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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2016년 계간 <문학과 의식>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우화(羽化)를 위하여
너의 뿌리를 아느냐.
누가 이렇게 물어왔을 때 대답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명색이 열에 하나나 겨우 대학을 다니던 시대에 다행스럽게 그 하나가 되어 공부를 한 나인데도. 아는 거라곤 신라의 시조(始祖) 박혁거세로부터 시작됐다는 것, 경명왕의 아들 밀성대군이 새롭게 터를 잡은 밀양이 본관이라는 것, 그로부터 갈라져내려 행산공파라는 것 외에는. 가까운 선대 그 누구 하나 자랑할 그 무엇도 없는 가문에서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근거를 나라를 세운 시조 외엔 찾을 수도 없으니. 참 알량한 가계다.
혁거세(赫居世). 이름도 특별한 시조는 알에서 태어났단다. 요즘과 같은 첨단과학의 시대에는 믿을 수도 없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무엇이었는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구쳤는지 알 길이 없다. 신화가 아무리 상징이라 하지만 나의 얄팍한 지식과 상상력으로서는 도저히 감조차 잡을 수가 없으니. 족보가 있긴 하나 할아버지부터 그 이상은 아무리 쳐다봐도 실체가 없는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고. 내가 이럴진대 아들 녀석은 말해 뭐하랴. 한글이나 겨우 깨칠 정도였던 아버지도 더 이상은 아는 게 없어 가르쳐주지 않았을 것이려니. 거실에서 핸드폰으로 여자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던 아들에게 물었다.
“너 우리 박 씨의 시조가 누군지 아냐?”
녀석은 느닷없는 내 말에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다간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들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는구먼요?”
“딴소리 말고 어서 말해봐, 인마.”
“박혁거세지 누구예요.”
“그럼 본은?”
“본이라니, 본이 뭔데요?”
불행하게도 아들의 의기양양은 딱 거기에서 끝나고 말았다. 파는? 하고 다시 물었을 때 녀석은 대꾸도 않고 양손 엄지로 전화기만 빠르게 터치했다. 일단 불리할 거 같으면 못 들은 척, 무시하고 보는 게 놈의 장기다. 하긴 본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놈이 파는 어찌 알겠는가. 내 탓이었다. 아비인 나도 거기에서 몇 발자국 더 나가지 못하는데.
그런 아들놈에게 입영통지서가 왔을 때 어째서 뿌리라는 말이 다시 떠오르게 됐는지 모르겠다. 하여 몇 년 만에 벽장 속 보자기에 싸둔 족보를 녀석 앞에 펼쳐놓고 시조의 묘인 경주 오릉과 사당의 사진을 보여준 뒤 본관과 파를 설명하고 어렵게 찾은 95세대를 거친 내 이름을 가리켰다. 이십오 년 전에 증보한 것이라 딸은 올라갔으나 녀석은 아직 이름이 없다.
“왕족의 자손이란 말이다.”
그러자 아들 녀석은 피식 웃었다. 한마디로 같잖다는 미소였다.
“이제 이 밑에 네 이름이 올라갈 거야.”
손가락으로 이름을 가리키고 있으나 그렇다고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왕족의 피를 실감할 수 있는 무엇 하나 시원하게 밝혀진 건 없었다. 오히려 가리키는 손가락이나 내 말이 왜소하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실감하기 힘든 관념이고 유희였다. 녀석은 힐끗 쳐다보곤 한 번 더 피식 웃음을 날렸다. 이번엔 씁쓸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하긴 뜬구름 잡는 식의 족보를 보여줘서 어쩌자는 것인지, 거기에 이름이 올라간다한들 뭐가 달라지기라도 하느냐는 건지 나도 녀석의 반응이 알쏭달쏭하고, 한편으론 그런 반응에 머쓱하기도 하여 책을 탁 덮고 말았다. 나도 족보를 보기 전보다 더 오리무중의 심정이 되었다.
“자식아, 그냥 그렇다는 거여!”
그래도 아들에게 그 뿌리라는 걸 더 보여줄 게 없을까, 족보를 원래 자리에 갖다놓는 동안 골몰하다 퍼뜩 생각난 게 있었다.
“너 군대 가기 전에 시골의 할아버지 산소나 한번 다녀오자.”
“그러시던지.”
녀석은 여전히 별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그런데 너 군대 빨리 가려고 줄기차게 지원까지 했으면서 막상 통지를 받으니 심란한 모양이다?”
“여자 친구 때문에 그래요.”
“왜 고무신 거꾸로 신을까 봐?”
“그럼 아빤 안 그러겠어요? 이제 막 정들기 시작하는데.”
“단지 여자 친구 때문에? 없이 가는 것보다 있어 가는 게 좋다는 것만 알아라.”
“왜요?”
“군대에서 제일 부러운 게 여자 친구 편지니까.”
“그런 것쯤은 알아요. 문제는… 아, 말 시키지 마세요.”
녀석은 말하기 곤란한지 탁자에 있던 전화기를 들어 만지작거렸다. 내 주특기가 상대를 놀려먹는 거다.
“문제가 뭐가 있겠어. 두 말할 것도 없이 고무신 거꾸로 신을까봐 그러는 거겠지.”
“여자 친구 가는 거야 두렵지 않아요. 옴짝달싹못하는 군대에서 그런 걸로 스트레스 받을까 그게 겁나서 그렇지요. 아 참, 군대는 왜 만들어 놔가지고.”
“그거 인마, 이 땅의 젊은이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줄만 알아.”
“무지막지한 의무지 어떻게 특권이 돼요?”
“너희 때야 당연히 그렇게 생각되겠지.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자신을 뒤돌아보고 앞날을 설계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흔한 줄 아냐? 너도 더 살아보면 알겠지만 없다, 없어. 정신없이 쫓기거나 좇기만 하는 거야. 네가 시간을 활용하는 게 아니라 시간에 네가 지배당하면서. 단 한 번뿐인 인생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다 가게 돼. 아무런 계획도 없이 닥치는 대로. 그렇기 때문에 군대를 잘만 활용하면 어떤 시기보다 값진 시간이 될 수 있다는 말이야. 우선 부담이 없잖아. 더군다나 네 인생항로가 정해지지 않은 젊었을 때 주어지니 특권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게 너무 막연해서… 말같이 쉽진 않잖아요.”
“당연히 쉽지 않지. 쉬우면 누가 못해? 최고학력이 꼭 인생의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보편적으로는 그게 주류의 길임을 인류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누구나 다니는 고등학교, 누구나 가려는 대학교를 너는 포기했잖아. 너는 이미 주류인생을 포기한 셈이여. 그러니 누구보다도 더 고민해야 혀.”
