 의해 죽습니다. 우리는 살아서도 주님의 소유이고, 죽어서도 주님이 소유입니다.” 이렇게 번역되었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천국백성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예수님의 소유이고, 죽은 후에도 예수님의 소유인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자기 맘대로 살지 않는다. 예수님의 소유이니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산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 오직 ‘물질적 복’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는 영적 품격이 다르다.
로마서 14장 9절을 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9).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과 다시 부활하신 목적은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기 위함이었다고 가르친다.
사람은 사는 동안에는 많은 관계를 맺는다. 부자관계, 형제관계, 친구관계 등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맺고 산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이 모든 관계는 종료된다. 추억과 그리움은 남지만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죽어도 끝나지 않는 관계가 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이 관계는 죽어도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셔서 확정 지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죽은 자의 주님이 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그러면 살아 있는 자의 주인은 아닌 것인가? 바보들의 생각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시내산으로 올라가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부재를 두려워한 나머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하나님이 산 위에서 모세를 만나고 계시니 지금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이 바보 같은 생각이 우상을 만들게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죽음의 세계에서 다시 삶의 세계로 나오셨다. 나오셔서 산자들의 주인이심을 확증하셨다. 그래서 우리 천국백성들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다.
Ⅲ 어찌하여 형제를 비판하느냐? (롬 14:10∼12)
로마서 14장 10∼12절을 보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12). 내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인 것처럼 나와 신념이 다른 성도도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인데, 비판 받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듯 묻는다. 예수님이 십자가로써 또한 부활로써 당신의 소유라고 확정한 교우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판할 수 있느냐? 고 따지듯 묻고 있다.
로마서 14장 12절을 보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 개인적인 잘잘못은 하나님이 직접 따지시니,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고 교유의 자유를 존중하고 화목한 신앙생활에 집중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기도>
하나님 영광교회 성도들 진리를 통해 얻은 자유를 누리되, 교우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게 하소서. 교우의 자유를 존중하고 응원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