내가 진지해지자 녀석도 진지해졌다. 웃음기가 사라진 녀석을 놔두고 작업실로 들어가 피아노 건반 위에 족보를 올려놓고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하는 고향의 사촌에게 생각난 김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결혼하고 이삼 년이 지났을 무렵 세운 할아버지 비석의 공란에 그 이후에 태어난 자손들의 이름을 언제나 새겨 넣을 계획인지 묻기 위해서였다. 비석에 공란을 두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 젊은 층에서 주장해 밀어붙였었다. 증손이 되는 녀석의 이름도 거기에 당연히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사촌형은 심기가 몹시 불편한 듯 그거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며 대뜸 역정을 냈다. 당장 하자는 것도 아니고 집안의 중지를 모아 하게 되면 언제쯤 하게 될 거냐고 물었는데 밑도 끝도 없이 마땅찮은 반응을 보여 오히려 내가 무안하여 전화를 끊었다.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일이 그에겐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어서 그런가? 이제 열 살도 안 된 그의 손자가 비석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걸 나는 몇 년 전 참석한 가을 시제에서 보았다. 당시에 배알이 뒤틀리긴 했으나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는 그가 그런 특권쯤 누려도 모른 척하고 넘어가도 될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음모는 거기에서 싹텄다.
고향에 발걸음이 뜸해지면서 돌고 돌아 들려오는 말이 듣기에 달갑잖은 ‘싸가지 없는 서울 놈들’이었다. 그 서울 놈들은 시골에서 해달라는 것 다 해주고도 욕을 먹었다. 요즘은 시골에 워낙 사람이 없어 돈보다는 인력이 우선이었다. 시골의 인심도 시대가 변하면서 따라서 변한 셈이다. 그런 반면에 서울에 사는 이들은 시골 사람들이 집안일을 맡아하는 걸 ‘그것 조금’하고 더럽게 생색낸다고 아니꼽게 생각했다. 보는 데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한다 해놓고는 뒤돌아서선 서로에게 불만이었다. 그럴수록 고향은 멀어져갔다.
“너, 회사는 언제까지 다닐 거야?”
“제가 알아서 할게요.”
물어본 내가 바보였다. 열 살 때 엄마를 잃고 불완전한 부성애(父性愛)만으로 자란 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티 하나 내지 않고 이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으스대는 놈, 누구나 다 다니는 고등학교를 이학년 때 포기해버린 놈, 아빠를 스스럼없는 친구처럼 막 대하는 놈.
원래부터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나인지라, 녀석이 뭘 하든 별로 간섭을 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담임의 호출을 받고 학교에 달려가 보니 결석을 밥 먹듯이 한다는 얘기였다. 모범생이 아니라는 건, 학교공부에 충실하지 않다는 건, 수업시간에 잠만 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까닭 없이 결석한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하긴 그때가 처음이면 학교에서 날 부르지도 않았으리라. 담임의 그러한 처사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에게 물었다.
“너 어쩌려고 그러냐?”
그러자 들려오는 대답은 이미 작정했다는 듯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저 학교 관둘래요.”
그 말에 옆에서 듣던 담임이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다가 나를 의식해서였는지 달래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교는 나와야지 않겠냐? 너 창피주려고 아버님 부른 게 아냐. 아버님 앞에서 다짐을 받고 싶은 게 있어 오시라 한 거야. 너 학교에 하루 종일 있으라고 하진 않겠다. 단 삼십 분이라도 얼굴을 보여주면 출석으로 인정해주마. 그렇게는 할 수 있지?”
엄청난 특혜라면 특혜였다. 그러자 녀석은 고개를 젓더니 큰 인심을 쓴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담임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요?”
그리곤 바로 나를 바라봤다.
“저 이거 하루 이틀 고민한 거 아니에요.”
얼굴을 삼십 분만 보여주면 출석으로 인정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도록 돕겠다는데 무슨 의미가 있느냐, 라니? 우리 사회의 통념상 최소한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 불편함이 없을 거라는 담임의 말을 우습게 만들어버린 녀석이 역시 세상물정을 모르는 철부지인가.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이, 그 고민이 어쩐지 믿음직스러웠다. 나의 열여덟을 떠올렸다. 아직 어리지만 그 나이면 완전히 어리다고만 볼 수도 없다. 자식이라서 막연히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그래? 그렇다면 너 후회하지 않을 거지?”
내가 재차 확인하자 녀석은 네, 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무진 표정까지 대답과 닮아있었다. 그래서 내가 담임을 보고 그런 녀석을 말리기는커녕 한 발 더 나아가 자퇴처리를 부탁하자 그는 아까보다 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아들에 그 아비’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녀석이 학교를 그만 두려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공부를 잘하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야만 공부가 최우선인 학교에 있는 시간을 의미가 없다 단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모두가 일등만을 바라보고, 일등 위주로 돌아가는 현실에서 항상 꼴찌 주변을 맴도는 성적이었으니 학교가 싫을 만도 했다. 그러나 속으로야 어쩔지 모르지만 꼴찌라는 걸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녀석도 그렇지만 나도 성적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 삶의 경험칙 상으로 공부가 제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지도 않고 사귀는 친구들을 보면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잘살고 못살고를 가리지 않고 어울렸으니. 물론 착한 짓만 하고 다닌 건 아니었다. 중학교 때는 같이 어울려 다니는 친구 일곱 명이 동네 놀이터에 모여 가위바위보로서 순서를 가려 꼴찌 두 명이 시장의 과일가게에서 수박을 훔쳐 함께 먹다가 CCTV에 찍혀 부모들 모두가 몇 배의 과일 값을 물어주었는가 하면, 고등학교 1학년 땐 훔친 오토바이인 줄도 모르고(몰랐다고 하는 건 얘들의 주장) 다섯 명이 어울려 타다 절도범으로 몰려 새 오토바이 값으로 합의를 본 일도 있었다. 그런 데다 술에 담배까지 섭렵했으니. 그러나 그 시기의 아이들이라면 하지 말라는 일은 더 하고 싶을 때고 우리 어릴 적 수박서리처럼 흔히 있는 일로 나는 말썽이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렇게 녀석은 학교와 담을 쌓았다. 좋은 소문보다 나쁜 소문은 더 빨리 돌기 마련인가. 일부러 감추지도 않았지만 자랑할 것도 없는 퇴학 얘기가 집안에 돌았다. 형님이나 누님, 그리고 여동생 등 우리 형제들은 녀석의 인생이 벌써 절단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전화로 일차 안 좋은 소리를 맛보기로 퍼붓더니 만나기만 하면 어쩜 그럴 수 있느냐고, 말리지도 안했느냐고 나를 몰아붙였다. 그들에 비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내 반응도 화를 돋우기에 충분했으리.
“하기 싫은 것 억지로 시킨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어떻게 세상을 하기 좋은 일만 하고 살 수 있대?”
“저 나름대로 계획이 있나 봐요.”
“계획은 무슨 얼어 죽을 계획이여, 그냥 공부하기 싫은 게지. 자식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멱살이라도 끌고서 다니게 해야지 얼씨구나 좋다, 그랬구먼. 최소한 저 배운 것만큼은 가르쳐야 아비 된 도리 아녀?”
그들도 ‘그 아들에 그 아비’라는 담임의 속내와 다를 바 없었다. 담임은 차마 말을 못했지만 누님 하나는 나 같은 동생에겐 그런 예의마저 지킬 필요도 없다는 듯 마침내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직격탄까지 날렸다.
“네가 그러고 사니 네 아들이라고 별 수 있겠냐, 딱 후레자식이지.”
부자가 함께 후레자식이 되었다. 번번이 듣는 그런 소리에 내성이 생길 법도 하건만 그럴 때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네가 그러고 사니, 라는 말에는 하기 좋은 일을 하고 사는 너는 왜 평균치의 삶을 살지 못하고 계속해서 허덕이며 사느냐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결국 돈이었다. 고생만 시킨 아내가 떠나간 지 십여 년이 흐른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홀아비를 벗어나지 못하고, 내 집 한 칸 없이, 그렇다고 뚜렷한 직장과 직위에 있는 것도 아닌, 변변한 히트곡 하나 없는 허울 좋은 작곡가에 불과하다는 야유이고 비난이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도대체 내가 사는 게 어때서 그리 못마땅한가. 정작 당사자인 나는 괜찮다는데 어째서 그들은 하나도 안 괜찮다고 박박 우겨대는가 말이다. 히트곡 하나 없이 어디 가서 명함 내밀기도 창피하지 않느냐며 작곡가라는 소리도 하지 마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모든 작곡가가 다 히트곡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예술이 바로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니잖은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는 고흐의 그림, 그의 생전에 그림 한 점이나 팔렸는가? 내가 만약 그렇게 얘기하면 우리 형제들은 그럴 것이다. 죽어서 억만금에 팔린들 무슨 소용이냐고. 하긴 누구보다 기대가 많았던 동생이고 오빠니 오죽하겠는가마는 내 삶이잖은가. 이제 포기할 만도 하고 그만 할 때도 됐건만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내 삶은 여전히 불만의 대상이고 만만한 홍어였다. 대학 졸업 후 줄곧 받았던 눈총이고 떵떵거리며 살지 못한 내 죄였다. 거기에 아들마저 고등학교 졸업은 고사하고 퇴학이라니 대번에 후레자식 취급을 할 만큼 준 것도 없이 얄밉고 열불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말해서 시원할 것 같으면 천 번 아니 만 번이라도 더 하쇼!”
나도 부처는 아니다. 내 삶이 떳떳하다고 우기지도 못하고 과연 어떤 삶이 정답인지 알지도 못한다.
“그럼 학교를 잘 그만 두었다고 하길 바랐어? 고등학교도 안 나오고 이제 뭐해먹고 산대. 참, 그 자식 앞날도 불 보듯 뻔하다.”
앞날이 빤하다는 악담을 들은 녀석은 그때부터 저녁에 출근해서 아침에 퇴근하는 동대문시장 옷가게를 비롯하여 오토바이 배달, 주차요원, 통신회사 서비스 상담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말하지 않아도 빤한 최저임금으로. 그런 생활을 하면서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음을 온몸으로 느꼈으리라. 그런데도 자신이 선택한 일이어서인지 힘들다거나 하기 싫은 데도 억지로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다. 하긴 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른 데로 미련 없이 옮겨 다녔으니 보수가 어찌 될망정 하는 일에서만큼 녀석은 자유였다. 그걸 지켜보면서 모두가 앞서 달려가는데 뒤로 처져 허둥대는 것만 같은, 안타까운 마음이 왜 없겠느냐마는 나는 녀석에게 단 한 번도 학교를 그만 둔 일에 대해 질책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저 스스로 알아서 검정고시를 보게 될 것이고 그 이상의 학력도 취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또한 그 누구와도 비교하여 말하는 것도 금기시했다. 묵묵히 지켜보는 게 최선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 경험주의까지 말해주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의 실패를 녀석에게 답습하게 할 정도로 내가 어리석진 않으니까. 변명 같지만 내겐 길잡이가 없었다. 녀석이 학교를 그만 두었으면서도 피아노를 계속 치게 된 건 내가 유일하게 강요한 덕분인지도 모른다. 물론 녀석도 어렸을 땐 치기를 엄청 싫어했으나 억지로라도 시켰다.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의 성화도 한몫했다. 녀석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내가 죽은 뒤로 다른 과목 과외는 시키지 않았으나 피아노만은 계속 하게했다.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자 저도 재미를 붙이게 되었는지 당연한 것처럼 여겨 내 잔소리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설령 피아노로 밥을 먹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악기 하나쯤 능숙하게 다루게 되면 나중에 무슨 일을 하든 멋지지 않겠는가. 남자에게 비장의 무기는 많을수록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학교를 그만 둔 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녀석은 껑충한 키에 비해 근육이 빈약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헬스클럽을 다니는 데 새롭게 열의를 보였다. 꾸준히 하다 보니 웃통을 벗어부치고 가끔 거울 앞에 서서 힘을 주어 왕자(字)를 그려 보이는데 내가 봐도 자랑할 만했다. 스스로 알아서. 내가 바라는 바였다.
녀석은 입영 일주일 전에야 다니던 곳을 정리하곤 여자 친구와 며칠간 부산으로 여행을 갔다 왔다. 나로서는 푹 쉬었다 가길 바라 그보다 일찍 그만두길 바라는 마음이 없지도 않았지만 알아서 한다니 간여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녀석의 선택이고 결정이었다.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녀석은 여자 친구도 숱하게 사귀었다. 중학교 때부터 허구한 날 목에 키스마크를 달고 다니던 놈이었으니 더 말해 뭣하랴.
입대 사흘 전, 아들과 나는 시골로 향했다. 오 년 만이었다. 고향을 갈 때마다 설레던 마음도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젊은 시절의 일이었다. 이제는 고향에 갈 일이 거의 없고 가려 해도 큰맘을 먹어야 한다. 한마디로 늙었다는 얘기다. 우리 형제들이 관리해야 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묘에 대한 벌초도 집안의 먼 조카에게 맡긴 지 오래. 그 일에 대해 누님들의 불만은 많았다. 최소한의 도리마저 져버린 상놈들이나 할 짓이라며. 물론 수고비야 우리 형제들이 모아 보내지만 형님이나 나도 불효라는 생각을 처음엔 지울 수가 없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감상도 희미해졌다.
2월 말이라고 하나 아직 봄이라고 말하기엔 추운 날씨였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그런지 고속도로를 거쳐 섬진강 상류의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향 마을입구에 도착한 시간이 열시 경이었다. 오십 호도 넘었던 마을은 이제 십여 호에 지나지 않았고 집의 형태도 거의 반이나 양옥으로 바뀌었다. 나는 당연히 큰아버지가 살던 사촌형 집으로 가야 하건만 마을을 지나쳐 바로 할아버지의 묘가 있는 산 밑으로 차를 몰았다. 사촌형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내가 왔다갔다는 것을 몰랐으면 싶었다. 간혹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이들도 낯익은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묘는 할아버지 묘에서도 산등성이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야 있었다. 아들놈은 어젯밤 늦게 들어와서 그런지 오는 내내 조수석에서 잠을 자다가 거의 다 와서 깼는데도 별 말이 없이 조용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놈과 시골에서 태어난 나의 고향에 대한 정서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이었다. 그것은 지역의 차이가 아닌 세대의 차이였다.
농로를 따라 더 이상 차가 들어갈 수 없는 데까지 와 멈추어 트렁크에서 묘에 올릴 술과 음식, 얼마 전에 준비한 비석에 글자를 새길 기계와 망치와 정 등을 꺼냈다. 망치와 정은 배터리로 움직이는 기계가 작동이 안 될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비석에 글자를 새길 각수(刻手)가 되는 것이 나의 음모였다. 내 품속에는 아들 녀석의 이름을 한자로 쓴 종이가 들어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물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너희 증조할아버지가 저 위에 계신다.”
나는 산 너머를 가리키고 앞장을 섰다. 먼 산에는 아직도 눈이 남아 있었다. 어지간한 산비탈은 옛날에는 무엇이라도 심어먹는 밭으로 이용했으나 이젠 잡목과 잡풀들로 빽빽했다. 내가 어릴 적에는 마을과 가까운 산이란 산은 겨울을 지나면서 말쑥해지기 마련이었다. 큰 나무를 제외하곤 모두 땔나무로 베어졌기 때문에. 나도 푸나무로만 한몫을 했었다. 어림으로 찾은 산소로 올라가는 길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뭐 이런 데다 묘를 썼대요?”
비탈을 오르기도 힘든 데다 각종 넝쿨과 잡목이 우거져 길을 막아서자 도시의 공원묘지에 익숙한 녀석이 툴툴거렸다. 그러고 보니 거긴 녀석에겐 초행이었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추석에 성묘 가는 길은 즐거운 일 중의 하나였다.
“나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이해 못하는 이유가 당시엔 다 있지 않았겠냐.”
한참을 오르니 봉분보다 먼저 검은 오석으로 된 비석이 보였다. 다른 곳보다는 수백 년 수령은 족히 될 아름드리 조선소나무 몇 그루가 모여 있는 곳. 어릴 적엔 해마다 올라왔으나 고향을 떠난 뒤로는 몇 번 와보지 못한 곳에 할아버지 묘는 있었다.
우린 잔디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가다듬었다. 막내인 아버지가 유복자로 태어나 얼굴도 알 수 없었다는 할아버지, 나의 뿌리였다. 역사로나 인구로나 강변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장삼이사의 하나에 불과한 인생을 살다 갔을 것이다. 단지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당신의 이름을 기억할 뿐이고. 풍문으로 들은 풍수로도 인근에선 제일 높은 대봉산이 마을을 지나 멀리 떡 버티고 있어 원거리 전망은 썩 좋다고 할 수는 없어도 마을이 한눈에 보이고 개천이 휘돌아 흐르고 있어 근거리 전망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나는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돌에 글자를 새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예의는 차려야 했다. 아들이 들고 온 봉지 속에서 술병과 잔을 꺼내 상석에 술을 고이고 나란히 섰다.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 당신의 증손자인 박현수가 군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부디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나는 벌써부터 나의 음모가 왈칵 내키지가 않아 찜찜했으나 그런 기분을 물리치고 마음을 다잡으려 일부러 큰소리로 고하고 두 번 절했다. 그리고 무덤에 술을 뿌리고 한 잔을 마신 다음 아들에게도 따라주었다. 녀석은 거침없이 마시더니 귤을 까먹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빠가 들고 온 건 뭐예요?”
미리 말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늦었으므로 아무렇지도 않게 무덤 오른쪽에 서있는 비석을 가리켰다.
“저기에 네 이름을 새겨 넣을 거야.”
“아빠가요?”
녀석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놈을 무시하고 일어나 비석 앞으로 다가갔다. 기계 쓰는 법도 자세히 배우고 산 데서 간단한 연습까지 마쳤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감쪽같이 할 생각이었다. 앞면에는 ‘처사밀양박공지묘(處士密陽朴公之墓)’라 쓰여 있었다. 작업을 할 뒷면을 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몇 년 전에 봤을 때만 해도 같은 글씨체로 단정한 모습이었는데 뒤죽박죽, 아예 낙서장이 따로 없었다. 비를 세우게 된 내력 밑에 네 명의 아버지 형제들 이름과 나와 같은 항렬과 그 밑으로 조카들 몇몇의 이름뿐이고 공란이었는데 너도나도 새로 새겨 넣느라 글자크기도 깊이도 질서도 없이 한마디로 개판이 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그건 조상이나 자신들에 대한 욕이었다. 아들놈의 눈치는 빨랐다.
“이렇게 새긴다고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너무 부끄러웠다. 그 무질서한 모습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나도 거기에 끼어들려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아빠답지 않게, 이거 반칙 아니에요?”
녀석은 웃었다. 웃어도 크게 웃었다. 저를 위한답시고 불의한 일을 꾸민 내가 무안하지 않게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반칙이지.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했는데도?”
“만약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하지 않았어도 아빠가 하려 했다면 제가 말렸을 거예요.”
내 부끄러움을 아들의 대견스러움이 누르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새겨 넣느냐 마느냐, 며칠 밤을 고민했던 일이었다. 그 고민이 간단하게 수포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싶었다. 술은 반병 가량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묘에 가지고 갈 것도 그대로고. 심기가 불편했던 사촌형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의 반칙이 잇따라 반칙을 양산한 꼴이었으니. 하지 마라고도 할 수 없고, 하라고도 할 수 없는.
“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다. 비석 베려버렸다. 얼마나 보기 싫으냐. 아빠는 원래 글씨와 같이 감쪽같이 할 자신이 있었는데. 그래도 말렸을 거라고?”
“당연히 말리지요. 저기에 이름 올린다고 뭐가 달라져요? 저기에 이름을 새긴 사람들도 감쪽같이 하려고 했을 거 아니에요. 저는요, 학교 그만 두고는 그때부터 반칙하며 살지 않기로 작정했어요. 학교 안 다니는 게 반칙인 줄은 모르지만요.”
그랬구나. 말썽이라고 여겨지던 것들 모두가 학교 다닐 때의 일이었구나. 이후 너는 내 눈에 거슬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향한 네 소신을 키우고 있었다니.
“네 생각대로 학교 그만 둔 게 무슨 반칙이겠냐. 반칙 아니다. 예전엔 널 막연히 믿고 싶었을 뿐인데 이젠 확실히 믿을 수 있겠다. 너 군대 가도 아빠가 걱정 하지 않아도 되겠어. 이럴 때 술을 마실 수 없는 게 아쉽다.”
“마시세요.”
“자식아, 언제 술 깨서 운전하게?”
“제가 할게요.”
그 말이 그냥 해보는 말이거나 과시욕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녀석이 술병을 잡아 잔에 가득 따라 주는 게 아닌가.
“인마, 이거 마시면 오늘 여기서 자야 돼.”
“걱정하지 말고 마시세요. 제가 운전한다니까요.”
“까불지 마, 오늘 올라가야 된다니까. 내일 저녁이 할아버지 제사야.”
“허 참, 금방 믿는다고 해놓고 다 뻥이시구만. 운전이 뭐 대단한 거라고, 일단 이거나 잡고 계세요.”
녀석은 잔을 내게 맡기고 바지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쫙 펼쳐 보여주었다. 낯익은 운전 면허증이었다. 딴 줄 알고 있는 오토바이 면허로 사기 치는 게 아닌가 싶어 다시 봤으나 틀림없는 1종 보통 자동차 면허였다. 이 자식이 오늘 날 놀리려고 작정했나?
“아니 너 이거 언제 땄어?”
“주민등록 나오고 이거부터 땄어요.”
“아무리 그래도 운전은 안 해봤잖아?”
“안 해보고 운전한다 할까봐서요? 걱정 마세요, 배달 할 때 오토바이로만 한 거 아니에요.”
“그런데도 아빠 차 한 번도 달라고 안 했어?”
“안 줄 게 빤하잖아요.”
이거 웬 횡재냐! 단번에 쭉 들이키는 술이 달았다. 춥게 느껴지던 바람도 상쾌하게 느껴지고. 아내가 죽고 나서 녀석은 커다란 짐이었다. 학교를 그만 두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도 아내의 근심어린 얼굴이었다. 누님은 후레자식이라는 욕설까지 썼다. 그 욕의 근원도 모르고서 아예 못된 놈이라 단정을 한 것이다. 이렇게 싸구려 감정이 범람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내 의지가 아닌 하늘의 의지일 수도 있는 결손이라는 말이 상처가 되지 않도록 그 얼마나 신경을 써야 했던가. 수박을 훔쳐 먹었을 때와 오토바이 절도범으로 몰렸을 때 보호자로서 경찰서에 아빠가 왔던 애는 녀석뿐이었다. 똑같은 입장인데도 그 엄마들의 수상했던 눈치와 수군거림을 나도 감수하기 힘들었다. 당사자인 너는 오죽했겠느냐. 그랬던 네가 아빠를 대신하여 운전을 한다니. 운전할 걱정 없이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하며 갈 수 있다는 것, 이게 횡재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제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도둑고양이처럼 슬그머니 왔다가려던 고향마을이 정겹게 느껴지고 골짜기마다 숨어있던 전설과 추억이 되살아났다. 생각나지도 않던 큰엉골과 숨박골과 비얀날과 굴밖거리와 구린자리와 작은배미 같은 사연을 간직한 지명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산등성이를 따라 아버지에게 갈 때도 거칠 것이 없었다. 묘에 도착해선 나보다도 먼저 녀석이 술을 따랐다. 비석도 없이 봉분만 두 개 덩그러니 있는 아버지 어머니의 묘.
“아버지, 돌아가시던 해에 낳은 이놈이 벌써 군대에 간대요. 그래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오늘 보니까 다 컸네요. 이놈 보니 안심하고 보내도 되겠지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옆에서 놈도 거들었다.
“할아버지, 제가 할아버질 제일 많이 닮았대요. 제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할아버지 아들, 저희 아빠 제발 딴 짓 못하게 잘 지켜봐 주세요.”
녀석을 낳고 일주일이 되었을 때 폐암을 앓던 아버진 돌아가셨다. 손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희미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선했다. 녀석은 갓난아이 적부터 할아버질 빼닮았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이 자식아, 딴 짓이라니!”
녀석이 딴 짓이라 함은 내 귀의 얇음을 두고 한 말이었다. 땀 흘리지 않고도 그냥 앉아 돈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빠져 없는 돈 끌어 모아 투자라고 했다가 사기를 당한. 그러니 한눈팔지 말고 하던 일이나 잘하라는 말이었다.
“아빠가 잘 아실 거 아니에요. 그리고요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장가 좀 가게 도와주세요.”
녀석의 엉뚱한 말에 기가 막혀 웃고 말았다.
“어떤 여자가 아무것도 없는 아빠 뭘 보고 오겠냐, 꿈 깨라.”
“그렇게 자신이 없으세요?”
“자신이 없는 게 아니라 현실이다. 이제 혼자 사는 것에도 익숙해졌으니 그런 걱정 말고 술이나 따라라. 술맛 떨어지는 얘기 하지 말고.”
아들 앞에서 체면 차리자는 얘기가 아니다. 남의 눈에 청승맞게 보일지는 몰라도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쥐뿔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고, 개나 물어갈 버릇이나 이력이 있으면서도 없는 척하며 인연 아닌 인연과 억지로 살아본들 얼마 안 가 질리기 마련이고 서로 상처주기 바쁘다. 나는 하늘이 내게 빚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 시대의 절대(絶對)에도 흔들리지 않고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인연을 나는 기다린다. 정녕코 하늘이 내게 빚이 없다면 그 인연도 없으리라. 그뿐이다. 외로움도 고통의 시기가 지나면 즐기게 된다는 걸, 그 쓸쓸한 경지를 너는 부디 네 생애 끝 날까지 모르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아는 한 신산했던 아버지의 삶에 대한 얘기를 해주며 술을 마저 마셨다. 백 평도 안 되는 마늘밭에서 시작했다는 당신의 살림과 팔씨름에서 팔뚝이 부러질 때까지 지는 걸 싫어했던 고집과 술만 마셨다하면 끝이 없던 힘자랑과 유독 아들들에게만 강했던 교육열과 소에 대한 지극한 사랑까지. 병원에서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많이 살아야 3개월이라며 집으로 모시고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의사의 말을 따랐던 내가 옳았던 것인지, 6개월의 고통을 괴롭게 지켜보면서 판단할 수 없었다는 얘기도 했다.
얼큰하게 오른 술기운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녀석의 운전에 처음엔 긴장했지만 곧 안심을 하고, 갈 때 녀석이 내내 잠에 취했던 것처럼 푹 잤다. 시골을 향하면서 들었던 찜찜했던 마음은 씻은 듯 사라졌다. 녀석은 집에 날 내려주고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차를 몰고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날이 가고 입대 하루 전, 녀석과 함께 부모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서울의 형님 집으로 향했다. 원래는 아버지만의 제삿날이었으나 어머니와 함께 모시게 된 것이다. 이제 운전은 녀석의 몫이 되었다. 편했다. 우리 형제들과 그 짝들과 그로부터 생겨난 2세들이 다 모인 밤이 되자 얼추 이십여 명이 되었다. 이렇게 모이는 건 일 년에 한두 번뿐이다. 작지 않은 거실이 꽉 찼다.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다가 녀석의 입대가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랐다. 세월 참 빠르다는 말, 키가 그렇게 클 줄 몰랐다는 말,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는 덕담이 오고간 뒤 툭 불거지듯 녀석을 후레자식 취급하던 누님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어떻게 고등학교도 안 나왔는디 군대는 갈 수 있는가보네?”
나만 느낀 것인가. 시끌벅적하던 자리가 찬물을 끼얹은 듯 일시에 조용해졌다. 어떻게 하면 내 비위를 상하게 할까만 고민하는지, 웃음이 걸리긴 했으나 받아들이기에 따라 치명적일 수도 있는 배배 꼬인 말이었다. 앞뒤 안 가리고 터져 나온 그 말에 나는 먼저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그 말의 진의를 모를 리 없었다.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특유의 조소를 입에 머금고 있었다. 대답이 궁색했다. 같이 어깃장을 놓을 수밖에.
“예전에는 글을 읽을 줄 몰라도 군대만 잘 갔다 왔어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하고 자빠졌네. 그때가 지금하고 같으냐? 대학이라도 다니다 가야 편한 데로 떨어지지.”
그 누님은 이제 웃음기도 거두고 톡 쏘아붙였다. 대학에 대한 무서운 신앙이었다. 그 집 아들도 대학을 다니다 군대 갔지만 편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나도 대학을 마치고 군에 갔지만 다른 이들보다 편했다는 기억은 없다. 어거지(억지)였다. 대학은커녕 중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본 누님은 무조건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대학까지 나오고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본 나는 대학에 대한 믿음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
“군대를 편하라고 가간?”
형님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자 누님도 지지 않았다.
“이왕이면 편한 게 좋지.”
“군대에 편한 데가 어딨어?”
“펜대 잡으면 편하지. 군대라고 펜대 잡는 데가 없가니?”
펜대. 배운 자들의 특권이고 권력의 상징이던 시절이, 그걸 또 부러워하던 시대가 우리 역사에 있었다.
“그거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여. 요즘은 펜대 잡을 일 거의 없이 컴퓨터가 다하고 또 다들 대학 나오는 형편인데 뭐 가려서 뽑을라고?”
“다들 대학 나오는데 얼마나 잘나서 대학은 고사하고 고등학교도 안 나오느냐 말이여. 부모가 돈을 쌓아놓은 것도 아니고.”
또다시 누님은 나는 아프지도 않은데 왜 아프지 않느냐, 굳이 우겨대며 찔러댔다. 그때 녀석이 나섰다.
“제가 군대 가요. 어디로 떨어지든 제가 알아서 해요.”
정답이었다. 당사자는 가만있는데 옆에서 난리인 셈이었다.
“그럼, 그럼. 쟤가 군대 가지 누님이 가는 것은 아니잖여?”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형님이 상황을 정리하려했다. 형님은 고등학교 선생님이다. 아들 하나는 대학입학 재수 중이고. 그때 입장이 난처해진 누님의 볼멘소리가 터졌다.
“어떻게 대학교까지 나왔다는 것들이 자식들 교육은 좆같이도 시키는지 몰라.”
좆같이도,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아들만 가르치고 딸은 가르치지 않았다고 아버지 어머니를 원망하며, 항상 배움에 한이 맺혀 있던 누님의 육두문자에 나와 형님은 쓰게 웃고 말았다. 집안의 자랑이 되지 못한 내 탓이려니. 그렇지만 나는 내가 작곡의 길을 선택한 것에 단 한 번도 후회를 한 적이 없다. 물론 성공의 잣대가 되는 명성이나 물질의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다. 기타를 가르쳐 겨우 밥을 먹는 형편이고 작곡으로는 돈도 거의 벌지 못한다. 밥도 되지 못하고 돈도 되지 않는 작곡.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리는 건 내 존재의 의미를 거기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작곡은 어느새 내 신앙이 되었다. 잠을 자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심지어 사랑을 나눌 때마저 악상이나 좋은 노랫말이 떠오르면 메모를 한다. 내 소망이라면 좋은 일만 벌어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 외롭고 쓸쓸할 때, 고통스러울 때, 실망스럽고 절망감이 들 때, 그런 사람들에게 내 음악이 위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소망이 거창했던 누님의 기대를 배신하고 말았으려니. 하여 난 가까운 피붙이들에게 항상 미안함을 느끼며 살얼음을 밟는 기분으로 살았다. 그건 세월이 흘러도 희미해져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응어리로 쌓여갔다.
“엄마, 왜 그래? 제발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결혼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누님의 아들이 조용하지만 간절한 목소리로 달래고 있었다. 매형도 눈을 부라리고. 그때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초상을 바라보는 누님의 이글거리는 눈을 봤다. 원망스럽고, 불만 가득하고, 분하고, 억울한. 뭔가 토해내지 않으면 스스로 폭발할 것만 같은. 오 마이 갓! 심상치 않았다. 그만 목표이고 싶었다.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리라.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옆에 앉은 녀석(1월1일부터 끊기로 내기를 했으나 나는 끊고 녀석은 끊지 못했다)에게 입에 손가락 두 개를 갖다 대며 담배를 찾는 시늉을 해보이자 호주머니에서 꺼내 줘 옥상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쿵!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건 누군가의 심장이 멎는 소리였다. 그 순간에 내 심장도 서늘하게 내려앉았으니. 소리가 나는 부엌 쪽을 봤다. 그 누님이었다.
“언니!”
여동생의 외침에 이어 엄마를 부르는 아들딸의 다급한 소리가 이어지고 놀란 매형의 목소리까지 더해졌다. 환했던 거실 천정부터 검은 연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환각이었다. 불길함이 엄습하고 내려앉은 심장이 거세게 콩닥거렸다. 나도 달려갔다. 누님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동생이 가슴을 흔들며 계속해서 언니를 불렀으나 누님은 축 늘어진 채였다.
이거 뭔 일이래! 또 다른 누님이 허둥거리고, 성질 좀 죽이지 성질낸다고 뭐가 달라지냐며 형님이 투덜거리고, 찬물 좀 먹여 보라며 매형이 아들을 다그치고, 형수가 당황하여 왔다 갔다 하고, 잔뜩 겁을 먹은 조카들이 우왕좌왕.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별일이야 있겠냐는 분위기였는데.
“119 부르세요.”
아들 녀석이 내게 얘기하고는 그 알 수 없는 상황 속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갔다. 네가 뭘 안다고? 말릴 겨를도 없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동생과 조카들은 누님을 계속 불러댔다. 상황이 급박하게 변했다. 형님 댁 위치를 알기 쉽게 설명하려면 형님이 하는 게 나았다. 내가 재촉하자 형님은 119까지? 하는 표정이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녀석이 잠시 누님을 살피더니 바닥에 똑바로 누이고 바로 가슴을 압박하는 모습을. 어찌할 줄 모르고 얼굴과 가슴을 토닥거리며 언니를 부르는 여동생과 엄마를 부르는 그 집 아들을 밀쳐버리고서. 전혀 생각지 못한 말로만 듣던 심폐소생술이었다. 검은 연기는 이제 누님과 녀석만을 빼놓고는 모두를 삼켜버렸다. 심각했다. 숨도 쉬지 못하고 눈도 깜박이지 못한 채 모든 것이 정지했다. 오로지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포개 가슴을 푹푹 압박하는 녀석의 몸짓만 슬로비디오처럼 움직였다. 저 놈이 과연 내 아들, 현수가 맞는가? 내가 걱정하는 건 누님인가, 녀석인가.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압박수를 세고 있었던가. 녀석은 침착했다. 서른 번쯤 가슴 압박을 하고 난 녀석은 이제 누님의 턱을 들어 입을 벌리더니 코를 막고 인공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가슴 압박을 하고, 또 한 번의 인공호흡과 가슴 압박이 이어졌을 때,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는가싶더니 형님이 뛰쳐나가고, 얼마 안 돼 구급대원들이 들이닥쳐 누님을 들것에 싣고 갔다. 매형과 그 아들딸과 여동생이 따라 나가고. 그 모든 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이뤄졌다.
“이게 무슨 일이다니!”
남은 누님이 아직도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탄식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기다리는 일만 남은 것이다. 아니 몇몇은 기다리지도 못했다. 누님을 데려간 곳이 그곳에서 가까운 서부병원임을 알았을 때 어린 조카들만 남고 우르르 몰려 나갔다. 나는 남았다. 녀석도 남았다. 착잡했다. 남은 이들의 침묵은 계속됐다. 입이 바짝바짝 탔다. 베란다로 나가는 창가에서 서성이던 녀석에게 다가갔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문을 열고 녀석을 데리고 베란다로 나갔다. 창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너도 피우고 싶으면 피워라.”
“아니에요.”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물었다.
“고모가 어떤 상태기에 그걸 한 거여?”
“의식을 잃었잖아요. 심장마빈 것 같았어요.”
“그럼 네가 제대로 한 거여?”
나는 혹시라도 녀석의 한 짓이 상태를 더 악화시켰을까봐 걱정이었다.
“몰라요. 배달할 때 한번 봤는데 제대로 했는지는.”
녀석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어찌됐든 놈이 원인이었다. 아니, 근원은 나였다. 그때 거실이 시끄러워지면서 문이 왈칵 열렸다. 형님의 재수 중인 아들이었다.
“작은아버지, 고모 깨어났대요.”
두 달 가까이 끊었던 담배 탓인가, 긴장의 끈이 끊어지고 머리가 핑그르르 돌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심이었다. 기분 좋은 어지러움이 한동안 계속됐다. 담배를 비벼 끄고 녀석의 다리를 탁 쳤다.
“박현수, 욕봤다.”
“제가 빨랐을 뿐이에요. 그나저나 이제 비긴 거예요. 아빠도 다시 피웠으니.”
“한 대 피웠는데?”
“피운 건 피운 거예요.”
녀석이 웃고 있었다. 근심이 사라진 웃음이 해맑았다. 거실로 돌아왔다. 모두의 얼굴도 밝아졌다.
“병원 가자마자 깨어났대요.”
여동생의 딸이 신이 나서 말했다. 얼마 후 병원에 갔던 이들이 매형과 조카 둘을 빼고는 모두 돌아왔다.
“현수가 누님을 살린 거나 마찬가지여. 병원에서 그러드만. 그런 일에는 얼마나 빨리 응급조치가 이루어지느냐가 관건이라고. 그런데 아주 적절했다고 하드만.”
형님이었다. 형님뿐 아니라 다들 이구동성으로 녀석이 한 일을 칭찬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지 모르겠다고, 생각만 해서 될 일이 아니고 직접 하지 않았느냐고, 나중엔 고모와 키스한 게 아니냐고 놀리기까지 했다.
“나도 학교에서 수도 없이 심폐소생술에 대한 교육을 받았거든. 그런데도 전혀 그걸 할 생각을 못한 거야. 재환이조차도 군대까지 갔다와놓고 당황해서 어떻게 할 줄도 모르고 제 엄마만 부르고 있었잖아. 우리 현수가 큰일을 한 거여.”
재환이는 누님의 아들이다. 형님은 ‘우리’라는 말에 힘을 줬다. 녀석은 그 밤 지옥과 천국을 다 경험한 셈이었다. 매형은 내게 직접 전화까지 해 진짜 큰일 날 뻔했다며 녀석이 누님을 다시 살렸다고 몇 번을 말했다. 지금은 안정을 취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며 지금까지 누님이 내게 말을 심하게 해서 마음고생을 시킨 것은 그만큼 아끼기 때문이라는 말도 했다. 말만 그렇지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누님은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안일을 거들다 초등학교에 야간 중학이 생겼을 때 아버지 어머니의 보수주의에 울고 불며 사정해도 통하지 않자 단식으로 맞섰으나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기회만 엿보던 도시로의 탈출도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형님과 내가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학교에 다닐 때야 그 뒤치다꺼리를 위해 집안일과 농사에서 풀려났다. 그러자 물 만난 고기처럼 처녀의 몸으로서도 악착같았다. 이왕 우리 형제들 밥 끓여주는 김에 하숙을 치렀던 것이다. 하숙생들은 누님과 거의 같은 나이의 학교 여선생들. 그녀들이 학교에서 백묵을 잡고 아이들을 가르칠 때 누님은 쌀을 씻고 김치를 담갔다. 그녀들이 유행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어울리는 짝들과 어울리는 데이트를 하고 있을 때 누님은 몸빼를 입고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배우지 못한 한을 삭이며 솥과 냄비를 윤이 나도록 철수세미로 박박 문질렀다. 살림도 야무졌지만 우리 형제를 단속하는 데도 철저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술을 마셨을 때 집에 들어와서도 몸을 가누지 못하자 구정물을 머리에 쏟아버린 누님이었다. 토목기술자였던 매형과 결혼을 한 후, 노름을 좋아한 매형이 많은 빚을 지자 버릇을 고치겠다고 미련 없이 집을 팔아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서울에 올라와 음식솜씨 하나만 믿고 식당을 차려 배달은 매형에게 맡기고 운영하다 나중에는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일군 누님이었다. 불같은 성질머리는 개떡 같아도 옳고 그름이 분명하고 정은 차고 넘친다는 평을 듣던 누님.
제사는 그런 소동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지내게 됐다. 열두시가 넘어 또다시 각자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할 시간, 녀석에게 잘 갔다 오라며 너도나도 봉투를 쥐어줬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녀석이 누님의 얘기에 상처를 받았을까봐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고모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러자 이번에도 녀석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안도감을 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저는 하도 그런 말을 많이 들어 이미 단련이 충분히 됐으니 제 걱정 마시고 아빠나 신경 쓰지 마세요.”
이런 녀석이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어찌 신경이 쓰이지 않겠는가.
“쓴 약이 몸에 좋은 거다.”
“아무리 좋아도 너무 많이 먹으면 독이에요.”
“오늘 같은 일을 두고 불행 중 다행이라는 거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면서요? 저도 어쨌든 기분 좋아요. 앞으로 저에 대해 더 이상 말이 없겠지요?”
자신에게 쏟아지던 따가운 시선을 녀석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것에 대한 불만을 녀석은 이렇게 에둘러 표현했다. 이럴 땐 맹목적으로 단정하여 무시하고 심통을 부리는 어른보다 더 어른 같았다.
입대일이 밝았다. 일곱시에 일어나 녀석을 깨우고 머리를 내가 직접 기계로 밀었다. 민둥머리를 보고 질릴 법도 하건만 녀석은 거울을 보며 그 순간에도 농을 던졌다.
“이렇게 잘생긴 아들 어디 가서 보겠어요?”
“헛소리 말고 가자.”
영등포역에서 여수행 무궁화호 아홉시 십사분 열차였다. 차를 갖고 가지 않으려 미리 예매했었다. 논산까진 두 시간 이십 분 정도 걸리니 입소 시간인 두시까진 넉넉했다. 녀석을 보내놓고 난 대전을 들를 생각이었다. 작곡을 하면서 내게 가끔 자문을 구하는 여성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술이나 한잔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부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가는데 누님의 전화를 받았다. 갑자기 정감 있게 들렸다.
“나 현수 땜시 다시 살아난 거시여. 내가 본께 다른 것들은 다 허새비(허수아비)등만.”
누님은 대뜸 잘 안 쓰던 전라도 사투리까지 써가며 그렇게 말하고 녀석이 응급조치를 할 때 이미 깨어났었는데 일부러 가만있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녀석을 바꿔주라고 해 전화기를 넘겨주었다. 누님다운 트릭이었다. 뭐라니? 전화를 끝내며 킥킥거리는 녀석이 의아하여 물었다.
“인공호흡 할 때 내 입술 깨물어버리려고 했대요. 이뻐서요.”
전철이라는 것도 잊은 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두 쳐다보는 바람에 멋쩍었으나 쉽게 웃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영등포역에 도착하니 생각지도 못했던 녀석의 여자 친구가 나와 인사를 했다. 사회체육을 전공한다는 귀엽게 생긴 아가씨다.
“아빠, 이제 열차표 주시고 힘드신 데 그만 들어가셔요.”
뭐라고? 둘이서만 가겠단다. 녀석에게 눈 벌겋게 뜨고 당했다. 논산까지 가려던 나는 기가 막혔지만 그런 표정도 지으면 안 되었다. 여자 친구가 미안해 할까봐. 하긴 나보다는 그 애가 거기까지 따라 가주는 게 더 절절하겠지. 나중에 얘기할 것도 있고.
“알았다. 너는 날개를 달러 군대를 가는 거야.”
“알았어요. 아빠나 잘하고 계세요. 전 벌써 옆구리가 근질거려요.”
녀석은 그렇게 떠났다. 그리곤 신병교육을 마친 뒤 정말로 날개를 달았다. 낙하산이었다.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특전사에 지원하여 강하훈련을 마친 뒤 전화를 해왔던 것이다.
(120매)
*박희주; 전북 임실 출신으로 전북대학교를 졸업했다. 시작활동을 하다가 <월간문학>에 중편 ‘내 마음속의 느티나무’가 신인상에 당선되어 소설계 데뷔. 시집으로 <나무는 바람에 미쳐버린다>, <네페르타리>가 있고 소설집 <내 마음속의 느티나무>, <이 시대의 봉이>와 장편소설 <사랑의 파르티잔>, <안낭아치>가 있다. 현재 <부천문학> 편집주간.